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데뷔 (5)
작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동산 위.
낮은 풀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그곳에, 한 남자아이가 앉아있다.
이제 여덟, 아홉쯤 돼 보이는 그 아이 뒤로, 한 그림자가 나타난다.
-트레그. 너 얼굴 탄다.
트레그라고 불린 아이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웃는다.
트레그의 앞에는 자신보다 네댓 살은 많아 보이는 남자가 서 있다.
트레그는 그의 이름을 부른다.
-글라이츠.
-형이라고 불러.
-글라이츠.
-에휴, 됐고. 너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나도 몰라. 잘 기억이 안 나.
-뭐 또, 아저씨한테 혼났어?
-그랬나······?
-나야 모르지.
-나도 모르겠어.
-오늘따라 이상하네, 너.
-그런가?
-다른 데로 가자. 여긴 너무 덥다.
-응.
어린 트레그가 자리서 일어난다.
먼지 묻은 엉덩이를 털고, 글라이츠를 보자 그가 손을 내민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커다란 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걷는다.
그러자 그늘 사이에서 순식간에 성장하는 두 사람.
10대 중후반이 된 두 사람, 계속 손을 잡고 걷는다.
그리고 대화한다.
-아저씨한텐, 언제쯤 말씀드릴 거야?
-······글라이츠는?
-난 오늘.
-오늘?
-응. 오늘 말할 거야. 전부 다.
-······
-왜? 트레그. 넌 안 되겠어?
추궁하는 어조는 아니다.
글라이츠는 그저 묻고 있다.
잠시 고민하던 트레그가 입을 연다.
-난 아직 모르겠어.
-아직도? 아저씨 때문에? 아님······
-아버지는······ 나만 보고 있잖아.
-그렇지만 널 제대로 보고 있는 건 아니지.
-우리가 토키베를랑으로 간다고, 뭐가 달라질까?
-적어도 거긴, 우리 같은 사람들이 당당하게 걸어 다니잖아.
-일부일 뿐이야.
-그거라도 어딘데.
-······
-두려워?
-두려워.
-트레그.
-응, 글라이츠.
-난 네가 좋아.
-······응.
-후회하지 않게 최선을 다해보고 싶어. 뭐가 됐든 말이야.
-······
-하지만 강요는 안 할게. 트레그, 진짜 사랑은 희생하는 것도 아니고 희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니까.
트레그는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자 글라이츠가 잡고 있던 손부터, 그의 팔과 몸까지.
바스러지듯 먼지가 돼 숲의 너머로 사라진다.
트레그는 홀로 그 그늘, 어둠 속에 남는다.
그리고 다시 걸어, 트레그는 자신의 자그마한 오두막집으로 돌아온다.
오두막집 안에는 중년의 남성이 식탁에 먼저 앉아있다.
간소한 식사를 하고 있는 그에게 트레그가 다가가 말을 건다.
-아버지.
-음?
-나 토키베를랑으로 가고 싶어요.
-······뭐 때문에?
-그냥, 재르간의 수도잖아요. 무슨 일이든 해보고, 경험해보고 싶어요.
-어차피 도시로 나가봐야, 넌 여기로 돌아오게 될 거다.
-왜요?
-거기라고 뭐가 다를 것 같냐? 더 심해. 욕심 많은 인간들이 순진한 너 하나 부려 먹고 벗겨 먹는 건 순식간일 거다. 뭔가 얻기는커녕 잃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그렇게 되고 나서 넌 결국 여기로 돌아올 테지.
-······
-아닌 것 같냐?
-그렇게 단정할 건 없잖아요. 아버지도 도시에 나가본 적 없으면서.
-주변에서 많이 봤다. 너나 다른 젊은 애들처럼, 나 때에도 많이들 갔었지. 그 녀석들 다들 지금 어디 있는 줄 아냐? 여기 아니면 저기다.
트레그의 아버지가 검지로 아래를 한 번 가리키곤, 다시 하늘을 가리킨다.
그건 죽었다는 뜻.
이를 알아들은 트레그는 한숨을 내쉰다.
-한숨 쉬지 마라. 넌 여기에 있는 게 제일 좋아. 조용히, 날 따라서 농장 일이나 하며 사는 게 널 위해서도 좋다는 거야. 네 토르 조종 실력이면 농장 일도 어렵지 않을 거다.
-그게 뭐가 좋아요.
-지금까지 나 혼자, 널 키우는 데에 그래도 부족하진 않게 했다. 그 정도면 된 거 아니냐.
-······부족한 게 없었다고 생각해요?
-너······
-그냥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뿐이에요.
