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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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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연재수 :
270 회
조회수 :
622,865
추천수 :
8,717
글자수 :
1,341,677

작성
13.02.16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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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
추천
26
글자
20쪽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12)

DUMMY

천막을 향해 다가가는 아르모어의 모습은 마치 가볍게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의 옷에 묻어있는 선명한 핏자국만 아니었다면 누구도 그가 막 살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곤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가하고 느긋해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의 속옷은 땀에 젖어 질척질척했고 천막의 문을 열어젖히기 위해 뻗은 팔은 부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털썩.


마침내 약 400m의 거리를 지나 23분대 천막에 도착한 아르모어는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힘없이 허물어졌다. 애시당초 출발하기 전부터 이미 균형이 어그러져 있던 몸이다. 아무리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되는 상황이었다지만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며 수백미터를 걸어왔으니 여지껏 정신을 잃지 않은 것만해도 기적이었다. 이처럼 몸도 정신도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도 아르모어는 남은 힘을 쥐어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은 뒤에야 힘겨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의식을 되찾은 아르모어는 이번에도 자신이 살아남은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분명, 몸의 균형이 어그러진 것은 죽을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건만 어찌된 셈인지 수십, 수백번을 겪어도 이 질긴 숨통은 도무지 끊어질 줄을 모른다. 하다못해 요정화라도 진행되었나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요정화 비율은 여전히 30%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고통만 실컷 맛봤지 얻은 것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체 여왕의 눈을 활성화시키자 노을빛으로 물들어있는 죄수대의 모습이 보였다. 정신을 잃었을 때가 이미 오후였으니 생각보다 시간은 많이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시야를 조절하여 23분대 천막과 그 주변으로 한정시켰다. 그제야 깔끔하게 정돈된 천막 내부가 눈에 띄었다.


' 누가 치운거지? '


분명히 나가기 전만해도 피와 시체들로 엉망진창이었던 천막을 떠올린 아르모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관심을 끊었다. 이유야 어찌됐든간에 골칫덩이가 사라졌으니 잘됐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게 물건의 수량과 위치를 파악하느라 잠시 시간을 보낸 아르모어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 그나저나 여기도 군대일텐데 너무 풀어주는거 아냐? '


환영대원의 말로보나 간부들이 병사를 대하는 태도로 보나 극도로 통제된 군생활을 하게 될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배치되고나니 널널해도 너무 널널했다. 전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통제나 지시가 없는 것은 둘째치고 아예 부대 안에 간부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상 무장한 죄수들을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는, 그야말로 막장 중에서도 막장 관리였다.


' 이렇게만 해준다면 기간을 체워서 나가는 것도 생각해볼만한데. '


물론, 실제로 그렇게까지 관리가 느슨할 리 없다. 거저 먹이고 재워주려고 감옥에서 꺼내온 것은 아닐테니까. 실제로 환영대의 여자는 오늘이 지나면 접촉조차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지 않나. 필시 신병이 들어오는 날만 특별히 자리를 비워주는거라고 생각하는게 맞을 것이다.


' 뭐, 그것도 별나긴하지만. '


어찌되었건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내일부터는 꽤나 귀찮은 잔소리가 시작될 공산이 컸다. 그렇다면 남방군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끔찍하게 귀찮은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군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상식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본래라면 고참들에게 배워야했을 지식이지만 고참들은 이미 자신의 손으로 모두 죽여버린 상태였기에 아르모어는 할 수 없이 여왕의 눈을 활성화시켜 시야를 크게 넓혔다.


' 흐음, 마침 타이밍이 괜찮은걸. '


기본적인 규정이나 주의사항 따위는 일찌감찌 알려줬는게 아닐까 싶었지만 의외로 많은 분대가 이제서야 정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신병을 받자마자 군기를 잡는답시고 두들겨패기 바빴던 것이다. 어차피 일찍 알려줘봤자 얻어맞다보면 금새 까먹는다는 점도 한몫했다.


덕분에 아르모어는 여러 분대에서 오가는 대화들을 통해 기본적인 상식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사람의 뇌 용량이 한정되어 있는만큼 처음부터 놓친 부분도 있고 잊어버린 내용도 많았지만 어차피 시시콜콜한 잡규정따윈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큰 줄기만 놓치지 않는다면 충분했다.


이렇게 아르모어가 정보를 수집하는 사이 시간은 소리없이 흘러 어느덧 다사다난했던 하루도 끝나가고 있었다.


***


" 귀찮아... "


입대 2일차.


아르모어 폰 피르쉬어는 심각하게 탈영을 고민했다.


