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사생활 (4)
로이나를 백악관에 들인 이후 건흥은 집무를 보는 틈틈이 그녀와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건흥을 부담스럽게 생각해 모든 행동을 조심하던 그녀도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건흥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물론 그게 건흥을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제국의 절대자 대한 충성과 두려움이 섞여서 나오는 행동이기도 했다. 건흥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백악관에 머무르긴 했지만, 공식적인 위치가 없었기 때문에 백악관 비서실에서도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곤란한 상황이 종종 있었다. 현재는 건흥의 손님 자격으로 대우하고 있었지만 마냥 이렇게 갈 수는 없었다.
"결혼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녀에게 공식적인 위치를 줘야 할 것 같다."
"로이나님을 황후로 맞이 하실 생각이십니까?"
"내 아내가 되는 것이니 당연 황후가 되어야지"
반스딘은 건흥의 말을 듣고 그가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결혼하고 자녀를 가지는 일을 순간 떠올려 봤는데 잘 그려지지 않았다.
'자녀까지 낳으실 계획이신가...?'
건흥을 만난지 삼십년이 지난 지금 많이 늙은 자신과 비교하여 여전히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인 그였기에 제국은 누군가에게 물려주지 않고 영원히 건흥의 손아귀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결혼을 해서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자녀가 태어날 것이고 그 때부터 제국에 있지 않았던 새로운 권력 투쟁이 생겨날 수 있었다.
'하긴... 시녀들 중에 임신한 자들은 나오지 않았지'
반스딘은 건흥의 모든 것을 서포트 하는 비서실의 책임자였기에 그가 시녀들과 성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십년 넘게 이어진 그녀들과의 행위에서도 그 어떤 시녀도 건흥의 아이를 가지지는 못했었다.
'어쩌면....'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어쩌면 건흥은 그것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나? 내 말 듣고 있나?"
"아! 죄송합니다. 폐하. 결혼식 준비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로이나님을 위해 황후의 공식적인 위치를 만들고 그에 따른 법 제정을 준비하겠습니다"
"나와 다르게 경호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비서실 산하 경호처를 설립하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건흥은 황제였지만, 따로 경호인력을 전혀 두지 않았다. 이 시기 다른 국가들이 근위대를 두고 충성심과 실력이 뛰어난 인물들을 배치한 것과 정반대였다.
본신의 능력이 너무나 뛰어난 건흥이었기에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경호랍시고 따라다니는 인력들은 거슬릴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세상을 오가며 일처리를 하는 건흥을 따라다니며 호위할 수 있는 인물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로이나는 달랐다. 그녀가 황후가 된다면 좋지 않은 목적으로 그녀의 신상에 위해를 가하려는 자들이 나타날 수 있었다.
옛날 명나라 출신 인원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제국 내부에서 위협이 생길 수도 있었고, 이제 슬슬 외부와 교류를 시작하고 국가의 문을 열고 있었기에 제국 외부의 유럽 국가들로 부터의 위협이 생길 수도 있었다.
"경호처에 신경을 좀 써라. 로이나가 계속 학교를 다니길 원하니 불한당 같은 놈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반스딘에게 결혼 준비 지시를 내린 건흥은 이제 학교에서 돌아왔을 로이나를 만나러 이동했다. 그녀는 대학에서 수업을 다 듣고 건흥이 만들어둔 게이트를 넘어 순식간에 백악관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식사 하자"
"예 폐하."
대부분 혼자 식사를 했었던 건흥의 식탁에는 이제 항상 로이나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끝없이 음식이 나오는 백악관의 식사에 어느 정도 적응해 더 먹고 싶은 마음을 조절하며 식사하고 있었다.
'음식은 맛있지만... 살 찌는 건 싫어'
이 시기의 미의 기준은 조금 통통한 여성이 가장 예쁘다고 추앙받았다. 로이나는 그 기준에 못 미치는 날씬한 체형이었는데, 본인 스스로 그 체형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통통한 것보다 날씬한 것이 옷을 입어도 더 예쁘고, 몸을 움직이기도 더 편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통통한 여성이 가지고 있는 강점을 날씬하면서도 갖추고 있었기에 굳이 일부러 살을 찌울 필요가 없었다.
"벌써 다 먹었느냐?"
"예. 배불러요"
"어째 점점 먹는 양이 줄어드느냐?"
"원래 이 정도만 먹는데... 그 동안 좀 과하게 먹었던 거에요. 이곳 음식이 맛있어서요"
"그랬느냐? 그래 과식해서 좋을 건 없지"
로이나가 식사를 멈추자 건흥도 더 이상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시종을 불러 식사를 치우고 후식과 커피를 내오도록 지시했다.
"커피는... 마시면 마실 수록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앞으로 이 커피를 모든 백성들이 마실 수 있도록 공급할 것이다"
"커피는 귀하지 않나요?"
"스페인 놈들이 물러간 땅에서 커피를 재배할 수 있다.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수확이 시작될 것이야. 아마 유럽처럼 도심 곳곳에 커피 전문점이 생겨날 게야"
"모두가 좋아할 것 같아요"
로이나는 건흥의 말에 미소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백악관에서 지내는 것은 어떠냐?"
"좋아요... 비서실 분들이 제가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신경 써 주시고 있으세요.."
"그럼 나와 지내는 것은 어떠냐?"
"그것도... 좋아요"
로이나가 대답을 약간 망설이는 것이 건흥은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그녀의 입장에선 갑작스럽게 끌려온 것이니 싫다고 말하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물론 이 상황에서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지만 말이다.
"매번 일방적이라 미안하지만, 너와 결혼을 할 생각이다"
"......!!"
"너는 제국 최초의 황후가 될 것이다"
"어...어...저는..."
