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 (1)
조선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인구 전반을 건흥에게 빼앗겼다. 조선군은 신출귀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인원과 재산을 징발하는 미군에게 저항할 능력도 안되었고 인조가 당한 이후에는 저항할 생각도 없었다.
무려 4백만에 이르는 대규모의 인구이동 결과 조선의 인구는 천만에서 6백만으로 줄어들었고 미국의 인구는 2백만에서 6백만으로 늘어났다.
공교롭게도 두 국가의 인구가 똑같아 졌는데 앞으로 크게 우상향 할 미국의 인구와 당분간 기근으로 인구성장이 지지부진 할 조선의 운명은 크게 달라질 예정이었다.
조선에서 넘어온 백성들은 기존의 도시에 2백만이 이주했고 새로 건설된 11개의 신도시에 나머지 2백만이 이주했다.
기존에 계획된 10개의 신도시 이외에 오대호 근처에서 철광을 비롯한 각종 자원을 채취중이던 곳을 더 확장하여 도시로 성장 시키고 그 땅을 원주라 명명했다.
새로 생긴 도시는 모두 남부에 세워졌는데 그 이름은 백성들이 징발 된 조선 도시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현대 미국의 텍사스 지역에 세워진 대구, 통영, 부산, 충주와 뉴올리언스 지역에 세워진 목포와 군산을 지나 동쪽으로 보령, 진해가 세워졌고 동남부 내륙에 청주와 상주를 추가로 건설했다.
도시들이 모두 남부에 배치된 까닭은 농업 중심의 경제 때문이었다. 경작이 가능한 데 놀고 있는 땅이 남부에 많이 있었고 그곳에서 최대의 산출을 해낼 계획이었다. 그리고 추후에 북부는 공업과 상업 중심지로 키워갈 계획이었다.
새로 건설된 도시에는 기존 도시에서 차출 된 치안부 인원들이 배치되었다. 특히 서울 치안부는 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인원이 신도시로 이동했다.
그럼에도 인력이 부족하여 건흥은 어쩔 수 없이 군을 투입했다. 군대는 계획된 구역에 계획된 인원을 배치하고, 그들을 일터로 이동 시키고 복귀시켰다.
서울에 비료 공장 건설이 완료되어 본격적으로 비료를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비료 공장 노동자들은 철저히 분업화 되어 자신이 맡은 부분의 기계 조작만을 수행했다. 건흥은 지은 공장의 규모는 어마어마 했기에 생산되는 비료의 양도 매우 많았다.
그러다 보니 공장에서 항구까지 운반하는 것도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했는데 그 임무는 모두 해골 병사들이 담당했다. 해골병사는 비료공장과 서울항의 정해진 길을 왕복하며 잠시도 쉬지 않고 짐을 운반했다.
* * *
"너희들은 모두 번호로 관리될 것이다! 자신의 관리번호를 숙지하고 절대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남부의 신도시 부산의 공동 숙소에서 치안부관리 헉슬이가 조선인들을 모아 두고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신분과 처우에 대하여 설명하고 앞으로 생활하게 될 모든 것을 숙지시키는 자리였다.
헉슬이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인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함양으로 명명된 버지니아 개척촌 출신이었고 원래 이름은 헉슬리였다. 미국어 중급 시험에 통과하면서 이름을 헉슬이로 개명했고 치안부 관리로 등용되었다.
"지금부터 번호를 부여 하겠다! 일렬로 줄을 서라!"
헉슬이의 명이 떨어지자 미군들이 노예들을 한 줄로 세웠다. 그들은 헉슬이와 가벼운 대화를 나눈 뒤, 나무로 만들어진 번호패를 지급 받았다.
번호패는 아라비아 숫자를 아직 모르는 조선인들을 위해 한자로 숫자가 적혀있었다. 그럼에도 수를 읽지 못하는 자들도 꽤 있어서 헉슬이가 한명 한명 번호를 불러주며 각인시켰다.
"삼일구사번이라..."
동래에서 농사를 짓던 칠석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이곳에서 이틀밤을 보냈다. 이틀 동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밥 먹고 대기, 또 밥 먹고 대기의 반복이었다.
그들의 행동은 모두 치안부라고 하는 자들이 관리했는데 자신처럼 조선인 출신인 자들이 반, 키가 크고 눈에 색이 있는 자들이 반이었다.
칠석은 손에 들린 번호판을 만지며 앞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함께 이곳으로 끌려온 마누라와 자식들이 아직 번호패을 받지 않고 대기중이었다.
