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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회귀자를 대신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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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작품등록일 :
2023.06.22 21:46
최근연재일 :
2023.08.03 22:3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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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94,793

작성
23.07.22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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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기억술사 (1)

DUMMY

실리콘밸리의 정리는 예상외로 빨리 끝났다.


지휘관을 잃은 놈들은 전략과 전술도 없이 마구잡이로 노래를 부르기에 바빴고, 세츠나는 추수하듯 놈들의 목을 베어냈다.


순식간에 사이보그의 목을 떨어트리는 세츠나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식은땀이 흘렀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그녀의 활약 덕분에 에리두와 실리콘밸리를 오가는 보급로의 안전을 빠르게 구축할 수 있었고, 진지까지 복구하고 난 뒤엔 굳이 사람을 보내지 않아도 실리콘밸리의 자원을 채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노아로 향하는 핵융합 열차의 수리 및 개량이 끝나길 기다리는 것뿐이었고, 이는 전적으로 캐시와 인공지능 로봇들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빠르면 한 달. 길면 세 달. 아마 그쯤 걸릴 것 같아. 기능을 좀 빼면 한 달이면 될 것 같은데, 어떡할까?”


캐시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넣을 수 있는 기능은 다 넣어. 이게 우리 사업 밑천인데, 애매하게 만들어서 일을 망칠 순 없으니까.”


“오케이. 조수는 많이 필요 없고 한 명만 보내줘. 그냥 말동무 겸 잔심부름이나 시키려고 부르는 거니까, 꼭 보리스만 안 불러도 돼. 그 양반이 일이야 제일 잘하겠지만, 똑같은 사람이랑 계속 놀면 재미가 없잖아.”


나는 그녀에게 격려의 의미로 주류 가격이라도 내려줄까 싶었지만, 의외로 먼저 사양한 건 그녀 쪽이었다.


“됐어. 일할 때 술 마시면 감 떨어져. 그리고 서비스를 줄 거면 나 한 명한테만 주지 말고 골고루 해줘. 나 말고 다들 고생했잖아.”


“안 그래도 조만간 필요한 물건 같은 게 있는지 조사하려고 했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이제 연말이잖아. 크리스마스도 있고 하니까, 우리 어른이들 선물은 내가 챙겨 줘야지.”


“하여간 말은 잘해요.”


그녀는 웃으며 작업을 하러 떠났고, 나는 그녀를 배웅하며 제비뽑기로 작업을 도울 조수의 순번을 정했다.


이제 열차의 완성이 조만간이다.


나도, 그리고 다른 동료들도.


가능하다면 우리는 더욱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머지않아 북미대륙의 서쪽에서 동쪽을 횡단하는 여정을 시작하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떤 위험과 변수가 기다리고 있을진 아무도 알 수 없다.


압도적인 전력은 곧 최고의 전략이었으니까.


고양이가 아무리 사력을 다해도 사자를 이길 수 없는 것처럼, 체급 자체가 다른 적을 상대로는 우리 역시 무력했다.


이를테면 초롱부름의 중추처럼, 몸길이가 500m가 넘어가는 거대괴수를 상대론 세츠나나 메이의 공격이 제대로 통할 거란 보장이 없다.


게다가 그런 거대괴수에게 물리법칙을 왜곡하는 능력까지 있다면 우리로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체급을 더 높여야 했다.


적어도 세츠나. 인공지능의 분석에 따르면 그녀는 아직 세 번은 더 성장할 여지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의 성장을 도울 수 있을까.


더 강한 상대를 찾아 겨루게 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가장 위험한 방법이었다. 그녀보다 강한 상대를 찾는 것부터가 일이거니와, 그녀를 상대로 손속을 봐주리란 법은 없었으니까.


시뮬레이션 룸으로 훈련을 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세츠나의 능력은 엄밀히 말하면 신체 가속도 시간 가속도 아니라 시공간 왜곡에 가까웠으니까.


고유한 감각에 맞춰 세계를 인식하고, 이에 맞춰 물리법칙을 왜곡하는 능력.


이것이 내가 이해한 세츠나의 능력이었다. 그러니 이를 인공지능을 통해 그대로 구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내 능력을 이용해 그녀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거나, 각성할 당시와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은 어떤지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이겨내기만 한다면 가장 확실하게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방법이고, 정신의 성장은 곧 능력의 성장이 될 테니 유효한 방법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당연하게도 기각됐다.


애초에 인륜을 저버리는 일이고, 자칫해서 마음이 꺾이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재기불능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아무리 능력의 성장이 중요하다고 해도 사람이 폐인이 되어버리면 본말전도다.


