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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회귀자를 대신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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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작품등록일 :
2023.06.22 21:46
최근연재일 :
2023.08.03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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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7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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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별바라기 (1)

DUMMY

전 회장, 유진의 기억은 곱씹을수록 절망적이었다.


노아에 있다는 ‘면역제’는 각성자를 만드는 물건이 아닌 이상현상에 면역력을 갖게 해주는 물건이다.


이를 양산한다면 인류를 복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인류의 재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인간이 아무리 늘어난다고 해도 밥만 축낼 뿐이지 이상체와의 전쟁에선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인구만 늘어나는 것은 짐 덩이에 가깝다.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규칙과 규율을 새로 만들고, 로봇 자원을 투자해야 하며, 물과 식량, 그리고 사치품까지 분배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노예로 부리며 억압하는 것은 동료들이 내켜 하지 않을 터였다.


만약 노아에 있던 것이 ‘면역제’가 아니라 ‘각성제’였다면 사정이 좀 나았을 테지만, 그런 편리한 물건이 개발되려면 200년은 더 필요했다.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막연하고, 낙관적이고, 편의주의적이었던 지난날의 계획들을 떠올렸다.


그래,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지.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 무의미한 건 아니었다.


목표 자체도 틀리지 않았고, 느리지만 착실하게 성장은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노아에 도착했다고 사명이 끝나는 게 아닌, 오히려 그때부터 지옥문이 열린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고작 7명의 각성자로 10만 명 이상의 인구를 통제하면서 초롱부름 같은 유랑도시의 습격을 끊임없이 막아내야 한다니.


웬만한 이상체야 레일건 포탑을 비롯한 방어체계로 손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벤딧, 컬렉터, 철인교회 같은 개체는 100만이 몰려와도 에리두의 화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초롱부름처럼 물리법칙을 왜곡하는 적을 상대로는 언제까지고 인류를 지켜낼 수 없다.


초롱부름에 다녀왔을 때를 떠올린다.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공중도시. 소원을 빌어서 공간 전이를 시키는 이능력. 유령처럼 도시를 떠다니던 수천의 괴물과 도시에 똬리를 튼 거대괴수.


놈은 내게 다시 온다 말했고, 나는 놈에게 인간을 바치겠다 말했다.


그 약속 따위를 지켜줄 생각은 당연히 없다.


초롱부름뿐만이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활동 중일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 규모의 위험 개체의 이름을 떠올렸다.


하얀평화. 폭소행렬. 행복정원. 극야극단. 무한첨탑. 산성해일. 광휘교단. 저주수해. 역천바다....


한 지역에서 머무는 것들도 있고, 여러 지역을 넘나드는 것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하얀평화는 LA 일대의 이상체를 감시하고 다닐 뿐 에리두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놈들이 에리두에 관심을 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실제로 유진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은’ 회차에서 각성자들을 시켜 놈들을 막아냈고, 제대로 세상을 구해낸 회차에선 최강의 능력자들에게 저들을 제거하도록 지시했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숨을 내쉬었다.


무지하던 옛날과 달리,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에 목이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개 같은 새끼...”


나는 자살한 유진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새끼만 있었어도. 하다못해 보름만 더 기다렸다가 몇 명이라도 더 각성자를 불러줬더라도 이런 심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알고 있었고, 나였어도 별로 다르지 않았을 거란 건 안다.


하지만 적어도 보름.


보름만 더 기다렸어도 남겨진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뒷일을 맡기겠다는 설명 역시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고, 우리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 버려졌다.


화가 났다.


그동안의 희망이, 내가 해왔던 노력이, 나를 보고 즐거워했을 승천나비의 비웃음에 화가 치밀었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안전을 추구했던 각오와 노력을 전부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이 세상에 저주라도 내리고 싶었다.


길을 트려는 나날을 비웃는 세상에. 그 길의 끝에 있는 건 낭떠러지라고 폭소하는 세상에.


피눈물로 적신 붓으로 한 땀 한 땀 저주를 새겨넣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생각이 부질없다는 사실 자체가 울분을 자아냈다.


이미 멸망한 세상을 저주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니까. 무슨 말로 저주를 써도 세계 어딘가에선 이미 그런 식으로 멸망해있을 테니까.


