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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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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연재수 :
2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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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170
추천수 :
8,717
글자수 :
1,341,677

작성
14.05.0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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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0
추천
27
글자
20쪽

하얀 기사 이야기 Ep.0 - 이야기의 시작 (4)

DUMMY

키에에엑!


닭대가리에 돌로 만들어진 뱀 형상의 괴물이 시커먼 피를 분수처럼 뿜어대며 쓰러진다. 날이 새하얗게 빛나는 헬버드로 괴물의 목을 친 기사, 에반트 홀 헤임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헬버드를 휘둘렀다.


카앙!


피륙으로 이루어진 괴물의 팔과 헬버드가 부딛쳤는데 어째서인지 금속과 금속이 부딛치는 소리와 함께 헬버드가 튕겨져나온다.


" 제길, 콘라드! "


반발력을 이기지 못한 양 팔이 머리 위로 들리며 무방비 상태의 상체가 드러난다. 바보같을 정도로 비대한 근육을 가진 괴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은 왼팔로 보디블로를 날렸다. 아무리봐도 맞았다간 상체가 통째로 뜯겨나갈 것 같은 일격필살의 공격이었지만 홀 헤임은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맞이할 위기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길은 죽었을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동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농담으로라도 현명한 선택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놀랍게도 좌측에서 튀어나온 기사가 맹렬한 기세로 달려와 괴물을 들이받아버렸다.


쿼어엉!


" 역시나 맷돼지 콘라드! 들이받는 것 하나는 최고구나! "


3m 40cm를 넘는 괴물의 거체가 기우뚱하며 주먹의 궤도가 틀어진다. 덕분에 가까스로 공격을 피해낸 홀 헤임은 놀리는건지 칭찬하는건지 구분하기 힘든 외침과 함께 혼신의 힘으로 헬버드를 휘둘렀다. 새하얀 헬버드의 날이 괴물의 목을 강타한다. 그러나, 기둥처럼 두터운 근육 탓인지 도끼날은 3분의 1 정도 밖에 박히지 않았다.


쿠아아아악!


고통이 심한 듯, 괴물은 짐승처럼 울부짖었지만 전투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닌지 지체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홀 헤임은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릴 기세로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헬버드를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동시에 자세를 추스른 콘라드의 철퇴가 정을 내리치는 망치처럼 할버드의 뒷날을 강타했다.


촤악!


홀 헤임의 머리가 날아가기 직전, 그의 헬버드가 한발 앞서 괴물의 목을 떨어트렸다. 목을 잃은 괴물은 바닥에 쓰러져 몇 번 꿈틀거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괴물의 죽음을 확인하고서야 할버드에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쉰 홀 헤임은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뒷통수에 충격을 받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 누가 맷돼지냐, 이 쥐새끼야. "


" 젠장, 그럼 저 덩치가 한방에 나가떨어지는데 그게 사람이냐? 맷돼지지! "


" 그래도 이게... 이크! "


콰앙!


전장의 한복판에서 티격태격하던 콘라드와 홀 헤임의 사이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동시에 투닥대던 두 기사는 번개같은 속도로 바닥을 박차고 뒤로 몸을 날렸다. 간발의 차이로 성인 남성만한 나무 몽둥이가 바닥을 짓뭉갠다. 그러나, 위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덥썩!


" 크윽!? "


" 이런! "


이번 괴물은 팔이 네 개였던 것이다. 좌우로 회피했던 두 기사는 괴물의 등에 난 길쭉한 손에 붙잡혀버렸다. 갑옷의 방어 마법이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지만 악력이 어찌나 강한지 몇 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 제기랄, 이깟 놈한테...! "


두 기사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쳤지만 괴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순 없었다. 오히려 점점 더 강하게 쥐어오는 괴물의 손아귀에 방어 마법마저 한계에 다다른다. 마침내 그들의 몸이 한 줌 핏덩어리로 변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물체가 괴물의 머리를 강타했다.


빠악!


중병기로 후려쳐도 쉽사리 깨지지 않는 괴물의 두개골이 내려찍기 한방에 수박처럼 터져나간다. 무시무시한 각력으로 괴물을 처치한 것은 놀랍게도 여자였다. 그녀는 바닥에 내려앉자마자 다시 한번 뛰어올라 공중에서 회전하며 오른쪽 발등으로 바스러진 괴물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러자 말로 형언하기 힘든 기괴한 소음과 함께 오른발이 괴물의 상체에 깊숙히 파고들었다.


" 휴우, 덕분에 살았습니... "


" 벌써 갔어. "


저승길 문턱까지 갔다온 홀 헤임이 식은 땀을 닦으며 감사 인사를 건냈지만 돌아온 것은 콘라드의 퉁명스러운 목소리 뿐이었다. 그들을 구원한 여자는 인사를 받을 틈도 없이 다음 적을 향해 가버렸던 것이다. 홀 헤임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저게 그거지? 『백기사의 다섯 날개』. "


" 맞아, 그 중에서도 레이라 루스일거야. 워낙 순식간이라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맨손으로 싸우는 여자가 그리 흔치는 않을테니까."


