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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쿤1 님의 서재입니다.

처용과 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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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쿤1
작품등록일 :
2015.03.24 22:14
최근연재일 :
2015.03.29 22:27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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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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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글자수 :
257,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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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2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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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세기말 증후 28

DUMMY

“서로 논공행상에만 관심이 있어 흥무 추존 건은 염두에 없었고 김유신의 증손이 반란을 일으키고 후손들은 오히려 6두품으로 강등되기까지 했습니다. 같은 진골이었어도 상대적인 불리함을 가지고 있던 김유신계는 신라에서는 견디기 어려운 처우를 받는 것입니다. 신라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세습도 막고 벼슬의 기회도 공정해져야만 합니다.”


범교사는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정치가의 뒷얘기를 들려주었다. 낭도들은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대물림되던 자리를 모두 다 내놓아야 한다는 말은 진골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습을 막는다는 것은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벼슬을 빼앗기는 것과 같은 말이 됩니다.”


숙종랑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반발했다. 낭도들도 같은 마음이었지만 쉽게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신라가 위험하다면 뼈를 깎는 고통도 함께해야 하는 것이란 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계원랑이 무신의 후예답게 동의를 했다.


“하지만 진골들은 그런 말에는 목숨을 걸고 반대할 겁니다. 안 봐도 뻔하죠.”


예흔랑이 쉽게 자신의 표현을 했다.


“그런 걸 정치라 하는 거요. 누가 곧이곧대로 벼슬을 내놓으라고 하겠소. 다 요령이 있어야지.”


낭도들의 발걸음은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계속되어 열흘하고도 닷새에 이르러서야 금성에 당도했다.

어둑한 시가지에 행인은 드물지만 금입택들이 환하게 길을 밝혀 주고 있었다. 낭도 일행은 급한 걸음으로 한 금입택 앞을 지나갔다.


“능력은 있는데 남의 밑에서 일을 하려는 게 겸손이라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숙종랑은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고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다 헛소리야. 중놈들은 자기들은 능력은 있는데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니 왕사정도에서 만족해야 되잖아? 다 그 변명이라고. 자기는 미륵불인데 세상이 안 알아준다는 말하고 같잖아.”


계원랑은 옥룡자를 어느새 땡중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맞아. 남의 밑에 들어가 일을 잘 해서 눈에 띈다. 그건 완전히 믿는 놈에게 뒤통수 맡는 거라니깐. 뒤로 호박씨 까라는 말이잖아, 결국은?”


예흔랑도 대중의 입김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에이~. 스님의 말씀은 귀인은 하늘이 내리는데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의 관점을 얘기한 거지. 어떤 사람이 하늘이 낸 것인지 알아볼 수 있냐는 말은 아니었어. 세 가지였나?”


그래도 응렴은 옥룡자선사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두 가지 같았는데.......”


범교사가 은근하게 수정해주었다.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 알아볼 겨를도 없을 때 계원이 주위의 금입택을 보고 소리를 쳤다.


“와! 저기. 금입택이다!”


“금입택들이 반기는 것을 보니 고향에 온 느낌이 확실하게 드는군.”


응렴은 밝게 미소 지으며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스스로 자신을 검소하고 겸허하기 때문에 부유함을 과시하지 않아야 귀인이라는데, 아니 군자라 했나? 아무튼 금입택을 지어 자랑하는 것은 그런 위인은 아니란 말이렸다?”


숙종랑이 횡설수설하듯 설명하자 두 가지인지 세 가지인지가 뒤섞여 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 분 얘기는 그만 하도록 합시다. 귀가 다 아픕니다.”


옥룡자와 같이 있게 된 후로 지도자로서의 위치에 흠집을 남긴 범교사는 이제 노골적으로 그를 폄하하기 시작했다.


“검소함과 겸허함은 다 같은 말이외다. 후세 사람들이 말을 다양하게 늘어놓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같은 듯 다른 듯 표현만 거창해 진거라우. 검소한 자는 당연히 겸허하지 더 무슨 차이가 있겠소. 게다가 부유함을 과시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그건 무슨 어법이어? 검소하고 뭐가 다르단 말이오?”


