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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회귀자를 대신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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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작품등록일 :
2023.06.22 21:46
최근연재일 :
2023.08.03 22:30
연재수 :
5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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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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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94,793

작성
23.07.21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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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아침 해

DUMMY

구조를 끝낸 직후.


나는 우리의 ‘회장님’을 데리고 와서 침대에 눕혔다. 혹시나 죽은 거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 과로로 인한 탈진 상태이니 푹 쉬고 나면 해결될 거란 진단 결과가 나왔다.


“아사히 씨. 정말 안 쉬고 가도 되겠어요?”


체리 메이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요. 간호, 잘 부탁드려요.”


대답을 끝낸 뒤 바깥으로 나가 3층 건물의 옥상 위로 뛰어올랐다.


철인교회의 잔당. 사람도 기계도 아닌 쓰레기들.


일출이 시작되니 놈들의 모습이 훤히 보였고, 놈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았다.


나는 칼을 뽑아 들었다.


저들의 노랫소리가 거슬렸다. 보병 로봇과 총격전을 벌이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다른 동료들이 나와서 저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도 불편했다.


끝내야 했다.


시간은 권태롭고, 나는 거리를 뛰어넘어 놈들 사이를 지나쳤다. 칼을 많이 휘두를 필요는 없었다. 사람을 베는 게 아니라 잔디를 깎는 것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칼을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관성을 이용해 놈들을 베어준다. 바람이 일고 난 다음에는 놈들의 목이 잘 익은 과일처럼 목에서 떨어졌다.


산책하듯. 추수하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골목을 한 바퀴 돌아준 뒤 다시 고지대로 향했다.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놈들을 향해 도약했다.


어려울 건 없었다.


놈들의 뼈와 살은 내가 베지 못할 정도로 두껍지 않았고, 저들이 메이나 엘리자베스처럼 초인적인 육감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혹시 모를 변수 때문에.


그리고 우리 ‘회장님’의 과보호 때문에 지금까지 몸을 사리고 있었을 뿐, 놈들이 천 마리가 몰려와도 내게는 요리 재료를 손질하는 일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과보호.


그래, 과보호였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내 능력은 자주 쓸수록 정신력 소모가 심한 편이었으니까. 비장의 카드는 마지막까지 아끼고 싶었을 테니까. 내가 나서서 모든 일을 해결해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실전경험을 쌓지 못해 성장할 여지가 없었을 테니까.


최악에 최악을 대비한다면 내가 정신력을 비축하고, 급할 때 전력을 다해서 사태를 수습하는 쪽이 옳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마음에 드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바보 같긴...”


정리를 끝낸 나는 칼에 묻은 괴물의 피를 털어낸 뒤 아티펙트를 없앴다. 선생님께 배운 버릇이었지만, 곧바로 아티펙트를 없애면 손에 피가 묻으니 굳이 버리진 않은 습관이었다.


무엇보다도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나면 속이 후련했다. 잔뜩 어지럽혀진 방 안을 깨끗하게 청소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후련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성과의 문제는 아니었다. 골목길 어귀마다 놈들의 머리가 떨어져 있었고, 그 숫자는 발에 챌 정도로 많았다.


총성은 멎었고, 싸움은 끝났으며, 우리는 승리했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고 전투 로봇의 손실은 경미 했으며, 차량의 손실 역시 하나도 없었다.


그가 우리의 일은 ‘전쟁’이 아니라 ‘사업’이라고 말했던 게 납득이 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속이 답답하고, 지금 상황이 못마땅했다.


나는 답을 찾지 못한 채 코에서 흐르는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아, 나도 무리했구나.


피로가 쌓인 거겠지. 차멀미 후유증 탓도 있을 거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이 튼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피와 기름으로 얼룩진 실리콘밸리의 거리를 걸었다. 능력을 쓰고 싶진 않았다. 정신력을 아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산책을 하면서 생각할 시간을 벌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고백하자면, 에리두에 다녀온 동안 제대로 쉬지는 못했다.


차 멀미 때문도 있긴 하지만, 현장에 남은 동료들이 걱정돼서 그런 게 제일 컸다.


