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HONOR CLUB
# 파수꾼들
바닷가 절벽 위. 바다가 보이는 절벽 위에 삐뚤어진 간판을 단 작은 술집이 하나 있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중앙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면, 야외에 아찔한 절벽 위로 아슬아슬하게 놓여진 테이블이 서너 개 있었다. 그래도 지붕엔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짚으로 엮어 만든 처마도 있었다. 낮에 어판장에서 난리를 피웠던 창식은 그 중 한 테이블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빗방울이 한두 방울 창식에게 튀었지만, 창식은 그 자리를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맞은편 의자 하나를 끌어와 발판삼아 두 다리를 올려놓고 자리에 앉아 있던 창식은 시커먼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무심하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창식의 전화기에서 갑자기 진동이 울렸다.
*27일 새벽 2시. 묵호항 3번 게이트.
창식은 전화기를 꺼내 문자를 확인하고는 다시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창식이 앉아 있는 자리 바로 앞에는 사람이 서 있을 작은 공간조차 없을 것 같은 시커먼 절벽이 있었고, 아까부터 내리던 폭우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그 절벽 밑 어둠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저, 왔어요.
가게 홀과 야외 테라스를 연결해 주는 유리로 된 미닫이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낯선 사내가 창식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비가 이렇게 내리니까, 한여름인데도 쌀쌀하네요.
사내는 창식에게 묻지도 않고 뒤집어져 있던 빈 술잔을 꺼내 술을 따르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술잔을 내려놓은 사내는 두 손으로 양쪽 팔을 엇갈려 잡더니 아래위로 서너 번 쓸어 내렸다.
-춥다, 추워. 언제 오셨어요? 많이 기다리셨어요?
사내는 그제서야 창식을 보며 말을 걸었다.
-응. 아니, 얼마 안 됐어. 올라오느라고 고생했다.
창식은 술병을 들어 사내의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워 주었다.
-고생은 뭐.
술잔을 든 사내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동우쪽에서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된 거 같은데, 아직이에요?
사내는 창식에게 물었다.
-그동안 들쑤셔 놨으니까, 곧 움직이겠지.
-서울에서는 연락, 받으셨죠?
-연락? 무슨 연락?
-묵호 쪽 파수꾼들은 죄다 문자 받았다던데, 형님은 못 받으셨어요?
-문자가 돌았어? 아니, 나는 연락이 안 왔어.
-그래요? 그럴 리가 없는데.
사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수부에서 어디를 쳐야되는지 파악이 끝났다나 봐요. 그동안 우리가 올려보낸 정보들이 도움이 됐겠죠.
창식은 사내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이야? 그럼 곧 작전이 시작된다는 얘긴데, 왜 나한테는 아무런 연락이 없지?
-저도 그 점은 이상하네요. 여기 파수꾼들 관리자가 형님인데, 어떻게 파수꾼들한테는 연락이 가고 연락이 꼭 가야 할 관리자한테는 연락을 안 한 거죠? 정말 이상한데요.
창식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창식은 상황 파악이 빠르게 되지 않았다.
-따님하고는 연락이 되셨어요?
창식은 사내의 물음에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울에선, 연락이 곧 오겠죠. 기다려보세요.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끄아아아. 휴우, 밤새 내릴 것 같죠? 이 비 말이에요.
창식은 고개를 들어 폭우가 쏟아지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하늘을 한참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이 비가 어느 부분에서 시작돼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인지, 그 비가 시작되는 부분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 늑대들
-호란그룹 강기호 이사님 오셨습니다.
태일그룹 회장실에 강기호가 나타났다. 강기호는 태일그룹 정태일 회장과 미리 약속이 된 듯, 그의 방 앞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누군가? 강이사? 어서 들어오게.
강기호는 허리를 굽혀 정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정회장은 그런 강기호를 가까이 오게 하더니 쇼파에 앉도록 권했다.
-그간의 얘기는, 우리 애들이 얘기해 줘서,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라네.
정회장은 강기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진호가 심하게 했더군. 자네하고 진호는 꽤 막역한 친구 사이인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가? 내 기억이 맞지?
