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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회귀자를 대신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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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작품등록일 :
2023.06.22 21:46
최근연재일 :
2023.08.03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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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94,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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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6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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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회장, 회귀, 회상 (2)

DUMMY

99번째 회귀.


아무리 [골드]여도 한 달로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이 슬슬 체감되었다.


[퍼플]과 [블루]도 쓰기 나름이라지만, 훈련 시킨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풋내기들로 노아의 지옥 같은 이상체들을 처리하는 건 무리였다.


무엇보다도 각성자가 성장하는 방식은 저마다 제각각이었기에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은 [퍼플]과 [블루]를 성장시킬 방법을 일일이 전부 외울 수는 없었다.


방침을 조금 수정했다.


[골드]가 나올 때까지 회귀를 반복하고, 어떻게 하면 골드를 최단시간에 최대수준으로 성장시킬지 계속 연구하자.


이를 반복하면 [골드]의 고점을 최대한 빨리 터트려 어떻게든 비벼볼 수라도 있을 테니까.


방아쇠를 당겼다.


나는 회귀했다.




*****




199번째 회귀.


최강의 능력자인 [골드]도 결국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무리하게 훈련과 실전을 반복하면 정신력이 바닥을 드러내 괴물이 되거나, 아니면 정신병에 걸려서 아티펙트가 유리처럼 쉽게 부서져 능력을 쓰지 못하게 됐다.


[황혼]이 홧김에 에리두에 총을 쐈던 걸 기억한다.

총알 하나에 도시 밑바닥에 있는 동면시설 대부분이 부서졌다. 그는 이후 죄책감에 시달려 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눴다.


[창공]이 괴물이 되었을 때는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그의 포효에 귀가 찢어지거나, 아니면 그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으니까.


[탐식]은 아예 클럽에서 탈퇴해 세계 곳곳을 누비며 불을 지르고 다녔다. 그 미치광이는 사기가 떨어질수록 오히려 불을 지르고 싶어서 난리를 피웠다. 보리스는 그를 말리기 위해 에리두를 떠난 뒤 실종됐다.


[묵시]가 괴물이 되었을 땐 나도 겁에 질렸다. 에리두 전역이 암흑으로 뒤덮였고, 이따금 동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던 날의 기억은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우리는 그녀에게 전멸당했다.


[새벽]은 그 날카롭던 칼날의 날이 전부 빠졌고, 시름시름 앓더니 능력을 쓰지도 못하게 됐다. 어떻게든 근성으로 극복해 보라고 했다가 체리한테 뺨을 맞았던 게 떠올랐다. 최악의 기억 중 하나였다.


한 달.


아무리 생각해도 한 달은 너무 짧다.


나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것을 억누르며 회귀했다.




*****





299번째.


슬슬 회원들을 다루는 방식은 익숙해졌다.


고정값인 초기 동료 네 명을 성장시키는 방법부터 우리의 [골드]님들을 훈련 시킬 계획까지 감이 슬슬 잡혔다.


따라서 나는 방침을 바꿨다.


적어도 2명의 [골드]는 확보하고 시작하자고.


한 명으로 역부족이라면 2명 이상으로 시작하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이때부터는 회귀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슬슬 희망이 보이고 있었다.




*****



799번째.


눈을 뜨니 [튜토리얼]이 시작됐다.


나는 늘 해왔던 루틴에 맞춰 [튜토리얼]을 진행한다.


아나운서의 음성에 맞춰 [몬스터]를 죽인다.


기본 [캐릭터]의 능력을 이용해 [보스 몬스터]를 죽인다.


[스테이지 클리어]


전투가 끝나자마자 능력을 써서 [가챠]를 한다.


[가챠]의 결과가 시원찮았다.


[골드]는 보이지도 않고 [퍼플] 하나에 [블루] 셋이다.


더 볼 것도 없이 [리셋]했다.


이젠 이 일도 익숙해졌다.




*****




999번째.


슬슬 이 세계를 게임 취급하는 것도 지긋지긋해졌기에 이번 회차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한 달이라는 제한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나의 시간은 무한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보름에 한 번 각성자를 생산하는 것 말고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정은 체리가 해주고, 수비는 도시의 보안 시스템이 해줄 것이며, 성장은 다들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시간이 흐르고, 각성자는 늘어나고, 늘어난 각성자가 이따금 쳐들어오는 이상현상과 유랑도시를 막아냈다.


이 과정에서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편안하고 안락한, 방치형 게임 같은 삶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수십 년을 놀고먹은 끝에 나는 환갑을 맞았다.