이는 몸으로 직접 얻은 교훈이었다.


결국, 나는 그녀의 성장은 온전히 그녀의 몫으로 남겨두는 편이 가장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설령 내가 그녀의 기억과 능력을 훔쳤다 해도 나는 나고 그녀는 그녀였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그녀의, 그리고 모두의 성장을 도울 방법은 무엇일까.


슬슬 단순반복과 대련을 통한 훈련으로는 한계를 느끼는 다른 동료들의 성장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그 대답을 내심 알고 있었다.


메이가 처음 승급한 이후 다들 연달아 승급했던 걸 떠올렸다.


누군가가 승급한다면 본보기이자 선구자로서 다른 동료들에게도 자극이 될 것이다. 먼저 승급한 사람의 노하우가 도움이 된다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에는 선구자가 되어 볼 생각이었다.


지난날의 열등생이 오늘날의 우등생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군침이 도는 법이었으니까. 때마침 연말이고, 다들 열차 완성 전까진 개인 시간을 갖기로 한 터라 시간도 넉넉했다.


나는 내 회원증을 바라봤다.


별은 아직 두 개 더 검게 칠할 수 있었다. 이는 적어도 두 단계는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란 뜻이기도 했다.


더 강해지거나. 아니면 더 유용해지거나.


어느 쪽으로든 성장의 가능성은 아직 열려있다.


다만, 나는 몰입을 통해 세츠나의 능력을 더 연마하는 것은 지양하기로 했다.


재능의 차이가 명확했고, 최적화를 해도 연비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메이나 세츠나 같은 싸움꾼들이 타고난 감각을 내 육신으로 재현하는 건 신체 구조상 불가능했고, 그들의 무술은 자신의 몸에 맞춰 최적화를 해 놓은 것이었기에 내가 이를 익힌다고 해서 같은 효율이 나오진 않았다.


이는 지금까지 실전을 겪으면서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었기에, 나는 전투에 집중하는 대신 내 능력의 본질인 기억 능력을 더 가다듬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만, 그것이 두 번째 능력인 ‘기억 발굴’을 개발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기억 발굴은 지금까지 가장 많이 사용한 능력이었고, 숙련도도 충분히 오른 덕에 더 이상 최적화할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내가 관심을 보인 것은 지금까지 가장 적게 사용한 능력인 ‘기록 작성’이었다.


[#8 남하진]

[코드명: Reminiscence]

[회원 등급: 퍼플(★★☆☆)]

[각성 능력: 기억 회상 및 전이]

[권장 포지션: 서포터]


[#1. 기록 작성]

[-아티펙트로 기억을 기록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기록물을 사용하여 기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현재 최대 1개의 기록물을 보유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 무고를 증명하기 위해 나름 유용하게 쓰인 능력이었고, 세츠나에게 내 기억을 갚을 때도 나름의 쓸모는 있었던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 능력은 ‘기억의 전이’라고 부르기엔 아쉬운 면이 있었다.


기록물을 두 손으로 직접 훼손해야 발동하는 능력이었고, 막상 쓴다고 해도 실감 나는 동영상을 보여주는 정도의 능력이었으니까.


물론 백 번 듣는 것보단 한 번 보는 게 나은 만큼 ‘기억 발굴’로 읽은 기억을 전달하는 용도로 연계할 순 있지만, 고작 그 정도로 끝인 능력이라기엔 능력의 사용자가 ‘나’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솔직히 나는 말을 꽤 잘하는 편이었고, 굳이 이런 능력 없이도 내가 뭘 봤는지는 잘 전달하는 편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아티펙트의 형태가 붓이 아닌 칼이고, 각성할 당시의 기억이 나비를 칼로 긋는 것이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캐시의 공구 상자나 체리 지팡이의 사례를 보면 아티펙트가 반드시 무기의 형태를 띠는 것도 아니었으니, 내 아티펙트가 칼인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내 칼이 붓을 겸하곤 있다고 해도, 붓과 칼은 엄연히 용도가 다른 물건이었으니까.


“아티펙트라...”


나는 개인실로 돌아와 내 아티펙트인 ‘호접몽’을 바라봤다.


아티펙트가 정신력으로 이루어진 만큼, 정신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과도 크기 정도의 이 칼은 세츠나의 기억에 몰입 능력을 사용할 때면 날의 길이가 어깨너비 정도로 길어졌다. 세츠나의 일본도보다야 짧긴 했지만, 이 역시 아티펙트가 변형되는 사례 중 하나였다.


