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美國) (4)
버지니아에서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기 위해 인근 숲을 벌목하고 대량의 목재를 준비했다. 해골병사만으로 다 해결할 수 없는 작업이 있었기에 나는 서울에서 학교 건설을 하고 있던 로빈 휘하의 목수들을 데려왔다.
서울에서 버지니아까지 게이트로 이동했기에 순식간에 목수들이 도착했고 그들의 원활한 작업을 위해 바람의 칼날을 몇 개 소환해준 다음 로빈에게 작업 지시를 하고 자리를 떴다.
새로운 마을은 버지니아 개척촌 바로 옆에 지어질 예정이었고 벌목된 숲 부지에 목화밭을 만들 계획이었다.
게이트를 통해 좌표를 찍어 뒀던 한양에 도착한 나는 하늘로 솟아 올라 남부지방을 향해 날아갔다. 소백산맥을 넘는 뒤 부터는 탐지 마법을 통해 넓은 반경을 탐색하며 이동했다.
충청도와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목화밭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가 먼 시야로 바다가 보이는 경상남도까지 내려오자 비로소 목화밭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지리산 산 줄기가 시작되는 경상남도 함양 부근이었다.
목화밭의 넓이는 제법 넓었다. 천천히 목화밭을 둘러보던 나는 아까부터 소란스러운 마을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곳에는 포졸들을 대동한 고을 현감이 백성들에게 공납을 받고 있었다.
"아이고! 인당 면포 30필이라니요 나으리! 그러면 저희는 굶어 죽습니다요"
"우는소리 하지 마라! 오랑캐들 때문에 전국적으로 피해가 많아, 전란의 화가 미치지 않았던 삼남 지방에서 더 많은 공물을 걷으라는 주상전하의 명이시다!"
"허나 저희 집에 갓난아기 까지 모두 계산하면 무려 240필입니다. 나으리. 저희는 그 정도의 면포를 생산할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허면 얼마나 납부할 수 있는가?"
"모든 역량을 동원해도 150필이 최대입니다"
"그럼 일단 150필을 납부하고 남은 90필은 가을에 납부하도록 해라"
"그러면... 가을에는 90필만 납부하면 되는 것이 옵니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원래 가을에 납부할 몫과 이번에 미뤄둔 몫까지 같이 납부해야 될 것이다"
"아이고... 나으리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이 손 놓아라!"
함양의 현감 박현천은 뇌물을 주고 벼슬을 산 자였다. 그는 현감으로 부임한 이 함양에서 본전을 뽑고 더 재물을 착복하여 더 좋은 벼슬로 이동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자였다.
'재물을 많이 쌓아 진주목 자리까지 노려봐야겠다'
그가 뇌물을 써서 함양으로 부임한 이유가 있었다. 함양은 고려시대 이래로 꾸준히 목화 재배가 이뤄지고 있는 곳이었기에 공납으로 면포를 걷었다.
두 번의 전란으로 중앙정부가 감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지금이 공납을 빙자하여 재산을 착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박현천은 이방을 데리고 직접 고을을 돌면서 공납을 직접 챙기고 있었다. 그가 백성들을 마주할 때마다 백성들의 입에선 곡소리가 들렸다.
"다음 집은 지난번 면포 공납 기일에도 하나도 내지 못했던 덕만이놈 집입니다."
"하나도 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이놈이 덩치가 좀 있다고 아주 그것만 믿고 허세가 대단한 놈입니다"
"허허.. 이런 몹쓸 놈을 보았나! 여봐라!"
"예. 수령어른"
"몸 좀 풀어야 할 것 같구나. 자신 있겠지?"
"물론입니다. 덕만이 놈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겠습니다"
현천이 데려온 포졸들은 그의 물음에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현천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착복하는 사내이면서 겁이 많은 자였기에 주위에 인물들에게는 적당히 베풀 면서 충성심을 유지했다.
항상 포졸들과 이방에게 섭섭지 않게 챙겨주는 현천이었기에 지금 몰려다니는 무리는 모두 뜻이 잘 통하는 한통속이었다.
"이리 오너라!"
이방이 크게 소리치자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서 덩치가 좋은 사내 덕만이 나왔다. 덕만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오셨습니까 수령어르신"
"오냐 이놈아. 듣자 하니 네 놈이 주상전하가 명하신 공납을 차일 피일 미루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허어... 이놈이 아주 당당하구나!"
"어머니의 병환이 심각하여 약을 타는데 전 재산을 털어 넣었습니다. 소인의 딱한 사정을 한....."
-찰싹!
덕만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현천이 그의 싸대기를 시원하게 후려 갈겼다.
"네 하찮은 어미의 목숨보다! 주상전하의 명이 훨씬 더 중한 것이거늘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 놓느냐! 여봐라! 이놈이 정신 번쩍 들게끔 해주어라!"
"예!"