첫날은 그야말로 특별 대우였다는 듯, 해가 뜨기도 전에 부대로 돌아온 간부들은 제일 먼저 두번의 종소리와 함께 아침 점호부터 시작했다. 점호는 말 그대로 인원의 체크 뿐만 아니라 장비류의 검사도 겸했는데 약간의 하자만 있어도 다짜고짜 주먹이 날아왔기에 시작부터 피를 보는 부대가 많았다. 더군다나 간부가 두들겨패고 지나간 뒤에는 고참들이 후임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또다시 두들겨팼기 때문에 아침부터 곡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 피눈물의 파도는 위쪽에서부터 ㄹ자 모양으로 내려와 마침내 23분대 천막에까지 도달했다.


" 뭐야, 넌 왜 혼자밖에 없어? 다른 새끼들은 다 어디간거야! "


" 까불길래 다 죽였습니다. "


마빡에 힘줄을 세워가며 추궁하는 간부에게 아르모어는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첫날, 하극상은 곧 죽음이라고 간부들이 공언했다는 걸 감안하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지만 간부의 반응은 뜻밖에도 가관이었다. 동료를 살해한 죄를 묻기는 커녕, 오히려 보기보다 능력이 있다며 칭찬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쓸데없이 남게된 소총을 회수하여 돌아간 것이 끝이었다. 아침부터 죽으니 사니 난장판이 되버린 타 분대에 비하면 어이없을만큼 태평한 시작이다.


하지만 무난했던건 딱 아침 점호까지였다.


" 20에서 25분대까지 전부 튀어나와! "


점호가 끝나기가 무섭게 차출된 다섯 분대원들은 무기 대신 삽을 지급받고 천막촌 아래쪽에 위치한 공동 화장실로 끌려나왔다. 하루에도 수천명이 사용하는만큼 화장실의 규모도 크고 넓었는데 적당히 만든 나무 발판에 구덩이만 파놓은 것 뿐이라 냄새가 상상 이상으로 지독했다.


입대 이후 처음으로 화장실에 접근한 아르모어의 표정도 험악하게 구겨졌다. 앞으로 계속 사용해야 할 생활시설의 한심한 자태에 짜증이 치밀어오른데다 자신들이 무슨 일을 위해 차출되었는지 감이 잡혔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에 부응하듯, 장교는 다섯 분대원들을 모아놓고 지시했다.


" 저기 2동 1호부터 한 분대가 15개씩 맡아서 총 75개의 변기를 퍼낸다. 퍼낸 오물은 용구함에 있는 똥통에 담아다가 뒤의 구덩이에 처넣으면 되고 최소한 절반 이상은 퍼내라. 알겠나? 나중에 검사해서 절반 이상 차있는 변기가 발견되면 그 변기 담당한 새끼들은 전부 변기 속에 처넣을테니 알아서 해라. 시간은 점심시간 종료까지다. 오후까지 질질 끄는 새끼가 있으면 마찬가지로 똥통에 처넣어줄테니 그리 알도록. "


" 23분대는 저 혼자뿐이라 도저히 시간에 맞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졸지에 혼자서 15곳을 처리해야 할 판국이 되자 아르모어는 즉시 항의했다. 그러나 장교는 표정을 굳힌 체 다가와 아르모어의 복부에 주먹을 질러넣었다.


" 이 미친 새끼야. 그래서 나더러 너랑 같이 똥이라도 퍼달라는거냐? 이 새끼가 아주 개념을 상실했구나. 귓구멍 파고 잘 들어라. 군대에서 명령이 떨어진 이상, 못하는건 없다. 알겠나? 상관의 명령이라면 니 눈깔을 뽑아서 똥구멍에 꽃으라 그러면 꽃아야 되는거고 칼 한자루 들고 드래곤 목을 따오라면 따와야 되는거야! "


퍼억!


용서없는 군홧발이 아르모어의 얼굴을 정면으로 걷어차버린다. 그 충격으로 아르모어가 나동그라지자 간부는 바닥에 침을 칵 뱉더니 좌중을 둘러보며 사나운 얼굴로 물었다.


" 아직도 나한테 할말있는 새끼 있나? "


" ..... "


있어도 말할 리가 없다. 꿀먹은 벙어리처럼 늘어서있는 병사들의 얼굴을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한번 둘러본 간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했다.


