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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식 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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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글넘기
작품등록일 :
2019.11.14 00:35
최근연재일 :
2020.01.16 17:00
연재수 :
200 회
조회수 :
104,805
추천수 :
1,137
글자수 :
1,122,955

작성
19.12.01 07:00
조회
454
추천
4
글자
11쪽

62화

DUMMY

(62편)


“이거 수리 들어가야겠는데?”

슬기가 천마의 망토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는 찢어진 망토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봤다가, 손을 통째로 넣었다 뺐다 거렸다.

천마가 슬기를 쳐다보며 엉성한 멜로디를 넣어 말했다.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

“아니, 수리, 수.리.를 해야겠다고!”

둘은 예전에 일망타진한 산적 마을에서 밤새 술 마시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슬기는 술을 어마무시하게 마셔대고, 온갖 진상을 부렸었다. 저 노래도 그때 많이 불렀었다.

그렇게 얼굴이 벌개진 슬기는 천마의 입가에 살포시 띄워진 미소를 발견했다. 얼음 같은 얼굴에 실금이 간 모양새였다.

“어, 지금 아저씨 농담한거?”

그러자 실금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매끈한 얼음덩이만 남았다.

“본좌는 농담 따위 하지 않느니라.”

천마의 얼음장 같은 그 기세에 슬기는 더이상 진실 추궁을 하진 못했지만,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건 어쩔 수 없었다.

천마가 짐짓 화가 난다는 식으로 말했다.

“감히 본좌의 최애 망토에 구멍을 뚫어 놓다니, 녀석의 대가리에도 구멍을 뚫어줘야겠군.”

검을 쥐며 일어서는 천마의 모습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슬기는 급히 그를 말렸다.

“아냐, 아저씨. 그 노인네도 아끼는 무기가 부러졌는걸. 서로 손해 본 부분이 있으니까 넘어가자고.”

그러자 옆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며 체력 단련중이던 광개토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가씨, 그건 죄송하지만, 잘못 계산하신 거 같습니다.”

광개토는 슬기가 주둥이 다물라며 눈알을 부라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생각해 보시지 말입니다. 이건 그 노...인분이 가만히 정차해 있는 사부님의 차에다가 달려와서 처박은 꼴인데, 자기 차도 부서졌으니 서로 이해하고 넘어가자는, 이 무슨 말도 안되는 개 같은 경우입니까?”

적절한 교통사고의 예를 들어가며 상황을 설명하는 광개토의 열변을 천마는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광개토의 말이 옳다고 여긴 슬기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빨리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받을 건 다 받았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더 원’과의 악연만 더 깊어질 뿐이었다. 슬기는 아직 ‘더 원’에게 들어야 할 내용이 있었고, 받아야 할 목걸이가 있었다.

슬기는 애꿎은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개? 너 지금 나보고 개라고 한거니?”

슬기의 말에 광개토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언제 그런 개소리를 했단 말입니까!?”

“됐고, 아저씨! 저녁때가 다되었는데, 저 개 같은 제자놈하고, 수련하러 가야지?”

슬기의 말대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그렇구나. 제자야, 일어나거라.”

천마의 명령에 광개토는 억울함을 가슴에 묻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막을 나서며 광개토는 실리엔에게 손을 흔들었다.

“리엔, 나 다녀올 동안, 울지 말고 기다려. 꼭 돌아올게.”

실리엔이 그런 광개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주인님.........다녀오세요.”

슬기는 실리엔이 말하는 중의 잠깐 있었던 공백에 왠지, ‘지랄 말고’ 라는 말이 들어 갔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슬기는 광개토의 간이침대에 앉아서 조물조물 빵조각을 뜯어먹고 있는 실리엔을 쳐다봤다. 실리엔은 어느덧 자라서 15세정도의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소녀일 때도 인형처럼 예쁜 외모라 은근히 짜증나게 하더니, 이제는 여성미까지 더해지니 슬기의 마음속에 질투심 한조각 만들기 부족함 없는 자태를 뽐냈다.

결국 슬기는 되도 않은 심술을 부려댔다.

“꼬맹아, 넌 못먹는게 없구나. 피도 먹고, 빵도 먹고, 고기도 먹고. 돌이나 나무는 안먹니? 그냥 전부 다 먹지 그래?”

