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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회귀자를 대신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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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작품등록일 :
2023.06.22 21:46
최근연재일 :
2023.08.03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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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3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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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별바라기 (10)

DUMMY

미겔 마르티네스의 말과 함께 잠시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는 싸늘해졌고, 은근한 적의가 대기실을 메웠다.


나는 미겔의 눈을 마주 봤다. 그의 눈에선 자본가와 권력자에 대한 혐오가 지독하게 묻어 있었다.


정적을 깨기 위해 나는 입을 열었다.


“계약서는 읽어보셨습니까.”


나는 근로계약서를 일부러 흘끗 쳐다본 뒤 말을 이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없을 텐데요. 보수도 적지 않게 지급할 예정이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건의하시면 됩니다.”


급여라면 이미 넉넉하게 주고 있었다. 웬만한 의사나 변호사 수준 이상의 급여를 신용화폐로 지급하고 있었고, 현재 방주도시 내의 물품 가격은 대부분 할인 중이거나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로봇을 대여하는 비용마저 직원 할인을 적용하면 헐값이니, 회사에서 제공하는 혜택은 적지 않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읽어는 봤지. 대충이지만.”


미겔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애초에 우리한테 거부할 권리는 주고 물어보는 건지 궁금해서 말이야. 당신네들이 잘 하는 거잖아. 거절할 수 없는 선택지로 몰아넣는 거.”


“거부권이라...”


말을 끝낸 뒤.


나는 그가 에밀리의 계약까지 말린 의도를 이해했다.


그는 뒤늦게 깨어난 후발주자로서, 먼저 깨어난 우리가 무슨 수작을 부려둔 건 아닐지 의심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의심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지적 우위로 후발주자를 털어먹는 건 기득권이 즐겨 하던 짓이었으니까.


이런 방식을 가장 즐겨 쓰던 인물이 바로 ‘회귀자’였음을 떠올리며, 나는 두 사람의 계약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계약서는 쓰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응?”


“네?”


미겔과 에밀리가 의아해했고, 체리 역시 정말 그래도 되냐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들의 의문에 답하기 위해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은 의심을 푸는 게 먼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들 각성할 때 아르고 클럽의 약관에는 동의하셨으니까요. 도시에 도움 되는 방식으로 일을 할 의향이 있다면, 굳이 회사에 입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들 할 수 있는 일이 다르고, 하고 싶은 일도 다를 테니까요. 이를 강제할 순 없죠.”


미겔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고, 에밀리는 혼란스러운 듯했다.


“물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건 곤란할 겁니다.”


나는 차분한 태도로 두 사람을 훑어봤다.


“세상은 여전히 위태롭고,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일을 하는데, 게으르게 쉬기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는 거니까요. 마땅한 비전이 있어서 그런 거면 몰라도... 아무 계획도 대안도 없이 쉬고만 있는 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겠죠.”


나는 미겔을 마주 보았다.


당신에게는 더 나은 대안이 있는가. 당신이 지금 하는 행동이 ‘반대를 위한 반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에겐 우리와 힘을 합치지 않고도 제 몫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과 능력이 있는가.


나는 말 없이 질문을 건넸고, 미겔은 내 눈을 슬쩍 피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보상이 적진 않을 거예요.”


체리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선 두 분을 깨우기 위해 이상체와 협상했고, 황금 22000파운드를 담보로 내놓으셨거든요. 여차하면 그대로 순금 22000파운드가 그 괴물 손에 넘어갈 뻔했죠.”


“뭐?”


“네?”


두 사람의 눈이 커졌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빚을 지울 생각도 없고, 갚으라고 할 생각도 없으니까요.”


“아니... 당신 제정신이야?”


미겔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괴물이랑 거래하려고 한 것도 웃긴 데, 황금 22000파운드? 그렇게 큰돈을 마음대로 써도 돼?”


“네. 지금은 제가 이 도시의 총책임자니까요.”


그 말을 시작으로 나는 당연한 말들을 읊었다.


“귀금속도 일단 인구가 충분히 늘어나야 가치를 지니는 거니까요. 지금 당장은 쓸모가 없는 물품을 담보로 걸어서 동료의 숫자를 늘릴 수 있다면, 황금 10톤 정도는 얼마든지 써야죠.”


미겔과 에밀리는 내 말에 할 말을 잃은 듯 눈을 깜빡거렸다.