" 빨리 끝낸 새끼들은 기다릴 것 없이 해산해도 좋다. 대신 다시 한번 명심해라. 내가 검사하러 왔을때 절반 이상 똥이 차있다? 그럼 그 똥통 맡은 새끼들은 각오해야할거야. 알겠나? "


" 옛! "


" 좋아, 그럼 시작해! "


간부가 자리를 뜨자 병사들은 투덜대면서도 앞에서부터 15개씩 변기를 맡았다. 분대마다 살아남은 인원수가 달랐기 때문에 별로 공평한 분배는 아니었지만 간부가 정한 일에 투덜거려봤자 바뀌는건 없다. 인원이 많은 분대는 느긋한 얼굴로, 인원이 적은 분대는 똥씹은 얼굴로 각자 배정받은 변기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일괄적인 일감 분배의 최대 피해자인 아르모어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짜증 가득한 얼굴로 삽을 들었다. 그가 배정받은 변기는 2동 30호에서 45호. 먼저 30호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코가 썩어들어갈 듯한 지독한 똥내가 반겨줬다. 한동에 75개씩 총 4동의 변소가 있었지만 3천명을 상회하는 죄수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다보니 화장실은 늘 모자랐다. 당연히 오물도 차고 넘쳐서 30호 변기는 거의 구멍 입구까지 똥이 차있는 상태였다.


" 우왝. "


별별 못볼 꼴을 보면서 살아왔건만 이 광경 앞에서는 절로 헛구역질이 나왔다. 하지만 더럽다고 마냥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는 먼저 조잡하게 짜여진 나무틀을 제거하여 입구를 넓힌 뒤, 용구함에서 꺼내온 커다란 나무통에 똥을 퍼담기 시작했다.


변기 두 개가 비워질 무렵, 어느덧 장정 몸통만한 나무통이 오물로 가득 찼다. 양이 양인데다가 나무통 자체의 무게도 만만치 않다보니 보통 사람보다 훨씬 힘이 좋은 아르모어가 들기에도 꽤나 묵직했다. 그것을 가지고 화장실 건물 뒷편으로 나가니 둘레가 50미터는 될법한 구덩이가 반겨준다. 깊이는 대략 3m 정도. 보아하니 쓰레기가 일정 이상 차면 흙으로 덮어버리고 그 앞쪽을 다시 파는 식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구덩이 속에는 분뇨뿐만 아니라 각종 폐품과 인간의 시체로 가득했다. 여러가지 이유로 죽어나간 죄수병들을 죄다 여기에 버린 모양이었다. 아르모어는 부패가 진행되어 얼굴이 반쯤 썩어들어간 시체 위에 똥을 들이붇고는 다시금 변소를 향해 걸었다. 이제 고작 두 개를 펐을 뿐인데 대략 30분은 지나버린 것 같다. 이래서야 어지간히 서두르지 않으면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다.


' 제기랄, 더럽고 짜증나고 힘드네. '


확 엎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잠시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고작해야 남들 다 하는 잡무를 하기 싫다고 항명하기엔 너무 치졸하다고 생각했다. 꼭 어린애가 방청소를 하기 싫어서 땡깡을 부리는 것 같지 않은가. 아무리 목숨이 하찮다곤 하지만 그런 찌질한 이유로 죽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 조금만 참자. 어차피 전쟁중이니 조금만 버티면 반드시 죽을 자리가 나올거야. '


설마하니 잡일 시키려고 3천명이나 되는 죄수대를 유지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아르모어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


똥퍼는 작업이 끝난 것은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테지만 마나가 있는 세상에서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1년 이상을 단련한 아르모어의 육신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았다. 15개의 변기를 모두 70% 이상 퍼낸 아르모어는 마나를 물로 조합하여 얼굴과 옷에 묻은 오물들을 씻어내고 천막으로 향했다. 아직 점심시간은 남아있었기 때문에 서두르면 식사를 할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방금전까지 구역질나는 똥을 펐던 탓에 식욕이 없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봤을 때, 아르모어의 판단은 오산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교들은 또다시 한 무리의 죄수들을 차출하여 잡무를 맡겼다. 이미 오전 내내 힘든 작업을 수행했던 분대들도 예외는 아니다. 아르모어에게 맡겨진 이번 잡무는 정규군이 주둔하는 내성의 쓰레기를 옮기는 일이었다. 죄수병들이 기다리는 가운데 왼쪽만 살짝 열린 성문사이로 음식물 찌꺼기부터 떨어진 단추에 이르기까지 자질구레한 쓰레기로 가득찬 수레가 끝도없이 밀려나온다.


수레를 인계받은 죄수병들은 거의 700m나 떨어진 매립장까지 족히 수백kg은 나갈 수레를 인력으로 끌고간다. 트럭 몇대만 있으면 순식간에 끝날 일이건만, 높으신 양반들은 결코 쓰레기나 옮기는데 귀한 차량을 배정해주지 않았다. 덕분에 죄수병들은 수레 하나당 여섯명씩 달라붙어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쓰레기를 운반해야했다.