슬기는 그냥 괜시리 시비가 걸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실리엔은 그런 슬기의 빈정거림을 깨달을 만큼의 지적 각성이 되어있지 않았다. 실리엔은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피는 맛있고, 빵이나 고기는 먹을만 하고, 돌이나 나무는 맛이 없다...요.”

슬기는 저 마지못해 하는듯한 존댓말도 귀에 거슬렸다.

“존댓말 똑바로 안하면 니 사부 괴롭힌다?”

슬기의 으름장에 실리엔이 고개를 들고 슬기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하나도 진심이 담기지 않은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그러...지마세요.”

슬기는 다시 한번, ‘제발 그렇게 하세요’라고 들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뭐지? 내가 지금 NPC의 마음을 읽고 있나?’

슬기가 이상한 생각을 하며 뭐? 하고 반문하려는데, 실리엔이 말했다.

“그래도 가장 맛있는 건 아가씨가 해주신 김치볶음밥이에요.”

“웃기네, 언데드가 무슨 음식 맛을 안다고?”

슬기의 비웃음에도 실리엔은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가씨의 김치 볶음밥은 아삭하고 매콤한 김치와 적당히 고슬한 밥의 조화가 너무 환상인거 같습니다. 둘이 먹다 한명이 피빨려도 모를 맛이에요.”

“그래?”

슬기는 저도 모르게 피식하며 진실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지만, 뱀파이어가 피보다 김치볶음밥이 더 맛있댄다. 이정도면 정말 맛있다는 표현의 끝판 왕이지 싶었다, 그런 생각에 슬기는 실리엔에 대한 반감이 스르르 사라지는걸 느꼈다. 비록 실리엔의 어조가 국어책을 암기하듯 딱딱했지만, 그건 전혀 문제거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슬기가 엄마 미소를 지으며 실리엔에게 빵 좀 더 먹으라고 권하는 순간, 천막 입구가 벌컥 열어 젖혔다.

“벌써 와?”

고개를 돌리는 슬기의 눈에 핑크빛 머리를 한 변태 장신남이 들어왔다.

“흐흐, 이것들이, 어디서 사기를 치고 있어?”니긴마는 들어오자마자 대뜸 사기 운운하며 눈을 부라리더니, 스르릉 장검을 뽑아 실리엔을 겨누며 말했다.

“너, 사람 아니지?”

“이게 미쳤나? 속옷도 없이 알몸에 갑옷만 걸친 이 변태놈이 또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지? 이제는 속옷뿐만이 아니라, 대가리도 벗어 던지고 싶어?”

“크크크, 얼굴 생겨 처먹은 꼬라지 대로 입도 더럽기 그지 없군.”

“우리 아저씨 앞에서도 그딴 망언을 내뱉을 수 있나 볼까?”

슬기는 호기롭게 외치며 니긴마를 겁박했다. 슬기의 생각에 비록 평범한 중렙대 플레이어인 자신으로서는 최고의 레이드 팀의 대장인 니긴마를 상대할 수 없겠지만, 저 놈 역시 천마 앞에서는 일개 힘없는 약자에 불과했다.

가만 그런데, 어떻게 여길 쳐들어올 생각을 한거지? 설마 계속 우리 동태를 살피고 있었나? 그래서 이렇게 아저씨가 외출한 순간을 노린건가?

슬기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그리고 니긴마의 다음 발언들이 슬기의 의심이 진실임을 증명했다.

“아, 그 까만 놈은 방금 산 쪽으로 갔다지, 딴 놈이랑 같이? 즉, 여기서 너희 두 년들이 어떤 고초와 핍박과 고통과 고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모를 거라는 사실! 그리고 알면 뭐 어때? 이번에는 나도 그냥 당하고 있지 않을꺼라고!”

니긴마는 여러 가지로 오해하고 있었다. 먼저 천마의 청력이 1킬로미터 바깥에서도 자신의 개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상상초월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걸 몰랐으며, 자신의 공격대가 힘을 합치면 능히 천마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이는 퍼스트 클래스의 수치를 밖으로 알리려 하지 않으려다 진실까지 알리지 않은 에릭의 탓이 컸으며(에릭은 천마가 괴마를 단신으로 죽였으리라는 추측, 괴마의 강함 정도 등을 니긴마에게 알리지 않았다), 천마에게 농락당했다는 아라곤의 증언따윈 니긴마의 한귀로 들어가 한귀로 흘러나가 버렸었다.