다들 바보같이 미련한 사람들이라 웬만큼 위험한 일이 아니면 우릴 부르지 않을 거고, 부른다고 해도 버틸 만큼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을 때가 돼야 부를 거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와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내용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다음 휴가. 그러니까 이번 작전이 다 끝나고 나면. 그러면 바다로 휴가 가는 건 어때? 다 같이 가도 되고. 우리끼리 가도 되고.’


뻔하디뻔한 데이트 신청.


그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한 건 사실 후회하지 않는다. 솔직히 통쾌했으니까. 시무룩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다음 휴가면 12월일 텐데 바다라니. 내가 그때 강으로 놀러 가지 못해서 아쉽다고 한 걸 정말 곧이곧대로 들었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차라리 연말 계획을 물어봤으면 고민하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고 새해가 올 텐데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전혀 안 돌아가는 걸까. 하다못해 여름에 가자고 말을 하며 다음을 기약했다면 그렇게 매몰차게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염치도 없고. 눈치도 없고. 날이 갈수록 글러 먹은 인간이 되어가는 그가 한심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재미없진 않았겠지. 막상 갔으면.”


12월의 바닷가를 상상했다.


가게 된다면 로스앤젤레스의 바다로 가게 될 것이다. 캘리포니아치곤 조금 쌀쌀하겠지만, 일본의 겨울보단 따뜻한 날씨. 햇볕에 따스하게 무르익은 모래사장을 맨발로 밟고 걷다 보면 늘 그래왔듯이 그가 말을 걸 것이다.


상상을 마치니 한숨이 나왔다.


그때 강에 가고 놀러 가고 싶어서 응석을 부린 것도, 애써 준비해둔 수영복이 무용지물이 된 것도 아쉬웠던 건 사실이다. 이 칙칙한 폐허에서 벗어나 일탈을 누리고 싶었던 마음은 진심이었다.


거절 이후에 그가 우울해했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그러자 조금은 심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화해의 표현으로 건넨 것일 텐데 너무 매몰차게 거절한 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가면을 벗고 얘기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잠시 발걸음을 멎었다.


먼저 사과해볼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버릇이 나빠질 것 같아져서였다.


그의 버릇이든, 내 버릇이든, 사소한 일에 하나하나 사과하는 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나는 잘못 따윈 하나도 하지 않았다.


멋대로 ‘사내연애금지조항’ 같은 거나 만들고, 먼저 선을 그으려고 한 것도 그였으니까. 그런 주제에 관심이 좀 멀어질 것 같으니 데이트 신청을 하는 그의 센스가 저주스러울 지경이었다.


아, 그에 대해 생각할수록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그 잘난 ‘사내연애금지조항’ 따위를 입에 담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당시에는 그러려니 했다.


원래 저런 규칙은 만든 사람이 깨는 법이고, 어디까지 고집을 부릴 수 있는지 두고 보자는 생각을 하니 오기도 생겼다.


머리에 동물귀가 돋은 걸 빼면 어딜 가도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었고, 그 역시 나에게 호감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와 보내는 시간은 나름대로 즐거웠다.


그럭저럭 성격도 맞는 편이었고, 무엇보다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시간이 잘 가는 것 같아 즐거웠다.


기억도, 목숨도 맡기겠다는 얘기를 떠올렸다.


그가 바람둥이가 아니라면.


아무한테나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 웃긴 ‘사내연애금지조항’같은 건 금방 깨질 것 같았다.


하지만 도플갱어가 나타난 그 날 이후 그는 무언가를 다짐한 것처럼 보였다.


나를 대하는 태도부터가 거리감이 느껴졌고, 은근슬쩍 보내오던 호의도 줄어들었다.


처음에 느껴진 건 의문이었다.


내가 무언갈 잘못했나 싶었고, 그에게 무슨 일이 더 일어난 건 아닐지 고민했다.


다음으로 느껴진 건 서운함이었다.


기억을 맡겨주겠다더니. 중요할 때는 자기 속내를 꼭꼭 숨기려는 그의 태도가 서운했다.


그렇기에 나는 나 나름대로 다짐했다.


그때 했던 말이 단지 책임감이나 부채의식에 불과하다면 나 역시 그 정도로만 여기겠다고.


말이란 건 원래 교묘한 법이니.


그쪽이 그런 식으로 선을 긋겠다면 나 역시 그쪽 마음대로 놀아나 주진 않겠다고.