"아부지!"
번호패을 받은 아들과 딸이 칠석에게 달려왔다. 그의 아들은 7세 딸은 5세였다. 아직 제 앞가림을 하긴 한참 먼 자식들이라 걱정이 많이 되었다.
"이거 받았어요"
"어디 보자"
다-五四七
아들이 내민 번호패을 살펴보니 자신과는 다르게 번호 앞에 언문이 적혀져 있었다. 무엇 때문에 번호패에 숫자가 아닌 글자가 더 추가되었는지 몰랐기에 칠석은 문득 불안해졌다.
"네 것도 줘 봐라"
"예. 아부지"
다-五四八
칠석은 다섯살 딸의 번호패도 살펴봤는데 자신의 아들의 것에서 숫자만 하나 올라가 있었다.
"서방님!"
딸의 번호패을 보고 있던 칠석에게 아내가 달려왔다.
"번호패 받은 거 줘봐"
칠석은 아내의 손에서 번호패을 빼앗듯이 받아 들고 살펴봤다.
나-二六四一
마누라의 번호패에는 2641이라는 숫자 앞에 '나'가 붙어있었다.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은 자신과 아내, 아이들은 모두 다 다른 글자가 있었다.
'혹시...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는 것인가?'
칠석은 불안감을 느꼈다. 마누라와 떨어지는 것도 싫었지만 아이들이 더 걱정이었다. 아직 부모와 떨어지기엔 아이들은 너무 어렸다.
"저기... 나으리"
결국 칠석이 용기를 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미군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마 자신들과 외모가 비슷한 조선인 출신의 미군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는 말해보라는 느낌으로 턱짓을 했다.
"우린 이렇게 한가족이옵니다. 헌데 방금 받아온 번호판에 언문... 아니 아니 미국어가 다르게 적혀 있어서... 혹시 저희가 떨어지게 되는 건지...."
"걱정하지 마라 숫자 앞에 글자는 노동 분류다"
"노동 분류... 가 무엇인지..."
"번호패 배부가 끝나면 치안대장님께서 다 알려주실 것이니 조급해 하지 말고 기다려라"
미군은 걱정 말라는 듯 칠석의 어깨를 툭툭치며 무리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칠석은 불안했지만 그를 믿어 보는 수 밖에 없었다.
공용숙소를 함께 쓰는 사람들의 번호패 배부가 끝나고 헉슬이가 다시 연단에 올라섰다.
"번호패를 받으며 알았겠지만, 숫자만 있는 자가 있고 미국어 가,나,다가 적혀 있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먼저 미국어 가가 번호 앞에 붙은 자들은 지금 앞으로 나와 서라!"
헉슬이의 말에 소수의 인원이 앞으로 나갔다. 분류 기호 가는 기술보유자였다. 목수, 도공등 기술을 가진 장인들과 관직에 있던 자들, 셈이 밝은 자들을 따로 모은 것이다.
"이 인원들을 인솔하여 검증하라!"
"예. 알겠습니다"
그들은 번호패를 받기 전 헉슬이와의 대화에서 밝힌 자신의 직업에 따른 능력을 검증 받아야 했다.
예를 들어 한 노예가 도공으로 능력을 인정받으면 바로 그의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동해 도자기 공방에 일을 하게 되었다.
물론 미국어 중급을 익혀야 되고,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없는 노예인 건 변하지 않았지만 공동숙소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고 개인 숙소를 지급 받을 수 있었기에 훨씬 나았다.
"다음은 번호패에 미국어 나가 붙은 인원들 나오거라!"
분류 기호 나는 숙소 내부 노동자였다. 숙소 인원들의 식사, 세탁, 청소를 담당하며 아이들을 양육하는 역할까지 맡게 될 예정이었다.
"지...지금 가야 되나 봐요"
"일단 가 보시오.... 군졸들이 별일 없을 것이라 했소"
칠석의 아내도 분류 기호 나 이었기에 앞으로 나가 줄을 섰다. 그들도 따로 이동하여 식사 담당, 세탁 담당, 청소 담당, 양육 담당등을 정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미국어 다 붙은 아이들! 나오거라. 아이들은 글을 아예 모르니 주변에서 알려주도록 해라!"
분류 기호 다는 노동이 불가능한 소년, 소녀들 이었다. 그들은 분류 기호 나의 인원들의 손에 보살핌 받는 것과 동시에 다른 인원들이 노동을 하고 있을 때 학교에서 학습을 하게 될 예정이었다.
