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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쿤1 님의 서재입니다.

처용과 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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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쿤1
작품등록일 :
2015.03.24 22:14
최근연재일 :
2015.03.29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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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24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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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세기말 증후 36

DUMMY

야쿱라이스는 왕관을 쓰고 앉아서 신하들의 보고를 들었다. 왕관은 구 페르시아의 마지막 황제가 쓰던 것으로 제대로 순양이 되었다면 아비틴 황태자의 소유이어야 맞는 것이지만 일리드가 보관하고 있었다. 일리드의 조부는 마지막 관료로 외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지 않고 페르시아의 산악지방에서 은둔하고 기다리던 차에 야쿱의 야망이 왕국을 형성하는 기운으로 번지자 은근히 기대하면서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드디어 야쿱의 민족국가인 사파르를 건국하고 만천하에 그의 존재를 천명했다. 사파르는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구 페르시아로의 회귀를 염원하는 국명으로 일리드가 주장해서 국명으로 삼긴 했지만 야쿱 형제들의 염원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체제 인사들의 포섭을 의미하는 하나의 약속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 의의를 다른 것이었다.

회의장 전면에 대형지도가 걸려있는데 아랍과 사파르 메르프, 타히르, 인도, 당나라 등의 위치가 각각의 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사파르는 구 페르시아의 영토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대 제국이 되었다. 일리드 장군은 야쿱 왕에게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이곳 동쪽은 타히르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과거 사산조 페르시아의 주력이었지만 지금은 옛 명성을 이을 힘이 없으므로 굳이 적으로 구분하지 않더라도 제풀에 망가질 것입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으로 믿고 타히르에 제일 가까운 우리의 시르칸 성에는 첫째 왕자이신 체리티에 장군이 수호하실 겁니다. 수비대장은 알파에 장군입니다.”


체리티에는 서있던 곳에서 한걸음 앞으로 나와 절을 하고 알파에도 그를 따라했다.


“오! 체리티에. 그대의 용맹함은 내 익히 알고 있다. 군사가 적으니 아직은 타히르를 공격하지 말고 관찰만 하고 있어라.”


“핫! 폐하. 명 받들겠습니다.”


“여기가 문제의 메르프입니다.”


일리드는 지휘봉으로 타히르의 동쪽 카스피 해 부근을 가리켰다. 체리티에와 알파에가 뒤로 물러났다.


“과거 페르시아 전 지역에 명망이 자자한 알사파의 근거지입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왕자들은 제발 자신에게는 메르프 지역이 걸리지 않기를 비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메르프는 지금은 아랍의 정예군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아랍의 제 2 수도인 바그다드와 접경하고 있어 정예군으로 방어를 하고 있으니 우리로서는 가장 껄끄러운 상대입니다. 둘째 왕자이신 야미드 장군이 병력 500 명을 가지고 주둔하겠습니다.”


호명된 야미드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한걸음 앞으로 나온다. 알사파는 가장 호전적이고 용맹한 장수가 아니던가?


“수비대장은 고모로 장군입니다. 여기가 메르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인 가즈니 성입니다.”


일리드는 지휘봉으로 가즈니 성을 가리키며 원을 그렸다.


“야미드 장군. 그대 또한 형 못지않은 용맹함을 가지고 있고 아랍의 정예가 가까이 있는 탓에 항상 위기의식을 갖고 임해줄 것을 당부한다. 다시 한 번 당부하지만 우리는 아직 정규군의 훈련을 거치지 않은 야생의 상태이기 때문에 섣불리 선공을 하는 일은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명 받들겠습니다.”


“또 중요한 거점으로 여기는 카불입니다.”


일리드가 아프가니스탄의 전 지역을 가리키자 야미드와 고모로는 뒤로 물러났다.


“산악과 강이 고루 잘 발달한 곳으로 교통의 요충지로서 현시적으로는 아니지만 장차 여러 군벌들이 노릴 수 있는 천혜의 지역입니다. 만약 우리 수도인 헤라트가 위험해지면 제 2의 수도가 될 유력한 곳이니 대장군이신 이븐라이스님께서 카불을 맡아 주십시오.”


이븐이 나와 한걸음 내딛으며 절을 했다.