" 레이라 루스... "


홀 헤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여자의 이름을 되새기며 그녀의 모습을 떠올랐다. 흑발과 백발이 반씩 섞인 신비로운 머리카락, 추악한 괴물의 핏물로도 가리지 못한 새하얀 살결과 아름다운 얼굴, 결정적으로 날렵한 움직임에 어울리지 않는 풍만한 가슴까지. 홀 헤임의 이상형이 즉석에서 재구성될만큼 완벽한 여성이었다.


" 결심했다. 나, 이번 일이 끝나면 레이라 양과 결혼하겠어! "


전쟁터 한복판에서 죽음을 부르는 대사를 지껄여댄 홀 헤임의 모습에 기가막힌 얼굴로 혀를 찬 콘라드는 멍청한 친구에게 차가우면서도 동정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 안됐지만 그건 불가능해. "


" 뭐? 왜? 내가 뭐 어때서? 집안 괜찮지, 재력도 좀 되지, 사람 괜찮지. 뭐가 문제야? "


" 사람이 괜찮긴 개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너보다 성격이 개차반인 놈은 하나도 없는데 무슨 개소리야? 뭐, 설령 성격이 좋아봤자 무리인건 마찬가지지만. "


" 그게 무슨... "


발끈했던 홀 헤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하는데 집안 좋고, 재력 있고, 사람 괜찮으면 다 된거지 또 뭐가 필요하단 말인가? 역시 자신을 놀리는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그가 한마디 하려는 순간, 콘라드의 냉혹한 한마디가 현실을 가르쳐주었다.


" 그녀는 이미 결혼했거든. "


" .....아. "


정말이지 상상조차 못했던 맹점이었다. 그러나 이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완벽한 여자를 세상 남자들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으니까. 빨리 끓어올랐던 것처럼 빨리 냉정을 되찾은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마음을 정리하면서 그래도 못다 떨친 미련 때문에 무의미한 정보를 물었다.


" 그 행운의 사나이는 대체 누구야? "


" 이안 루스. 레이라 양과 마찬가지로 백기사의 다섯 날개 중 하나이자 우리 무기에 색칠해준 놈이지. "


" 색칠? 아, 이거 말인가. "


홀 헤임은 하얗게 빛나는 헬버드의 날을 뚱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이빨도 들어가지 않았을 괴물들의 몸뚱어리를 힘겹게나마 가를 수 있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걸려 있던 이 강화 마법 덕분이었다. 무기가 통하지 않았을 때의 절망감을 생각하면 고맙기 그지없는 마법이었지만 레이라의 남편이 걸어준 것이라 생각하자 묘하게 짜증이 몰려왔다.


"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센스는 형편없군. "


" 질투하냐? "


콘라드가 실실대며 묻자 홀 헤임은 발끈했다가 이내 자신의 꼴만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은 전투 중이 아닌가. 여자니 질투니 하는 것들로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


" 아차, 지금 전투 중이었지! "


" 허억! "


맙소사, 목숨이 오가는 전투 도중에 잡담이라니! 정신이 나가도 보통 나간게 아니다. 명색이 기사라는 자가 전투 중에 전투를 잊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재빨리 잡념을 떨쳐버리고 애병을 붙잡는다. 헬버드의 익숙한 중량에 당황했던 정신이 안정을 되찾는다. 콘라드도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것인지 기겁한 얼굴로 철퇴를 잡고 일어섰다. 그렇게 전투태세를 다시 갖춘 두 기사는 이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치열한 전투 도중에 몇 분이나 잡담을 나눴는데도 어째서 습격당하지 않았던걸까?


어째서 격전의 와중일텐데도 주변이 이토록 조용한걸까?


그들의 의문에 대한 답변은 엉뚱하게도 뒤쪽에서 들려왔다.


" 상황 다 끝났는데 너네 뭐하는거야? "


" 엉? "


괴물들의 피로 범벅이 된 도끼를 어께에 짊어진 또다른 동료, 코르데 달딘이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며 하는 말에 두 기사는 한목소리로 멍청한 소리를 냈다.


" 저길 보라고. "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거대한 뭔가로 땅을 파내버린 듯한 흔적과 스무마리나 될까 싶은 소수의 괴물들을 상대로 네 명의 기사가 터무니없는 학살극을 펼치는 모습이 보였다. 어께에 대검을 걸친 기사가 검을 한번 휘두를때마다 괴물의 팔다리가 뚝뚝 끊어져나갔고 거구의 사내가 기둥처럼 보이는 철곤을 내리치자 전신이 쇳덩어리로 되어있는 괴물의 몸통이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뭉개진 괴물의 잔해 너머로 아까처럼 날렵한 몸놀림으로 괴물을 때려눕히는 레이라 루스의 모습이 슬쩍 스쳐지나가고 그녀의 왼편에서부터 닥치는대로 쌍검을 휘둘러 괴물을 학살하는 하얀 갑주의 기사가 있었다.


