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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쿤1 님의 서재입니다.

처용과 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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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쿤1
작품등록일 :
2015.03.24 22:14
최근연재일 :
2015.03.29 22:27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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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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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글자수 :
257,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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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24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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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20쪽

세기말 증후 27

DUMMY

다음날 아침 응렴일행은 산행준비를 마치고 일주문 앞에 모였다.


“밤늦게나 귀환할 겁니다.”


응렴은 학승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좋은 수행이 되길 바랍니다. 금강은 절경이 만이천봉이라고 하듯이 태산에서 시작한 천지를 감도는 기운이 마지막으로 오는 길입니다. 온갖 생명이 기운을 받아 성불할 수 있는 영험한 곳입니다.”


학승은 일차로 태산을 손가락으로 찍고 쭉 돌아 금강으로 오는 길을 손가락으로 그리듯이 움직였다.


“아! 그렇습니까?”


“일설에는 태산에서 동쪽으로 가는 길을 따라 오 만리를 가면 영험한 고봉이 만이천봉이 있을 것이고 그 기운을 받은 사람들은 장차 푸른빛을 발하는 피부를 가지고 태어나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금강산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 기운을 받아 먼 훗날 하늘에 닿을 수 있는 기, 호연지기를 쌓길 바랍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아! 그래서 도인들은 호연지기를 품는 마지막 길로 금강을 택하게 되었군요?”


계원이 말을 받았다. 마침 다른 곳으로 가려던 옥룡자가 이들을 발견하고 가까이 왔다.


“그대들은 어디를 목표로 산행하십니까?”


옥룡자는 본전에서 일주문으로 나오며 멀찌감치 소리를 쳤다. 옥룡자의 물음은 단순히 여정을 확인하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았다. 응렴은 그 의미를 파악하느라고 잔머리를 굴리게 되지만 그의 진의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저흰 옥녀봉을 시작으로 비로봉을 오를 예정입니다. 하산은 만장대를 통해 만물상을 보고 총석정 쪽으로 빠질 생각입니다.”


“그럼 동해를 따라 금성으로 들어가시겠군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는 않겠군요?”


“아니! 다시 오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밤늦게나 오게 될 것입니다.”


“날짜를 명백하게 못 박지는 않았지만 다시 들러 선사님들의 가르침을 더 듣고 싶습니다.”


차가운 범교사의 얼굴에 비해 그래도 웃음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응렴은 다시 설명했다.


“이번에 못 만난다고 마지막은 아닙니다. 소승은 오늘 하산하여 철원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니 언젠가는 또 만나겠지요.”


옥룡자는 모자를 어루만지며 딴청을 했다.


“아! 제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학형들! 채비는 이미 다 마쳤습니다. 그럼 이만 가시지요.”


허곡이 급히 바랑을 지고 나왔다. 일행들을 세워두고 앞장서서 나가려하자 옥룡자는 아무 말 없이 허곡의 행동을 관찰했다. 드디어 허곡이 제일 먼저 일주문을 나섰다. 일행들은 허곡의 뒤를 따라 스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길을 내려갔다. 학승과 범교사는 작은 소리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럼 안녕히들 계십시오. 가르침 잘 듣고 갑니다.”


응렴이 학승에게 합장하며 말했다.


“주지스님께선 출타하셨다고요?”


범교사가 놀라는 표정으로 보탰다.


“아! 네. 비로봉 가는 길에 암자가 하나 있는데 거길 다녀오실 예정으로 출타하셨습니다.”


학승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설명했다.


“아쉽군요. 말씀도 못 드리고 떠나니........”


“어제 긴 말씀을 나눠 안심입니다.”


허곡이 상기된 얼굴로 화답했다. 그는 간밤에 주지와 나눈 대화에 흡족한 느낌이었다. 이제 그가 말한 더 높은 도통하였다는 옥룡자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달려가 옥룡자를 불러 세웠다.


“선사님!”


뒤를 돌아본 옥룡자는 허곡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 허곡랑이시라고요. 우린 어제 대화를 서로 나누지 못한 사이나 익히 알고는 있습니다.”


“난 이번 기회에 철원과 길주를 둘러볼 심사요. 캬! 경치 좋다.”


일행들은 옥룡자의 감탄에 다시 한번 사방을 둘러보며 경치를 즐겼다.


“허어! 그것 참!”


