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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쿤1 님의 서재입니다.

처용과 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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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쿤1
작품등록일 :
2015.03.24 22:14
최근연재일 :
2015.03.29 22:27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15,819
추천수 :
224
글자수 :
257,916

작성
15.03.27 19:32
조회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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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7쪽

변혁의 소용돌이 16

DUMMY

“실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오늘 손님은 없지 않아요?”


“지금 막 오셨는데요. 전에 아시는 분이시라고........ 성함은 허준님이십니다. 일행이 한분 계시고요.”


연지는 그만 정신이 멍해졌다. 5년이 됐지만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분명 내 쪽에서 먼저 절교를 선언했지만 마치 절교를 당한 기분이 들었던 아득한 옛사랑. 시간은 많이 지났으니 감정의 골은 없을 수도 있겠다싶어서 키폰을 눌렀다.


“우선 무슨 용건인지..........”


“직지사 탱화를 보고 싶어서 왔다고 전해주십시오.”


허준이 먼저 큰 소리로 연지가 들을 수 있게끔 말을 했다. 징검다리를 없애버리는 준을 보며 형석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직지사 탱화를 보기 위해서 오셨다합니다.”


그래도 큐레이터는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 내실에선 아무 말도 없이 먼저 문이 열리고 연지 홀로 나왔다. 얇고 분홍의 씨쓰루 블라우스를 받쳐 입은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뺨에 홍조를 띄었다. 서로 어색해 하며 누가 먼저 말을 꺼내는지 시합이라도 하는 듯 말이 없었다. 당연히 큐레이터도 상황을 알 수 없어 입을 닫고 있었다.


“직지사 탱화를 들여오시느라 많은 수고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형석이 한 말이었다. 인사말을 거창하게 꺼낸 것은 일단 존경의 뜻이 컸다. 연지는 당황하여 손 사레를 치지만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형석은 전보다 더 아름다워졌다는 표현이 걸맞은 그녀의 자태에 그만 넋이 나가버렸다.


“제가 아니더라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행동했을 겁니다. 저는 단순히 우연한 기회를 포착했을 뿐이고 돈에 여유가 있었을 뿐입니다.”


“잃어버린 유산을 뒤쫓는 일은 단순한 호기심 정도는 아니라 믿습니다. 오랜 노력의 경주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 아닙니까?”


연지는 대답을 하지 않고 준을 바라보았다. 준은 아까부터 계속해서 연지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정말 오랜만........”


큐레이터가 지켜보고 있기에 연지의 위상을 생각해서 존대를 하기로 했다.


“유학 가는 얘기까진 들었는데 이렇게 미술관 관장님으로 오시고 게다가 잃어버렸던 위대한 유산과 함께 금의환향하셨다니 경하와 존경을 표합니다.”


너무 존칭이 심했다. 거리감이 확연하게 표현되자 연지는 마음이 아팠다.


“너무 형식에 얽매여 인사치레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옛날처럼 그냥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연지는 손으로 방 가운데 소파로 준 일행을 안내했다. 그걸 기화로 큐레이터는 재빠르게 차를 준비했고 현석과 준은 연지의 얼굴과 탱화를 연신 돌아가며 감상 아닌 감상을 했다. 이제 연지의 볼의 홍조는 옅어졌다.


“저는 친구가 아니니 그냥 말씀드리겠습니다. 준이 이 탱화를 보기위해서 어제 직지사까지 다녀왔습니다. 학승에게서 그 탱화가 여기에 있다는 소릴 듣고 밤에 여기에 왔으나 문이 잠겨 다시 학교 연구실로 들어가 한숨자고 지금 같이 오게 된 것입니다.”


“어머! 죄송하게 됐네요. 하지만 일반인 공개는 계획에 없어 그냥 왔더라도 보지 못할 수도 있었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옛정을 들먹이는 게 제대로 먹힌 거죠, 안 그렇습니까?”


형석이 뻔뻔스럽게 이죽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다음 말을 하지 않자 화랑 안은 적막에 싸였다.