-글라이츠 자식한테 물들어 가지곤, 이젠 반항까지 하는 거냐?
-글라이츠한테 물든 거 아니에요. 그리고 글라이츠 나쁘게 말하지 마세요.
-이 녀석이.
트레그의 아버지가 자리서 일어선다. 큰 덩치에 근육질 몸으로 트레그에게 다가선다.
-너, 내가 모를 줄 알아? 글라이츠 녀석하고 매일 붙어 다니면서, 산에서 이상한 짓 하고 다니는 거!
-우리 이상한 짓······ 한 적 없어요.
-마을 소문이 다 났어. 그래서 글라이츠 자식도 도시로 도망친 거고. 왜, 걔가 너도 같이 가자고 꼬셨냐? 그런 거냐?
-안 갔잖아요.
-꼬신 건 맞나보네. 잘 들어 트레그. 네 이상한 그거, 내가 지켜줄 수 있는 건 여기뿐이야. 아직은 내가 다 아무렇지 않게 무마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 현명하게 보라고.
-이상하게 태어나서 죄송해요.
-비꼬지 마. 네가 그렇게 태어난 건, 내 잘못도 있는 거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하! 됐다.
아버지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식탁 앞에 앉는다.
트레그도 더 말하지 않고 자신의 좁은 방으로 들어간다.
트레그가 침대에 누워 방 천장을 보자, 통나무 천장은 사라지고 밤하늘이 보인다.
그리고 트레그가 다른 세계에 떨어진다.
사람이 번잡하게 오고 가는 도시의 인도.
거기에 멍하니 서 있는 스무 살의 트레그에게 성숙해진 글라이츠가 뛰어온다.
-트레그!
-글라이츠?
-드디어 왔구나. 보고 싶었어.
와락.
트레그를 껴안는 글라이츠.
트레그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피지만, 정작 지나가는 사람들은 둘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괜찮아. 토키베를랑 사람들은 별로 신경 안 써.
-다행이다.
-아저씨는 어쩌고?
-그냥······
-그냥? 말없이 나왔다고?
-응.
-하하······ 뭐, 어쩔 수 없지. 가자, 소개해주고 싶은 데가 있어.
글라이츠가 트레그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로 이끈다.
두 사람이 다다른 곳은 분위기 있는 술집.
가게에 무대가 있어 가수가 노래하고, 손님들을 이를 볼 수 있는 구조.
아직 이른 시각이라 손님이 없는 이 술집에, 바닥 청소를 하고 있던 남자와 여자가 글라이츠를 알아본다.
-어이, 글라이츠. 일찍 왔네?
-옆엔 누구야?
-아, 말한 적 있지. 여긴 트레그 베르터.
-아! 네가 그 트레그?
-예쁘게 생겼네. 이제 스무 살이라고 했던가?
-미안, 트레그. 여긴 라이브 펍을 운영하는 재크와 튤리야.
-안녕하세요.
-편하게 해~ 그냥 재크, 튤리라고 불러줘.
-그래, 그리고 딱히 정해놓은 거 없으면, 여기서 일해 볼래?
튤리라 불린 여성이 트레그를 보며 묻는다.
그리고 글라이츠가 괜찮다는 듯 트레그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아. 여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펍이니까.
그렇게 트레그는 라이브 펍, ‘카이트’에서 일을 한다.
바닥을 닦고, 술과 안주를 나르고, 노래하는 가수를 보기도 한다.
쉴 때는 클라이츠와 함께 토키베를랑의 거리를 걷는다.
낮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두 사람은 함께 걷는다.
웃으면서.
그런데 둘의 웃음이 곧 멎는다.
-재르간이 쇠퇴하고 있습니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뛰어난 재르간인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카이트 내에 설치된 TV에서 방송이 흘러나온다.
가게를 정리하던 트레그와 재크, 튤리가 그걸 본다.
-동성애는 악입니다! 이를 근절하지 않으면, 신께서 허락하신 재르간 제국의 영광은 다신 오지 않을 것입니다!
-씨발, 뭐라는 거야.
-재크, 입조심.
-아니 그렇잖아. 동성애가 뭐? 악? 지랄하고 있네, 진짜.
-······
-너무 신경 쓰지 마. 트레그.
-그렇지만 튤리. 저 사람, 제국 수상이잖아요······
-수상이면 뭐? 어차피 달라질 거 없어!
-재크.
-우리가 토키베를랑에서 저딴 소리 처음 듣는 것도 아냐. 또 뭐 심사 뒤틀리는 게 있나 본데, 마음대로 지껄여 보라지.
심각한 표정의 트레그.
난감한 튤리.
흥분한 재크.
셋의 표정이 곧 하나로 바뀐다.
