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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노트 님의 서재입니다

-99레벨 마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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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노트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3.08.22 15:53
최근연재일 :
2023.10.27 23:5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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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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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3.09.18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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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20. 비올레 (7)

DUMMY

30분 전.


나는 블랙마켓 경매장 관중석에 앉아서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비올레.

그 아이가 경매에 오를 때까지.


원래 되도록 블랙마켓과 마찰 없이 조용히 구매해서 나올 계획이었으니까.


‘초기부터 블랙마켓과 악감정이 쌓이는 건 좋지 않다. 괜히 귀찮은 일만 생겨.’


나는 미리 준비한 대금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블랙마켓.

대륙 남부 뒷세계를 장악한 거대 악 조직.

점조직이라 뿌리 뽑기도 힘들고, 흑마법사답게 보복도 끈질긴 편이니까.

굳이 충돌할 이유가 없다.


‘······근데 비올레는 왜 선언을 안 하지?’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초조해진다.

슬슬 경매 분위기도 무르익고, 비올레 차례가 다가오거늘.

아직도 고민하는 눈치였으니까.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비올레는 반드시 선역이 되는 아이는 아니다.

만약 플레이어가 제대로 양육하는데 실패한다면, 완전히 감정을 잃고 비스트 로드로서 흑화하는 소녀.

나는 비올레를 돕고 싶지만,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조용히 떠나보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이번 소녀들은 무려 발레리나들로······!”


그렇게 행복 고아원 아이들과 비올레가 막 무대에 올랐을 때였다.


“엇, 이쪽입니다. 정보원님.”

“?”


가장 중요한 순간, 몇몇 사내들이 내게 다가온다.

까마귀 가면의 상인과 블랙 마켓 정보원들.

그중에서 내게 삿대질하는 까마귀 가면 상인은 일전 내게 흑마법 물품을 팔았던 자였다.


“무슨 일이지?”

“손님께서 판매하신 물품 중 마물의 숲 재료가 많아서 말이지요. 혹시 아르케 남작령에서 오셨습니까?”


까마귀 가면 속에서 불길한 광기가 번들거린다.

질문하긴 하지만 이미 확신이 담긴 눈치.


“그건 왜 묻지?”

“몇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까마귀 가면 상인은 증오로 이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겉만 늙은 마녀를 본 적 없으십니까~? 저희 지부장님께서 마물의 숲으로 출장을 나갔는데 통 돌아오지 않아서요.”

“······.”


겉만 늙은 블랙 마켓 마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늙은 흑마법사 데이안과 거래했던 마녀. 무려 최하급 마물 자이언트 웜을 조종했던 여자다.

내 친히 데몬 피어를 쓰고 짓밟아 죽였었지. 그 녀석의 수하들인 모양.


“글쎄, 잘 모르겠군.”


일단 오리발을 내민다.

거듭 말하지만 벌써부터 굳이 블랙마켓과 충돌할 이유가 없으니까.

좀더 힘과 세력을 키우고 충돌할지 교섭할지 결정하는 게 옳다.


다만 까마귀 가면 사내가 즉답했다.


“거짓말이시군요.”

“······.”

“사자 가면 손님은 거짓말하시는 게 너무 티가 나서 말이지요. 일전 비올레란 아이가 탐나서 이곳까지 오신 게 맞으시지요? 저희 지부장님을 죽인 범인이기도 하고.”


제기랄, 눈치 빠른 상인놈.

앞으로는 표정 연기를 좀 더 연습해야겠다.

더 이상 발뺌은 불가능한 모양.


“그래, 내가 죽였다.”

“이 개새끼가 역시! 가드!”

챙! 채쟁! 챙!


격하게 날뛰는 까마귀 가면 상인.

그를 따라온 블랙마켓 정보원들도 품에서 각종 무기를 꺼낸다.

아직 경매 도중인데도 날 죽이기 위해 난동을 부릴 모양.