포졸들은 허리에 차고 있던 몽둥이를 꺼내 들었다. 그 때 덕만은 뒤로 펄쩍 뛰며 포졸들과 거리를 벌린 뒤,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이!이이이! 이놈! 본색을 드러내는 구나!"
순순히 머리를 숙이지 않고 싸워 보겠다는 자세를 취한 덕만에게 현천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 놈이 병신이 되어도 좋으니 단단히 혼을 내 주거라!"
"예!"
현천의 명이 끝나자 마자 포졸들이 벼락처럼 달려들어 덕만을 공격했다. 그러나 포졸들의 방망이는 덕만에게 제대로 적중되지 못하고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덕만이 모두 민첩하게 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뒤로 물러서며 좁은 지역으로 들어간 덕만이기에 두 명 정도만 덕만과 마주할 수 있었고 나머지 포졸들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어이쿠!"
덕만의 솥뚜껑 같은 주먹이 포졸의 얼굴에 정확하게 들어가며 그의 코뼈가 박살나고 이빨이 몇 개 부러져 하늘로 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방망이가 덕만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덕만이 고개를 숙여 피하며 방망으를 휘두른 사내의 턱을 힘차게 후려쳤다.
"크억!"
턱을 맞은 사내는 혀를 깨물었는지 입에서 피가 철철 흘렀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덕만이 그의 몽둥이를 뺏어 들고는 머리통을 힘껏 후려쳤다.
-빠각!
머리통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리며 포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덕만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포졸들이 쉽게 덤벼들지 못했다. 서로 대치한 상황에서 눈치만 보기 시작하자 현천은 화가나 크게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다들 옥에 들어가고 싶은 게냐! 이방! 어서 관에가서 포졸들을 모두 이끌고 와라!"
"예! 어르신"
현천은 포졸들을 압박하는 것과 동시에 이방을 시켜 지원병력을 부르게 했다.
'이야 타고난 싸움꾼이구나'
몸을 숨기고 구경을 하고 있던 나는 박진감 넘치는 싸움 구경에 신이 났다. 격투기 시합을 1열에서 보는 기분이 이럴까 싶었다.
이후 몽둥이를 휘두르는 덕만에게 포졸들은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얻어 터지고 있었다. 그러나 포졸들도 나름 생각이 있는지 한꺼번에 덤벼들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며 시간을 벌고 있었다.
"어르신! 제가 왔습니다"
그 사이 지원 병력을 데리러 간 이방이 포졸들을 잔뜩 몰고 왔다. 이번에 도착한 포졸들은 그물과 장창을 가지고 왔다.
'이야... 이러면 쉽지 않겠어'
내 예상은 정확했다. 포졸들을 장창을 들이밀며 덕만의 접근 공격을 막은 뒤 연신 그물을 던졌다. 덕만이 온 힘을 다해 저항하기는 했지만 결국 포졸들에게 제압 당하고 몽둥이로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이런! 육시럴놈!"
포졸들은 아주 제대로 분풀이를 할 요량으로 이미 제압된 덕만을 개패듯 패고 있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고을 전체에 울려 펴졌고 온 마을 사람들이 덕만의 집 앞에 모여들었다.
"그만 좀 하십시오! 정말 사람을 죽일 생각이십니까!"
덕만의 동년배인 을석이는 사내가 과감하게 앞으로 나서며 현감에게 소리쳤다. 을석도 참을 만큼 참아왔다가 폭발한 것이었다. 사실 함양의 모든 백성들은 현철을 향한 분노가 쌓일 만큼 쌓여 폭발 직전이었다.
덕만이나 을석같은 젊은이 뿐만 아니라 왜란을 겪었던 동네의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상전하라고 한들 왜란이 일어나니 도망가기 바빴을 뿐 결국 마을을 지키는건 백성들이었다.
도망이나 갈 줄 아는 임금의 자식이 지금의 임금인데 그는 얼마 전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오랑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는 것을 모르는 백성은 없었다. 때문에 낡아 빠진 충심을 들먹이며 참을 주민이 별로 없었다.
"뭐야? 여봐라! 저놈도 잡아 족쳐라!"
"그만 하십시오!"
을석도 패버리라고 말하는 순간, 단지 구경 온 줄 알았던 마을 사람들이 농기구나 몽둥이를 쥐어 들고 저항의 눈빛을 보내며 그만 하라고 소리쳤다.
'이.. 이놈들 봐라?'
현천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서 약간 진땀이 났다. 포졸들도 갑자기 주민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쉽게 달려들지 못하고 멈칫하였다.
"어르신... 고민 하지 마십시오 이럴 때일수록 과감하게 나가셔야 합니다. 기세에서 밀리면 끝장입니다요. 어차피 저놈들은 오합지졸이니 몇 놈만 본보기로 손보면 알아서 와해 될 겁니다"
고민하는 현천에게 이방이 귓속말로 조언했다. 듣고 보니 그러했다. 평생 목화 농사만 짓던 놈들이 싸울 능력이 있겠나 싶었다. 덕만 같은 별종들은 어차피 고을에 한두놈 뿐이었다.