“우리가 보름간 노독을 쌓았는데 예서 풀어야 하나 시간이 없는 게 흠이군요. 저의 아버님과 큰 집 삼촌들께서도 올해 중에 금입택을 마련할 것입니다. 얼마 안 남았어요.”


계원랑은 골치 아픈 논쟁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저기 보이는 제일 높은 지붕이 바로 김국선의 금입택이죠?”


숙종랑은 얼른 그 말을 받아 국선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도 역시 논쟁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네. 맞소. 저기 담장에 복사꽃이 아로 새겨진 집이 바로 우리 집이오. 내년에 궁궐에 더 가까운 곳으로 한 채 더 장만하기로 했습니다. 그건 내집이 될 거요. 집들이 때 부르리라.”


“당연히 불러야죠.”


예흔도 맞장구를 쳤다.


“대청마루를 페르시아산 구수로 다 덮기로 했답니다. 엄청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더군요.”


“듣자하니 페르시아산 구수가 수입이 까다롭다고 하더군요.”


“그거 간단히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모르셨다면 내가 자세히 알려드리죠.”


이제 화제전환은 확실하게 일어났고 응렴은 자신의 위치를 과시할 수 있게 된 것을 기꺼워하고 있었다.


“방법이란 게 뭡니까? 나도 좀 들어둡시다. 당장에 금입택을 지을 형편은 못되지만 나중에 우리 집도 그걸 마련한다면 내가 손을 써야 체면이 서니까.......”


“궁궐에 납품하는 상인들이 김윤흥 이찬님과 연통이 닿는다고 합니다. 그 품목을 곱으로 신청하면 다른 곳에서 동일한 품목을 수입하려는 자들에게 세금을 물리고 왕실에 들어가는 품목에는 절세를 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내가 필요한 품목을 왕실용이라고 하면 세금 없이 싸게 사들일 수 있는 겁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그럼 이찬 대감과 친분이 있어야 가능한 겁니까?”


“아니, 굳이 친분이 없어도 친분이 있다고 밝힐 증거만 대면 그만이오. 아전들이 감히 조사를 할 수나 있겠습니까? 그냥 그렇다면 그런 줄 알겠죠.”


멀리 역참이 눈에 들어왔다. 다섯 명의 낭도들은 역참으로 들어섰다. 역참지기들이 떼로 몰려나와 영접을 했다. 응렴은 거만하게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범교사의 지휘로 역참지기들이 낭도들에게 말을 대령했다. 준비를 마치자 응렴은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말에 올라 길을 떠났다.


“이찬 대감께 나중에 선물을 하면 무마됩니다.”


범교사가 끊어진 말을 다시 이어 화제에 몰입했다.


“아! 알았습니다. 생각보다 쉽군요.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을 알아두면 여러모로 편리하다는 말이 괜한 소문만은 아니군요.”


숙종랑은 입맛을 다셨다. 다섯 필의 말이 먼지를 날리며 궁궐로 들어선다. 호위를 맡은 병사들이 말을 제지하고 검문을 한다. 범교사는 병사들에게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고 안으로 안내를 받는다. 말을 묶어두고 걸어서 만찬장으로 들어선다. 보름에 시작하기로 했던 만찬이 지금 막 진행되고 있었다.

진수성찬이 마련된 연회장에 대신각료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고기를 뜯는 일로 분주했다. 중앙에는 헌안왕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신하들과 음식을 들고 있다. 궁궐 밖으로는 무관들이 대문을 호위하고 있지만 궐내는 무장을 하지 않은 무리들이 순번을 돌고 연회장 근처에는 문관들만 있다. 왕의 친위대만 수비적인 집창을 하고 있다.

헌안왕은 신라의 47대 왕이며 삼국을 통일한 지2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왕이 되었고 이제 집권 2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대왕폐하! 국선 응렴이 이제 왔습니다. 그의 낭도들도 함께 입궐했습니다.”