“······139번 손님! 비올레 상품을 낙찰하셨습니다! 그 액수는 무려 1,620페니!”


더구나 블랙마켓 조무래기들을 상대하는 사이 비올레가 원작 노인에게 팔려버렸다.

어차피 대금을 지불하고 조용히 넘어가는 건 불가능한 상황.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이미 들켰다.

그렇다면 더 이상 조용히 구매하고 돌아가는 게 의미 없겠지.

비올레만 데리고 나가봤자 하리움 남작령을 필두로 끝없이 보복에 나설 것이다.


‘차라리 목격자를 전부 제거하는 게 안전하다.’


따라서 나는 오히려 블랙마켓에게 깊은 공포를 심어주려고 한다.

미지의 공포.

시세와 주가에 민감한 상인이라면 가장 두려워할 것이 미지의 공포이므로.

아무리 흑마법사들이라고 한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건 아니므로.


“제 발로 사지로 향하는구나.”

쿵, 쾅, 쿵, 쾅!


마스터급 권능 ‘데몬 피어’를 발동한다.

무려 지고한 마왕의 에고께서 한수 접어주고 조용히 넘어가려고 하였거늘.

끝끝내 소란을 피우고 원래 계획에 훼방을 놓은 블랙마켓 조무래기들에게 분노를 표한다.

경매 시간에 비올레를 놓쳐버린 짜증이 솟구친다.


서걱!


마음 먹은 순간, 내 허리춤에 걸려있던 철검이 번개처럼 날아든다.

내게 삿대질하며 범행을 눈치채던 까마귀 상인 머리가 순식간에 허공에 뜬다.

눈치가 그렇게 빠르던 놈이 제 죽을 자린 눈치 못 챈 모양.


푸확!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진다.

관객석에 앉아있던 손놈들이 비명을 지른다. 일제히 패닉 상태에 빠진다.


“켈베로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만약을 대비해 몰래 숨겨둔 켈베로스를 호출한다.

마계의 최하급 마물 켈베로스.

그 녀석은 앞발로 땅을 파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었으므로. 지하에 숨겨진 경매장 근처까지 대기할 수 있던 까닭이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쿠과광!

-크아아아아-!!


내 명령에 켈베로스가 지하 벽을 부수고 강림한다.


흙먼지를 뚫고 경매 무대 위로 뛰어든다.


홀로도 소영지를 멸망시킨다는 마계의 마물. 그 악몽의 괴수가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



블랙 마켓 지하 경매장은 순식간에 백색소음 상태가 됐다.


내 데몬 피어에 혼비백산하는 귀빈들, 그런 귀빈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못에 핏발 세우는 가드들, 무질서하게 앞사람을 밀치는 범죄자들과 옷자락과 장해물에 발이 걸려 넘어져 밟혀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정신이 나간 건지 그저 흐흐흣 웃으며 미친 소리내는 자까지.

마치 통 안에 아무 악기나 넣고 굴려서 귀 아픈 굉음을 내는 것처럼.

층 전체가 뾰족한 비명으로 메아리친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크로오오-!!


그러거나 말거나 켈베로스는 내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켈베로스는 사람을 찾아내 죽이기보다는 지하 기둥들을 부수는 데 전념했다.

층 자체를 무너뜨려 전원 생매장시키기 위해서.

어차피 블랙 마켓에 참가하는 자들은 죄다 부랑자와 범죄자, 그리고 흑마법사뿐이니 윤리적으로 문제될 것도 없었다.


“도, 도대체 어째서 마계의 마물이 우리 상단을 습격하는 거지?”

“정신 차려! 가드! 지금은 귀빈분들 대피가 최우선이다! 어서 탈출구로 모셔라!”

“으악! 저 검은 털의 괴물! 머리 세 개의 늑대가 기둥들을 무너뜨린다! 지하층이 무너진다!”


물론 블랙마켓 가드들이라고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그들은 경악하며 최우선적으로 켈베로스를 막기 위해 집결했다.