[이제 포기한 거야?]


나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마침내 다시 만난 나비를 바라보며.


나는 환희와 위화감을 동시에 느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일종의 트리거.


나비에 관해 위화감을 느끼는 것을 계기로 회상이 시작됐다.


무엇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지를 떠올렸다.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나’의 기억을 되짚고 있는지. 그리고 이 기억은 ‘누구’의 것인지 구분이 되기 시작했다.


기억 능력자로서의 자아가 돌아왔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푸른 나비 한 마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승천나비]


마침내 행차한 나비를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너도 슬슬 재미없어진 것 같은데.”


나비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을 재밌어하는 모양새였다.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얼마 안 됐어. 방금 알았거든.”


나는 내 코드명을 떠올렸다.


나는 ‘별바라기’가 아니라 ‘회상’이다.


나는 이제 늙고 병든 노인의 몸이 아니라 원래의 내 몸으로 돌아와 있었고, 승천나비는 그런 나를 신기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한 거야? 그거?]


“노력의 결과지. 기억을 다루는 연습을 많이 하다 보니, 기억 속에서 자아를 유지하는 요령도 생겼거든. 자각몽을 꾸는 것처럼.”


승천나비는 나비 가면을 쓴 여성의 모습으로 변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손가락을 한 번 튕겨 테이블과 탁자를 만들어낸 뒤 내게 자리를 권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너도 혹시 회귀자가 되고 싶어?]


“아니. 이 꼴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 리가 없잖아. 게다가...”


나는 숨을 한 번 골랐다.


“그 인간이 죽은 세계... 전부 멀쩡히 굴러가고 있는데, 이걸 미쳤다고 하겠어? 심지어 그 사람은 이걸 아직 모르는 것 같고.”


[그래서 재밌는 거야. 나는 극적인 순간을 좋아하거든.]


골치가 아파졌다. 지독한 악취미였다. 최후의 순간에 ‘전 회장’이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남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끔찍했다.


‘말 잘하는 이상체를 조심하라’는 속설이 맞다면, 승천나비는 내가 아는 이상체 중 최악의 괴물이었다.


평행세계에 시공간까지 자유자재로 인지할 수 있는 괴물이라니.


만약 조금만 더 위엄있게 굴면서 다가왔으면 나는 녀석에게 머리를 조아렸을지도 몰랐다.


놈이 ‘전능’에 가까운 존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전지’에 가까운 존재라는 건 확실해 보였으니까.


“그래서. 그 잘난 회귀자님은 내버려 두고, 나한테 말을 건 이유는 뭐야?”


[궁금한 게 많아 보이네. 그러면 규칙을 하나 정하자.]


“무슨 규칙?”


[서로 한 번씩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거야. 일단은 가볍게 세 번만 할까?]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거짓말을 하는지는 어떻게 구분하는데?”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아. 사실을 덜 말하는 게 더 재밌거든.]


이곳은 꿈, 혹은 기억의 세계.


생리현상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나는 어쩐지 목이 타는 기분이 들었다.

저런 괴물에게 관심받은 자의 말로가 어떤지 조금 전에 실시간으로 보고 온 터였으니까.


다만, 지금 이 상황은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보아하니 녀석은 물리력으로 직접 무언가를 파괴하려는 성향은 없어 보였고, 대화와 관찰을 즐겨 하는 성향처럼 보였으니까.


적어도 회장이 2000년 동안 회귀를 하지 않아도 이를 묵묵하게 지켜만 본 걸 보면, 다른 이상체에 비해 오히려 평화적인 편에 속했다.


“순서는 어떻게 정하지?”


[당신부터 해. 양보해 줄게.]


나비의 말에 나는 고민했다.


이는 어떤 질문을 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지만, 어떤 질문을 해선 안 되는지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회귀, 불로, 불사, 미래, 부활.


이런 이상에 가까운 키워드를 질문하는 건, 대답을 듣는 것만으로도 위험했다.


자칫해서 흥미라도 생겼다간 그대로 전 회장의 꼴이 될 테니까.


따라서 나는 노아에 관해 묻는 것으로 질문을 시작했다.


“노아에 있는 면역제는 언제까지 유효해?”


[앞으로 몇 년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누가 억지로 부숴 먹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야. 사고든 고의든.]


나비는 대답을 끝낸 뒤 곧바로 질문했다.


[내 차례네. 가보고 싶은 여행지는 어디야?]


“......”


나는 어처구니를 잃고 나비를 바라봤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당연하지.]