칠석의 아들 딸도 앞으로 나갔다. 그들은 일단 분류 기호 나의 업무가 끝나면 처리될 예정이었기에 인솔자를 따라 이동한 뒤 대기했다.
"지금 남아있는 너희들은 모두 일반 노동자다! 모두 국가 소유의 논과 밭, 목장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번호는 앞으로 나와라! 1에서 999까지 인원!"
칠석을 비롯해 남아있는 자들은 모두 일반 노동자였다. 그들은 건흥과 로빈이 건설해둔 농경지와 목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
칠석을 포함한 3000번에서 3500번까지 인원들은 벼농사를 짓는 노동이 할당되었다.
"너희들이 일 할 곳까지 안내하겠다"
미군의 인솔에 따라 칠석은 논으로 이동했다. 공용숙소에서 논까지는 걸어서 40분이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대...대단하구나...!'
건흥이 이동하는 길에 보고 있는 광경은 대단했다.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끝없는 평지의 땅에 논이 들어서 있었다. 멀리서 다른 무리의 인원들이 이동 중인 것이 보였는데 그들은 또 다른 공용숙소에서 논으로 이동 중인 인원들이었다.
부산에만 칠석이 머무르고 있는 것과 같은 규모의 공용숙소가 수백개는 넘게 있었다. 숙소는 농경지의 배치에 따라 넓게 펼쳐져 있었다.
"도착했다. 바로 이곳이 너희들에게 할당된 논이다"
"어디부터...어디까지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금 눈에 보이는 곳 전부다"
미군의 말에 노예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논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는데 그곳이 다 자신들이 작업해야 할 장소였다.
"자 오늘은 잡초를 제거한다! 그리고 오후에는 모판을 관리 할 것이다"
벼농사는 도시 단위로 계획되어 있는 스케줄을 따라 진행되었다. 칠석이 오늘 오전에 할 일은 넓은 범위의 논에 잡초를 제거하는 것 이었다. 조만간 논에 물을 채울 예정이었고 그 전에 정리 작업을 하는 것 이었다.
점심은 따로 제공 되지 않았고 오후까지 작업은 계속 이어졌다. 작렬하는 태양에도 임의로 작업을 쉬지 못하는 고달픈 노예의 삶 이었다.
"전원 복귀한다!"
몸에 기력이 다 빠질 정도로 작업한 이후 그들은 공용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오후였다. 딱 죽기 직전까지 일을 시키는 듯 했다.
"오오... 냄새가..."
"이야...."
숙소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고소한 음식 냄새가 노예들의 코를 찔렀다. 그들은 일렬로 서서 식당 건물에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노동 분류 나였던 아녀자들이 엄청난 양의 밥과 국을 끓이고 노예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부지!"
칠석은 자신을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미 수북한 밥과 따뜻한 국을 받은 아들이 딸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칠석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밥을 이렇게 챙겨주는 모습을 보니 이곳이 걱정했던 만큼 나쁜 곳은 아닌 것 같았다.
"줄을 서서 배급을 받아라!"
"밥은 넉넉하게 줘도 괜찮다!"
미군은 통제를 하고 있었고 배식은 아녀자들이 하고 있었다. 아녀자들은 장정들이 밥을 달라는 대로 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미군들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서방님!"
"오오! 별일 없었지?"
"그냥 밥을 계속 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밥을 나눠주라고... 자!"
칠석은 배식을 하고 있는 자신의 마누라와 마주쳤다. 그녀는 칠석을 보자 밥을 세네 주걱 크게 퍼 주었다. 자기 남편을 챙기는 마음이었다.
"이... 이렇게 많이 받아도 괜찮은가...?"
"아무 소리 안하더라구요... 그리고 쌀이 엄청나게 많았어요 걱정 말고 많이 드셔요"
"너는 밥 먹었는가?"
"우린 배식 시작하기 전에 먼저 먹었어요"
"많이 먹었지?"
"야 빨리 빨리 안 움직이고 뭐해!"
반가운 마음에 마누라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칠석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칠석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얼른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래... 차라리 이곳이 훨씬 낫다!'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지만 이곳에는 밥을 많이 먹을 수 있었다.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던 동래성에서의 삶보다 나은 것 같기도 했다. 밥과 국, 간단한 찬을 받은 칠석은 잰걸음으로 이동해 아이들 근처로 갔다.
"아부지!"
"밥 먹자"
칠석은 수저로 밥을 크게 떠서 입에 밀어 넣었다. 잘 지어진 뜨끈한 밥은 정말 꿀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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