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사생활 (2)
대학로를 돌아다니던 건흥은 새로 생긴 대형 서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서울 서점'이라는 상호를 가지고 영업하는 이 서점은 제국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점이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서점이었기에 건흥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서점 안으로 들어간 그는 제법 그럴싸하게 꾸며져 있는 서점의 모습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자고로 지식인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서점이 있어야지'
서점에는 여러가지 책들이 주제 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대부분 과학과 관련된 책들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제국의 과학중심주의가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었고, 다르게 보면 인문학적인 연구가 부족한 상황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었다.
여러가지 분류의 책들을 살펴보던 건흥은 역사 부분으로 넘어와서 진열된 책들의 제목에 약간의 민망함이 느껴지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제국 건국 역사
위대한 황제 폐하의 일대기
황제 폐하의 가르침 모음
역사 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흥과 관련된 서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책은 상당히 많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그만큼 많이 팔렸기 때문이었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는데...'
건흥은 자신과 관련된 책을 집필하는 것을 허가했고 검열은 모두 교육부에 위임한 상태였다. 그래서 내용을 읽어보진 않았었는데 막상 책의 실물을 보니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까 궁금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 건국 역사
인기 서적 1위에 빛나는 제국 건국 역사를 꺼내든 건흥은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1635년
황제 폐하께서 뉴암스테르담에 도착하시어 바스텐을 만나셨다. 그에게 백성이 될 것을 명령하셨고 바스텐은 이에 총을 쏘며 저항했다. 허나 전능하신 황제 폐하께 그들의 총탄이 효용 없음은 당연한 이치였고 폐하께서는 바스텐을 용서하고 휘하로 받아들이니 이것이 미국의 첫 걸음인 뉴암스테르담 조우이다.
이어서 황제 폐하는 뉴잉글랜드로 향하시어 그들에게도 복종을 명령하셨으나, 그들 역시 저항한다. 이에 폐하는....
'이야... 생각보다 굉장히 자세한데?'
책 내용은 사실에 입각해서 정확하게 쓰여져 있었다. 물론 건흥이 마법을 사용한 부분의 묘사는 아무래도 부족하긴 했지만, 미국에 도착한 이후부터의 건흥의 행적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온전히 찬양적인 어조로 적힌 책이었기에 건흥의 행동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논란이 될 수 있는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사지를 잘라 엄벌을 내린 경우들은 아주 간략하게 다루거나 생략되어 있었다.
'무슨 종교의 경전 같군'
역사책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어찌 보면 약간 성경처럼 적혀진 책을 읽으며 이 책을 집필한 학자가 건흥을 신성시 하려고 하거나 이미 마음속으로 신격화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자 서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서기진
책을 어느 정도 읽다가 건흥은 맨 뒷페이지를 펼쳐 저자를 살폈다. 그는 서울대학교에 새로 생긴 역사학과의 교수였다. 아무래도 이 책을 논문 삼아 교수 시험에 합격한 것 같았다.
제국 건국 역사를 내려 놓고 그 옆의 다른 책들도 살펴보았다. 다른 책을 읽어가는 건흥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이건 우상화 수준이 아주...'
제국 건국 역사는 폭 넓게 조사하여 사실에 입각한 책이었다면 나머지는 완전 소설이었다. 특히 황제 폐하의 가르침 모음은 저자의 상상력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는 듯 했다.
건흥이 한 적 없는 인도주의적 발언들이 잔뜩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 책을 읽은 사람이 느끼기에 건흥이 완전 성인처럼 느껴질 수 밖에 없도록 서술 되어 있었다.
'이건 출판 금지 해야겠어'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 질 정도로 우상화 수준이 쎈 일부 책들은 교육부에 조치를 취하도록 연락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흥은 역사 코너를 떠나 과학 서적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뉴턴
전기란 무엇인가?
발전기의 원리
하위언
증기기관과 동력
기계론
과학 서적에는 학자별로 정리되어 있었는데 뉴턴의 서적이 가장 메인에 위치해 있었고, 하위언의 서적이 뒤를 잇고 있었다.
많은 대학생들이 그들의 서적을 새로 구입하고 있었는데, 제국의 두뇌는 모두 이과로 가고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해 줫다.
"과학 서적이 인기 인가 봅니다?"
건흥은 열심히 책을 고르고 있는 학생 한 명에게 넌지시 말을 걸어봤다. 그는 책을 고르다 갑자기 말을 거는 건흥에게 당황했지만 웃는 표정으로 대답해 줬다.