옥룡자가 낙담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아니오. 내가 괜히 내 기분에 사로잡혀 감탄을 한 거외다. 모처럼 훌륭한 풍경에 눈이 갔습니다.”


옥룡자가 손 사레를 치며 안타까워했다.


“선사님께서도 자연 풍광에 눈을 돌리시기도 하시는군요? 뜻밖입니다.”


“나도 소위 땡중이기 이전에 사람입니다. 사람은 당연히 이쁜 것에 눈이 가지 않겠습니까?”


“헤어짐이 안타깝지만 짧은 시간이라도 가르침을 얻게 되어 영광입니다. 헤어지는 길에 마지막으로 저희들에게 좋은 말씀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허곡이 머리를 조아렸다.


“시국에 관해 한 말씀 하라, 이건가?”


스님이 선뜻 말을 열지 못하자 허곡이 먼저 입을 열었다.


“스님께선 이 나라의 앞날을 생각할 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어떤 덕목을 가져야 한다고 보십니까?”


“오호호호! 상당히 복잡한 계산을 가지고 던진 질문이군요.”


“소인은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어서 우문을 드렸습니다.”


허곡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안절부절 못했다.


“이 나라의 앞날이라? 지도자의 덕목이라? 원하는 대답이 이 두 가지요?”


“허허! 그냥 한번 해본 말인데 두 가지나 질문을 한 것이군요?”


“허허! 제가 아직 세상을 볼 견문은 좁습니다만 그간 산행하면서 본 바로는 백성들을 구제할 만한 소양을 가진 사람은 구태여 자신을 꾸미지 않아도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추종한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선사께서는 우리 백성들이 참된 지도자의 그릇을 알아볼 능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허곡이 놀라는 표정으로 저절로 소리가 높아지자 낭도들도 일제히 관심을 가지고 다가왔다. 일행은 옥룡자 가까이로 모여들자 대열의 맨 뒤에 남은 응렴과 범교사는 머쓱해졌다.


“그 말씀은 군주는 하늘이 낸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까?”


응렴이 재빠르게 차고 들어왔다.


“하늘이 낸다? 전혀 다른 의미로 쓰는 말인데 결과적으로는 같은 말이군요. 하지만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려는 인사들에게는 전혀 다른 말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옥룡자는 응렴의 개입에 기분이 나쁘다는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다분히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응렴은 다분히 대화의 주도권을 자신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다른 의미인데 같은 말이 되었다고요?”


응렴도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백성들이 귀인을 알아볼 혜안을 가지고 있다면 속편한데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요.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런 기운은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에 서로 끌리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끌리는 것입니까?”


허곡이 본격적인 논의로 들어와 물어왔다.


“하늘이 낸 귀인은 우선 백성들의 아픔을 어루만질 줄 아는 군자이어야 합니다. 이게 가장 큰 덕목입니다.”


“이어야 합니다는 당연한 말이란 뜻인데 이면 좋다는 말보다 더 큰 요소로군요.”


“최선이나 차선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위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겉치레의 어떤 말보다 스스로 선행을 하는 사람입니다. 당연하겠지요? 그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겠지만 겸손하기 때문에 나서지 않고 남의 밑에서 일을 하려고 할 겁니다. 그런 사람은 시간이 되면 당연히 두각을 나타내죠.”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할 경우엔 어떻게 합니까?”


“그건 물어보나 마나지요.”


모두들 대답은 하지 못하고 옥룡자의 입만 바라보았다.


“멸망하고 말죠.”


“겉치레로 말만 앞세우는 사람과 겸손한 사람이 엄연히 다르다면 현실적으로 그런 인물은 실재합니까? 현실에서 군자는 누굽니까?”


허곡은 노골적으로 물어왔다.


“겸손하지 않은 자! 잘난 체 떠벌이고 앞에 나서는 사람은 일단 제외되겠군요?”


예흔랑도 자신이 들은 말을 종합해 단언했다.


“내가 무슨 비결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천지조화를 예견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인물을 미리 알 수 있겠소? 호호호! 그런 인물은 잠룡이라고 많이들 얘기하지 않소. 그런 인물은 때가 되면 자연히 드러나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어 있소. 세상을 보는 눈이 트인 자에게 보이는 게 아니라 누구의 눈에도 그런 사람이 보인다는 뜻이라고 해두죠.”


“그러니까 잘난 체하는 놈들이나 앞에 나서서 주장하는 놈들은 아니라는 게 눈에 확 뜨이잖아요, 그렇죠, 스님?”