“그런데 둘은 사귀던 사이였던 것 같은데 왜 헤어졌습니까? 왜 전엔 모르는 척 했습니까?”


누구도 대답하지 못할 성질의 질문이었다. 연지나 준 모두 얼굴이 붉어졌다.


“아! 쓸데없는 질문이었나요? 죄송합니다. 두 분.”


이때 큐레이터가 준비한 차가 나오고 셋은 아무 말도 못하고 차를 세팅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물 대여섯 살로 보이는 큐레이터가 가슴이 움푹 파인 옷을 입고 젊은 남자들에게 찻잔을 건네느라 어색하게 한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하는 폼이 부자연스러워 형석은 외면하며 그림만 바라보았다. 준은 계속 연지의 얼굴을 살피다가 형석의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


“호호호!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연지가 먼저 인사를 했다. 형석은 얼른 손으로 찻잔을 들어올렸다.


“이 그림 얼마야?”


연지는 또 말을 하지 못했다.


“야! 무슨 질문을 그딴 식으로 하냐?”


“그럼 어떻게 해?”


“그냥, 뭐 ‘이 직지사 탱화는 한 점에 얼마에 구입하셨습니까?’ 이렇게 물어야지...........”


“뭐가 달라?”


연지가 파안대소했다.


“그럼 직지사에 가서는 뭐라 말했어?”


드디어 평이한 말로 자연스럽게 연지가 물어왔다. 그녀는 볼우물이 들어가고 법령이 가지런해 고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눈썹 또한 곱게 펼쳐져 신비로운 느낌마저 드는 매력적인 여자였다. 형석은 그림을 보다 말고 연지에게 눈이 꽂혔다.


“왜 직지사 탱화가 유명하냐고 물었더니 자신도 잘은 모르지만 오래된 절이어서 그런 점이 하나고 둘째는 사실적인 그림이라고 하더라.”


“사실적인 그림?”


연지는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탱화가 그것도 산신도가 사실적인 것은 없을 텐데.........”


셋은 모두 벽 뒤에 걸린 탱화를 바라보았다. 흰 수염에 비단 옷을 입은 산신이 두 명의 동자승을 데리고 있고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신선 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민화풍의 과장된 그림일 뿐이었다. 사실적이란 표현은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다.


“내가 보기에 저 그림은 값어치가 없을 겁니다. 짝퉁이거나........”


“왜 그렇죠?”


연지는 자신이 사온 그림이 값어치 없다는 말에 발끈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이유를 물어봤다는 것이 준으로서는 신기했다. 형석의 말의 요점은 진정 탱화의 가치는 도교풍의 신선도가 아닌 한국적인 신선도가 제값을 할 텐데 그런 그림은 없다고 봐야한다는 말이었다. 뒤에 걸린 그림은 가로 3미터 세로 1미터짜리의 거대한 것이지만 완전 중국풍이었다. 연지는 그런 평가에 서글퍼하지도 분노해하지도 않았다. 마치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처럼 태연했다.


“괜찮아?”


형석의 혹평에 기분이 괜찮은지 준이 물었다. 그림에 대한 평가가 올바른지 그른지의 문제보다도 그로 인한 데미지를 입었을 연지가 걱정이 돼서 괜찮은지 준이 물어왔다는 사실에 연지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저거 천만 원짜리야.”


연지가 뒤에 걸린 그림을 턱으로 가리켰다. 주름 한 점 없는 그녀의 목선은 희고 가늘었다. 격정적인 마음이 생기는 걸 피하느라 형석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와! 신문에서는 수억을 들였다고 했는데........”


셋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마치 퀴즈풀이라도 하는 듯.


“저거 말고 또 있어?”


준이 대뜸 던진 말에 큐레이터가 깔깔대며 웃었다. 준의 손가락은 신선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준과 형석은 갑작스런 웃음에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큐레이터는 가짜 그림을 놓고 품평회를 하듯 갑론을박하는 모습을 재미있게 지켜보았다.


