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위기는 또 다른 기회 (5)
민지우는 모른 척,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행한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예지 영상에서 보고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근데 이게 다 뭐예요?”
“간단히 먹을 것 좀 샀어요. 그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을 거 아녜요. 이제 기운 차릴 때죠.”
주해나는 우지민 작가의 자상함에 반해 버릴 것 같다.
아니, 이미 빠져 버렸다.
“너무 감사해요. 작가님, 우리 같이 먹어요.”
“차에서는 냄새 날 텐데.”
“상관없어요. 문 열어 놓고 5분만 달리면 되는 데요. 그리고 여기 너무 어둡고 답답해요. 잠깐 시간되시죠?”
“물론입니다.”
차는 백화점을 나와 도로를 달려 어디엔가 도착했다.
시원한 한강이 마주보이는 공원 주차장.
운전도 수준급인 그녀는 꽤 서울 시내 핫스팟을 잘 알고 있었다.
“작가님께서 주신 자료들과 용기 덕분에 제가 되살아났어요.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제가 할 수 있는 능력 내에서 한 일인데요. 인사는 잘 받겠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들을 입수하실 수 있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사연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배려 고마워요.”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저를 위해서도, 그리고 앞으로 저 같은 사람이 또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그 인간과 관련 인물들에 대해서 법적으로 끝까지 책임을 물을 거예요.”
“당연히 옳은 결심입니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 위해서는 관용 같은 쓸 데 없는 관념은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양쪽으로 살짝 열어 놓은 창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 들어온다.
기분이 저절로 좋아지는 미풍이다.
“저...”
“...?”
“아시죠? 하기로 했던 드라마에서 퇴출된 거.”
“아, 국선영 작가님 작품 말씀이죠?”
짐짓 큰 심적 관심이 없는 척, 자연스레 받는 민지우다.
그래야 혹시 모를 부담을 지우지 않을 수 있으니까.
“네.”
“기사 읽었습니다. 근데, 계약서에 도장은...?”
“찍으려던 바로 그 주에 일이 터진 거였어요.”
“아...”
앗싸!
속으로 다행의 쾌재를 부르면서도 절대 얼굴에 티내는 건 자제하는 그다.
“구두계약도 계약이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국 선생님이 그 ‘구두’로 저한테 함께 할 수 없다고 했으니 결국 계약 해지도 통보가 된 셈이죠.”
그녀의 말이 맞다.
어차피 말로 했던 걸 말로 깨부쉈으니.
국 작가 입장에서는 이제 할 말이 없어진 셈이다.
“많이 실망스러웠겠군요.”
“솔직히, 그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
“금세 괜찮아졌어요. 어차피 저를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진심을 믿어주지 않는 분과 일하는 건 저도 원치 않으니까요. 다시 출연을 요청해도 이제 제 마음이 돌아섰어요.”
“그렇군요.”
“그래서 말인데, 저 작가님 작품에 함께 하고 싶습니다.”
시원해서 기분이 좋다.
너무 이리저리 돌리는 것보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터놓고 말하니 얼마나 속이 뻥 뚫리나.
“블랙 셀러브리티에요?”
환하게 지어지는 웃음을 자제하느라 쉽지 않은 민지우다.
먼저 나서 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네. 사실 지난 번 최 CP님께서 제 스케 물어보셨을 때, 혹시 저한테 배역 제안을 하시려는 건 아닌가 해서 마음이 두근두근 했어요. 물론 그 때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지만, 기쁘고 또 설렜거든요. 만약 그런 사정이 없었다면 당연히 그 자리에서 덥석 받았을 거예요.”
“아, 네.”
“작가님의 소설 읽으면서 그 안에 제가 함께 하면 얼마나 좋을까 수도 없이 상상해 봤어요.”
“그랬어요?”
“네. 이렇게 제 상황이 풀려서야 말씀드려서 면목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말씀을 드려보는 게 나중에 후회 안 할 거 같아서요. 꼭 ‘유하린’ 역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작가님만 괜찮으시다면 어떤 배역도...”
“죄송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네?”
민지우의 너무나도 어이없는 단호한 거절.