체리는 그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키득거렸고, 나 역시 이제 막 깨어난 22세기 친구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22세기의 경제관념으로 27세기의 경제상식을 이해하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각성자 한 명이 황금 10톤보다 귀한 시대에 살고 있었다.


“체리 씨가 말했던 것처럼, 사업이 끝나고 나면 보상은 넉넉하게 해 드릴 생각이에요.”


나는 그들을 향해 나의 이상을 더 구체적으로 풀어놓았다.


“풍족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경제적인 지원을 해 드릴 거고,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제 힘이 닿는 선에서 도와드릴 거라 약속할 수 있어요.”


회장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나는 진심을 담아 그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전쟁이 끝나고 버려지는 참전용사들 얘기 같은 건. 그런 이야기는 역사 속으로 묻어둬야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미겔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듯이 의심을 끈을 놓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눈에 담겨있던 적의는 한결 누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저는... 서명할게요...”


에밀리가 정적을 깨며 펜을 움직였다.


“아직 뭐가 뭔진 잘 모르겠고... 어떻게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짐이 되고 싶진 않아요.”


그녀는 서명을 끝낸 뒤 계약서를 내게 건넸고, 나는 이를 조심스럽게 받아 서류철에 넣으며 미겔에게 말했다.


“서명은 천천히 하셔도 돼요. 지금 당장 계약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충고를 덧붙였다.


“서명보다 중요한 건 계약을 이행하려는 의지니까요. 부디 신중히 결정해주시길 바랄게요.”


“...그 황금 말인데.”


미겔은 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직접 구경할 수 있을까? 달라는 건 아니고. 진짜 그런 거래를 하려고 한 건지 궁금해서.”


그 말에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어려울 것 없는 일이기도 했고, 거의 다 넘어왔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물론이죠. 안 그래도 조만간 회수 작전을 하려고 했는데, 그때 같이 가시죠.”


나는 두 사람에게 악수를 청했다.


한 사람은 사원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아직이었지만, 모두 에리두의 새로운 주민이라는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에리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회장이 아닌 이웃으로서 청한 악수에 두 사람은 흔쾌히 응했다.


썩 괜찮은 시작이었다.





*****




대기실에서 나온 나는 체리와 함께 두 사람에게 기본적인 생활 규칙을 안내했다.


숙소의 배정. 신용화폐의 사용법. 훈련실의 이용법. 자료실의 위치와 단말기로 이를 검색하는 법까지.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한 이후에는 식당으로 동료들을 불러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게 했고, 조금 뒤에 있을 저녁 식사 시간에는 조촐하게나마 만찬을 차려 신입 환영회를 열 예정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정말 괜찮겠어요?”


오래간만에 등장한 뉴페이스에 다들 들떠있을 때, 체리가 내 옆자리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미겔 씨의 계약. 만에 하나라도 하지 않겠다고 하면 문제가 될 수도 있잖아요. 아무리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일을 하겠다고 해도, 지휘체계에 혼란을 줄 수도 있는 거고요.”


나는 동료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모습을 바라봤다. 미겔의 특이한 외형에도 불구하고 다들 거리낌 없이 그에게 말을 걸었고, 자신이 블루 등급이라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는 에밀리의 말에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회귀자의 기억과는 다른, 화기애애하기까지 한 풍경이었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저 사람은 억지로 목줄을 채워봐야 역효과거든요.”


나는 기억을 되짚어 미겔 마르티네스의 과거를 떠올렸다.


유진이 회장이었던 세계에서 미겔은 걸어 다니는 폭탄 취급이었다.


언제든 방화충동에 중독돼 에리두를 전부 태워버릴 수도 있는 시한폭탄.


어느 세계에서든 미겔은 아웃사이더였고, 본인 역시 그런 처지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처지를 은근히 즐기도록 당시에 회장이었던 유진이 유도했기 때문이었다.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법이라고.


마음먹기에 따라 도시 하나는 가볍게 태워버릴 수 있는 능력자를 누가 무시할 수 있겠냐고.


단 몇 마디의 말로 유진은 그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렸다.


실로 효율적인, 회귀자다운 조련법이었다.


나는 이를 떠올리며 체리에게 말했다.


“내 방식이 비효율적인 건 알고 있어요. 이렇게 길고 번거롭게 말 안 해도, 더 쉽고 빠르게 계약서를 쓰게 할 방법도 있겠죠. 원래는 그렇게 할 생각이었고요.”