“오! 이븐. 드디어 네가 내 곁을 떠나고 마는 구나.”


“제 마음은 항상 폐하께 머물러 있습니다.”


“부디 몸조심하고 동쪽 끝으로 인도와 당나라가 버티고 있는데 그쪽으로는 경계가 험난하니 욕심 내지 말라. 부탁한다.”


“잘 알겠습니다. 폐하! 외람되나 청이 있습니다.”


이븐은 큰절을 하면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야쿱을 바라보았다.

“뭔가? 그대의 청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지.”

“아무로 둘째 형님의 막내인 체르케스 왕자를 제 곁에 두고 문물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체르케스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이븐과 아무로를 번갈아 보았다.


“체르케스를 왜?”


“저에겐 딸린 가족도 별로 없고 자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체르케스는 형들이 많아 성을 소유하지 못할 테니 제가 같이 있으면서 전략적인 것들을 많이 가르쳐 후계자로 삼고 싶습니다.”


“좋은 생각이다 만 아무로의 의견도 있을 터.”


“이븐의 의견은 좋지만 체르케스가 아직 어리다고 봅니다. 교육의 필요는 있으나 여기서 성인식을 마치면 보내는 것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성인식을 하고 보내는 게 어때?”


야쿱은 해결책인 듯 아무로에게 안심의 눈짓을 보내고 다시 이븐의 눈치를 본다.


“고맙습니다. 제 아들이라 여기고 살뜰히 보살피겠습니다.”


“늠름한 사나이로 커주길 바랍니다.”


체르케스는 멍한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입지가 정리되어 가고 있는 것을 스스로 거들지 못하고 구경만하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멍한 시선은 초점을 고정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 됐고. 다음은?”


야쿱은 일리드를 쳐다보았다.


“이곳은 야즈드입니다. 사막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지만 남부지역에는 산악이 닿아 있어 중요한 지역입니다. 아랍이 침공해 온다면 이 루트가 활용될 염려가 있습니다. 셋째 왕자이신 엠버 장군과 다섯째 왕자이신 케르네 장군이 함께 주둔할 겁니다.”


케르네와 엠버가 한발 앞으로 나와 절을 했다.


“이곳 시라즈는 야즈드와 거의 같은 맥락입니다. 넷째 왕자이신 로물르 장군과 여섯째 왕자인 해파이 장군이 함께 주둔합니다.”


두 왕자가 앞으로 나와 절을 했다.


“오! 그대들이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실 짐의 가슴은 턱하고 막혀 왔었소. 처음부터 이 왕조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이런 이별도 없었을 텐데 하는 자괴감이 밀려왔다오. 하지만 남자라면 전쟁을 하건 장사를 하건 가업을 잇던 뭔가를 행해야 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라 생각하니 나라를 지키고 이끌어 가는 것만큼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제군들의 혁혁한 전과를 바란다. 부디 몸조심하길........”


“폐하! 성은이 망극합니다.”


왕자들은 내키지 않는 표정들을 뒤로하고 늠름하게 한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우리의 수도는 이곳 헤라트로 잡고 병력은 1000 명입니다. 대장군인 일리드, 제가 맡겠습니다.”


일리드는 단상에서 일어나 대장군의 칼을 들어올렸다. 이에 화답하듯 야쿱이 단상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체르케스도 꿈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하지만 야쿱은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븐은 체르케스의 뒤로 와서 가볍게 어깨를 안아준다. 체르케스는 감사의 인사로 목례를 한다. 일리드 대장군은 두 팔을 번쩍 들어 환호에 답했다. 단상 가운데로 인도되어 나간 일리드는 두 손을 흔들어 박수소리를 잠재웠다.


“저는 대장군으로 추천된 일리드입니다. 우리 페르시아가 벌써 200 년 전에 아랍에 패망했습니다. 그동안 지하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우리의 수호신들은 이제 페르시아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 모두에게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세상에 어디 군대도 없는 패거리가 왕조를 일구어내는 일이 있었습니까? 도둑의 무리라고 손가락질 받던 우리가 사파르 왕조를 창출해 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낱 도둑의 무리가 아니라 의적단이었습니다. 하늘이 내린다는 왕족들은 다 도망가고 죽었습니다. 세상을 다 가질 것 같이 호사하고 화려했던 귀족들은 모두 다 망명을 하거나 변절해서 아랍의 개가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루하루 먹는 일을 해결하기에만 급급하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아랍의 패거리들은 우리 페르시아를 송두리째 집어 삼켰습니다. 정의가 파괴된 치욕스런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길은 그들에 복종하거나 그들에게 저항하거나 단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일리드는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렸다.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다.