놀라고 당황해하며 잠시 그의 눈을 쳐다보던 주해나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체념한 듯.
“아, 네. 하긴, 저도 참 뻔뻔한 것 같아요. 그 때에는 한 마디 말도 없다가 이제 와서 너무 당당하게 요구를 하고 있으니. 죄송해요, 작가님. 좀 전 제 말은 없던 일로...”
“그게 아니구요. ‘유하린’이 아닌 다른 배역은 안 되겠다는 겁니다.”
“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민지우를 향했다.
“애초에 주해나 씨가 맡아줘야 할 인물이 바로 ‘유하린’인데, 다른 배역을 담당하면 안 되죠!”
“지금 그 말...씀은?”
화들짝 놀라서 급격히 안색이 되살아나는 주해나.
“제가 공식적으로 요청 드릴게요. ‘블랙 셀러브리티’의 주인공 ‘유하린’을 해나 씨가 맡아 주세요. 승낙하시겠습니까?”
정중하고 포멀한 민지우의 제안에 주해나는 온 몸으로 전율하며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맡겠습니다! 꼭 하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어느새 눈물이 차올라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간 심적으로 고생했던 데 대한 서러움과 고뇌가 몸 밖으로 배출되는 순간이다.
민지우가 이제야 더없이 환한 미소를 띠고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괜히 짓궂은 방식으로 답을 해버린 같아서 미안했다.
하지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진심이고 사실이니까.
한강의 수면 위로 반사되어 비치는 반짝임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주해나의 눈물방울처럼.
*****
“하아, 감히 내 전화를 그냥 끊어?”
국선영 작가의 얼굴이 닳아 올라있다.
보조작가를 통해 연락을 취했다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리를 주해나 소속사로부터 들은 그녀.
- 죄송합니다. 해나 씨가 선생님 작품 안 하겠다고 하네요. 그리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말도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자꾸 그 말을 되새김질하는 국 작가다.
딴에는 자존심이 굉장히 상한 터.
그녀는 자신이 그런 대접을 당했다는 데 대해 어이가 없고 분통이 터진다.
“하아. 이제 하다하다 저런 애송이한테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해? 아무리 내가 작품 하차하라 했어도 그렇지. 그럼, 그런 상황에서 누가 그냥 두겠어. 그 정도는 이해를 해야지! 그러니까 누가 그런 놈팽이하고 엮이래?”
쏟아내는 말과 함께 입에서 김이 뿜어져 나온다.
용가리인 줄.
“선생님. 계속 전화 안 받습니다.”
주해나는 그녀뿐 아니라 보조작가인 손미나의 연락도 안 받고 있다.
“이게 진짜 나하고 한 번 해보자는 거지? 그치?”
“어차피 다른 배우로 거의 마음을 굳히셨는데, 굳이 이러실 필요까지 있을까요?”
국 작가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다.
“급하게 교체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캐릭터에는 주해나가 딱이야.”
“그럼 애초에 조금 지켜보시지 그러셨어요.”
“너도 알다시피 당시에 그럴 분위기였니? 여기저기서 난리들이었잖아. 거기에 나나 우리 작품이 얽히게 될 게 뻔한데, 그렇게 되면 구설수에 엮여서 평판 떨어질 게 눈에 너무도 확연히 보이는데 어떡해, 그럼.”
역시 그녀는 전적으로 자신을 위한 마음에 최소한의 인내심도 발휘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꽤나 긴 인연의 끈마저도 순간 싹둑 잘라버릴 만큼 국 작가는 자신의 커리어에 집착이 지나치게 강했다.
“제 소견으로는 교체하신 대로 밀고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주해나도 입장을 밝힌 데다 자칫 이런 사정이 알려지면 대중들의 평판도 안 좋아질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사태가 질질 끌렸으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단박에 해결됐잖아. 게다가 지금 대중으로부터 재평가까지 받는 중이야. 걔가 우리 작품에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그렇더라도, 저런 식으로 반응하는 배우를 선생님께서 자존심까지 굽혀가며 매달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내가 자존심을 굽혀가며 왜 매달려? 내 방식대로 해야지. 아직 나, 업계에서 나름 파워 있어. 너도 그걸 의심하는 거니?”