그렇게 애써 쓰레기를 운반해도 일은 끝나지 않는다. 운반한 쓰레기를 매립해야하는 것이다. 수레의 뒤를 열고 구덩이에 쓰레기를 쏟아부은 뒤, 흙을 덮어 마무리한다. 그러면 그 위에 다음 분대가 쓰레기를 붓고 또 한층의 흙을 쌓아올리는 식으로 커다란 구덩이를 매워갔다.


다행히 이번에는 특별히 분대별로 일을 나누지 않았기에 아르모어는 두세곳의 분대원들과 뒤섞여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한다. 거의 어두워질 무렵에야 잔뜩 지친 몸으로 천막촌 돌아온 아르모어는 주린 배를 이끌고 식사를 배급받기 위해 이동했다.


땡땡땡땡땡!


" 이런 씨발! "


급히 줄을 섰지만, 다섯명을 앞에 남겨놓고 저녁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배급하던 병사들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배식을 중단했다.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없다. 그것이 규칙이니까. 취사병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빵을 먹고 있던 병사들도 남은 빵을 빠르게 입에 우겨넣으며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속 어정대다간 간부들이 들이닥칠 것이기에 아르모어도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


지치고 배고픈 죄수병들은 밤이 되어서도 쉴 수 없었다.

밤새 엘프들이 숲에 장난질을 쳐놓지 못하도록 야간 순찰을 돌아야 했던 것이다. 분대별로 2시간마다 교대하며 밤새도록 위험지대를 순찰하는 것이었는데 총 500여명이 동원되는 대규모인데다 심심찮게 사상자가 발생하는 위험한 임무였다.


" 정신 바짝 차리고 경계해라. 앞서가는 분대와 거리 유지 명심하고. "


" 알겠습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엘프놈들을 발견한다고 무슨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감시하러 나온 간부도 없잖습니까. 그냥 적당히 짱박혀서 시간만 보내면 될 것 같지 말입니다. "


선임병의 말에 라이트를 비추며 선행하던 신병, 에모랄은 주변을 라이트로 꼼꼼히 비추며 곁눈질로 앞선 부대의 불빛을 주기적으로 주시했다. 그러나 이내 그 눈빛에는 지루한 빛이 감돈다. 언제 엘프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숲이라며 겁을 주지만 실상 성벽까지의 거리는 300미터도 체 되지 않는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만 없다면 육안으로도 훤히 보이는 거리. 엘프들 입장에서도 이곳은 적진 코앞이나 다름없는 위험한 지역이다. 자신들이 숲속으로 들어가길 꺼리는 것처럼 엘프들도 여기까지 나오는건 꺼린다는 뜻이다.


물론,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여기까지 왔다는건 그만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고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성취해야할 목표라면 남방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것이 틀림없다. 당연히 열심히 순찰하여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도리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방군의 입장. 어떻게든 시간만 때우면 그만인 일개 죄수병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하물며 감시하는 간부도 하나 없는데야 탈주하지 않은 것만해도 칭찬받고 싶을 정도다.


그런 신병의 태도에 선임병 모레스의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그러나 주먹은 이내 어둠속에서 조용히 풀린다. 부대 내에서라면 감히 고참이 하는 말에 토를 단다며 신명나게 두들겨줄테지만, 이곳은 명색이 전장. 모두가 총을 가지고 있으니 성질대로 두들겼다가 신병이 이성을 잃고 쏴버리기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개죽음이다. 물론, 지근거리에 동기가 둘이나 더 있으니 반란은 곧 진압되겠지만 자신이 죽고나서 진압되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 이봐, 너. 오늘 하루 지내보니 어떻냐? "


" 그야... X같습니다. "


" 그렇지. X같지. 여기서 조금만 있어보면 그 생각은 점점 더 강해질거야. 차라리 감옥에서 죽는게 나았다며 쓸데없이 지원한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놈들도 널려있지. 모르긴해도 탈영하려는 놈들도 적지않게 있을거야. 근데 간부 새끼들이 이걸 모를까? 정말 모를 것 같아? "


" 아닙니다. "


" 그럼 뻔히 알면서 소총까지 들려줘놓고 우리만 여기 풀어놓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


듣고보니 꽤나 이상한 일이었다. 탈영 의사가 넘쳐흐르는 병사들을 무장까지 시켜놓고 감시할 간부나 독전대도 없이 그냥 풀어놓다니. 상식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 그건 바로 풀어줘봤자 열심히 순찰을 도는 것 외엔 살아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


" .....! "


" 주변의 지형을 잘 살펴봐. 좌우가 절벽으로 막혀있지? "


그의 말대로 주변을 살펴보니 과연 동쪽과 서쪽에는 경사가 거의 직각에 가까운 천연 암벽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급한 경사도 경사였지만 높이가 족히 200미터쯤 되는 것이 쉽사리 넘기는 어려워보였다. 또한 절벽의 높이가 주변의 나무 크기보다 높아서 벽을 기어오르는 물체가 있으면 눈에 확 들어왔다.