“저항하는 것은 언제나 목숨을 내놓고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용인하는, 저들이 허락하는 방법의 독립운동이라면 그것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그들의 구미에 맞는 친목단체의 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의적단은 새로이 거듭나 사파르 왕조를 창출했고 그 힘은 아랍제국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만 끝이 나는 숭고한 정신입니다.”


일리드를 중앙에 두고 모인 모든 인사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만세삼창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전령이 들어왔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잠시 후 경비사령들과 적국의 전령이 함께 입장했다. 전령은 예전처럼 자기들이 협상국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다. 분위기는 심상치 않아 전쟁전야와도 같은 음산한 기운이 지배하고 있었다.


“뭐라고?”


야쿱은 화가 나 소리쳤다.


“ 이건 마문 칼리파의 최후통첩입니다. 폐하.”


일리드가 이를 갈며 자기의 생각을 전개했다.


“그놈이 뭐라고 써 보냈든?”


야쿱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빨리 해결책이 나오지 않자 버럭 소리를 지른 것이다.


“처신을 분명히 밝히라고만 했습니다. 그리고 추신으로 뜻이 같은 동지로 생각한다면 조공으로 낙타 300 마리 분의 식량과 특산물을 대고 왕자 셋을 유학생으로 보내라고 썼습니다. 메카에 한 명, 메디나에 한 명, 바그다드에 한 명.”


“뭐야? 이런 건방진 놈이! 300마리를 조공으로 바치고 아들 셋을 자기네로 유학 보내라고?”


야쿱은 전령의 칙서를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전령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겁에 질려 떨었고 일리드는 눈을 질근 감았다.


“싸웁시다. 형님!”


이븐이 칼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이븐. 함부로 나서지 마!”


아무로가 팔을 저으며 이븐을 말렸다.


“아니, 형님도. 저런 게 바로 선전포고란 거예요.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우고 화친하자는 것은 약을 올리는 겁니다. 자존심을 짓밟고 어르고 뺨치는 거라고요. 알겠어요? 자존심이 있는 사내라면 그 수모를 못 견디고 결국 싸움을 선언하게끔 만드는 그러니까 먼저 선전포고를 하게 하는 고도로 간악한 술수라고요.”


“네 말, 일리 있다. 어떻게든 싸우자는 표현을 그렇게 치사하게 한 거겠지?”


“그렇습니다. 폐하! 그건 전형적인 주전론자들의 방법입니다. 저들은 화친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먼저 전쟁을 선포하는 게 주위의 이목이 있으니 피하기만 한 것이고 내심은 전쟁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결론을 내리기 전에 먼저 전령을 보내야 합니다.”


일리드가 민첩하게 좌우를 갈랐다. 야쿱은 손을 흔들어 명령을 내리고 일리드는 전령들이 묵을 막사를 지정해 주었다. 전령들이 예를 표하고 나가자 이븐은 참았던 분노를 다시금 표출했다.


“그 간악한 놈들! 이슬람이 파괴와 정복은 없다고 설레발이 치더니 드디어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는군. 내가 네 놈들의 심장을 갈아 먹어주고 말테다. 좋아! 전쟁하자고!”


“아우야. 그만 흥분하고 얘기 좀 하자.”


야쿱은 이븐이 흥분해 날뛸 때도 막아서지 않았지만 이 번 만은 사정이 달랐다.


“얘기? 뭐가 필요합니까? 당장 쳐들어가면 그만이지!”


“일리드 대장군!”


“네, 폐하!”


“좋은 생각 있나?”


“폐하, 이런 일에 대비한 것이 있긴 하지만 우선 우리는 수적으로 불리합니다. 그래서 선공을 하는 것은 이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선공이 불리한가?”