"다들 황제 폐하의 과제를 해결해 부자가 되고 싶어 하니까요"
"과제 해결에 이 책들이 도움이 됩니까?"
"기본 소양이지요..... 요즘에 증기기관과 전기를 모르고는 창업도 힘들고 취직도 힘듭니다"
"내용이 어렵지는 않습니까?"
"쉽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노력해야지요... 그럼 저는 이만"
건흥과 대화를 조금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였던 학생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마무리하고는 다른 쪽으로 이동했다.
그를 보내 주고 나서 건흥은 좀 더 서점을 둘러보다 밖으로 나왔다. 슬슬 배가 고파질 시간이 되어 식당을 찾던 건흥은 이탈리아 스타일의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파스타를 한 접시 시켜 먹었다.
중남미에서 들어오는 작물들은 백악관 뿐만 아니라 서울에 일반 식당에도 공급되었기에 음식의 다양성이 크게 늘어나 있는 상태였다. 특히 향신료 부분에서 공급이 크게 개선되어 식사의 질이 전보다 높아졌다.
덕분에 만족스럽게 식사를 한 건흥은 값을 치르고 다시 대학로로 나왔다.
'서기진이라고 했었지?'
건흥은 자신과 미국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역사책을 서술한 학자를 만나볼 생각이었다. 서울 대학교로 천천히 걸어가던 그의 눈에 전구의 발명으로 인해 밤에도 불이 켜져 환한 대학교의 모습이 보였다.
대학 이정표를 확인하여 역사학과의 위치를 파악한 건흥은 아직 불이 켜져 있는 서기진 교수의 연구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서기진의 대답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건흥은 40대 내외로 보이는 서기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서기진의 눈에 비친 건흥은 완전한 청년의 모습이었기에 그는 건흥이 당연 자신을 찾아온 학생이라 생각하고 말을 편하게 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이야기를 하려면 본 모습을 보여야 하겠지..."
건흥은 그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서 폴리모프를 풀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서기진이 깜짝 놀라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화...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서라. 오체투지 인사는 금지인 것을 모르나?"
"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앉아라. 이야기를 좀 나눠보려고 왔다"
"예. 폐하"
건흥은 그를 응접용 소파에 앉히고 자신은 연구실을 둘러봤다. 그의 연구실에는 건흥이 제국에서 살아온 수많은 흔적들이 역사 사료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거... 완전 스토커 수준이네'
그는 건흥의 일거수일투족을 수집하고 연구하고 있었다. 제국 곳곳을 직접 발로 뛰며 건흥의 흔적을 찾아 기록했고, 건흥과 대화해본 자들을 섭외해 간접적으로 건흥의 말과 행동을 수집했다.
"나에 대해 책을 썼더군"
"그...그게... 교육부에서 허가를 받아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궁금해서 물어 보는 것이야"
"예. 폐하"
"왜 나에 대해서 연구하게 되었는가?"
"폐하를 처음 본 순간부터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본 적이 있나?"
"저의 아버지는 신림의 백정으로 일했습니다. 지금도 정육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삼십년도 더 전의 일입니다만.... 제 아버지가 신림의 유생에게 협박 당하고 집을 빼앗기려 했을 때 폐하께서 그를 벌하시고 아버지를 지켜주셨습니다..."
"으으음... 기억이 난다. 헌데 그 때 아비를 부르며 뛰어 나왔던 것은 여자아이였는데?"
"제 누이동생입니다. 창피한 말이지만.... 저는 그때 너무 무서워 어머니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건흥은 그가 말하는 이야기가 기억이 났다. 건국 초기에 조선에서의 신분을 이용해 세력을 규합하고 약한 자들을 핍박했던 유생들이 종종 있었다.
그 때 유생들을 잡아서 사지를 자르고 본보기로 삼았었는데, 그 모습을 본 아이 중 한 명이 서기진이었다.
"네 아비를 구해준 일 때문에 나에 대해 호기심이 생긴 것이냐?"
"물론 그것 또한 있지만... 폐하가 만드신 이 나라의 은혜로움과 백성들의 삶이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폐하의 업적을 낱낱이 기록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낱낱이 기록하는 점이 없지 않아 있어"
건흥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데 사학자로서 그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죄...죄송합니다.."