한껏 우울감을 토해낸 끝에, 나는 방문을 잠그고 잠을 청했다.


낙관론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




똑, 똑.


집무실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말을 하니 [새벽]이 문을 열었다.


회귀자의 기억에 종종 등장하곤 했던 최강의 골드 등급 능력자 중 하나.


유약하면서도 필사적인.


살벌하지만 상냥한 칼잡이.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내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응.”


“정말이에요?”


“무슨 일 있으면 너한테 말했겠지.”


“요즘 바깥으로 안 나오시잖아요. 저녁 식사도 혼자 따로 하시고.”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랬어. 정리되면 괜찮을 거야.”


“......”


그녀는 말을 멈췄고,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내일이면 새해에요. 몸조리, 잘 하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문을 닫고 나갔다.


그녀가 떠난 자리를 바라봤다.


[새벽]. 아사히 세츠나. 코드명은 데이브레이커.


나는 그녀가 모르는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다.


처음 떠오른 것은 그녀의 사인이었다.


첫 번째 사인은 출혈사였다.


그녀는 노아를 공략할 때 무예를 이상으로 삼은 이상체들과 연이은 혈전을 벌였고, 체력을 한계까지 끌어다 쓴 끝에 도룡선생과 동귀어진했다.


두 번째 사인은 중독사였다.


미확인 기체를 뿜어내는 이상현상의 중추를 파괴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기체에 중독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세 번째 사인은 과로사였다.


미쳐버린 회귀자가 각성자를 얼마나 빨리 성장시킬 수 있을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나날이 피폐해졌다.


정신 능력자를 이용해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훈련법이 있었다.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이용해 지옥 같은 상황을 보여준 뒤 이를 극복하게 하는 훈련법이 있었다. 개나 고양이에게 정을 주게 한 뒤 이를 살해하게 하는 훈련법이 있었다. 최강 수준의 대인전 능력을 지닌 이상체를 아바타로 구현해 이길 때까지 시뮬레이션을 반복하게 하는 훈련법이 있었다.


사생결단.


칼을 품고 눈을 뜬 칼잡이는 모든 것을 베며 앞으로 나아갔다.


과장되고 강조된 트라우마를 보고 난 뒤에도 눈물을 흘리며 일어섰다. 그날 그녀는 여우귀를 자르던 버릇을 떠올렸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이상체가 도시에서 사람들을 베고 다니는 시뮬레이션 상황을 마주했다. 수십 만의 철인신자들로 인해 아비규환이 된 도시에 떨어진 적도 있었다. 동료들이 모두 죽고 노아에 홀로 고립된 상황이 구현된 적도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베어내고 시뮬레이션을 끝냈다. 그녀는 귀를 베는 것마저 그만뒀다.


키우던 강아지를 죽이는 것에 무덤덤해졌다.


회귀자가 보아온 최강의 대인전 이상체들마저 수천 번의 시도 끝에 모두 베어냈다.


그렇게 마침내 4개의 별을 검게 칠했을 때, 그녀는 날이 빠져버린 자신의 칼을 보게 되었다.


능력은 제대로 써지지 않았고, 정신이 피폐해진 끝에 시름시름 앓는 날이 늘었다.


그렇게 29일째 되던 날에 그녀는 병사했다.


그녀를 잃은 유진은 노아에는 가 보지도 않고 회귀를 택했다.


물론, 유진이 바보라서 저런 기행을 벌이고 다닌 건 아니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완성된 골드 등급 훈련법은 20일 만에 별을 두 개 더 까맣게 칠해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별을 전부 까맣게 채웠을 때의 그녀가 공간을 통째로 베어내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대괴수의 심장을 터트렸을 때는 그 잘난 회귀자마저 경악했을 정도였다.


그녀는 회귀자가 보아온 많고 많은 각성자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보석이었고, 회귀자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근거이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찬란함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그녀의 죽음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그중에서도 한계까지 내몰린 끝에 비참하게 죽어간 세 번째 죽음이 유독 선명했다.


나 또한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세상이 이렇다는 이유로. 우리 모두가 죽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한시라도 빨리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회귀자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그녀와 다른 동료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지 않을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을 정리했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될지.