환수가 응렴의 등장을 알렸다. 헌안왕은 자신의 딸을 책임지고 다음 왕권을 물려받을 헌헌장부로 김응렴 국선을 손꼽고 기다리고 있었다.


“응렴이 이제 왔다고?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운집한 신하들을 헤집고 응렴 일행이 등장했다.


“폐하! 송구하옵니다. 신 응렴, 많이 늦었습니다.”


응렴은 뛰어 들어오며 한쪽 무릎을 꿇었고 낭도들도 똑같이 따라 했다.


“하도 오지 않기에 쓴 술만 마시게 되었잖은가?”


헌안왕은 기쁘면서도 짐짓 화난 척 거칠게 잔을 테이블위로 던졌다.


“송구합니다. 폐하. 소신을 벌하여 주십시오.”


“하하하! 아니, 그냥 과인이 해본 소리니 괘념치 말라. 오늘은 즐거이 백관들과 함께 만찬 겸 담소를 하기로 한 것이니 괜찮다. 김응렴 국선! 그런데 그대는 어디에서 무얼 하다가 이렇게 늦은 건가?”


“네, 폐하. 소신들은 낭도 수련을 위해 산천을 주유하다가 시각을 맞추느라 급히 뛰어 왔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주유산천이라....... 그거 좋지. 과인도 소싯적에 주유산천을 많이 했었지. 호연지기를 키우고 대의를 품고 하는 데는 그것만한 게 없으니까 말이야. 그럼 하던 주유는 다 마치지 못하고 예까지 오기위해 수련을 포기한 게냐?”


“날짜 계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소인의 불찰이었기에 수련을 접고 오게 되었습니다. 폐하!”


젊음이 좋구나! 그래 이제 그만 일어나고 여기 와서 앉아서 내가 주는 술을 한잔 받거라!“


“망극하옵니다. 폐하.”


응렴이 잔을 받아들고 좌석에 앉자 낭도들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대의 낭도들인가?”


“예, 폐하. 부제 범교사입니다.”


“부제 범교사 인사드립니다.”


응렴이 손을 들어 하나씩 소개하고 소개를 받은 낭도들은 일어서며 한발 앞으로 나서 절을 했다.


“낭도 계원랑입니다.”


“요원랑입니다.”


“숙종랑입니다.”


“예흔랑입니다.”


“흐음~. 모두들 헌헌장부일세. 듬직하구먼. 다들 화랑들인가?”


헌안왕은 손수 응렴과 범교사의 잔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환수가 나머지 낭도들의 잔을 채웠다.


“예, 모두 화랑이고 부제는 진골입니다.”


응렴은 범교사를 친근하게 다시 소개했고 왕은 손을 들어 마시라고 권유했다.


“주유는 어디를 경유했는가? 편히 앉거라.”


“네, 폐하. 경주 남산을 시작으로 팔공산, 소백산, 오대산, 금강산을 돌아 왔습니다.”


응렴이 잔을 마셔 비우고 낭도들도 일제히 마셨다.


“흐음. 과인도 다녀본 곳이군. 절경이었지. 아! 옛 시절이 생각나는구나. 헌데, 경치만 감상하는 것은 주유의 취지는 아닐 것이야. 과인은 어릴 적에는 아무 의견도 없이 그냥 시키는 대로 주유만 했었지. 시간이 지나고 되돌려 생각해보니 그때 어떻게 깨달았나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낭도들이 자리를 찾아 앉고 응렴은 범교사의 눈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미 다 준비된 얘기들이라 긴장이 되지 않았다.


“돌아보니 궁궐에서는 폐하의 선정의 은혜가 곳곳에 넘쳐나 궁성백성들은 풍족하게 살고 있습니다만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백성들은 그 은혜를 고루 입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찬 김윤흥과 그의 실제인 숙흥, 계흥 형제가 차가운 표정으로 응렴을 노려보고는 있었지만 딱히 반박할 공간을 찾지 못했었다. 다른 신하들도 응렴이 도에 넘치게 불경한 발언을 한다는 의미로 잔뜩 눈에 힘을 주고 지켜보고 있었다.


“저런 발칙한 놈!”


