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19)
무바라크 시민들을 경악하게 만든 거대한 마법진은 이내 저절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도시 전체를 뒤덮는 규모의 마법진이 타오르자 마치 하늘이 불바다가 된 것 같았다.
허나, 이 압도적이며 장엄하기까지 한 광경을 보고 감탄하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불타는 하늘에 자극받은 인간의 생존본능이 머리가 터질듯이 명령을 쏟아냈다.
그들의 공포에 부응하듯, 불타던 마법진은 이내 거대한 구멍으로 변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뚫린 구멍은 검고 두려운 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이내 그곳에서 새빨간 화염이 솟구쳐나왔다.
" 어, 어... "
풀썩.
지상에서 족히 2000m 는 떨어진 상공의 불이건만 어찌나 뜨거운지 무바라크는 거대한 찜통으로 변했다. 그 열기를 견디다 못한 어린아이들이 엄마를 불러보지도 못한 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자신의 아이가 바로 옆에서 쓰러져도 어른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심연과도 같은 깊은 구덩이에서 솟아나온 공포가 그들의 전신을 옴싹달싹 못하게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 크아아아아아앙! "
화염이 솟구치는 구멍에서 짐승의 포효과 들려왔다.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도시가 진동하고 2천미터 아래의 사람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곳곳에서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울음소리에 담긴 위압감에 압도당한 사람들은 감히 숨을 쉬지도 못하다가 호흡 곤란으로 쓰러져 죽었다.
미지의 적에게 대항하기 위해 마법진의 중심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창잡이도 상상을 초월하는 상대의 위압감에 이를 악물고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을 정도였다.
단지 포효만으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괴물체는 서서히 구멍을 통해 모습을 들어냈다. 구멍을 통해 튀어나온 괴물의 거대한 모습을 확인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 맙소사. 우린 전부 죽었어! "
" 전부 끝이야... 모두 살해당할거라고! "
만일 그들이 강건한 육체와 굳건한 정신을 가진 오크 전사들이라 할지라도 반응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것은 전신이 불로 이루어진 거대한 드래곤으로,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거의 50km에 달했다. 높디높은 하늘에 있으니 형상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지 땅으로 내려왔다면 불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맥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 맙소사. "
상상을 초월하는 적의 거체에 창잡이조차 전의를 상실했다. 미간에 올라타서 전력을 다해 창을 꽃아넣는다 한들 두피나 뚫을까 의심스러운 판국에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싸우기는 커녕 저 드래곤이 도시에 내려앉기만 해도 끝장이었다. 아니, 고도만 낮추어도 사람들은 전멸이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 떠 있는 지금도 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데 저 불덩어리가 800m만 더 내려온다면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인간은 한 손으로 꼽을 것이었다.
가게 지붕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르모어도 어이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의 화염 드래곤을 보자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드래곤이 크다크다 하더니만 진짜 크네. "
지금까지 판타지의 드래곤은 마법만 없으면 현대무기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아르모어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머리 위에 떠 있는 화염 드래곤은 핵미사일을 맞아도 끄떡없어 보였던 것이다.
하물며 저런걸 사람이 오러 좀 둘렀다고 잡을 수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였다.
저러한 괴물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나도 무력하다.
그리고 자신들이 밟아 터뜨리는 벌래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의미없이 밟혀죽을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아르모어는 두렵기보단 자꾸 웃음이 나왔다.
" 푸흐흐흡... 그래, 죽는게 뭐 대수냐?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죽는거야. 오히려 이렇게 대단한 양반께서 종지부를 찍어준다니 영광이지. 지옥에 가서 자랑해도 되겠다. "
자, 어서와라. 나는 미련이 없다.
그렇게 외치듯 아르모어는 가슴을 펴고 두 손을 펼쳤다. 그의 기대에 부응하듯, 좁아터진 통로를 부수며 완전히 하늘로 빠져나온 화염 드래곤이 기쁨의 포효를 울렸다.