“대책을 벌써 세워 두셨소, 장군?”


아무로는 일리드의 선견이 대견스러운 듯 눈빛이 밝아졌다. 그러나 이븐은 일리드가 믿음직하지 않았다는 것을 처음부터 밝히고 안하무인격으로 무시했다.


“나에게 정병 일천 명만 주십시오. 당장 바그다드로 가서 칼리픈지 뭔지 하는 놈의 목을 따겠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장군.”


“대책도 없이 정병 천명이면 반을 달라는 건데 말이 되느냐?”


야쿱은 화가 나 있었다.


“뭐, 뭐요? 안 된다고? 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소리요, 일리드 대장군?”


“물론 가장 용맹스런 이븐 장군님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일전만 하는 게 아닌 지루한 전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합니다. 용의주도한 점을 따지자면 다소 문제가 있어 우리의 전술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전술? 전술이라 했소?”


“우리 전군이 이천 명이 안 되는데 천 명을 기병하여 바그다드로 떠나 버리면 메디나에서 아니면 메르프에서 아니면 타히르에서 수 천 명의 대군으로 우리 헤라트의 후방을 칠 수 있기 때문에 병법으로는 전혀 고려할 수 없습니다. 아랍의 군사력이 얼만지나 알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자그마치 2만입니다.”


모두들 입을 떡 벌리고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이븐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정작 부끄러운 것은 야쿱이었다. 괜한 객기를 부려 조국을 전쟁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꺼내지도 않고 애꿎은 이븐에게 화살을 퍼부었다.


“넌 입을 좀 가려서 해라!”


“그럼 화친을 하잔 말이오?”


“화친이라뇨, 형님!”


“물론 화친은 불가합니다. 반드시 전투는 이뤄질 것이고 어떻게 싸우느냐가 관건입니다. 여기 헤라트는 수비에 유리한 곳이니 버틸만합니다.”


“답답하구나. 지금 놈들은 저 사막을 가로질러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데 우린 여기서 진퇴도 결정 못하고 이러고 있다니.......”


헤라트 성에서의 어전회의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전령들은 위리안치로 성안 한쪽 구석에 마련된 방갈로에 기거하게 된 지 벌써 사흘이 지났지만 야쿱의 형제들은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체르케스는 대화의 모양을 주시하다가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하여 밖으로 나간다. 나가면서도 대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일단 우리가 공격을 하지 않고 시간을 끈다면 공격을 준비해온 저들은 마냥 기다리지 못해 먼저 공격을 감행할 겁니다.”


일리드는 전술의 일단을 들어 사태를 해석했다. 그러나 정황상 증거일 뿐이지 사실에 입각한 내용은 없다고 봐야했다.


“만약에 놈들이 선공을 퍼 붙지 않고 계속 소강상태를 유지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아무로는 아무래도 화친에 뜻이 더 있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필시! 저들의 전략이 그렇습니다. 선전포고를 하기에는 주위의 이목이 있어 꺼릴 것이고, 빨리 붙어 결말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저쪽이 더 급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걸 꺼리냐고요?”


“대국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비열한 수를 썼다는 소문은 그들이 견디기 힘들 겁니다. 그들은 그래서 먼저 우리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작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전쟁준비는 하되 먼저 도발하면 안 됩니다.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합니다. 선전포고는 그들이 먼저 하게 해야 하는 거죠. 식량을 많이 비축해 두었으니 겨울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는 겁니다.”


“겨울까지요?”


헤라트는 성벽 아래로는 모두 절벽이라 천혜의 고지로 정평이 나있었다. 성벽에서 수 킬로 떨어진 곳은 숲으로 이어져 산악지형에 걸맞은 풍광을 제공했다. 메디나에서 기병한 아랍군사들은 검은 복색으로 통일된 마구를 착용하고 소리 없이 헤라트의 성 밖 숲길을 장악했다. 이미 성안으로 들어가 내응하기로 한 전령들은 패석이나 다름없는 작전을 수행하는 중이었지만 야영하고 있는 진영에선 천여 명의 군사들이 깊은 밤인데도 잠을 자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 아랍의 지휘관은 헤라트성의 불빛을 보면서 상념에 젖어들었다. 이때 부관이 보고하기 위해 다가왔다.