숙종랑은 눈을 크게 뜨고 스님의 팔을 잡았다.


“겸손한 자와 겉치레를 하는 자가 처음엔 구분이 안갈 것이라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만약 그런 구분을 할 시기에 둘 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허곡은 자못 예리했다. 모두들 허곡랑과 옥룡자를 번갈아보았다.


“그렇죠. 먼저 겉치레라고 한다면 그자는 겸손을 가장하겠죠. 어느 순간에도 그 겸손이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고요. 연기에 능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백성들은 늘 그 속임수에 당했습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가려볼 혜안이 없으니 민초라고 할 밖에요. 그들은 매번 그런 식으로 이용만 당하고 말겁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그 것을 한탄하겠지만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게 세상사는 이치입니다. 고귀한 세력가이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 위엄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자는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바로 그런 사람을 올바로 알아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쉽게 세상을 알아보려고 물은 거였는데 듣고 나니 더 어려워지고 말았어.”


잔뜩 기대하고 들었던 것이 무색한 듯 숙종랑의 실망감은 더 크게 보였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더는 그런 이용을 당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선택한 효능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스님.”


허곡이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그런 걸 다름 아닌 개벽이라고 합니다. 개벽은 하늘이 열린다는 의미로 선천과 후천의 구분이 있지만 곧 우린 후천시대를 맞이하여 개벽을 알리는 후천의 시기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때 하늘의 기운을 미리 읽는 사람들은 하늘이 낸 인물을 알아보는 것 외에도 그런 힘이 있는데도 그걸 밖으로 드러내놓지 않는 사람을 구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소승은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아무리 난국이 와도 백성들을 옳게 지도하고 어려움을 타개할 것이라 믿습니다.”


“민초들이 그런 일을 미리 알고 싶어 하는데 그게 허영입니까?”


“어쩌면 그게 가장 중요한 거지요.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 그런 게 있습니까?”


“당연히 그런 게 있어야지요.”


숙종랑이 호들갑을 떨며 묻자 계원은 당연하다는 투로 말을 했다.


“첫째, 부자이면서도 검약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이 낸 부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자신에게 검약합니다. 게다가 둘째로 겸허하기 때문에 부유함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그 부유함으로 남을 돕는데 앞장서니 타의 모범이 되겠지요. 있는 사람의 곳간에서 양식이 나는 법이니까요. 여러 낭도님들이 그런 사람이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옥룡자가 합장하며 말하자 허곡도 마주 합장한다. 범교사가 응렴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보게 김국선!”


“예. 범교사 국선님.”


“아까 허곡랑과는 뭔 얘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했소?”


“아? 아까 일 때문에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우린 둘도 없는 벗이니 당연히 마음 쓰이지요. 게다가 신라 최고의 상단인데........ 관계를 좋게 유지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좋은 게 좋은 거죠. 장차 우리의 일을 도모하는 데 허씨 상단은 긴요한 끈입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이 빠지는 일은 없도록 하시게.”


“더 깊이 들어가는 일이라니요?”


“지금 당신의 처지에 집중하십시오. 대왕마마의 눈에 들어야 하는 일이 급선무인데........ 6두품의 등용이나 정치 개혁에 관한 말은 꺼내지도 마시오.”


“이건 점수를 따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형제와 같은 벗의 장래에 관한 문제요. 난 이기적으로 생각하는 건 질색이오.”


응렴은 자못 심각하게 범교사의 말을 부정했다.


“전혀 도외시하는 게 아닙니다. 시간의 선택을 잘 하라는 말입니다. 언제고 그런 기회는 있을 겁니다만 대전에서는 그런 말씀은 결코 꺼내서는 안 되오. 이건 김국선 개인의 일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일이고 우리 가문의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길은 철원으로 가는 길과 금성으로 가는 길, 그리고 금강산으로 올라가는 길로 갈리는 곳에 다다랐다. 옥룡자는 일행과 헤어지기 위해 길 한켠으로 비켜섰다. 허곡은 옥룡자의 곁으로 가서 섰다. 낭도일행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허곡랑? 무슨 일이오?”


“모두에게는 죄송할 따름입니다만 이제 저는 낭도의 길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같이 호흡을 한 게 어언 오년이란 세월이 흘렀소이다. 그걸 하룻밤 새 갈아 버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숙종랑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을 할 수가 없지만 서운한 감정은 제대로 표출했다고 생각했다.