좀 더 교묘하게 권유하는 방법도 있었다.


지금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시청각 자료와 교전 기록을 보여줘서 압박할 수도 있었고, 내 능력으로 기억을 읽게 해서 더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방법 역시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사람을 다루면, 내가 그 회귀자 양반이랑 뭐가 다를 게 있나 싶더라고요.”


회귀자의 말은 폭력적이다.


그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라는 사실을 손쉽게 증명할 수 있는 권력자였고, 최소한의 말과 행동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것에 능숙한 지휘관이었다.


그런 사람이 되어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다루는 건 편리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은 지켜보려고요.”


나는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정말 급한 경우는 어쩔 수 없어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요. 상황 파악이 되면 자기가 알아서 잘 결정하겠죠.”


애초에 급할 이유는 없었다.


그 역시 아르고 클럽의 약관에 동의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비록 이 세계의 일은 아니지만, 한때는 회귀자와 함께 세상을 구한 영웅 중 한 명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회귀자의 기억 속의 그는 단 한 번도 에리두에 불을 지른 적이 없었다.


내가 그의 적응을 도우려는 이유 중 하나였다.




*****



신입 환영회가 끝난 다음 날.


나는 에리두의 금괴 10톤과 귀금진인의 귀금속을 회수하기 위해 팀을 꾸려서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그리고 수십 대의 수송 차량과 함께 귀금진인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귀금진인의 백화점 일대는 이상체의 혈흔과 시체로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개중 대부분은 귀금진인과 그의 하수인들의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귀금진인과 무관해 보이는 형상의 이상체들도 적지 않게 눈에 들어왔다.


귀금진인이 사라진 이후 다른 이상체들이 주인 잃은 귀금속을 탐내다가 하얀평화에게 살해당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저런 데서 3일 동안 인질로 잡혀있다가, 깽판을 치고 나왔다는 거지?”


미겔이 살육극의 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하얀평화의 본체가 백화점의 중심부에 앉은 채 우릴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너희도 황금을 탐내 살생을 저지르러 왔냐고 묻는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미겔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제가 있을 땐 저 정도는 아니었어요. 괴물이랑 보석이 많긴 했는데, 나름 평화로웠거든요. 저 친구가 지켜주는 동안에는 그랬죠.”


하얀평화는 당분간 현장을 떠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설령 떠나더라도 하얀사절을 감시역을 남겨둘 것처럼 보였기에, 나는 퇴각을 지시하며 말했다.


“당분간 귀금속은 저 친구에게 맡겨 두는 걸로 할게요.”


그 말에 동료들은 정말 괜찮겠냐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피식 웃으며 이에 답했다.


“좋게 생각하면, 우리 대신 보관해주는 거잖아요. 어차피 한동안 쓸 일도 없는 물건들인데,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죠.”


그러자 미겔이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 상황 자체가 유쾌하다는 듯이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좋아! 이 정도로 미쳐야 사장 노릇을 하겠다고 하지! 마음에 들었어.”


그는 웃는 걸 멈춘 뒤 내게 악수를 청했다.


“돌아가면 계약서부터 쓰자고. 그쪽 배포를 보니, 마음이 바뀌어서 말이야.”


나는 그의 악수를 받아주며 미소를 지었다.


“저야 환영이죠. 잘 부탁드립니다, 미겔 씨.”


한동안 신나게 훈련 시킬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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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회장, 회귀, 회상 (1) +2 23.07.25 485 27 13쪽
37 기억술사 (3) +1 23.07.24 441 33 12쪽
36 기억술사 (2) +2 23.07.23 439 26 13쪽
35 기억술사 (1) +1 23.07.22 443 31 12쪽
34 아침 해 23.07.21 460 35 12쪽
33 새벽녘 (3) +1 23.07.20 466 34 15쪽
32 새벽녘 (2) +3 23.07.19 526 34 13쪽
31 새벽녘 (1) +1 23.07.18 529 33 13쪽
30 불면의 밤 (2) +5 23.07.17 564 40 15쪽
29 불면의 밤 (1) +4 23.07.16 569 33 13쪽
28 길을 트는 자 (4) +5 23.07.15 592 39 13쪽
27 길을 트는 자 (3) +5 23.07.15 599 39 13쪽
26 길을 트는 자 (2) +5 23.07.14 732 5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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