“장군님! 오늘은 저녁을 생략하고 대기 중입니다.”


“그래. 장병들의 사기는 어떤가?”


“일당백이라 확실합니다. 게다가 이번 작전에 대한 개요를 정확히 인지하고 난 후엔 더욱 더 진기한 작전이라고 하면서 입을 모았습니다.”


“무조건 굶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니 여유가 있는 조는 헤라트 외곽으로 멀리 벌려서 끼니를 때물 수 있도록 하라!”


“옛, 장군. 그러면 여기서 정찰을 하던 부대는 시간이 되면 후방으로 들어가 밥을 먹고, 그 틈에 후방의 부대가 이쪽을 지나가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별은 빛나고 달빛이 스며드는 헤라트 성 안뜰, 체르케스와 호다람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달을 보며 천천히 걸었다.


“따라오지 마. 껌껌해서 위험해.”


체르케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오르며 호다람을 꾸짖었다.


“나도 이런 데 잘 갈 수 있어. 오빠도 횃불 없이 가잖아, 지금.”


호다람은 보호를 받는 입장이 아니란 걸 확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용감하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저기서 보면 아래가 모두 보이지 않을까?”


호다람은 멀리 성벽위로 솟아난 망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망루? 거긴 아무나 올라갈 수 없어. 그리고 높다고 잘 보이는 건 아니야. 지금은 껌껌해서 안 보이는 거야. 저 망루위엔 지금 아무도 없어.”


“별이 저렇게 밝게 빛나는 데도 안 보이나?”


“저긴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서 별이 아무리 반짝여도 보이지 않을 거야. 낮에 태양이 아무리 밝아도 저 숲 속에 숨어 있으면 전혀 볼 수가 없을 거야.”


체르케스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힌트를 얻었다. 뇌리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기자 각성한 사람처럼 자못 심각해졌다. 체르케스는 서둘러 망루를 올랐다. 호다람도 따라가려 했지만 너무 높아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망루를 오르는 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오빠! 혼자 올라가서 뭐 하려고?”


“저기서 멀리 볼 수 있나 한번 보려구.”


“나도 올라가고 싶어.”


“넌 힘들어서 못 올라와.”


체르케스는 꼭대기에서 성문 밖을 살폈다. 숲속은 깜깜했고 쥐죽은 듯 고요했지만 멀리 떨어진 곳은 약한 불빛이 보였다. 숲속에서 불을 피워도 밖으로 불빛이 새어나올 일은 없다고 판단되었다. 큰소리는 아니지만 숲속도 생명이 있다면 소리가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으니 소리도 없는 것처럼 이해되는 감이 있었다. 체르케스는 순간 무릎을 쳤다.


“아! 삼촌한테 그 얘길 해봐야겠다.”


“무슨 얘기?”


“넌 몰라도 돼!”


체르케스는 급하게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호다람은 부지런히 따라오며 계속 졸라댔다.


“아이! 오빠, 나한테도 얘기 해줘.”


“에이, 넌 몰라도 된다니까....... 아! 그만 들어가자.”


체르케스는 호다람이 자꾸 뒤따라오자 그녀를 방에다 돌려보내놓고 혼자서 어전으로 들어갈 요량으로 기다렸다.


“깜깜하면 오빠 혼자 숨으려고 그랬지? 난 다 알아!”


“내가 왜 숨어?”


“오빤 나랑 놀지 않으려고 틈만 나면 숨으려고 했었잖아.”


“에이! 내가 언제.”


“그런데 왜 별이 저렇게 많은데도 안보이게 숨으려고 해?”


“밤바람을 많이 맞으면 버릇없다는 소리 듣는다.”


“왜 밤바람을 맞으면 버릇이 없어?”


계단이 가파른 곳에 이르자 호다람이 따라붙지 못하자 체르케스가 안아 올리면서 도와주었다.


“널 보면 잘 알 수 있잖아.”


“날 보면?”


“말 많지, 말도 잘 안 듣지 또, 물어보는 게 너무 많고........해서 사람들이 귀찮아 한다는 거.”