-크아아아-!!


켈베로스가 데몬 피어를 발동하지만, 가드들은 어떻게든 몸을 움직였다. 과거 기사 한스조차 움직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대단히 최정예 부대인 모양.


‘마약으로 몸을 강화한 모양이군.’


더구나 나는 가드들의 몸에서 은밀히 느껴지는 약초 향기를 포착한다.

마약.

블랙 마켓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

블랙마켓은 제 가드들이 배신하지 못하도록 주기적으로 마약에 찌들게 한 것이다. 뭐, 자의적으로 피는 놈들도 있을 테고.


‘하지만 그것들은 내 알 바가 아니지.’


나는 흑마법 ‘폭발적인 힘’으로 다리 근육을 강화한다.

순간 비정상적으로 강화한 다리는 마치 축지법을 쓰듯 폭발적인 속도로 질주한다.


‘비올레와 경매 상품들. 켈베로스가 시선을 끌어줄 때, 구출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나는 비올레를 생매장시킬 생각 따위 전혀 없다.

블랙 마켓 지하 경매장은 흑마법으로 강화되고 확장된 공간.

켈베로스라도 무너뜨리기 위해선 시간이 꽤나 걸릴 테니. 그 사이에 비올레가 있는 상품 대기실을 구할 생각이다.


“어엇! 손님 이곳은 관리자 외엔 출입금지······.”

푸확!


중간중간 블랙마켓 가드가 있긴 했지만, 일격에 베어 죽인다.

상대가 갑옷을 입거나, 방패를 들고 있는 경우도 있었으나, 찰나의 틈을 노린다.

흑마법 ‘신경과민’으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감각. 거기에 그간 수련으로 검로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었으니.

갑옷 사이 틈이나, 방패로 가려지지 않는 부위를 베어 가르는 것이 가능했다.


“뭐, 뭐야! 저 사자 가면 손님 왜 저래!”

“반동분자다! 저 흑발의 사내가 습격의 주동자인 거야! 막아!”

“긴급 고용합니다! 저 괴수를 저지하는 데 도움을 주시는 손님께는 그에 걸맞은 포상을 드리겠습니다! 반복합니다!”


그제야 대응에 나서는 블랙 마켓 가드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다. 대다수 가드는 켈베로스에게 집중하고 있고, 상품 관리실을 지키는 가드들은 수준 또한 형편없었으니까.


[레벨이 올랐습니다.]


몇 번의 칼질만으로도 레벨이 오른다.

더구나 상품 보관실이다보니 눈에 띄는 보물도 있었다.


[이름 : 흑철의 장검 (RARE.)]

[설명 : 브루고뉴 왕국의 특제 철광으로 제작된 장검. 뛰어난 대장장이가 제련하여 예기와 내구도를 동시에 잡았다.]


[효과 : 일반 장검을 휘두를 때보다 파괴력이 한 단계 상승한다.]


* 단, 흑철의 특성상 타 장검보다 무거워 힘이 강한 자가 아니면 휘두르기 벅찰 것 같다.


꽤나 만족스러운 아이템까지 얻었다.

쥐어보니 묵직한 무게감과 동시에 어지간한 장검은 힘으로 밀어버릴 파괴력이 느껴진다.

하기야 냉병기는 상대와 무게 차이가 30%만 넘어도 힘 싸움이 안된다는 특징이 있으니까.

안 그래도 마나가 없는 적들이라면 양 떼에 뛰어든 이리처럼 무자비하게 날뛸 수 있었는데, 이리 등에 날개까지 달게 됐다.

물론 장검 주제에 너무 무겁다는 사소한 단점이 있긴 했지만······.

어차피 나야 흑마법 ‘폭발적인 힘’ 덕분에 괴력은 차고 넘쳤다.


“여기 있었구나.”

“······!”


그렇게 나는 혈혈단신으로 비올레가 담겨있는 상자까지 돌파한다.