" 크아아아아아아앙! "
도대체 얼마나 강대한 힘이 있어야 이럴 수 있을까?
답답한 마음에 내지른 포효가 공포와 죽음을 가져왔다면 기쁨의 포효는 죽은 자를 되살리고 식물들로 하여금 때아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만들었다.
그저 감정을 표출하는 것만으로 생명을 좌지우지하다니. 눈으로 보고도 몸으로 느끼면서도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 저놈은 진짜 신이라도 되는건가? "
아르모어는 가게 아래에서 쓰러져 죽어있던 사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살아는 것을 보곤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도무지 현실성이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 구시대의 사람들이란 놈들도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걸 불러오는 마법을 개발했지? 단체 자살이라도 하고 싶었나? "
그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의 상황은 사실 사고였다. 거대한 화염 드래곤이 튀어나온 것은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돌발사태였던 것이다.
속사정이 어찌되었건 사고는 터졌고 불타는 거대 괴수는 지상을 향해 내려오기 시작했다. 화염에 데인 대기는 점차 뜨겁게 달아올랐고 사람들의 피부는 사막에 던져놓은 나무토막처럼 바짝바짝 말라버렸다.
이제 조금만 거리가 좁혀진다면 사람들의 몸이 산 체로 불타오르는 진풍경이 벌어질 것이었다. 그것을 직감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손 쓸 도리없이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수로 이 재앙에서 벗어날 것인가?
사람의 발이 아무리 빨라봤자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직경 50km짜리 불덩어리를 피해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또는 담담하게, 또는 절규하면서 서서히 내려오는 죽음을 기다렸다.
***
" 꼴깝떤다 진짜... "
서서히 하강하는 드래곤을 보며 미친듯이 낄낄대던 아르모어의 귓가에 비수같은 냉소가 틀어박혔다. 뜻밖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딘가 낮익으면서도 낮선 얼굴이 들어왔다.
" 페어리...? "
아르모어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게, 난데없이 나타난 상대는 그만큼 괴이한 존재였다.
겉보기는 인간 여성과 다를 바 없었으나 여왕의 눈은 그녀가 요정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페어리 계열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
하지만 보통 페어리는 주먹만한 크기가 아닌가?
가장 커다란 개체인 여왕조차도 기껏해야 건장한 인간 남성의 몸통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물며 페어리는 변신 능력이 있는 종족도 아니었으니 아르모어가 혼란에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괴상한 인간형 페어리(?)는 아르모어의 고민을 해결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다짜고짜 자신의 용건부터 들이밀었다.
" 너, 지금 폐하의 눈을 가지고 있는 놈 맞지? "
" 어? 어어... 맞긴 한데... "
폐하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면 일단 요정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지금 요정이 나타나 여왕의 눈을 찾는단 말인가?
그런 의문을 해소할 겨를도 없이 아르모어는 이전에 한번 맛보았던 고통을 다시금 느껴야만 했다.
" 아악! 이게 무슨 짓이야! "
눈앞이 번쩍인다 싶더니 천지가 캄캄했다. 이전에 여왕에게 당한 것처럼 두 눈을 생으로 뽑혔던 것이다.
" 곱게 쓰고 돌려줄테니까 징징대지 말고 찌그러져있어. 사내새끼가 눈 좀 뽑혔다고 엄살은. "
고통에 몸부림치며 고함을 지르는 아르모어를 한심한 듯한 눈으로 내려다본 요정은 그의 등을 짓밟아 제압하며 투덜거렸다.
" 정말이지, 여왕 폐하는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어. 왜 이런 얼간이에게 눈을 줘버리신 거람. 차라리 나한테 물려주셨으면 큰 도움이 되었을텐데. "
말하다보니 자기 말에 자기가 삐졌는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요정은 강탈한 여왕의 눈을 양 손에 나눠쥐고는 허공에 뜬 화염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
- 작가의말
『반응이 없다. 평범한 시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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