나름의 선을 정한 뒤, 비서 로봇을 불러 나무판자와 목공 도구를 주문했다.


납관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




관을 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무 관의 설계도를 확인한 뒤 자를 이용해 선을 그었다. 선에 맞춰서 나무판자를 잘랐고, 자른 판자를 못질해 이어붙였다.


톱질을 하고 있으니 생각은 점차 맑아졌다.


나무판자들이 점차 관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굳어졌다.


세츠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같이 죽으러 가자고 말해요. 절벽으로 뛰어내리자고 말해요. 불구덩이로.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지자고 말해요.’


말 그대로였다.


저 정도의 잔혹함이 없다면 살아남는 것 자체가 버거운 세상이었다.


500년을 버텨온 방주도시는 500년을 살아온 이상체에게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들어갈 관을 완성한 뒤 유서를 적었다.


혹시라도 내 시체를 찾으면 이 관에 넣어서 태워달라고. 시체를 찾지 못했어도 적당한 유품을 넣어서 장례를 치르라고.


완성된 관은 개인실의 창고 칸에, 유서는 회장 집무실의 잠금 서랍에 넣어두었다.


준비가 끝났다.




*****



12월 31일. 저녁 8시.


나는 단말기로 동료들을 회의실로 불러모았다.


다만, 지금 하려는 것은 회의가 아니었다.


“회귀자의 기억을 봤습니다. 노아에는 면역제의 시제품이 있고, 이걸 확보하면 면역제를 양산해서 동면 중인 사람들을 깨울 수 있습니다.”


희소식에 동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는 그들의 설렘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면역자는 각성자가 아닙니다. 방주도시의 방어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부양해야 할 인구가 늘어나면 우리가 져야 할 부담도 커지겠죠. 게다가 회귀자의 기억에는 에리두가 침공당하고, 이를 각성자들이 막아내는 기억도 있었습니다. 수십 명의 각성자들이 몸을 바쳐 막았죠.”


청중들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체념하는 표정도 보였다. 불안해하는 표정도 보였다.


“그러니 하던 사업은 그대로 유지하되, 방침을 바꾸겠습니다. 성운석 탐색을 최우선으로. 그리고 이를 통한 각성자 확보를 최우선으로 할게요. 어차피 성운석을 찾으려면 북미 대륙을 전부 뒤져야 할 거고, 노아로 가는 길도 만들어 두긴 해야 하니까요. 이상입니다.”


투표는 생략했다. 의견을 물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으니까. 일방적인 통보였고, 이견은 없었다.


이를 반박하려면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거나, 나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했으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고, 체리가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위험하긴 하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운을 떼며 말했다.


“만약 성운석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제가 최대한 전력에 도움이 될 능력을 지정해서 우선순위를 높여드릴 수 있어요. 저도, 전 회장도. 그런 식으로 먼저 각성한 거거든요.”


생각지도 못 한 희소식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돌이켜보면 유진, 그는 구태여 성운석을 찾으러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름마다 각성자를 찍어낼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골드 등급 몇 명만 확보해도 세상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


한 달이라는 제한시간. 2000년을 넘게 살면서 마모된 정신. 회귀에 집착하면서 생긴 생각의 공백. 끊임없는 리셋으로 인해 끊어진 인내심.


별바라기라는 능력으로 인해 별을 찾길 그만둔 회귀자를 떠올리며 나는 동정심을 느꼈다.


그는 회귀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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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회장, 회귀, 회상 (1) +2 23.07.25 484 27 13쪽
37 기억술사 (3) +1 23.07.24 440 33 12쪽
36 기억술사 (2) +2 23.07.23 439 26 13쪽
35 기억술사 (1) +1 23.07.22 443 31 12쪽
34 아침 해 23.07.21 460 35 12쪽
33 새벽녘 (3) +1 23.07.20 466 34 15쪽
32 새벽녘 (2) +3 23.07.19 526 34 13쪽
31 새벽녘 (1) +1 23.07.18 529 33 13쪽
30 불면의 밤 (2) +5 23.07.17 564 40 15쪽
29 불면의 밤 (1) +4 23.07.16 569 33 13쪽
28 길을 트는 자 (4) +5 23.07.15 591 39 13쪽
27 길을 트는 자 (3) +5 23.07.15 599 3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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