상자를 열고 손발이 묶여 있는 비올레와 눈을 마주한다.


“거기까지다. 반동분자!”


물론 내가 비올레와 고아들이 있는 곳까지 당도하자, 적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가드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하기야 네크로맨서와 테이머를 상대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식은 술자를 죽이는 것.

켈베로스를 상대하기 어렵다면 날 처형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지.


-쿠구구구.


더구나 이번엔 인간 가드만 있는 게 아니었다. 블랙 마켓 경매에 참가한 흑마법사가 협조하는지 천장에 가까스로 닿지 않는 크기의 바위 골렘이 일어서 있었다.

아마 어지간한 인간은 저 바위 골렘의 주먹 한 방만 맞아도 피떡이 되겠지.

그 외에도 밟혀 죽은 귀빈 시체를 일으킨 네크로맨서와 이종족 흑마법사도 날 포위하고 있었다.


‘객관적인 전력만 따지면 내가 이길 가능성은 0%에 가깝겠지.’


하지만 왜일까? 어째서인지 패배할 거란 위기감 따위 들지 않는다.

블랙마켓에 있는 전력은 대부분 흑마법에 관련된 자들. 데몬 피어의 의미를 알고 있는 놈들이니까.

마나를 가진 기사나 신성력을 머금은 사제처럼 신념으로 맞서지 않으리란 걸 직감한다.


마치 물소 100마리를 사냥할 수 있는 한 마리의 사자처럼.

오히려 마왕의 전투 본능은 혈투를 더욱 원하고 있었다. 그간 했던 수련의 결과를 바라듯. 피를 흡수하여 봉인된 힘을 깨어내길 바라고 있다.


“잠시 상상하고 있거라.”


따라서 나는 바르르 떨고 있는 비올레에게 부드럽게 속삭인다.

상자 뚜껑을 닫고, 데몬 피어를 발산한다. 이곳까지 돌파하느라 피 철갑이 되어 있었기에 상자에 피가 뚝뚝 묻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제대로 된 가정에서 평범히 자라는 네 모습을.”

쿵, 쾅, 쿵, 쾅, 쿵!


데몬 하트가 거칠게 마력을 내뿜는다.

아직 다 낫지 않은 마력 혈관이 비명을 지르고, 입안에 쇠 맛이 올라오지만 이 악물고 견뎌낸다.

비올레에게 스스로를 마왕이라고 소개한 상황. 계약한 당사자가 어떤 존재인지 똑똑히 각인시킬 필요가 있으니까.


“······무, 슨······?”

쿠구궁.


내 몸에서 뿜어지는 지독한 마기에 블랙마켓 가드와 흑마법사가 뱀 앞 개구리처럼 마비된다.

온몸을 짓누르는 압력에 토사물을 내뱉으며 그 위로 얼굴을 처박는다. 믿기지 않는 공포에 멍청하게 날 바라본다.


쩌저적!


그러나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이미 켈베로스가 지하 대들보들을 상당수 무너뜨린 상황.

거기에 벽돌을 새까맣게 변색시키는 마기를 뿜어내니 중세 수준의 건물 설계로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을 터이니.


“널 배척하던 프레야의 섭리가 곧 무너질 터이니.”


나는 인간을 상품으로 사고파는 블랙마켓 지부를 내려다보며 읊조린다. 이미 금이 갈 대로 가서 코 메운 흙먼지와 불쾌한 하수구 악취가 솟구치는 곳.


쿠과아아아-.


그와 동시에 지하 2층 전체가 일순 박살 난다.

마치 폭우가 쏟아지는 날, 물을 가둬뒀던 둑이 무너진 듯이.

천장에서 지하 1층이 무너져내린다.


비올레를 학대하던 블랙마켓 지부, 이기심과 탐욕만이 가득한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



비올레의 시간은 6살 때 멈췄다.