계흥은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배석한 지인들에게는 들릴듯한 소리로 역정을 냈다.


“저건 치기입니다. 그냥 두십시오,”


옆에 있던 아찬이 한마디 해서 계흥의 분을 가라앉히려 했다.


“백성들은 풍족하지 못하게 산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들 사는 모양이 풍족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두 부류로 나뉜다는 말인가?”


헌안왕은 표정에 속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불었다. 응렴은 모골이 송연했지만 이왕 내킨 일이었다.


“사람 사는 세상은 늘 그렇듯 빈부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런 구분이 없는 사정은 없을 것입니다. 하늘의 이치가 그렇다는 것은 소학을 한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관리가 선정을 베풀면 페하의 은혜가 방방곡곡에 널리 퍼질 수 있을 것이니 지방관은 충심으로 사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폐하의 선정을 옳게 진행할 책임감 있고 능력 있는 관료를 등용시키고.......”


순간 범교사는 우려의 눈빛을 보냈지만 응렴은 멀찍이 내다보며 당돌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적재적소에 잘 배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계흥일족들이 노골적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은 이런 관료들의 눈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응렴을 웃으며 맞이했다.


“그래? 능력 있고 책임감도 있는 관료를 등용한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백성들이 폐하의 선정에 감복할 수 있도록 하려면 관료들은 물론이고 명망 있는 귀족이나 호족도 몸소 선행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관료를 올바로 등용하고 귀족이나 호족들도 몸소 선행을 해야 한다?”


왕은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몰라 복창을 하듯이 응렴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예, 폐하.”


“그건 일견 당연한 거지. 그런데 그런 관료를 등용하지 못했단 질책으로 들리는데 그게 맞는가? 짐이 그럼 관료를 등용하는 데 있어서는 실정을 했다는 말인가? 새로 능력 있는 관리를 등용하라? 짐은 그런 점에서 실패를 했다는 말이지?”


일순간이었다. 관료들은 모두 겁먹은 표정으로 마비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에 대비되듯이 헌안왕의 표정은 차분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없도록 매우 냉철했고 마치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폐하!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소신 결코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응렴은 제자리에서 튀어 올라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이 말이다 이놈아!”


헌안왕은 격노한 듯 소리쳤다.


“인사의 등용과 적소의 배치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폐하! 감히 국선은 왕실을 능멸하는 불충한 발언을 했습니다.”


숙흥은 흥분해 떨면서 말을 했지만 윤흥이 손을 들어 제지하는 척만하고 계속 응렴을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숙종랑과 범교사가 서로 걱정스런 눈빛을 교환했지만 이내 범교사는 응렴의 당당함을 믿었고 왕의 태도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방법은 있다고 사료됩니다. 폐하!”


응렴이 명료하게 말했다. 좌중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범교사가 보기에 응렴이 자신에게 사람들의 이옥을 집중시키는 버릇이 있는 것을 어전에서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의 감을 믿었다.


“있어?”


좌중이 술렁거렸다.


“있다고? 그럼 있으니까 처음 말을 꺼냈겠지.”


왕은 본격적으로 대화를 한다는 의미로 상체를 기울였다.


“소신 산천을 주유하면서 덕망 있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소신만의 관점을 세웠습니다. 결코 폐하의 하교에 불충한 것은 아닙니다. 통촉하시옵소서.”

“그래? 그럼 특별히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니까 한번 들어나 보지, 그게 뭔가? 아! 이 자리는 대전의 자리도 아니고 연회 아닌가? 걱정하지 말고 어서!”


흥분한 배관들의 관심을 알고나 있다는 듯 왕은 풍부한 몸짓을 해가면 응렴을 안심시켰다.


“소신이 보기에는 세 가지 귀인의 형상이 있습니다.”


왕은 잔을 들었다. 범교사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응렴은 그런 범교사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첫째는 겸손한 자입니다. 충분히 고위직급의 일을 수행할 능력도 있고 민심을 등에 업고 있지만 성큼 그 자리를 탐하지 않고 겸양지덕을 발휘합니다.”