“아뇨. 그런 말씀이 아니라...”
“일단 하루 이틀만 기다려 보고 그 때에도 별 변화 없으면 내가 직접 액션을 취해야지. 그러면 다 따라오게 돼 있어.”
자신을 위한 제언에도 귀를 닫는 국선영 작가.
지나친 자존심과 자기애는 지혜의 발현을 막아 버린다 했던가.
본인이 주해나에게 했던 칼질에 대해서는 깨끗이 잊은 듯하다.
참으로 가슴 웅장해지는 선택적 기억력이었다.
*****
그 시각.
ETVN 드라마국에서는 난리가 났다.
“네? 그게 정말이세요, 작가님?”
민지우로부터 전화를 받은 최인아 CP.
깜짝 놀라서 되묻는 그녀의 눈 크기가 인생 역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자세한 사정 이야기는 내일 꼭 해주세요. 네네!”
하도 목소리가 커서 국원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볼 정도.
부스에 처박혀 있던 한석우 국장이 긴급재난상황인 줄 오해하고 뛰쳐나올 정도였다.
“지진이야?”
“네.”
“진도 몇이야?”
“역대 3위 안에 들 것 같은데요. 꽤 강진이네요.”
“근데 난 못 느꼈는데. 진앙지가 어디래?”
“우지민 작가님이요.”
“뭐? 그게 무슨...?”
“우리 드라마에 해나 씨가 출연하기로 했대요.”
“에이 씨. 난 또 뭐라고. 진짜 지진인 줄....뭐? 그게 무슨 소리야? ‘해나 씨’라면 ‘주해나’ 말하는 거야?”
“왜 아니겠어요. 현재 최고의 핫이슈 아이콘이 우리 작품에 출연하기로 했으니 이보다 더 큰 강진이 어디 있겠어요?”
그 말에 CP들이 전부 와다닥 모여들었다.
“진짜야, 최 CP?”
“그게 사실이야?”
“설마. 기자회견 한 게 며칠이나 지났다고. 고작 엊그제야.”
사실 알게 모르게 본인들 작품에 어떻게 해볼까 각을 재고 있던 참이었거든.
‘아이 씨, 또 빼앗겨 버렸네.’
‘아니, 우지민 작가도 채가 놓고서 이제 주해나까지!’
한 국장이 믿어지지가 않는지 다시 한 번 확인을 한다.
“확실한 거야?”
“네!”
“근데 최 CP가 총괄인데 도대체 누구한테 연락을 받은 거야?”
“우 작가님이요. 우지민 작가님이 갑자기 나가시더니 이야기 다 끝났다면서 내일 계약서 준비해 놓으라고 전화가 왔어요. 해나 씨하고 같이 와서 도장 찍고 바로 언론에 공개하자고 하시네요.”
그 말에 CP와 피디들의 입이 단체로 벌어졌다.
개중에는 배현아도 있었다.
“대박! 우 작가님이 해나 씨하고 그렇게 밀접한 관계였어?”
“글쎄요. 자세한 사연은 저도...”
“어찌 됐든, 우리 드라마에 큰 호재네. 아니 이건 호재 정도가 아니라 전 국민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일이잖아! 우지민 작가님 덕분에 이게 웬 호사냐. 상무님 아시면 또 입이 귀에 걸리시겠구만, 하하하!”
최인아 CP는 곧장 계약서 준비에 들어갔다.
*****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주해나와 관련된 속보 기사들이 연이어 세간을 달궜다.
[주해나와 제이로언 엔터테인먼트, 고강윤과 GSK 엔터테인먼트 고소. 경찰 수사 본격적으로 시작.]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 주해나 팬클럽과 시민단체, 고강윤과 소속사 고발.]
[고강윤은 대체 어디에? 베트남과 태국 모처에서 은신 중으로 파악.]
이번 사건에 대한 뉴스뿐 아니라.
주해나를 응원하는 팬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ETVN 우지민 작가 신작 ‘블랙 셀러브리티’, 주인공에 ‘주해나’ 배우 낙점!]
하지만 그 누군가에게는 기함할 내용.
이 뉴스를 접한 국선영 작가의 작업실에서는 분노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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