태어날 때부터 어미도, 아비도 없었던 아이. 프레야 수도원에서 사제들에게 길러지다 행복 고아원으로 팔려온 삶.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학대와 훈련을 반복하며 같은 시간을 반복하고 있었으니.


온 세상이 무채색처럼 변하고, 매일 같은 시간에 울리는 성당 종소리처럼 반복만 되는 것이다.


‘······그때 삶의 미련을 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비올레는 눈을 감고 생각한다.

사제들을 그토록 잘 따르며 해맑던 과거의 그녀.

제 부모는 누구일까, 어떻게 해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혹시 착하게 살면 프레야 여신님께서 기적을 선사해주실까.

그러한 희망으로 새 삶을 꿈꿔온 것이다.


【비올레. 반항하지 말고 순응해라. 만약 네년이 경매장에서 1천 페니 이상의 값어치로 팔린다면 네 생모의 물품을 돌려줄 테니까.】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평범한 고아답게 꿈꾸던 그녀는 행복 고아원에 온 이후, 마음이 꺾였다.

새 주인에게 팔려가기 위해서, 두 번 다시 생부모를 만나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프레야 여신님의 섭리와 멀리 떨어진 흑마법사에게 팔려가기 위해서.


고아원장 윌리스에게 허리띠 채찍을 맞으며 발레 훈련을 받다 보니, 4년 만에 모든 감정을 잃게 되었다.


쿠구구······.


그 때문일까?

지하 공간이 허물어지고, 천장에서 흙이 쏟아지는데도 별 감흥이 들지 않는다. 근엄한 척 하던 귀족들이 혼이 빠져 횡설수설하고, 상인들이 돈과 상품을 두고 달아나는 데도 별 생각이 들지 않는다.


“여기 있었구나.”


······그저 막 도착한 마왕 데하칸을 보고 안도감이 들 뿐.


생부모도, 고아원장도, 대금을 치른 구매자도 제 자식을 버리고 달아났거늘.

땅이 뒤흔들리고, 기둥이 금이 가며 층 전체가 생매장될 위기에 처해있어도.

모두가 두려움에 질려 달아나고, 자신을 버렸음에도 마왕만큼은 자신을 두고 떠나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계약을 지키기 위하여 블랙마켓 가드를 뚫고 자신 앞을 다가온 마왕에게 신뢰가 생긴다.


“잠시 상상하고 있거라.”


그런 마왕이 속삭인다. 과연 악마의 왕이 아니랄까 봐 근엄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대로 된 가정에서 평범히 자라는 네 모습을.”

“······!”


상자 속에서 떨고 있던 비올레가 일순 몸을 굳힐 발언을 한다.


제대로 된 가정.

제비꽃 언덕에서 홀로 찬바람을 맞으며 생부모를 떠올리면서도 계속 눈이 가던 대상이었으니.


······그래.

사실 비올레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진정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간 생부모의 유품에 집착했지만, 실은 일면식도 없는 생부모를 찾는 것이 진정 바람이 아니었다.

평범한 삶.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와 보드라운 살결을 부비며, 따스한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것.

그것을 위해서,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생부모를 찾아나섰을 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비올레는 몸에 힘을 빼기 시작했다.

고아원장 윌리스에게 얻어맞고, 리본에 묶여 강제로 팔려가기에 자기도 모르게 팔다리 근육이 뻣뻣했으니.


눈을 감고 상상한다.

한낱 늑대도 제 동족을 아끼고, 길고양이도 제 가족을 보살피며, 하물며 몬스터조차 제 새끼만큼은 귀여워하거늘.

반인반마의 혈통을 가진 자신이라고 하여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할 이유는 없으니까.


‘다만 마족 사회의 보금자리는 잘 떠오르지 않는데.’


······다만 마족의 사랑은 사뭇 떠올리기 어렵다.

성서에 따르면 마족은 살육과 파괴, 가학심과 제 생존 본능만이 존재하며, 자애로운 성품과 의로운 도덕 따위 없다고 했으니.