거기다 기세에서 밀리면 안된다는 이방의 말이 설득력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고혈을 짜내야 하는데 여기서 물러서면 이도 저도 안될게 분명했다.
"한 명 제압 할 때마다 석 냥의 포상금을 주겠다!"
현천의 말이 포졸들의 귀에 들리는 순간 포졸들의 기세가 변했다. 역시 고금을 통틀어 돈 만한 것이 없었다.
"으아아압!"
포졸들과 마을 주민들이 부딪혔다. 주민들도 쉬이 물러나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장창도 있고 몽둥이도 있는 포졸들이 농기구로 싸우고 있는 주민들 보다 훨씬 우위였다.
"어이쿠!"
시간이 지날 수록 포졸들의 몽둥이에 머리를 얻어 맞는 주민들이 늘어났고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민들의 머리 속을 가득 채웠던 분노가 사그라들고 조금씩 두려움이 뻗치기 시작했다.
'장난질 좀 쳐 볼까?'
그 때 건흥이 마을 주민들에게 마법을 걸었다. 헤이스트와 스트랭스같은 버프계열 마법을 쏟아 부었다. 그로인해 느릿하고 힘겹게 움직이던 주민들의 움직임이 숙련된 무사처럼 민첩하고 강맹해졌다.
-깡!
마을 주민 한 명이 휘두른 호미에 장창이 절단 되어버리며 큰 금속음이 들렸다. 장창을 절단한 주민이나 휘두르던 장창이 절단된 포졸이나 모두 놀랐다.
'너도 가세 해야지!'
건흥은 두들겨 맞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덕만에게 최상위 치유마법과 각종 버프마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덕만의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고 혈색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몸에서 기운이 용솟음 치듯 솟아났다.
"이놈들!"
덕만은 자신이 이미 죽어서 귀신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들겨 맞아 정신을 잃어 버렸었는데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온몸이 깔끔하게 치료된 것은 물론이고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거대한 힘이 몸 안에서 들끓었기 때문이었다.
'저승사자가 날 위해 복수의 시간을 줬구나!'
덕만은 제 멋대로 생각하며 기회를 받은 김에 확실히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포졸들의 머리통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빠각!
덕만의 주먹이 휘둘러 질 때마다 포졸들의 머리가 터지며 뇌수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의 주먹이 어찌나 빠른지 휘두르는 모습을 제대로 보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으아아아! 뭣들 하느냐! 저놈을 막아라!"
현천은 좌측에는 성난 주민들, 우측에는 미친 덕만 사이에서 소리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포졸들의 숫자는 줄어 들었다.
뭔가에 씌인 듯한 주민들은 힘 조절을 하지 못하고 포졸들을 죽이고 있었고 덕만은 죽이다 못해 시체도 제대로 남기지 않을 만큼 다 터트려 버리고 있었다.
어느새 포졸들과 이방은 모두 죽어버렸고 도망치려고 열심히 달렸던 현천은 번개같이 달려온 덕만에게 머리통을 잡혔다. 덕만의 솥뚜껑 같은 손은 현천의 머리를 완전히 감싸쥐었다.
"으..... 덕만아 살려다오. 살려주면 모두 없던 일로 해주겠다."
"흥. 난 이미 죽었는데 그런 소리를 하면 뭐 하는가? 나와 같이 가자 개자식아!"
-빠삭!
덕만의 엄청난 힘에 현천의 머리가 폭죽 터지듯 터져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본 을석이 덕만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줬다.
"을석. 자네라도 도망쳐서 살아 남게나..."
"뭔 소리인가? 도망쳐도 함께 도망쳐야지"
".....!? 을석! 내가 보이는가?"
을석의 입장에서 황당한 덕만의 말에 을석이 약간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눈에 뵈는 게 없어서 현감을 죽이긴 했지만 자네는 잘 보인다네"
"이보게 덕만 괜찮은가?"
다른 주민들도 다가와 덕만의 상태를 걱정해 줬다. 그들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분명 덕만은 너무 두들겨 맞아 온몸이 찢어지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을 줄 알았는데 버젓이 살아 있었으니 말이다.
"모두 제가 보이십니까?"
"무슨 소리 하는 건가? 당연 보이고 말고. 자네가 현철의 머리를 박살 냈지 않은가?"
덕만은 그제서야 자신이 귀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인데 말이 되지 않았다.
"한바탕 신나게 다들 즐기셨나?"
건흥이 마을 주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웬 놈이냐!"
"웬 놈이냐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내가 자네들을 살렸는데 말이다"
건흥은 말을 하며 덕만을 쳐다봤다. 덕만은 그 눈빛을 받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자가 죽어가는 날 살렸다!'
덕만은 이유를 막론하고 건흥을 향해 오체투지 하며 큰 절을 올렸다. 허망하게 죽을 수도 있었으나 마지막 복수를 하게 해준 그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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