무엇보다도, 천마가 없는 틈을 타 천마 일행의 천막에 침입한 것은 일행의 여자들을 인질로 삼으면 천마를 무릎꿇게 할 수 있을거라고 판단한 니긴마의 선택이었다. 니긴마는 그 첫걸음으로 그의 피를 빨았던 저 년의 정체를 만천하에 까발리기로 했다.

사실 니긴마는 피 빨려 죽었던 오전의 개죽음에 대한 비애를 그 이후로 한시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성좌를 탈환해야 한다는 숭고한 목적이 없었더라면 진작에 몇 번이나 까고 뒤집었을 것이었다.

‘뱀파이어와 한패인 플레이어라~ 이정도면 거의 천마용군급의 배신이자 적폐지! 용인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

이제 성좌함락도 끝났겠다. 더 이상 이들의 힘이 필요없을 것이므로 이장도 자신의 편을 들어, 저들을 응징할 것이다. 니긴마는 틀림없이 에릭도 그에 못지않은 이 년놈들에 대한 분노와 불만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착각과 오해, 그리고 그의 분노가 결국 그를 현실로 내몰았다.

니긴마는 대뜸 정곡을 찔러 들어왔다.

“네 년은 뱀파이어가 틀림없다. 언데드 중의 언데드, 괴물 중의 괴물이지. 그리고 이 괴물과 같이 있는 너희들도 틀림없이 악한 자들임에 틀림이 없고 말야. 네 년 얼굴이 그걸 증명하고 있어.”

실리엔을 향했던 니긴마의 검 끝이 어느새 슬기를 향해 있었다.

원래 못생긴 사람이 못생겼다는 말에 상처 받는 법. 순간적으로 눈이 돌아간 슬기는 그녀가 니긴마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잠깐 잊어버렸다. 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니긴마에게 달려들었다.

단 한걸음만에 니긴마의 바로 앞까지 들이닥친 슬기는 적의 움직임을 예측하며 곧장 달려들지 않고, 오른쪽으로 한걸음 횡이동했다. 그리고 다시 벼락같이 니긴마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차례 훼이크 동작을 먹이고 달려들던 슬기는 그녀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따라오고 있는 니긴마의 눈동자를 보고서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 앉고 말았다.

“아..안돼!”

니긴마의 가슴팍에 거의 파고 들고서야 슬기는 니긴마의 등 뒤에서 곧장 뻗어나온 하얀 실선이 엄청난 속도로 그녀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걸 발견했다. 아니, 그건 실선이 아니라 니긴마의 기형 장검이 너무 빨리 휘둘러져 허공에 실선과 같은 잔상을 남긴 것이었다. 슬기의 주먹도 뻗어나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주먹이 거북이라면, 놈의 검은 페라리였다.

허공에 새겨진 하얀 실선처럼 니긴마의 입매도 매끄럽게 휘어졌다.

니긴마가 웃으며 말했다.

“목덜미는 예쁘군. 잘라 볼 법하게 생겼어.”

슬기는 공격을 이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앙--


아직 목이 안잘렸는지 날카로운 충격음이 정확하게 귀를 때렸다. 슬기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니긴마의 좁고 긴 기형 검신이 그녀의 목 바로 옆까지 와있는데, 목과 그 검신 사이에 역시나 좁고 긴 꼬챙이가 같은게 보였다.

‘이게 내 목숨을 구한 거야?’

그녀가 고개를 더 내려보니 그 꼬챙이의 정체를 알수 있었다. 어느새 달려온 실리엔의 길게 자란 손톱이었다.

“호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니긴마가 웃으며 검을 거두었고, 실리엔이 슬기의 자리를 차지했다. 둘의 사이에 폭발적인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바람에 슬기는 두어걸음 물러서다 자신의 침대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목숨을 구해준, 그리고 이제 그녀를 대신하여 변태자식과 일전을 벌이려는 실리엔에게 고마움을 담아 슬기가 중얼거렸다.

“꼬맹아.. 나중에 김치 볶음밥 많이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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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69화 19.12.03 439 5 12쪽
68 68화 19.12.03 456 5 11쪽
67 67화 19.12.02 442 6 12쪽
66 66화 19.12.02 464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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