설혹 겉으로 인자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것은 진정 인자해서가 아닌, 인간을 속이기 위한 기만전술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기만이라고 해도 믿고 싶어. 악마조차 날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다만 비올레는 억지로라도 믿고 싶었다.

프레야 여신의 섭리 속에서 돌아가는 세상. 그 속에서 단 한 뼘의 땅조차 자신을 포용해주지 못했으니.

오해라도 믿고 싶었다. 설혹 지금 이 생각이 그릇되고 위험하더라도······.

이 마지막 희망마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상상해보자. 마왕의 말대로. 내가 바라는 가정을.’


따라서 비올레는 달리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자신의 입양하게 될 마왕. 비록 헛된 망상일지라도, 자신이 바라는 마왕을 상상해본다.

지금 마왕이 벌이는 살육과 파괴, 가학심이야말로, 마족에겐 자애와 사랑이라고 상상해본다.

역설적으로 프레야 여신의 섭리를 무너뜨리는 것이야말로, 배척받는 제 혈족과 동족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꿋꿋이 걸어나가는 길이라고.

그것이 마왕이 자신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말이다.


“······.”


그렇게 생각하니 세상이 다르게 느껴진다.

온 세상에게 배척받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었다. 마족과 악마, 몬스터는 물론 맹수, 수인, 이민족, 이교도, 타왕국 등 수많은 세상. 오히려 프레야의 섭리 속이 너무 좁게 느껴질 만큼 방대했으니까.


마왕은 그런 동족을 구하기 위해 오늘도 전장에 나선다. 마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서는 가장처럼.

한 가지 꽃만이 자리 잡은 언덕으로부터 다른 꽃들을 피워내기 위해 악을 쓴다.

비록 다른 꽃이 피어오를 때마다 어디선가 비명이 메아리칠 지라도. 제 가족이 최우선시되기에 망설이지 않는다.


“······.”


물론 지금 비밀 경매장은 소란스러웠다. 귀 먹먹할 만큼 메아리치는 비명. 상자 안에 갇혔지만, 밖이 생생하게 상상될 만큼 점철된 살기. 사방을 새까맣게 물들이는 마왕의 마기까지 한꺼번에 느껴졌으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 끔찍하고도 징그러운 악몽을 회피하고 싶겠지.

아니, 검은 바다처럼 온 세상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마기 앞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질식했을 것이다.


두근.


그런데 이상하다.

자신도 분명 그래야 할 텐데. 심장이 두근거린다. 가슴을 짓누르는 묘한 불길함.

이는 가여움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왕에 대한 동정심. 자신과 같은 운명을 걷는 자에게 숨겨진 외로움과 고단함을 알기에 묘하게 느껴지는 괴로움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렬한 감정은 따로 있었다.

압도.

제 감정을 죽이고 세상을 복종시키는 위엄.

눈을 가려도 상상되고야 말았다. 시뻘건 시체. 검에 베인 인간 시체를 보며 죽기 직전 모습을 복기한다.

조금 전, 흑발의 사내가 다룬 압도적인 마기가 어땠는지 눈앞에서 생생히 재현된다.

그 행위 하나하나는 무뚝뚝하였으나, 그로 인해 변한 세상의 흐름은 평생 배웠던 발레보다 우아하다.

늑대의 발톱보다도 투박하면서도, 온 세상을 뒤덮어버릴 만큼 섬세한 파도.

약육강식이라는 비정한 세상의 논리 속에서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힘.

가식으로 가득 찬 프레야 여신의 세상을 하늘부터 무너뜨리는 균열이었으니.


그러한 감상에 비올레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혈통과 뿌리를 인정해버렸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뜨며 멍하니 읊조려버렸다.


