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HONOR CLUB
# 위로
-요새 통, 연락이 없으셨어요?
-그랬었나?
-뭐에요? 난 진호씨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미안, 요즘 안 좋은 일이 많았어.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요?
-아니,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 지영이는 몰랐으면 해.
-무슨 일인데 물어보지도 말고 알려고 들지도 말라고 하세요?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이에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지영이는 나에 대해서만 궁금해 하길 바래.
-그 일이, 진호씨 일이 아닌가요?
-내 일이지.
-진호씨에 대해 알아가려면, 그 일에 대해서도 궁금해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지마. 내가 원하지 않아. 부탁인데, 내가 원하는 것만 관심 가져줘.
-그건, 이상한 말이네요.
-뭐가?
-진호씨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는 데, 진호씨 모습은 다 보여주기 싫어하잖아요.
-이상해도 어쩔 수 없어. 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지영이에게 보여주고 싶어.
-제가 진호씨가 보여주기 싫어하는 모습도 보고 싶어 한다면, 그땐 어떻게 하실 거에요?
-아마, 화를 낼 거야.
-....
-듣고 있어?
-네.
-말이 없어서, 전화가 끊어진 줄 알았어.
-이제 끊으려구요.
-왜?
-지금 진호씨 모습은 제가 보고 싶은 진호씨 모습이 아니에요.
-이러지마. 나 지금 지영이의 위로가 필요해.
-미안하지만, 위로가 필요한 진호씨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진호씨의 모습이 아니에요. 위로를 받고 싶으면 위로할 수 있도록, 진호씨의 다른 면을 보여주세요. 지금까지 내게 보여 주었던 진호씨의 모습은 결코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지영아, 나 지금 많이 힘들어.
-지금 그 말투도 공감할 수가 없네요. 저한테 다른 모습도 보여주고 싶으면 그때, 연락 주세요. 이만 끊을께요.
-지영아!
뚜. 뚜. 뚜.
# 동맹
-강릉하고 속초도 우리와 함께 하기로 했다. 정회장이 약속한 돈을 보냈어. 조만간 정회장이 보낸 애들이 묵호로 내려올거야. 강릉하고 속초 애들까지 모아서 묵호로 건너갈게. 그때 보자!
비장한 듯 전화를 하는 사람은 강기호였다. 정회장과의 거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정회장은 강기호가 비밀스럽게 자신의 일을 볼 수 있도록 이곳 삼척으로 보냈다. 전국 곳곳에 미디어 제국을 만들어 놓은 정회장은 삼척 태일방송의 지부장으로 강기호를 임명했다. 물론 방송국 일을 시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강기호는 정회장이 제 날짜에 약속한 돈을 보내자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정회장을 찾아가 담판을 짓긴 했지만, 정회장이 끝까지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은 없었다. 정회장의 돈이 제 날짜에 들어왔다는 것은 정회장이 이제 자신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미로 봐도 무방했다.
똑.똑.똑.
-네?
-지부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강기호는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강기호가 삼척 태일방송의 지부장으로 임명돼 내려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지? 일단, 들어오라고 하세요.
강기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들어왔다.
-기호? 기호 맞지? 오랜만이다!
-어! 진수 형님?
강기호를 찾아온 사람은 구양순 전 회장의 장남 구진수였다. 구진수는 웃음 띤 얼굴로 기호를 보며 다가왔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며 반가워했다.
-아니, 형님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일 보러 오신 거에요?
구진수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강기호는 어리둥절했다. 아마도 자신을 만나기 위해 먼 삼척까지 내려왔다기보다는 다른 볼일이 있어 내려왔다가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일은 무슨, 너 여기 지부장으로 부임했다는 소리를 들었어. 니 얼굴 본지도 오래되고 해서, 뭐 겸사겸사 내려왔다.
구진수의 말을 들은 강기호는 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구진수는 아무 목적없이 어딘가를 가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형님이 아무 일 없이, 게다가 내가 여기 지부장으로 내려온 거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도대체 누구한테 들었어요?
-나 현직 검사야. 내가 알고 싶은 건, 다 알아낼 수 있어. 니가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더라구.