“힝~. 오빠! 조금 더 놀다 들어가. 안에 들어가면 답답하단 말이야. 저기 별도 많은데 구경 좀 하다가 가자.”


“지금 그럴 시간 없어. 빨리 어르신들께 알려줘야 해.”


“아빠가 어른인데 그걸 모를까봐?”


대전은 여전히 회의하는 모습이다. 입구 쪽에서 체르케스와 호다람이 뛰어 들어왔다.


“그들이 도발하게끔 우리가 수를 쓰는 게 한 방법 아니겠습니까?”


일리드가 채용한 중대장인 조르민이 발언을 했다.


“대왕폐하!”


체르케스는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가 직고했다.


“오! 체르케스야. 지금 어른들은 중요한 문제로 회의를 하는 중이니 얘긴 나중에 하자.”


야쿱은 겉으로는 인자하게 대했지만 약간 짜증이 나 있었다.


“아니, 그냥.”


체르케스는 자신이 없어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저기 나가서 놀아라.”


야쿱이 크게 화를 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아무로가 먼저 철부지를 대하듯 야단을 쳤다.


“아빠! 오빠가 할 얘기가 있다고 했는데........... 우리 지금 밖에서 별을 보고 왔다!”


“할 얘기가? 별을 보았다고? 성곽에서 놀았단 말이냐?”


부릅뜬 야쿱의 눈을 보자 체르케스는 더욱 겁에 질려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네가 할 말이 있긴 모양이구나? 그래, 말 해보렴. 남자는 말야 어려워하지 말고 자기 의견을 거침없이 내뱉어야지.”


야쿱은 인자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에 힘을 얻은 체르케스는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다름이 아니옵고 저 밖의 수풀이 너무 울창하니 경계가 불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경계라?”


“만약 저 숲 속에 적군이라도 숨어 있다면 우리가 몹시 불리합니다.”


참석한 관료들은 체르케스의 말에 몸을 돌려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흔한 얘기이지만 왕족의 발언이니 무시할 순 없고 분명히 어린 왕자의 의견에 평가를 요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지, 만약 놈들이 벌써 저기까지 들어와 있을 수는 없겠지만 안전이 제일 중요한 거니까 그런 경우를 상상할 수 있어야지. 남자라면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어야지. 그런 것은 뛰어난 관찰이다. 이번 전투를 끝내고 시간이 있으면 저 숲을 몽땅 들어내 버리지.”


야쿱은 호기롭게 과장된 몸짓으로 대답했다.


“선전포고는 없었지만 척후를 보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폐하.”


일리드도 매우 긍정적인 판단을 해주었다.


“전투를 끝낸 다음에요?”


체르케스의 놀란 표정에는 실망감이 어려 있었다.


“얘가 똑똑하긴 하지만 경우가 없어놔서........”


아무로는 체르케스를 혼내주는 요량으로 폄하했다.


“좋은 지적인데 괜히 애 기죽이지 마십시오, 형님.”


언제나 체르케스를 후원하는 이븐은 역시도 체르케스의 편이었다.


“지금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대왕마마!”


체르케스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체르케스! 어른들 일에 끼어들지 마라.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 무슨 소꿉장난으로 여기느냐? 전쟁놀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거냔 말이다. 여기 전문가들이 한 둘이 아닌데.......”


아무로는 야쿱이 소리 지르기 전에 먼저 자신의 아들을 야단쳤다. 그게 유일한 그만의 보호책인 것이었다.


“왕자님의 지적은 적확합니다. 전술적으로 그 점은 당연히 고려해야합니다만 지금 우리가 처한 일이 급박해서 손을 쓸 수가 없을 뿐입니다.”


일리드가 정확하게 정황을 정리했다. 체르케스를 두둔하는 발언에 이븐이 먼저 신이 났다.


“대장군이 보기에도 체르케스의 지적이 정확한 거죠?”


“전술적으로 고려한다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오?”


아무로는 일리드의 의견이 궁금했다. 그러나 이븐처럼 호들갑을 떨 순 없었고 태연한 척 물어봤다.