그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다 잡은 물고기 신세가 되어 놀아나는 건 사양이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내가 느낀 답답함의 근원을 알게 되었다.


화가 났던 거구나.


결론이 나오자 힘없이 웃음이 나왔다.


그가 구제불능인 만큼, 나도 사실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나도 유치한 건 마찬가지였다.


걱정했다고. 서운했다고.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달라고.


그렇게 말을 해줄 수도 있었다.


내가 무적이 아니듯 그 역시 무적이 아니었으니까. 그 역시 사람인 이상 힘들고 지친 순간은 있을 테니까.


그가 유약하던 나를 최강이라 말하며 세뇌 수준으로 치켜세워주었듯, 나 역시 그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그리고 사방에 널린 철인신자의 잔해를 바라보며, 체리 메이빌에게 전화를 걸었다.


“체리 씨, 통화 괜찮으세요?”


[네, 무슨 일이에요?]


“회장님이 언제쯤 일어날 것 같은지 궁금해서요.”


[적어도 12시간은 걸릴 거예요. 피로가 많이 쌓였을 거거든요. 여러모로.]


‘여러모로’라는 말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저런 식으로 은근히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면 스탠퍼드에 있는 철인교회 잔당, 저희끼리 처리하는 건 어때요? 가능할 것 같은지 확인해주세요.”


사정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진작에 지원을 부를 수 있음에도 휴가를 방해하기 싫어서 고집을 부렸다는 이야기. 그러는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서 결국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이겼다는 이야기까지.


철저하게 계획된 일이고, 근거는 있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아무도’에 '그'가 빠져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기 딴에는 목숨이 소중하다곤 하지만,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괜찮겠어요? 아무리 우리끼리긴 해도, 월권 취급받을 수도 있는데. 알잖아요. 그 사람 그런 거에 은근히 신경 많이 쓰는 거.]


알고 있었다. 일단 손에 쥔 건 놓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체면이랑 평판에 민감한 사람이고, 실없이 웃고 다니지만 예민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신경 쓰라고 해요. 그러라고 이러는 거니까.”


망설임은 없었다.


신경 쓰게 하고 싶었으니까. 한 방 먹여 주고 싶었으니까.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그가 우리의 단잠을 위해 밤을 지새웠듯, 자고 일어났을 때는 평안한 휴일을 보낼 수 있도록 손을 써두고 싶었다.


내가 그동안 칼을 갈아왔던 이유는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였다.


[알겠어요. 그러면 4시간 있다가 출발해요. 다들 체력 상태가 말이 아니거든요.]


“고마워요.”


[됐어요. 나도 사실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그 사람한테. 다들 비슷할걸요?]


“그거 다행이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키득거렸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속내를 알기 힘든 사람이었지만, 이럴 때는 뜻이 통하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 푹 쉬어요. 저도 이만 쉬러 갈게요.]


“네. 이따 찾아뵐게요.”


통화를 끝낸 뒤에 나는 후련한 기분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앞으로 네 시간 정도 지나면 해가 중천에 뜰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부디 그가 일찍 깨어나지 않길 바랐다. 그가 잠든 사이에 모든 일이 끝나길 바랐다. 항상 자신만만한 척을 하던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보고 싶었다. 허탈해할까, 당황해할까, 멋대로 굴었다며 화를 낼까.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구제불능에, 미련하고, 바보 같은 사람.


그건 나 역시 다를 게 없었다.


어쩌면 옮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도약했다. 한시라도 빨리 쉬어둬야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그를 위해 목을 베어다 줄 생각이었다.


이는 내 나름의 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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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기억술사 (2) +2 23.07.23 438 26 13쪽
35 기억술사 (1) +1 23.07.22 443 31 12쪽
» 아침 해 23.07.21 460 35 12쪽
33 새벽녘 (3) +1 23.07.20 466 34 15쪽
32 새벽녘 (2) +3 23.07.19 526 34 13쪽
31 새벽녘 (1) +1 23.07.18 529 33 13쪽
30 불면의 밤 (2) +5 23.07.17 564 40 15쪽
29 불면의 밤 (1) +4 23.07.16 569 33 13쪽
28 길을 트는 자 (4) +5 23.07.15 591 39 13쪽
27 길을 트는 자 (3) +5 23.07.15 599 3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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