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기사의 이야기 Ep.9 - 낙인 (2)
하늘에서 나폴나폴 날아온 눈송이 하나가 사내의 코 끝에 내려앉는다. 남루한 옷차림의 사내는 천천히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려 이미 녹아버린 눈을 닦아냈다. 하지만 닦아내기가 무섭게 새로운 눈송이가 내려앉는다. 몇 번을 닦아보다가 소용없음을 깨달은 남자는 손을 내리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추워... "
새하얀 입김이 그의 말에 신뢰를 불어넣어준다. 기실 사내의 옷은 낡은데다가 홑겹이었으므로 겨울의 삭풍 앞에서는 맨몸이나 다를 바 없었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신사 하나가 그의 몰골을 보고 딱한 표정을 지었다. 두터운 모피 옷을 두겹 세겹 껴입은 자신도 바람이 불때면 몸이 떨리는데 바람이 불면 찢어질 것 같은 낡은 바람막이를 두른 부랑자는 얼마나 춥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잔돈을 넉넉하게 쥐어들고 사내에게 다가갔다. 이 돈으로 여관에 가서 눈이 그칠 때까지 따뜻한 수프라도 들면서 쉬라고 말해줄 요량이었다.
" 헛! "
그러나 사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신사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왠 허연 돌맹이 같은게 박혀 있었던 것이다. ' 아뿔싸, 이게 사람이 아니라 사람으로 변신한 정령이구나. 어쩐지 오늘따라 눈이 유달리 많이 온다 했더니만... ' 신사는 등골이 오싹했다. 정령과 얽힌 사람은 대게 끝이 좋지 않다는 소문을 떠올린 것이다.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신사의 뒷모습을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다 다시금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
사내, 아르모어 폰 피르쉬어는 막막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5년 7개월의 시간을 흘려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껏 쌓아올렸던 육체의 힘도, 여왕의 눈이 주었던 초능력도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남은 것이라곤 조수 노릇도 해먹기 어려운 어설픈 마법 지식과 쓸데없이 늘어버린 나이, 그리고 자유라는 무책임한 두 글자 뿐이다.
' 그냥 죽을까? '
기왕 죽을거라면 보다 가치 있는 죽음을 맞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던 마음조차도 눈발속에서 스러져간다. 천천히 떨어지는 체온과 함께 마지막 삶의 의욕도 사그라든다. ' 이젠 지쳤어. ' 모든걸 놓아버리는 마음 속 한마디에 다리 힘이 풀린다.
털썩.
바닥의 냉기가 등뼈를 타고 올라와 머리까지 전해진다. ' 이걸로 된거야. ' 무릎을 껴안고 고개를 파묻은 사내가 소리없이 중얼거렸다. 치가 떨리는 냉기를 버티며 사내는 잠을 청했다. 내일 아침이 되면 고통도 슬픔도 없는 편안한 세상이 펼쳐지리라 기대하며...
- 작가의말
시간 관계상 다음화는 좀 늦을겁니다.
Commen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