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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 님의 서재입니다.

HONOR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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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
작품등록일 :
2022.05.21 14:36
최근연재일 :
2022.06.18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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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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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0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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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HONOR CLUB




DUMMY

# 구진호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는 지영이 신경 쓰여, 구진호는 운전에 집중할 수 없었다. 방금 전 지영을 태운 구진호의 차는 어딘가로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운전하는 구진호의 눈은 분명 정면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온 신경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지영에게 쏠려 있었다. 하지만 구진호는 조금은 불편한 이 상황이, 꼭 싫지만은 않았다.


-저기 봐요! 저기, 저쪽이요.


구진호는 턱을 들어 지영이 앉아 있는 창밖을 가리켰다. 구진호의 차는 어느새 고속도로에 진입해 있었다. 빠르게 지나치는 고속도로 길가 위로, 산등성이 곳곳에 서 있는 나무들이 새 색을 입으려 경쟁적으로 허물을 벗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도 똑같은 색이 입혀진 나무는 없었다. 어떤 것은 설익은 붉은 빛으로, 또 다른 나무는 짙은 연두색으로. 누군가 단단히 작정을 하고 물감통에 수만가지의 물감을 모두 쏟아붓고는 곧 온 산에 마구잡이로 색색을 뿌려 놓으려 하는 것 같았다. 유난히 무덥고 길어 숨 막히던 뜨거웠던 여름도, 언제나처럼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밀려 이제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우와! 벌써 단풍이 들려고 하나 봐요. 보세요. 울긋불긋, 여기저기서 색이 들려고 해요.


-하하하. 내가 뭐라고 했어요. 벌써 단풍이 든 곳도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어때요? 오늘 저랑 같이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요?


지영은 환하게 웃으며 옆자리의 구진호를 바라봤다. 구진호 역시 정면을 보며 운전하고 있었지만 가끔씩 지영을 쳐다보며 환하게 웃곤 했다. 지영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이 꿈만 같았다.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겨 지지가 않았다. 내 옆에 앉아 지금 나를 에스코트하는 이 사람이 정말 호란그룹의 총수가 맞는 걸까? 나에게 이처럼 다정하게 구는 사람이 진정 재계서열 20위 호란그룹의 총수! 그 구진호 회장이 맞다는 말인가? 지영은 불과 며칠 사이에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자신의 처지가 도무지 믿어지지도 않았고 현실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제가, 앞으로 회장님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계속 회장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회장님 소리는 이제 그만하고 좀 다르게 불러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미처 생각해 본 적 없는 갑작스러운 지영의 질문에 구진호는 언뜻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 글쎄요. 지영씨가 갑자기 물어보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는데요? 지영씨는 나를 뭐라고 부르고 싶어요? 나도 회장님 호칭은 싫은데요. 지영씨가 날 멀리하는 것 같거든요. 그러지 말고, 그냥 지영씨가 부르고 싶은 데로 불러봐요. 난 지영씨만 좋다면 어떻게 불리 든 괜찮을 것 같아요. 똥개라고 해도 좋구요! 하하하.


-네? 똥개요? 그건, 너무 심한 것 같네요. 호호호.


두 사람은 마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자동차의 유리창을 뚫고 따뜻한 햇살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두 사람이 지나칠 때마다 산등성이의 나무들은 알록달록 그 색을 바꾸어 입고 있었다. 지영을 바라보는 구진호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해 보였다. 지영은 그런 구진호의 얼굴을 하나하나, 천천히 구독하기 시작했다. 바람에 자연스럽게 날리는 짙은 색의 머리부터 쌍꺼플이 없는 작은 눈과 오똑하고 바르게 솟은 콧날까지, 이 남자는 사랑스러웠다. 지영이 꿈꿔오던 이상형이 바로 구진호였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러길 바랬다.


-그런데,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에요?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미쳤다 미쳤어. 지영씨하고 얘기하느라고 정작 목적지가 어딘지도 말해주지 않았네요? 우리 지금 남해로 가고 있어요. 땅끝마을, 들어 봤죠?


-땅끝마을이요? 그러엄요, 들어 봤죠? 땅끝마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하하, 네 맞아요. 거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에요. 지금 우린 땅끝마을로 가는 거에요.


-거기, 꽤 멀지 않나요?


-꽤 멀죠. 한 5~6시간 꼬박 걸릴 거에요. 천천히 안전하게 모실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쉬세요.


지영은 구진호의 말에 오히려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이 벌써 오전 11시. 남해까지 갔다 오려면 오늘 밤 늦게나 서울에 도착할 텐데, 내일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일찍 출근해야 하는 지영은 여기서 조금만 더 늦어지면 내일 오전 미팅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 마음이 들떠 있던 지영은 내일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일 일을 걱정하던 지영은 금방 울상이 되어 버렸다.