“...뉴욕.”


대충 대답한 뒤 곧바로 질문했다.


“나한테 굳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색다르니까. 너도 나름 희귀한 편이거든. 회장이 돼서 이렇게 판을 벌이는 사람도 드물고.]


“그거참 영광이네.”


[이번엔 내가 질문할게. 좋아하는 동물은 뭐야?]


“...개.”


연달아 이어지는 허무한 질문에 맥이 빠졌다. 저걸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걸까. 아니면 이것도 나를 가늠해보려는 전략일까.


[이제 마지막 질문이네. 생각해 둔 거 있어?]


그 말에 나는 고민했다.


에리두가 언제 위험에 처하는지 물어볼 수도 있지만, 이는 예지에 해당하는 내용이니 위험했다.


이상체를 사람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 역시 같은 이유로 물어보기에 꺼림칙했다. 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방법이나 수단이 위험천만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전 회장이 이상체를 사람으로 되돌리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노아의 괴물들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부분은 전 회장의 기억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회장이 서두르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 달 안에 승천나비를 만나기 위해서였고, 이를 통해 회귀를 끊어내거나 성운석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결국 질문 할 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동안 일부러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을 질문했다.


“전 회장. 그 사람 본명은 뭐야? 회원증을 볼 때마다 항상 지워져 있던데.”


[유진.]


나비는 싱긋 웃었다.


[그의 이름은 유진이야. 흔한 이름이지?]


유진.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고루 사용되는 이름이었다.


그렇게 흔한 이름을 지닌 사람이 별바라기라는 능력을 타고난 탓에 반쯤 사람이 아닌 존재로 변해버린 것을 생각하니 괜히 씁쓸해졌다.


[이제 마지막으로 질문할게.]


나비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정말로 노아에 아무도 안 죽고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도발일까. 아니면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 걸까. 의문에 대한 답은 알 수 없기에,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모르지. 위험할 것 같으면 도망칠 거라. 그러려고 이 고생을 하면서 길을 만드는 거고.”


[도망치지 못하면? 함정을 깔아놓고 걸릴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는 거잖아.]


“질문.”


나는 나비를 노려봤다.


“규칙은 지켜야지. 세 번 끝났어.”


[아, 이런.]


나비는 키득거렸다.


[미안, 너무 들떠서 실수했네. 용서해줘.]


멍청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성격이 경박한 건지.


도저히 가늠하기 힘든 태도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런 얼간이가 반쯤 신이나 다를 바 없는 인지능력을 지니고 있다니.


세상이 말세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 정도였다.


“이제 슬슬 일어나 보려고 하는데...”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안 만났으면 좋겠네.”


[그래도 유익했잖아?]


다행히 저 괴물은 나를 막아서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나비의 형태로 변하며 작별을 건넸다.


[우린 다시 만날 거야. 노아에서 기다릴게.]


나비는 사라졌고, 나는 아티펙트의 칼날로 손가락을 베었다.


고통과 함께 피가 맺히는 것을 신호로 시야가 순식간에 깜빡거렸고, 나는 그렇게 회귀자의 기억에서 빠져나와 개인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




나는 손목시계를 통해 시간을 확인했다.


순식간에 지나간 회장의 2000여 년과는 달리, 시간은 거의 지나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찰나.


나의 시간은 여전히 크리스마스에서 멈춰있었다.


쉽게 잠들지 못할 것만 같은 밤이었기에 나는 펜을 들어 ‘유진’의 기억을 종이에 기록했다.


기록물로 남겼다가 혹시라도 잘못 만지게 되면 그대로 2000년을 겪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설령 기억의 형태였기에 순식간에 지나갔다곤 해도, 그때의 감정만큼은 또렷했기에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회귀자의 기억이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크리스마스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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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장, 회귀, 회상 (2) +2 23.07.26 450 3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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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기억술사 (2) +2 23.07.23 439 26 13쪽
35 기억술사 (1) +1 23.07.22 443 31 12쪽
34 아침 해 23.07.21 460 35 12쪽
33 새벽녘 (3) +1 23.07.20 466 34 15쪽
32 새벽녘 (2) +3 23.07.19 526 34 13쪽
31 새벽녘 (1) +1 23.07.18 529 33 13쪽
30 불면의 밤 (2) +5 23.07.17 564 40 15쪽
29 불면의 밤 (1) +4 23.07.16 569 33 13쪽
28 길을 트는 자 (4) +5 23.07.15 592 39 13쪽
27 길을 트는 자 (3) +5 23.07.15 599 3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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