"농담이다. 신경 쓰지마라.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를 직접 대면하게 되었으니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마"
"저..정말로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마음 변하기 전에 하도록 해. 나는 변덕이 많은 사람이니까"
"옛! 폐하.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질문 시간을 준다는 말에 서기진은 잔뜩 흥분하여 연구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는 종이와 펜을 찾는 것과 동시에 평소 건흥에 대하여 연구하다 막히는 부분을 적어 뒀던 수첩을 용케 찾아 가지고 왔다.
"첫 질문 드리겠습니다. 폐하"
"그래"
"폐하는 종종 공간을 넘나드는 문을 만드시는 데 그 능력은 무엇입니까?"
"마법이다."
"마법이 무엇입니까?"
"자연의 힘을 변형해서 쓰는 방법을 총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간을 넘나드는 문을 만드는 것이 자연의 힘을 빌려 이뤄지는 것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그런데 마법 이야기는 역사책에 기록하지 마라. 점차 음지로 스며들어 가야할 힘이다. 공개 되어서 좋을 게 없다."
"아...알겠습니다. 대외비로 하겠습니다. 그럼 마법은 넘어가고 다음 질문 드리겠습니다"
"그래"
"폐하께선 미국을 건국하시면서 공용어로 미국어를 지정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미국어라는 것이 조선어와 상당히 유사한데 혹시 미국어와 조선어가 어떤 관계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미국어는 먼 미래의 조선어라고 보면 된다."
"미래...말씀이십니까?"
"후우... 그래...."
서기진의 질문을 받고 있는 건흥은 괜한 짓을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물어보는 내용들은 여지껏 주변의 참고 그 누구 하나 물은 적이 없었던 내용이었다.
건흥은 주변의 부하들에게 멋대로 행동하는 폭군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정한 군주도 아니었다. 워낙 가진 바 능력이 뛰어나고 한번 벌을 내리면 치를 떨리는 잔인함을 보여주는 그였기에 부하들이 알아서 곤란한 질문을 눈치껏 피했던 것이다.
그런데 서기진은 순수한 학자의 호기심으로 건흥이 곤란할 수 있는 질문들을 연달아 이어갔다.
"미국어는 그정도로 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
"예. 폐하. 그렇다면 조선과 명, 일본에서 많은 백성들을 친히 데리고 오셨는데 그 중 조선인을 특별하게 많은 숫자를 데려오시게 된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흐으음...."
건흥은 서기진에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잠시 고민이 되었다. 본인이 미래의 한국이라는 한반도 국가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이야기 할까 싶다가 그것은 좀 아니다 싶어 대충 둘러댈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세나라의 백성들 중에 조선인들이 가장 고통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란과 호란으로 삶이 피폐한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아! 역시..."
건흥이 대충 둘러댄 변명에 서기진은 깊이 감동하며 그의 말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이후에도 건흥을 곤란하게 하는 서기진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과학에 조예가 깊은 이유는 무엇인지? 삼십년이 지났지만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는 능력도 마법인지 등의 질문이었다.
건흥은 그런 그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대충 둘러대기만 했다. 그러나 서기진은 그것 만으로도 크게 만족하며 연신 펜을 움직여 건흥의 답변을 받아 적었다.
'이거 왠지 불안한데?'
지식을 갈구하는 그의 순수함에 휘말려 굳이 알려질 필요가 없는 내용까지 많이 말해버렸다 생각한 건흥은 서기진에게 오늘 질문 답변한 내용은 모두 대외비로 하라고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백성들이 굳이 알 필요가 없는 내용들도 분명 있다는 것을 저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폐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언젠가 모두 알려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렇게 질문 답변 시간이 끝나고 건흥은 서기진을 격려하며 연구실을 떠났다. 건흥이 떠난 이후 서기진은 떨리는 손으로 방금 기록한 답변의 내용들을 살폈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어'
서기진은 건흥을 연구하며 그가 이 땅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라는 가설을 세웠다. 터무니 없을 수도 있지만 옛날 신화의 내용들처럼 그가 다른 차원에서 넘어 왔을 것이란 내용이었다.
오늘 그가 물었던 내용들은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는데 필요한 증거들이었다. 건흥이 답변을 두루뭉술하게 하거나 말을 돌리는 것들이 많았지만, 그것 또한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 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건 정말 대외비다. 내가 무덤까지 안고 갈 비밀이야'
그는 자신의 수첩을 연구실 책상 깊숙한 곳에 넣었다. 오늘의 대담은 자신의 가설이 맞았다는 기쁨으로 끝나야 했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황제 폐하의 형벌이 떨어 질 것이 분명했다.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