“우린 전시장에 진본을 걸지 않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전시기획중인 것도 아니고요. 당연히 진본은 다른 곳에 있겠죠.”


“그럼 저건 뭐예요?”


이번엔 형석이 손가락으로 신선도를 가리켰다.


“위본으로 그냥 요즘 그린 탱화예요.”


“아우~!”


형석은 마치 속임수에 놀아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들 소리 내서 크게 웃었다.


“나. 진심인데 직지사 탱화 볼 수 없을까?”


“왜 보려고 하는데?”


“웬만한 절간에 있는 산신도는 죄다 도교풍이어서 우리나라 전래의 신앙에 정통으로 입각한 그림이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왜 보려고 하는데?”


“글쎄. 그게 왜 보냐고 물으니까 대답이 딸린다.”


“진품을 보면 당시 불교와 전통종교와의 대립에서 밀려버린 우리 근본 신앙의 바탕을 느껴보고 싶어서 라고나 할까.”


준이 명쾌하게 답을 못 내리자 형석이 대신 대답은 했지만 그 역시 명쾌한 건 아니었다. 단언적인 표현을 찾지 못하자 너털웃음을 지어 민망함을 만회하려했다.


“망해가는 종교의 부침을 겪은 당시 지식인의 눈물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눈물? 없던데...... 그림 그리던 환쟁이는 지식인도 아니고...........”


“넌 봤어?”


“당연히 봤으니까 사왔겠지.”


“아. 그렇구나.”


연지가 피식 웃었다. 잘만 하면 보여줄 것 같은데 일부러 애를 태우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준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럼 가자.”


준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지가 당황했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형석은 얼른 준의 팔을 잡아 당겨 억지로 앉혔다.


“우린 이 탱화에 매우 관심이 많고 그동안 애쓰고 다닌 게 다 이 그림 때문입니다.”


“그게 이유에요?”


“뭐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형석이 안타까이 물었다. 일부러 얼굴을 찡그리며 불쌍해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얘는 전통사상에 대해서 삼 개월 만에 전문가가 되었데.”


“알아.”


“엉? 알아?”


“전에 편의점 앞에서 그런 말 했었지.”


“아! 그때 우리 모두 그 말을 같이 들었었죠. 얘는 그 후로 번개에 맞아 시름시름 앓다가 죽기 직전에 그 그림을 보고 나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으로........”


“그건 번개가 아니고 감전입니다. 아주 일시적인........ 그리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나도 그때 같이 맞았거든요.”


“아하!”


형석은 억울한 듯 몸을 짜내며 일어섰다.


“이분은 그렇게 몸을 비틀어서 장이 꼬여서 먼저 죽을 거예요.”


연지가 퉁명스럽게 말을 하자 준과 형석은 멍해졌고 큐레이터만 미친 듯이 웃어댔다.


“웃지만 말고!”


형석이 큐레이터에게 화를 냈다. 그녀는 당황하여 멈칫했다.


“실장님이 뭐에 약한지 이실직고해요. 뭘 해야 마음이 풀어진대요?”


형석은 큐레이터에게 손가락을 찌르듯 세우고 연지의 눈치를 보았다.


“마음에 상처를 주었으니 그 상처를 말끔히 치료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겠죠?”


그녀는 쟁반으로 가슴을 가리듯이 하면서 웃었다.


“너! 너 때문이야!”


형석이 손가락 끝을 자신의 코에 대고 있다가 다시 준에게 삿대질하고 덤벼들었다. 소파에 뒤엉켜 간지럼을 태우고 나서 형석이 일어섰다.


“내가 혼내줬어요.”


“우쭈쭈! 그랬쪄요?”


연지가 형석의 엉덩이를 토닥이는 시늉을 하는 동안 형석은 웃옷을 들어 올리고 엉덩이를 내밀었다.


“직지사에 대해 뭔가 알아낸 건 있어요?”


“신라 눌지왕 때 불법을 전하러 온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선산 도리사를 창건하고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쪽에 큰 절이 설 자리가 있다`고 하여 직지사로 불렸다는 거.”