“아니오. 그걸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마십시오. 허곡랑도 얼마나 고심이 컸겠습니다. 가까이 혈육처럼 지낸 우리에게도 말 못한 심정을 헤아린다면 하루 이틀 고민은 아니었던 것을 알겁니다. 지금은 비록 헤어져도 훗날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약이라도 해둡시다.”


드디어 허곡은 응렴일행과 작별을 고하는 순간을 맞았다.


“내가 환궁하면 꼭 그대와 같은 처지의 6두품의 아픔을 직고할 것이외다. 그러면 장차 신분의 차별을 없애는 정책을 펴나가 진정으로 혁신적인 정치를 할 겁니다.”


응렴은 여전히 자기최면에 걸린 황태자처럼 과대망상적인 말만 늘어놓았다.


“난 그런 것까진 바라진 않습니다. 그저 난 내가 하고픈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을 뿐입니다.”


“허씨 상단은 우리 신라에서 가장 막강한 재력에 정치력을 겸비한 거상입니다. 우리 화랑이 그 덕을 많이 본 것도 있고 앞으로도 우리 조정에서도 큰 기재를 가지고 있으니 허곡랑의 꿈도 전개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지금에 실망하지 말고 우리 먼 훗날을 위해 기원합시다."


응렴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옥룡자는 먼발치서 이들의 헤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입가에는 쓴 웃음이 번졌다.

응렴이 제법 회자정리의 이치를 들고 나와 숙연하게 하였다. 범교사는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이고 각자 정이 깊은 만큼 포옹하고 헤어졌다. 아침부터 같이 걷던 길이 이젠 저녁노을이 되어 점차로 어두워졌다. 옥룡자와 허곡이 서쪽으로 갔고 일행은 금강산행을 지켰다. 삼림 속으로 오솔길이 나있었다. 낭도들이 줄지어 산길을 걷는다.


“동무인 허곡랑이 벼슬의 기회가 없어 몇 년간을 바쳤던 낭도 수련을 포기해야 한다는 게 솔직히 이제야 실감이 나는 군요. 동고동락한 형제 같은 허곡랑과 갈라서야 한다니 가슴이 아픕니다.”


응렴은 허곡과의 헤어짐을 슬픈 것인지 아니면 당장의 헤어짐의 현실이 스픈 건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형식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지방관직도 많은 성골들과 그 친인척들이 줄을 서고 있는 형편이라 차례가 오지 않을 겁니다. 두품들은 그 박탈감을 실제보다 더 크게 느낄 거고요.”


응렴에 비해 범교사는 제법 표정이 냉철했다. 쉽게 인정에 휘둘릴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물갈이가 시원하게 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요?”


“가장 큰 원인은 세습에 있습니다. 한번 잡은 관직을 세습시킬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유혹일 겁니다. 벼슬이 명예를 드높이는 것으로 이해를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삼국통일에 있어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우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많죠. 일단 태종 무열제와 문무대제의 공이 가장 크죠.”


응렴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 두 분 말고 왕족이 아니신 분으로 일등공신은 김유신 장군이십니다.”


범교사가 얼굴빛에 변함없이 말했다.


“아! 김유신장군님! 잘 압니다. 가야에서 귀화해서 혁혁한 무훈을 세우신 분!”

“그 김유신 장군님의 업적을 기려 흥무대왕으로 추존하는 작업을 했습니다만 그 후로 김유신계의 후손들은 6두품으로 강등되고 말았죠. 왜 그랬습니까?”


응렴은 영문을 몰라 깜짝 놀란 표정이지만 나머지 낭도들은 익히 아는 얘기인 듯 놀라진 않는다.


“아! 그래요? 왜 그랬답니까?”


응렴만 모르는 얘기이니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다 각 귀족 연합들 간의 세력다툼 결과인 것입니다.”


“흥무대왕에 추존되면 진골이 되는 마당이니 이미 진골로 있던 사람들에겐 요직을 양보해야 하니 그랬겠죠.”


숙종랑이 팔짱을 끼고 거드름을 피우며 한마디 보탰다.