강기호는 정회장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대답했다.
-회장님! 도움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저를 도울 수 있는 분은 정회장님 밖에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강기호의 얼굴에서 간절함이 묻어 나왔다. 그러나 정회장은 강기호의 간절함에 비해 아무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느닷없군. 갑자기 찾아와서 도와달라니.
-들어서 아시겠지만 더 이상 호란그룹은 제가 있을 곳이 못 됩니다. 구회장과 저는 이제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회장님이 절 받아 주시지 않는다면 이제 저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회장님. 목숨을 걸겠습니다.
강기호는 정회장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정회장은 강기호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을 말이 없었다. 정회장은 호란그룹의 창업주인 구양순 전 회장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의 아들인 구진호 회장 역시 정회장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강기호의 처지가 딱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정회장이 강기호를 거둬줄 수는 없었다. 강기호를 거둬준다면 호란그룹과 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네 사정도 잘 알겠고, 그동안 자네가 우리 태일그룹을 위해 신경 써 준 것도, 내가 잘 알고 있다네. 그렇지만 내가 대놓고 자네를 받을 수는 없지. 구회장은 내 아들 같은 놈이야. 아들이 친구놈을 때리고 조금 다치게 했다고 해서, 아들을 내 쫒아 버리고 그 친구놈을 집안에 대신 들일 수는 없지 않겠나?
강기호는 정회장이 마음을 돌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섣불리 정회장을 찾아 온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육장을 기획한 게 자네라고 들었네만?
정회장이 사육장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강기호는 크게 놀랐다. 사육장은 사람들에게 드러나선 안 될 곳이기 때문이었다. 정회장이 어떻게 사육장을 알고 있는지 강기호는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하고 구양순, 그 친구하고는 서로 비밀이 없어. 아마 자네보다 내가 호란그룹의 비밀은 더 많이 알고 있을거야.
정회장은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우리 태일그룹에도 그런 곳이 필요해. 내가 자금을 대지! 자네가 다시 만들 수 있다면, 자네를 받아 주겠네.
정회장은 강기호에게 호란그룹의 사육장을 태일그룹에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 조건으로 강기호를 받아 주겠다는 것이다. 강기호는 이것저것 잴 입장이 아니었다. 태일그룹이 무엇을 원하던, 강기호는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자네라면 믿고 맡길 수가 있지.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그게 뭔가? 한번 말해 보게.
강기호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여기서 정회장이 마음을 바꾼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호란그룹은 제가 가지게 해 주십시오.
정회장은 강기호의 뜻밖의 제안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갈 데 없는 거지새끼를 걷어 주려고 했더니 밥만 달라는 게 아니고 집안에 들어와 잠을 자겠다는 판이었다. 그러나 강기호의 표정은 자신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강기호의 태도는 구걸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을 이제는 찾아야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호란의 주인은 진호가 아닌가?
-구진호는 호란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지금의 호란은 제가 힘들게 일구고 가꾼 제 노력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호란을 위해 구진호가 대체 무엇을 했다는 말입니까? 저는 호란을 구진호에게 넘겨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강기호는 호란을 넘어뜨리기 위해 정회장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정회장과 호란의 관계를 잘 알고 있던 강기호는 정회장이 쉽게 넘어오지 않을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기호가 믿는 것은 정회장의 야비함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어떤 것도 고려치 않는 비열한 야비함. 그것만이 정회장을 거꾸러 트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였다. 때마침 정회장은 강기호에게 사육장 건설을 의뢰했고 강기호는 그런 정회장의 요구를 들어주고 자신에게 호란그룹을 달라고 요구했다. 강기호는 태일그룹의 성장을 위해 사육장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회장이 강기호의 요구가 다소 무리하다고 생각되더라도 강기호의 손을 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강기호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고 있었다.
-사육장만 건설 해 준다면, 그래, 호란은 뭐 자네가 키운거나 마찬가지인 게지. 자네가 맡더라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을 것 같군!
강기호는 속으로 이제 됐다고 고함을 쳤다. 강기호는 정회장이 자신의 뒷배가 된다면, 이건 분명 본인 쪽으로 유리한 싸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음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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