-내가 지금 지영씨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한번 맞혀 볼까요?


지영이 얼굴이 울상이 되어 버린 것을 보고 구진호는 씨익 웃었다.


-네? 무슨?


-내일 아침, 구매팀과 미팅이 있죠?


-그걸 어떻게?


-어떻게요? 나는 지영씨가 다니는 회사의 오너입니다만. 하하하.


-호호. 네, 뭐 그렇기는 하지만. 제 말은 어떻게 회장님 같은 분이 저 같은 말단 사원의 일까지 다 알고 계신건지 궁금해서요.


-어, 또 회장님 이라고 했어요! 회장님 말고 다른 걸 한번 생각해 봐요.


구진호는 지영이 자신을 어떻게 불러 주길 원하는지 물었던 것이 생각났다. 구진호는 그 문제를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지영에게 회장님이라고 불려지고 싶지는 않았다.


-저는 지영씨에 관한 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지영씨의 내일 오전 미팅을 오후로 미룰 권한도 있는 사람이구요. 그러니 오늘은 아무 걱정하지 말았으면 해요. 오늘 하루만큼은 우리 두 사람만 생각하는 거에요. 어때요? 할 수 있죠?


구진호의 말에 지영의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영에게 이처럼 다정하게 구는 남자는, 분명 호란그룹의 총수 구진호 회장이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남해 도착하기 전까지, 우리 서로를 부르는 호칭을 정하기로 해요. 그리고 오늘 이후부터는 그 호칭으로만 부르기로 하는 거에요. 어때요? 괜찮죠?


-네! 좋아요. 구진호님. 어머, 제가 나도 모르게 구진호님 이라고 했네요.


-구진호님? 하하하. 그것도 나쁘지는 않네요. 하하하.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차 안 이곳저곳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 너의 이름을 부르다


이런저런 얘기들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던 두 사람은 어느덧 남해에 도착해 있었다. 시간은 평일 오후를 훌쩍 넘겨,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드물게 볼 수 있었다. 땅끝마을이라는 표지석을 지나 긴 벤치가 놓여 있는 넓고 한적한 바닷가에서 내린 두 사람은 각자의 손에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커피지? 맛있는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구진호는 커피 맛에 만족한 듯 기분이 좋아졌다.


-진호씨는 이런 커피 많이 마셔보진 않았죠? 나는 이거 매일 아침마다 한잔씩 뽑아서 지하철 타는데. 우리 왕자님은 커피를 어떻게 드시나? 설마 아침마다 원두를 볶는 건 아니겠죠?


구진호는 지영과 눈이 마주치자 순간 멈칫거렸다.


-설마! 정말 원두를 볶는다구? 매일 아침마다?


구진호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게 아니고, 집에 일 도와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 자격증이 있으셔. 그 왜, 커피 만드는 자격증 있잖아?


-소사 소사 맙소사! 진호씨 정말 왕자였네요. 집에서 원두를 볶아서 커피를 마신다구요? 집에 바리스타가 함께 산다구요?


-왕자? 하하하. 이제는 왕자보다는 왕 쪽에 가까워졌지.


구진호는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지영을 바라봤다. 지영에게 보여주려 일부러 미소를 지었다기보다는 지영을 보면 단번에 웃음이 나왔다. 구진호는 지영을 바라보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을 평생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거봐! 호칭을 정하니까 우리, 가까워졌지?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이제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편해졌다. 서먹하고 어색하게 어떻게 서로를 부를지 몰라 난처해하던 아침보다는, 서로를 자연스럽게 부르고 있는 지금이 오히려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지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호씨라고 부르니까 왠지 더 가까워진 것 같아요.


-지영이가, 앞으로 계속 진호라고 불러줘. 지영이만 그렇게 불러 준다면 나, 진짜 구진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진호씨는 내가 부르지 않아도 구진호잖아요. 내가 불러야만 구진호가 될 수 있다구요?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저편에, 붉은 태양이 바다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석양은 몸 안에 붉은 빛을 창공에 폭발시켜 주위를 모조리 붉게 만들어 버리고는 천천히 천천히,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부탁할게. 날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줘. 난 지영이한테 구진호로 불리고 싶어.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날 부르면 안돼. 약속해 줄 수 있지?


지영은 구진호의 행동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구진호는 한 팔로 지영의 어깨를 감싸 지영을 안았다. 지영은 구진호를 거부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머리를 기대고 벤치에 앉아, 먼 바다로 떨어지고 있는 석양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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