난데 없이 황후를 언급하는 건흥의 말에 로이나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지금 건흥이 자신을 잘 대해주고 있지만, 이것이 얼마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국 모든 것의 주인인 황제에게 여자들이 얼마나 많을 것이겠는가? 그는 머지않아 자신에게 실증 내고 마음속에서 잊어버린 뒤, 또 다른 여자를 백악관에 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황후라니요.... 저는 평범한 대학생인데...."
"앞으로는 아니다. 나와 함께 살아갈 사람이니 확실한 위치가 있어야지"
건흥의 말에 로이나는 감동했다. 자신을 잠시 스쳐가는 놀이감으로 여기는 줄 알았는데 황제는 자신에게 진심이었던 것 같았다.
'괜히 훗날 곤란해지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주는 것 같아 기쁘긴 했지만, 여러모로 로이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거듭 마음에 걸린 것이 지금은 진심이라 하더라도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폐하... 폐하께선 영원히 젊은 모습이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는 지금의 젊은 모습은 잠시일 뿐, 곧 나이 들고 늙어 버릴 것입니다"
"그땐 또 그때만의 매력이 있지 않겠느냐?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건흥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없애 줄 순 없겠지만, 황후가 되고 공식적인 위치에서 생활하다 보면 차츰 마음이 편안해 질 것이라 생각했다.
* * *
서울 베니스지구
로이나의 부모님이 기거하는 집 앞에 일련의 병력들이 찾아왔다. 그들의 제일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은 비서실장 반스딘이었다.
"계시오"
"누구십니까?"
반스딘이 문을 두드리자 로이나의 아버지인 로버트가 나왔다. 그는 베니스 지구에서 유리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기술자였다.
"반갑네. 나는 반스딘이라 하네"
".....!"
반스딘은 제국의 최고 수뇌부중 한명으로 오랫동안 일해왔기에 일반 군중들에게도 유명했다. 몇 년 전부터 발간이 시작된 신문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그였기에 로버트도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비서실장님께서.... 제 집에는 어쩐 일로...."
모르는척 묻는 로버트였지만 대충 무슨 일로 반스딘이 자신의 집을 찾아 왔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로이나가 결국 사고를 쳤구나!'
로이나는 백악관에서 지내게 된 그 다음날 대학 수업을 마치고 베니스지구의 집을 들렀다.
그날 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 밤새 대학과 집을 오가며 그녀를 찾았던 로버트는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나타난 딸에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당분간 백악관에서 지내게 되었어요... 자세한 건 묻지 말아 주세요"
로이나는 그 말만 하고 집을 나섰다. 딸의 일방적인 태도에 화가 나기도 하고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했던 로버트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문 밖에서 기다리는 경호원들에게 제지 당했다.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예..."
경호원들은 그녀를 데리고 베니스지구를 떠났고 로버트는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그 모습을 바라만 봐야했다.
제국에서 황제의 명령이라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 사이에 건흥은 자애로운 군주가 아니라 공포의 군주였다.
딱히 백성들을 억압하진 않았지만, 한번 벌을 주면 무시무시하게 벌하는 그의 행동 때문에 건흥을 향한 백성들의 존경심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깔려있었다.
그런 상황에 갑자기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반스딘의 모습을 본 순간 로버트는 로이나가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 책임을 가족 전체가 져야 할지도 몰랐다.
"자네의 딸 로이나님께서 조만간 황후의 자리에 오르실 것이네"
"그...그게 무슨....!"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야. 황제 폐하가 로이나님을 매우 총애하고 있으시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자네에게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고"
"저는 베네치아에서 문을 넘어 이 땅에 온 평범한 유리기술자입니다. 고귀한 혈통도 아니고 근본도 없습니다. 제 아내 역시 오랑캐를 피해 도망가던 중 이곳으로 넘어온 신림의 백성입니다"
"언제 우리 제국이 신분이 있는 사회던가? 황제 폐하 아래에서 모두 평등하고 오직 능력에 의해 평가 받는 곳이야. 우리는 근본을 따지는 나라가 아니네"
"하지만.... 제 딸이 황후가 된다는 것을 높으신 분들이 받아 들이실 수 있을지...."
"하하 누구의 명인데 받아들이지 못하겠는가?"
누구의 명인데 감히 토를 달겠는가? 말하는 반스딘의 이야기를 들은 로버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 제가 할 일을 알려주십시오"
"결혼식에 참여해야 할 것이야. 물론 일반적인 절차와는 좀 다를 것이네. 아무래도 폐하의 결혼식이니까 말일세"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사를 좀 해야겠어"
"이사를....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폐하께서 자네에게 새로운 저택과 금일봉을 하사 하셨네."
"아... 아 그런..."
"자네를 위한 최소한의 경호인력 또한 붙을 것이야. 조금 불편하더라도 안전을 위한 것이니 협조하시게"
"아..알겠습니다."
로버트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가슴 한 켠에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찌 되었건 로이나가 잘못을 저질러 반스딘이 자신의 집에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폐하의 여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로이나가 어떤 과정으로 백악관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는 그는, 평범한 자신의 딸이 어떻게 황제의 눈에 들었는지 신기했다. 참 사람의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폐하의 여자가 된 다면 그 누구보다 시집을 잘 간 것이니 축하할 일이었다. 백악관 생활이 쉽지 않겠지만, 똑똑한 로이나가 잘 이겨낼 것이라 믿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비서실 직원이 방문하여 설명할 것이야. 그럼 결혼식때 보자고"
"예. 알겠습니다"
용건을 마치고 떠나가는 반스딘의 뒷모습을 로버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혹시 꿈속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 본 그는 선명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이게 꿈이 아님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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