이외에도 메이나 세츠나처럼 아티펙트에 정신을 집중해 위력과 강도를 높이는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고, 엘리자베스나 캐시처럼 아예 아티펙트의 변형을 전제로 능력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웠다.


능력의 결정체인 아티펙트가 바뀔 수 있다면, 각성자의 능력 역시 노력에 따라 원하는 방향으로 변형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이상이란 게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거라면, 타고난 능력 역시 원하는 방향으로 완성할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칼을 찔러서 기억을 뽑아낼 수 있다면, 반대로 칼을 찔러서 기억을 부여할 수 있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직은 추측에 불과했다.


성공 사례는 없고, 성공할 가능성도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을 투자할 가치는 충분했다.


만약 내가 각성할 때 본 나비가 이상체라면, 내 능력으로 이상체에게 기억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포로로 잡은 이상체와 능력을 사용해 소통하거나 아니면 세뇌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악몽을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신파를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고, 단잠을 꾸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상상의 영역이었지만, 지성을 잃은 이상체에게 사람의 기억을 불어넣어 인간답게 되돌리는 것마저 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우리 중 누군가가 면역력이 떨어져 이상체에 가깝게 변한다면, 그때는 내 능력이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나 역시 체리 메이빌과 같은 서포터였으니까.


육신을 치유하는 서포터가 이미 있으니, 정신을 치유하는 서포터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아니면 정신을 죽이는 서포터가 되거나.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나는 능력을 어떻게 연마할지에 대한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기록 작성’을 자주 사용하여 이해도와 숙련도를 올려야 했다.


기억을 사물이나 생물에 전이시키는 능력은 기록물을 만드는 능력의 상위호환에 가까울 테니까.


그러니 이에 대한 감각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능력 개발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기록물을 제작할 때 얼마나 깊이 있고 정교하게 기억을 부여할 수 있는지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초롱부름이 초롱불로 환각을 걸거나, 철인교회가 악보를 써서 사람에게 악상을 전달한다는 걸 생각하면, 내 기록물 역시 눈으로 확인하거나 읽는 것만으로도 기억을 전달할 수 있도록 개량할 여지가 있었다.


무엇보다 기억을 표현하는 능력이 모자라면 애써 기억을 부여하는 능력을 얻는다 쳐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할 테니 이에 대한 연습은 필요했다.


여기까지 연습을 통해 기본기를 충분히 다지고 나면, 그다음엔 ‘기억 발굴’을 쓰는 도중에 ‘기록 작성’을 쓸 수 있도록 훈련해볼 생각이었다.


‘기록물’이란 결국 기억을 특정한 물건에 부여한 것이고, ‘기록 작성’ 능력은 기록물을 사용한 대상이 기억을 흡수하도록 하는 능력이니, 무생물이나 생물에게 직접 기억을 부여할 수만 있다면 이른바 ‘기억 부여’ 능력이 완성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을 읽지 않고 부여만 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이상체를 상대로 과감하게 능력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전에 캐시의 조언을 들었던 대로, 청사진 구상을 끝낸 나는 아티펙트를 종이에 겨눴다.


한동안은 정신력을 끊임없이 사용하게 될 것이다. 푹 쉬어둔 덕에 회복된 체력은 계속해서 갉아 먹히게 될 것이다. 피폐하고, 혹독한 여정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걱정이 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낸 것에 설렘이 앞섰다.


성공한다면 능력 개발의 선구자가 될 테니까. 새로운 길을 발굴해낸 개척자가 될 테니까.


나는 기록을 시작했다.


이상을 거머쥐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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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회장, 회귀, 회상 (1) +2 23.07.25 485 27 13쪽
37 기억술사 (3) +1 23.07.24 441 33 12쪽
36 기억술사 (2) +2 23.07.23 439 26 13쪽
» 기억술사 (1) +1 23.07.22 444 31 12쪽
34 아침 해 23.07.21 460 35 12쪽
33 새벽녘 (3) +1 23.07.20 466 34 15쪽
32 새벽녘 (2) +3 23.07.19 526 34 13쪽
31 새벽녘 (1) +1 23.07.18 530 33 13쪽
30 불면의 밤 (2) +5 23.07.17 564 40 15쪽
29 불면의 밤 (1) +4 23.07.16 570 33 13쪽
28 길을 트는 자 (4) +5 23.07.15 592 39 13쪽
27 길을 트는 자 (3) +5 23.07.15 599 39 13쪽
26 길을 트는 자 (2) +5 23.07.14 733 50 13쪽
25 길을 트는 자 (1) +4 23.07.13 830 4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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