그건 두려움.
-재르간 제국의 쇠퇴를 일으킬, 악을 말살하라!
-말살하라!
-말살하라!
거리를 행진하는 시위대.
그들을 보호하는 재르간 군인들.
트레그와 재크, 튤리가 가게 유리창 너머로 바깥의 행진을 본다.
-씨발, 씨발, 씨발.
-재크, 욕 좀 그만해.
-하아······ 내가 잘못 생각했어. 미친놈들이 이렇게까지 할 줄 몰랐다고.
-다른 애들한테 연락은 했어? 당분간 가게에 오지 말라고.
-연락이야, 했지. 근데 그것보다 우리 걱정이나 해. 우릴 벼르고 있던 놈들이 많아.
-설마, 뭔 일 있겠어?
쨍그랑.
그때, 가게 유리창을 깨며, 돌멩이가 들어온다.
이어서 무수히 많은 돌이 날아와 창을 깨부수기 시작한다.
퍽, 퍽, 퍽.
머리에 돌멩이를 맞은 재크가 피를 공중에 흩뿌린다.
그러면서도 튤리와 트레그를 향해 서서 날아오는 돌을 막는다.
-아······
-재크!
-씨발······
-여기가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술집이다!
-다 잡아!
-도망쳐, 튤리······트레그······
가게 안으로 몰려드는 시위대.
가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튤리는 재키를 부축하면서 트레그를 가게 안쪽으로 밀어낸다.
-도망쳐 트레그! 넌 괜찮아! 아무도 모를 거야!
떠미는 튤리의 말에 고민하던 트레그가, 결국 뛴다.
가게 안, 주방으로.
그리고 주방에 이어진 통로를 통해 골목으로 빠져나온다.
-트레그!!
-헉, 헉, 글라이츠!
-다행이다, 무사했구나!
-지금 가게 안이······
-일단, 도망치자. 도망치고 얘기하자.
글라이츠가 트레그와 함께 골목을 뛴다.
수많은 사람의 눈과 귀를 피해 골목으로 도망친다.
달리고 달려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괜찮아, 트레그?
-모르겠어······ 재크도, 튤리도, 죽었으면?
-······괜찮을 거야. 녀석들, 꽤 강한 애들이니까.
-왜 이렇게 됐을까······
-곧, 다시 좋아질 거야. 사람들도 예전처럼 우릴 받아 줄 거고.
-그럴까?
-거기 멈춰!
걸어가는 두 사람을 총든 재르간 군인들이 막아선다.
-신분증 제시해라.
-아, 여기······
-글라이츠 매나?
-네······
-손들어.
-저 무슨······
-몰랐나? 글라이츠 매나, 네놈 회사에서 네가 동성애자임을 신고했다.
-······
-새로 제정된 제국법에 따라 즉결 처형···
-흣!
글라이츠가 앞에선 재르간 군인을 기습한다.
한 명을 빠르게 제압하고, 그의 총기로 다른 군인을 향해 총을 쏜다.
탕! 탕! 탕! 탕!
서로의 총을 맞고 쓰러지는 세 사람.
그건 재르간 군인과 글라이츠.
쿨럭.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글라이츠를 트레그가 붙잡아 안는다.
-트레그······
-글라이츠!
-지금까지······ 널······만난······거······
-뭐라고?
-난······후회하지 않아······넌······어때?
-후회해!
-후회······하지······마······
어떻게 후회하지 않을 수가 있어.
아버지에게 떳떳하게 네 얘길 하지 않은 것도.
토키베를랑에 간다던 널 잡지 않은 것도.
떠난 너를 더 빨리 따라가지 않은 것도.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더 당당하게 함께하지 않은 것도.
위험해지기 전에 함께 도망치지 않은 것도.
다 후회해.
-이런······삶도······있는······
글라이츠가 말을 끝맺지 못한다.
그리고 트레그는 눈물을 닦지 못한다.
트레그는 길가에 글라이츠를 묻는다.
그리고 그길로 고향에 돌아온다.
아버지가 살고 있는 오두막으로.
-트레그, 너!!
-아버지.
-살아······있었냐. 다행이다.
-나, 토르 좀 빌려줘요. 농업용 토르.
-무슨 소리냐, 그게······ 일단 들어와 집으로.
-토르가 필요해요.
-뭘 하려는 거냐.
-이제부터 당당하게 살려고요. 뭐든, 뭐가 됐든. 숨김없이. 후회 없이.
- 작가의말
우려의 코멘트
저는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입니다. 그냥 캐릭터로만 봐주세요~
그리고 재미없는 거 보게 해드려서 매번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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