" 저건 남쪽으로 뻗어있는 커다란 V자곡이야. 한쪽의 길이가 10km도 넘지. 즉, 우회하려면 최소한 10km 이상은 숲 쪽으로 들어가야하는데 그건 적진 깊숙히 혼자 돌격하는거랑 똑같아. 자살행위지. 그렇다고 타고 넘을 수도 없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랍시고 초소와 포병대가 진을 치고 있거든. 물론, 죄다 정규 남방군이지. 우리네 목숨 같은건 파리처럼 아는 개새끼들 말이야. 이제 내가 무슨 소릴 하고 싶은지 알겠나? 남문을 나선 이상,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은 한군데 뿐이야. 계곡과 계곡이 만나는 지점. 즉, 외성의 남문을 통해 돌아오는 길 밖에 없다고. "


남쪽은 적, 동서는 절벽, 북쪽은 성벽. 이곳은 자연과 두 세력이 만들어낸 감옥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죄수들도 여기로는 탈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남쪽에 풀어놓는 한, 탈영의 위험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 그리고 넌 우리랑 싸우는 엘프놈들이 몇놈이나 되는지 아나? "


" 잘 모르겠습니다. "


" 오늘 왔는데 당연히 모르겠지. 상부의 말에 따르면 기껏해야 오백 정도밖에 안될거야. "


" 고작 오백 말입니까? "


" 그래 오백. 전력상으로는 이쪽의 10분의 1도 안되지. 정면승부로는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어. 하지만 실제로는 어느쪽도 좀처럼 승기를 가져가지 못하고 있지. 놈들은... "


펑! 펑! 펑!


모레스가 설명을 끝마치기도 전에 남쪽에서 쏘아올린 무언가가 환한 빛을 발하며 허공에서 폭발했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괴물체의 빛을 확인한 고참병들의 표정이 일시에 굳어졌다.


" 이런 썅, 다들 뛰어! 다른 분대와 합류해서 최대한 뭉쳐야된다. "


" 서둘러! 어떻게든 교대 시간까진 버텨야해! "


고참병들이 고함을 지르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신병들이 허둥지둥대는 혼란속에 밤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어떻게든 월간지는 피해보려고 하지만 이야기가 잘 써지질 않네요.

주인공 심경의 변화를 설명하려고 했더니 소설이 아니라 무슨 설정집처럼 지루한 설명만 이어지질 않나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보여주려했더니 부제목은 지옥인데 난데없이 깽판물이 되질 않나 비극을 강조하려했더니 별로 비극적이지도않고...  

 

이런저런 이유로 수정하다보니 결국 결과물은 이도저도아닌데 시간만 왕창 잡아먹어버리네요. 이쯤되면 부제목의 지옥이 전쟁터가 아니라 작가의 지옥 같기도 합니다.

 

쩝. 적다보니 쓸데없이 변명만 늘어놨군요. 변명은 죄악인 것을...

 

그럼 가급적이면 2월 안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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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6) 12.05.26 1,888 29 8쪽
138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5) +18 12.04.20 2,133 32 9쪽
137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4)+ +10 12.04.14 1,999 39 14쪽
136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3) +16 12.04.11 2,066 36 6쪽
135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2) +17 12.04.11 2,035 35 15쪽
134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7 - 지옥 (1) +20 12.04.01 2,203 51 9쪽
133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end) +11 12.03.31 1,954 32 12쪽
132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20) +16 12.03.25 1,723 31 12쪽
131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19) +14 12.03.25 1,823 41 8쪽
130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18) +4 12.03.25 1,622 23 8쪽
129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17) +7 12.03.16 1,755 24 12쪽
128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16) +13 12.03.13 1,854 23 10쪽
127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15) +6 12.03.11 3,285 54 13쪽
126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14) +7 12.03.07 3,103 47 10쪽
125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6 - 다시 굴러가는 수레바퀴 (13) +13 12.03.04 1,707 2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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