범교사는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심했다. 하지만 백관들은 행여나 자신의 이야기가 오르내리지나 않을까하고 노심초사하는 표정들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래? 그런 겸손은 좋은 것이고 겸양지덕을 겸비한 관리라면 응당 등용하는 게 정리지만 과연 덕과 능력을 고루 갖춘 자임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문제인데 그런 것은 따로 있나?”


“겸손은 자신의 입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각양각층의 여러 사람이 추천하는 방법이 가장 옳다고 봅니다.”


“그래. 좋구나. 각양각층이라하면 편협한 지우관계로 일관되는 그 동안의 천거방식과는 차원이 다르네.”


왕은 은근슬쩍 고개를 돌려 윤흥일파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윤흥은 깜짝 놀라 술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왕은 못 본 체하고 다시 응렴을 보았다.


“다음은?”


“네. 폐하. 그 둘은 부유한 태생이지만 검소한 생활이 몸에 벤 사람입니다.”


“부유하자만 검소하다? 검소한 게 덕망 있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검소한 인사라면 필요한 것 외에 남은 재물들을 쓸 곳을 찾아야 할 겁니다. 풍요로운 재물이 쓸모를 잃고 방치되는 것도 죄악으로 여길 겁니다. 그리고 허투루 낭비되는 것도 참지 못하니 당연한 이치로 이런 사람들은 백성들의 필요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물산의 흐름을 다스릴 줄 알 것입니다. 당연히 백성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는 선정을 베풀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사람만이 충분히 지방 관리로서의 임무를 해낼 수 있습니다.”


“야! 그거 멋진 발상이네.”


왕은 박수를 쳤다. 좌중은 새롭게 환기가 되었고 범교사는 이제야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검소하다면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않고 사치스러운 패물도 하지 않으며 사치스러운 집을 짓지 않을 거란 말이로군.”


귀족들은 이야기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헛기침을 하거나 딴 짓을 했다 그러나 범교사도 마찬가지로 불안했다. 금입택이 눈에 아른거렸던 것이다.


“그렇게 사료됩니다. 폐하.”


“하하하! 그러면 여기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은 관료로 임명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란 말인가?”


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관료들을 손가락질 했다. 응렴도 순간적으로 실수했음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계속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고개를 푹 숙였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렇다면 셋째는 무언가?”


범교사와 응렴은 서로 마주 보았다. 뚜렷이 좋은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셋째요?”


“그래, 셋째. 첫째가 겸손이오 둘째가 검소라면 이제 셋째가 되지.”


응렴은 아무리 생각을 쥐어짜도 셋째가 무엇인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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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변혁의 소용돌이 14 15.03.27 614 7 15쪽
23 변혁의 소용돌이 13 15.03.27 648 8 21쪽
22 변혁의 소용돌이 12 15.03.27 586 6 20쪽
21 변혁의 소용돌이 11 15.03.27 589 8 32쪽
20 세기말 증후 37 15.03.24 665 10 26쪽
19 세기말 증후 36 15.03.24 228 5 25쪽
18 세기말 증후 35 15.03.24 484 5 25쪽
17 세기말 증후 34 15.03.24 471 8 18쪽
16 세기말 증후 33 15.03.24 479 7 17쪽
15 세기말 증후 32 15.03.24 420 6 17쪽
14 세기말 증후 31 15.03.24 355 7 22쪽
13 세기말 증후 29 15.03.24 610 6 17쪽
» 세기말 증후 28 15.03.24 697 4 18쪽
11 세기말 증후 27 15.03.24 418 9 20쪽
10 세기말 증후 26 15.03.24 579 5 27쪽
9 세기말 증후 25 15.03.24 597 8 18쪽
8 세기말 증후 24 15.03.24 454 10 20쪽
7 세기말 증후 23 15.03.24 248 6 15쪽
6 세기말 증후 22 15.03.24 460 7 5쪽
5 세기말 증후 21 15.03.24 480 9 15쪽
4 세기말 증후 14 15.03.24 657 9 26쪽
3 세기말 증후 13 15.03.24 611 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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