구진수는 강기호를 보며 빙그시 웃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 영감님이 내 얼굴이나 보자고 이 먼 삼척까지 오시지는 않았을 테고 빨리 말해보세요. 도대체 이곳까지 내려온 이유가 뭐에요? 뭐, 저한테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구진수는 미소만 지을 뿐, 속 시원하게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고, 저 숨 넘어갑니다. 형님, 저 바쁜 사람이에요. 계속 그러고 계시면 저 나갈 겁니다. 방송국 지부장이 놀고 먹는 자리가 아니에요. 저하고 밥 한번 먹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강기호의 재촉에 구진수는 탁자 위에 자신이 가지고 온 가방을 올려놓았다. 가방 안에서 한 묶음이나 되는 서류를 꺼낸 구진수는 강기호 앞으로 서류를 돌려 놓았다. 강기호는 구진수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게 뭐에요?
자신 앞에 놓인 서류를 들쳐 보며 강기호가 물었다.
-지난 10년간, 호란그룹이 저지른 분식회계를 입증할 장부!
강기호는 너무 놀라 손에 든 서류를 떨어뜨릴뻔 했다. 이걸 왜 구진수가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도대체 구진수는 이걸 왜 자신에게 보여주는 것일까?
-형님이 왜? 이거 어디서 나셨어요? 설마 형님이 직접 수사하신 건 아니죠? 형님, 이거 하나면 호란그룹은 끝장입니다. 도대체 왜 이걸 저에게...?
강기호는 구진수의 행동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내가 수사하는 껀 맞아. 그리고 이건 복사본이고.
-아니, 복사본이든 진본이든..., 도대체 왜 이걸 저한테 보여주시냐구요?
강기호는 구진수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구진수가 호란 그룹을 수사해? 호란의 장남이 호란을 망가뜨릴 수 있는 자료를 호란을 노리고 있는 나에게 보여 준다고?
-니 얘기 들었어, 진호하고 있었던 일.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진호가 얘기해요?
-아니, 그냥 우연히 알게 됐어. 검사들은 우연히 알게 되는 일이 많거든.
-그거하고 이 서류 저한테 보여주신 거 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구진수는 다시 침묵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를 때까지 강기호는 재촉하지 않고 구진수가 입을 열기를 기다려 주었다.
-니가 진호에게 당하고 가만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아마 니 방식대로 복수를 준비하고 있겠지? 정회장님이 널 이리로 보낸 걸 보면, 정회장님도 니 편에 서신건가?
강기호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이제 겨우 구진호와의 전쟁 준비에 들어갔는데 구진수가 눈치챘다면 모든 게 허사였다. 구진수 역시 구씨 일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눈치채셨다니 더이상 숨기지 않겠습니다. 제가 억울해서 그럽니다. 그동안 제가 진호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형님도 옆에서 다 지켜보셨잖아요. 제가 그동안 사람이었습니까? 그렇게 충성했는데 진호는 나한테 어떻게 했습니까? 지금 제 꼴을 보세요. 제가 이 꼴을 하고도 참아야 합니까?
강기호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호란그룹을 지금 이만큼 키운 게 누굽니까? 진호 술 처먹고 계집질하러 다닐 때 저 밤잠 안 자고 일했습니다. 진호 마약 먹고 사고 친 거, 제가 다 수습 했다구요! 저 지금까지 호란을 제 생명처럼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진호 그 새끼가 저한테 한 걸 보세요. 제가 참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저한테 뭐라고 할 수 있어도 형님은 저한테 뭐라고 하실 수 없어요.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알고 계시잖아요?
강기호는 참아 왔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버렸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되짚어보며 구진호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자신도 자신의 감정이 왜 이렇게 폭발해 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마 구진수를 보자 구진호가 떠올라서 일 것이다. 강기호의 울분을 모두 받아주던 구진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호란이 무너지는 걸 보고싶다!
구진수는 강기호를 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호란을 무너뜨릴 의도라면 내가 돕겠지만 단순히 주인 자리를 탐내는 거라면, 후회하게 될 거야!
구진수는 강기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또박또박 정확하게 전달했다. 강기호는 구진수 역시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것을 내심 기대했지만 의외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도무지 구진수의 진짜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호란의 흔적을 이 땅에서 완전히 지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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