“바로 그겁니다. 얼마 남지 않은 진골들의 입장에선 흥무대왕으로 추존하는 순간 새로운 진골이 탄생하는 것이라 거부했을 겁니다. 나중에는 서로 논공행상에만 관심이 있고 흥무 추존 건은 물 건너가게 됩니다. 후에 궁핍에 쩔은 김유신의 증손이 반란을 일으키고 후손들은 오히려 6두품으로 강등되기까지 했습니다. 같은 진골이었어도 상대적인 불리함을 가지고 있던 김유신계는 신라에서는 견디기 어려운 처우를 받는 것입니다. 신라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세습도 막고 벼슬의 기회도 공정해져야만 합니다.”


범교사는 낭도들을 가르쳐야하는 입장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대물림되던 자리를 모두 다 내놓아야 한다는 말은 진골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습을 막는다는 것은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벼슬을 빼앗기는 것과 같은 말이 됩니다.”


숙종랑이 입에 거품을 물었다.


“하지만 신라가 위험하다면 뼈를 깎는 고통도 함께해야 하는 것이란 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계원이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자는 의미에서 냉철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진골들은 그런 말에는 목숨을 걸고 반대할 겁니다. 안 봐도 뻔하죠.”


예흔랑도 덧붙였다.


“그런 걸 정치라 하는 거요. 누가 곧이곧대로 벼슬을 내놓으라고 하겠소. 다 요령이 있어야지.”


응렴이 마치 결론이라도 내리듯 정리를 했다.


“아! 동무들! 이제 제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합니다.”


허곡은 말이 자신에게로 튈 것을 염려해 손 사레를 쳤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허곡랑?”


응렴은 용납 못하겠다는 어투로 허곡을 나무랐다.


“너무 나 때문에 동지들의 흥이 깨진 것이 마음 아픕니다. 솔직히 저는 신분 때문에 벼슬길이 막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더 필요한 능력을 가졌다면 신분이 어떠하더라도 일을 할 수는 있을 것인데 괜히 그 핑계로 사는 것은 사내답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디 저의 처지만 생각하지 마시고 동지들은 수련을 속행하시기 바랍니다. 부담 되서 싫습니다.”


“좋소이다. 내가 이번에 입궁하게 되면 대왕마마께 상고하겠습니다. 신분의 귀하를 막론하고 등용하시라는 말씀을 꼭 하겠소. 신라의 강성대국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넘어야 될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성대국의 길에 골품이 걸림돌이라는 말씀이죠?”


계원이 응렴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럼 골품으로 부국강병을 가로막는 것을 척결하자는 의지가 우리들의 목표라고 천명할 겁니까?”


숙종랑이 한술 더 떴다.


“염려들 마시게. 내가 다 속 시원히 해결하리라.”


“그럼 제가 군부로 나갈 수 있도록 동무들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원도 이틈에 응렴에게 진정을 내듯이 말을 했다.


“그럼 좋고요. 이번 금강산행이 마지막이니 끝나고 바로 입궁하도록 합시다. 참! 연회가 이달 보름인데 지금이 며칠이지?”


범교사가 ‘아차’하는 표정으로 날짜를 물었다. 모두들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허둥댔다.


“열사흘입니다. 보름이라면 서둘러 귀환해야겠군요. 한 시각도 지체한다면 연회에 못 갈 것입니다. 발길을 돌려야 합니다.”


허곡이 역술가처럼 손가락을 짚으며 말했다.


“벌써 열사흘이나 된 거요?”


응렴이 대경실색이다.


“이런~ 큰일입니다. 어쩌죠?”


범교사가 마치 죄지은 사람인 것처럼 응렴 앞에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다른 낭도들은 발을 동동 구르듯 안타까워했다.


“그럼 우리의 금강산행은 포기합니까?”


“어디 금강산행이 구경거리랍니까?”


응렴이 언짢은 듯이 핀잔을 주었다.


“그럼 일정을 지금 바꾸겠습니다. 금강산행은 이것으로 마치고 속히 금성으로 되돌아갑시다. 너무 안타까워하지 마십시오. 기회는 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계원랑? 너무 낙심 마시게. 또 기회가 있겠지.”


응렴이 계원랑의 등을 두드렸다.


“염려 마십시오.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보다 더 중요한 일을 미룰 수는 없지요. 조금이라도 늦으면 우리의 행보에 차질이 생기니 천만에요.”


일행은 시간을 줄이기 위해 속보로 길을 재촉했고 갈래 길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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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변혁의 소용돌이 11 15.03.27 589 8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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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세기말 증후 21 15.03.24 480 9 15쪽
4 세기말 증후 14 15.03.24 657 9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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