“한 때는 정실만 352칸에 달하고 부속 암자가 26개나 있었을 정도로 동국 제일의 가람이라는 칭송을 받았으나 지금은 많이 축소되었다는 거. 그리고 산신사상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절이라는 거.”


“좋아요. 그럼 그림을 보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죠?”


연지가 두 사람을 보고 말을 하고 마지막에는 큐레이터를 바라보았다.


“음식물을 가지고 들어가면 안 됩니다. 카메라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림을 만지거나 훼손하면 안 됩니다.”


그녀는 사무적인 어조로 또박또박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연지가 내실의 문을 열었다.

가로 세로 1미터 내외의 작은 소품이 벽에 걸려 있었다. 검은 호랑이. 밤이어서 특별한 무늬와 색은 보이지 않았다. 물컹한 살이 넘실거리고 바짝 서있는 털끝이 까실하게 찔러오는 맹수의 기상이 느껴졌다. 교교한 초승달의 음침한 기운이 서늘하게 전달되는 그런 그림이었다.


“우와~.”


“이런 그림도 있습니까?”


“저도 이런 그림은 처음입니다. 탱화인지도 몰랐어요. 그냥 풍경도 아니고 그런데 직지사라고 전해진 것도 아니고 극락전이라고만 씌어있어요. 전문가가 아니면 전혀 알아보지 못할 그림이었어요.”


“와~. 저 눈빛이 장난이 아닙니다. 살아있어요.”


맹수의 기운이 눈빛에서 느껴졌다. 이러니 사실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이런 그림이 어떻게 탱화고 산신각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지?”


“조선후기에 그려진 거라고 기록에 전할 뿐이야.”


김천 직지사에 있는 탱화가 한국 최고의 경지에 오른 불교 미술의 보고라 한다. 처음 인상은 맹렬한 기세로 노려보는 위압적인 기상이 전부지만 점차 볼수록 자애로운 인상이 사람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뒤에 원경처럼 서있는 산신의 수염이 검었다.


“수염이 검은데 나이가 젊다는 뜻인가?”


“아니. 흰 수염은 중국 도교식이고 우리나라의 산신은 검은 수염을 해야 제격이야. 단군상도 그렇거든.........”


“이유가 따로 있나?”


“과학적인 해석은 없지만 우리나라의 신선들은 명약을 먹고, 물론 산삼이겠죠? 불로장수한다는 설을 따르고 있어. 중국의 도교에서는 그런 한국의 약초를 찾기 위해 예부터 그렇게 한반도의 명산대천을 뒤지고 다녔지만 실패했지. 진시황의 얘기도 그런 종류의 하나로 꽤 상징적이야.”


“아! 그렇겠군.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군. 호랑이의 그림도 진경이고.”


“많은 산신도가 민화처럼 그려져 호랑이가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지. 진짜 산신이라면 저렇게 위엄 있고 무서운 기세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악인들의 눈에는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의 위압감을 충실하게 주어야하기 때문에라도.”


산신의 뒤에는 늙은 소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데 이 또한 수작이었다.


“저 소나무는 한웅이 태백산에 내려 와서 원래는 삼위산이었지. 신시를 열 당시의 신단수를 의미해. 삼위태백이라고 명백하게 단군신화에 기록되어 있지.”


“아, 그런데 신단수는 나중에 박달나무라고 하지 않았나?”


“물론 삼국유사나 다른 책에서는 박달나무의 기원을 단군신화로 잡는 것들이 있긴 하지. 그러나 우리나라 신화의 기원으로 본다면 소나무와 호랑이로 묘사하는 것이 올바르다 하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그림이 탁월한 겁니다.”


준은 다시 호랑이를 보았다. 강렬한 눈빛이 무서우면서도 다시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주는 묘한 기운이 있었다. 눈동자 위에 있는 흰 터럭 한 올까지도 세밀하게 그린 명품이라고 생각했다.