“아름답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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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55. 홍수의 악마 (3) +10 23.10.19 1,999 78 13쪽
54 54. 홍수의 악마 (2) +4 23.10.18 2,064 74 14쪽
53 53. 홍수의 악마 (1) +5 23.10.17 2,155 75 15쪽
52 52. 의회 소집 (2) +5 23.10.16 2,270 91 17쪽
51 51. 의회 소집 (1) +4 23.10.15 2,331 91 17쪽
50 50. 왕위 계승자 (3) +5 23.10.14 2,478 85 15쪽
49 49. 왕위 계승자 (2) +3 23.10.13 2,551 78 14쪽
48 48. 왕위 계승자 (1) +4 23.10.12 2,830 82 15쪽
47 47. 결과 +6 23.10.11 2,756 86 13쪽
46 46. 영지전 (5) +4 23.10.10 2,805 94 15쪽
45 45. 영지전 (4) +2 23.10.10 2,814 84 12쪽
44 44. 영지전 (3) +2 23.10.10 2,877 85 16쪽
43 43. 영지전 (2) +6 23.10.09 3,012 92 13쪽
42 42. 영지전 (1) +4 23.10.08 3,158 90 14쪽
41 41. 흑사병 (黑死病) (2) +5 23.10.07 3,214 98 13쪽
40 40. 흑사병 (黑死病) (1) +3 23.10.06 3,297 96 12쪽
39 39. 결투 (3) +5 23.10.05 3,410 103 14쪽
38 38. 결투 (2) +4 23.10.04 3,418 98 18쪽
37 37. 결투 (1) +9 23.10.02 3,510 103 15쪽
36 36. 마리 드 마가렛 카트린 (4) +8 23.10.01 3,615 100 16쪽
35 35. 마리 드 마가렛 카트린 (3) +6 23.10.01 3,744 114 13쪽
34 34. 마리 드 마가렛 카트린 (2) +4 23.09.30 3,829 97 17쪽
33 33. 마리 드 마가렛 카트린 (1) +10 23.09.30 3,977 91 16쪽
32 32. 흑기사의 탄생 (3) +6 23.09.29 4,030 110 17쪽
31 31. 흑기사의 탄생 (2) +6 23.09.28 3,884 97 16쪽
30 30. 흑기사의 탄생 (1) +2 23.09.27 4,065 89 12쪽
29 29. 지역장 제프리 (2) +3 23.09.26 4,075 94 15쪽
28 28. 지역장 제프리 (1) +5 23.09.25 4,099 101 12쪽
27 27. 마태오 수도사 (2) +7 23.09.24 4,171 107 15쪽
26 26. 마태오 수도사 (1) +6 23.09.23 4,224 113 14쪽
25 25. 건방진 거래 (2) +3 23.09.21 4,388 95 14쪽
24 24. 건방진 거래 (1) +2 23.09.21 4,478 107 12쪽
23 23. 양육 (3) +5 23.09.20 4,570 106 14쪽
22 22. 양육 (2) -재업로드- +3 23.09.20 4,564 92 12쪽
21 21. 양육 (1) +3 23.09.19 4,779 107 12쪽
» 20. 비올레 (7) +2 23.09.18 4,811 104 20쪽
19 19. 비올레 (6) +3 23.09.17 4,807 114 18쪽
18 18. 비올레 (5) +7 23.09.15 4,867 111 12쪽
17 17. 비올레 (4) +3 23.09.15 4,942 103 14쪽
16 16. 비올레 (3) +5 23.09.14 5,004 102 16쪽
15 15. 비올레 (2) +4 23.09.13 5,184 104 13쪽
14 14. 비올레 (1) +5 23.09.12 5,678 108 16쪽
13 13. 휴식 +4 23.09.12 6,016 122 12쪽
12 12. 데몬 피어 (3) +2 23.09.11 6,206 115 10쪽
11 11. 데몬 피어 (2) +3 23.09.10 6,165 121 15쪽
10 10. 데몬 피어 (1) +3 23.09.09 6,270 118 16쪽
9 9. 영지 내전 (3) +5 23.09.08 6,383 118 14쪽
8 8. 영지 내전 (2) +4 23.09.07 6,620 12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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