“경계를 확실하게 하려면 숲을 없애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축성을 하고 개활지를 경계선으로 삼을 경우 저 숲을 밀어버렸어야 하지만 이미 이 성을 중조했을 때는 300년 전의 일이고 그 이후로 버려지다시피 했기에 저렇게 숲이 우거진 것입니다. 성 밖 가까이에 저런 울창한 숲은 우리에게 불리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체르케스 왕자님의 지적은 정확합니다. 정말 탁월한 지적입니다.”


이븐과 아무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쿱은 놀라는 시선으로 체르케스를 보았다.


“어제 오빠가 높은 곳에도 빨리 올라갔었어요.”


호다람은 자랑스럽게 체르케스의 활약을 선전했다.


“망루에 올랐다는 얘기냐?”


야쿱이 소리를 질렀다. 그 위세에 호다람은 주눅이 들었고 백관들은 체르케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저 숲을 없애는 것은 매우 큰 토목사업인데...... 시간도 없고.......”


아무로는 체르케스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흩트리고자 말을 돌렸다.


“숲의 외곽으로 보이는 곳에서 여러 군데 불빛을 보았습니다.”


“불빛을 보았다고요, 왕자님?”


일리드가 관심을 가지고 물어왔다.


“예. 몇 개의 불빛은 고정된 것이고 여러 개는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멀리 움직이지는 않았고 매우 가까운 거리로 판단됩니다.”


일리드의 눈빛은 밝게 빛났다.


“전술적인 가치가 있다고 보고 그 사업을 한다면 얼마나 시간이 소요되겠는가?”


야쿱도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일리드에게 작전을 지시하기 전 확실한 이유를 확보하기 위해 의견을 물어보았다.


“전군을 쓰기로 하고 한다면 약 두 달 정도 소요될 겁니다.”


“무슨 두 달! 그냥 확 불을 싸질러 버리면 하루 반나절이면 땡이지!”


이븐은 조심성 있게 의견을 개진하는 일리드가 못마땅한지 버럭 소릴 질렀다.


“불을?”


야쿱은 이븐에게서 새로운 전술을 습득했다. 체르케스는 회의가 자신이 의도한 대로 흘러간 것을 확인하고는 웃으며 어전을 나섰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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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과 용신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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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변혁의 소용돌이 24 15.03.29 447 10 16쪽
30 변혁의 소용돌이 23 15.03.29 504 7 28쪽
29 변혁의 소용돌이 22 15.03.29 320 7 17쪽
28 변혁의 소용돌이 21 15.03.28 584 7 17쪽
27 변혁의 소용돌이 17 +1 15.03.27 529 9 13쪽
26 변혁의 소용돌이 16 15.03.27 465 5 17쪽
25 변혁의 소용돌이 15 15.03.27 260 7 14쪽
24 변혁의 소용돌이 14 15.03.27 613 7 15쪽
23 변혁의 소용돌이 13 15.03.27 647 8 21쪽
22 변혁의 소용돌이 12 15.03.27 586 6 20쪽
21 변혁의 소용돌이 11 15.03.27 588 8 32쪽
20 세기말 증후 37 15.03.24 665 10 26쪽
» 세기말 증후 36 15.03.24 228 5 25쪽
18 세기말 증후 35 15.03.24 483 5 25쪽
17 세기말 증후 34 15.03.24 470 8 18쪽
16 세기말 증후 33 15.03.24 478 7 17쪽
15 세기말 증후 32 15.03.24 419 6 17쪽
14 세기말 증후 31 15.03.24 355 7 22쪽
13 세기말 증후 29 15.03.24 609 6 17쪽
12 세기말 증후 28 15.03.24 696 4 18쪽
11 세기말 증후 27 15.03.24 417 9 20쪽
10 세기말 증후 26 15.03.24 579 5 27쪽
9 세기말 증후 25 15.03.24 596 8 18쪽
8 세기말 증후 24 15.03.24 454 10 20쪽
7 세기말 증후 23 15.03.24 248 6 15쪽
6 세기말 증후 22 15.03.24 459 7 5쪽
5 세기말 증후 21 15.03.24 480 9 15쪽
4 세기말 증후 14 15.03.24 656 9 26쪽
3 세기말 증후 13 15.03.24 611 9 10쪽
2 세기말 증후 12 15.03.24 619 5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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