“조명을 낮추고 어스름한 밤에 보면 더 강렬해! 한번 봐 바. 난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연지가 조명을 낮춰주고 밖으로 나가자 점점 호랑이는 그림에서 밖으로 빠져 나올 것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야행성 맹수답게 눈빛은 발광했지만 무서운 게 아니라 준엄한 심판의 눈빛과도 같다는 생각에 미치자 온 몸이 오히려 따뜻해졌다. 형석은 옆에서 신음소리를 냈다. 준은 그런 형석을 고개를 돌려 보자 그의 몸이 전율을 느끼듯 파르르 떠는 것이 보였다.

준은 강화도에서 체험한 그 전기충격이 고스란히 몸을 훑어오는 게 느껴졌다. 순간 허공에서 일갈하는 소리가 있었는데 얼핏 알아듣지 못해 가만히 있었다.


‘어디로 가느냐?’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화랑 안에는 형석과 단둘이 있었다. 소리의 근거를 몰라 일단 외면하고 서있자니 다시 소리가 울렸다.


‘어디로 가느냐?’


몸이 떨렸다. 순간, 그 소리는 바로 그림을 보는 자에게 하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준과 형석은 호랑이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 고 말았다. 호랑이의 안광에 완전히 지배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재차 물음이 또 들려왔다. 이제는 어떤 대답이라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르겠습니다.’


입은 열리지 않고 생각으로만 대답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다시 허공의 소리가 울렸다.


‘너는 어디로 가길 원하느냐?’


‘제가 어디로 가겠다고 생각하면 그리로 갈 수가 있는 건지요?’


‘너는 어디로 가길 원하느냐?’


‘사람들의 갈등이 없는 세상으로 가고 싶습니다. 아니면 갈등이 생기기 전의 세상으로 가고 싶습니다.’


‘너는 어디로 가길 원하느냐?’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데라도 좋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습니까?’


호랑이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노여움은 없었다. 단지 엄중한 심판관 같은 정밀한 관찰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의 종교는 위선과 아집으로 닫혀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라는 껍데기를 벗어버리면 인간의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원래의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요? 종교라는 외피를 벗어난 참된 인간의 모습은 기대하면 안 되는 건가요?’


이제 던지는 말들은 허공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 아닌 내 마음 속의 화두를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호안을 중심으로 환한 광채가 방사선처럼 퍼져나갔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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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변혁의 소용돌이 17 +1 15.03.27 529 9 13쪽
» 변혁의 소용돌이 16 15.03.27 466 5 17쪽
25 변혁의 소용돌이 15 15.03.27 261 7 14쪽
24 변혁의 소용돌이 14 15.03.27 614 7 15쪽
23 변혁의 소용돌이 13 15.03.27 648 8 21쪽
22 변혁의 소용돌이 12 15.03.27 586 6 20쪽
21 변혁의 소용돌이 11 15.03.27 589 8 32쪽
20 세기말 증후 37 15.03.24 665 10 26쪽
19 세기말 증후 36 15.03.24 228 5 25쪽
18 세기말 증후 35 15.03.24 484 5 25쪽
17 세기말 증후 34 15.03.24 471 8 18쪽
16 세기말 증후 33 15.03.24 479 7 17쪽
15 세기말 증후 32 15.03.24 420 6 17쪽
14 세기말 증후 31 15.03.24 355 7 22쪽
13 세기말 증후 29 15.03.24 610 6 17쪽
12 세기말 증후 28 15.03.24 697 4 18쪽
11 세기말 증후 27 15.03.24 418 9 20쪽
10 세기말 증후 26 15.03.24 579 5 27쪽
9 세기말 증후 25 15.03.24 597 8 18쪽
8 세기말 증후 24 15.03.24 454 10 20쪽
7 세기말 증후 23 15.03.24 248 6 15쪽
6 세기말 증후 22 15.03.24 460 7 5쪽
5 세기말 증후 21 15.03.24 480 9 15쪽
4 세기말 증후 14 15.03.24 657 9 26쪽
3 세기말 증후 13 15.03.24 611 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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