" 백기사와... 다섯 날개? "


" 설마 저 넷이서 다 정리한거야? 그 짧은 시간 사이에? "


그들이 한창 싸우고 있을 때, 그러니까 약 4분 전만해도 괴물들은 적어도 400마리 정도는 남아 있었다. 기껏해야 전투의 초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작 3~4분만에, 그것도 기사조차 고전을 면치 못할 정도로 강력한 괴물들을 400마리 가까이 처치하다니, 그것도 고작 네명이서?


" 무슨 멍청한 소리하는거야? 저 작자들이 괴물인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라고. 그런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너네들 정말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었던거야? 살아남은 것만 해도 용하다 용해. "


" 크윽...! "


경악을 금치 못하는 얼굴로 홀 헤임과 콘라드가 돌아보며 묻자 달딘은 바보를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을만큼 짜증나는 시선이었지만 두 기사는 이를 갈면서도 반박하지 못했다. 기사가 전투 와중에 잡담이나 하면서 정신을 팔았다는건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최악의 바보짓이었으니까. 머저리 같은 동료들의 보기 드문 굴욕씬을 감상한 달딘은 흡족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 뭐, 까놓고 말하면 정확히 뭐였는지는 잘 몰라. 그냥 저쪽에서부터 무슨 물체가 휙 하고 날아왔는데 때마침 그 아래에 있던 괴물들이 여파에 쓸려나간 것 뿐이거든. 아마도 처음에 신전을 부쉈던 그 괴상한 남자와 백기사의 종자가 싸우면서 날린 공격이 우연히 이쪽으로 날아온 것 같다고는 하던데... "


거기까지 말한 달딘은 새삼스럽게 바닥에 남은 거대한 흔적을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던 두 기사도 새삼스럽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전투 마법사들의 마법 폭격을 받고도 멀쩡했던 수백마리의 괴물들을 여파만으로 한번에 쓸어담은 강대한 일격. 그런 공격이 오가는 전투가 바로 저쪽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 나... 이번에 돌아가는 길로 그냥 은퇴할까봐... "


홀 헤임의 입에서 그답지 않은 나약한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다른 두 기사들은 차마 뭐라하지 못했다. 그들도 느꼈던 것이다. 『기사』란 괴물들 앞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그리고 전장을 떠나지 않는 이상, 언젠가 저런 괴물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 나도 한번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될 것 같다. "


그렇게 중얼거리는 콘라드의 뒷모습이 어쩐지 초라해보였다.


***


20초.


잠깐 멍하니 있다보면 지나가버리는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이라기보다는 순간,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틈새. 과장을 조금 보태서 눈 한번 깜짝이면 지나가버리는 간격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다.


너무나도 빠르기 때문이다.


소리조차도 뒤따르지 못하는 압도적인 속도가 전투에 돌입한 두 괴물의 시간감각을 형편없이 뒤틀어놓고 있었다. 쉴새없이 굉음이 터지고 있는데도 막상 굉음을 일으키고 있는 원인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기묘한 고요 속에서 사내의 신경이 터무니없는 속도로 뇌에 정보를 전달한다. 정보를 전달받기가 무섭게 대응책이 내려오고 결과물이 도출된다.


!


한 변의 길이가 1cm 밖에 되지 않는 정사각형 방패가 허공에 출현한다. 그 수는 모두 2714개. 하나의 정사각형처럼 완벽하게 겹쳐진 방패는 시퍼런 불꽃에 휩싸인 인형의 나뭇가지를 절묘하게 가로막았다. 뾰족한 나뭇가지의 끝은 기세 좋게 2713개의 방패를 관통했지만 마지막 한장을 뚫지 못하고 멈춰섰다. 허공에 멈춰선 인형을 방패와 동시에 형성된 시퍼런 불꽃이 덮친다. 그러나 불꽃이 7cm 앞의 목표지점에 도착했을 즈음, 인형은 이미 수백미터 밖으로 피신한 뒤였다.


! ! !


멀어졌다 싶은 순간, 뒷통수가 있던 자리를 나뭇가지가 꿰뚫는다. 공간을 도약해 허공으로 날아오른 사내의 등 뒤를 나뭇가지가 후려친다. 괴한의 허리가 동강나며 연기처럼 흩어진다. 흩어진 연기가 마나의 사슬이 되어 인형을 덮치지만 인형은 이미 바닥에 내려서 있다. 사내의 몸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펼쳐진 무형의 함정이 제 발로 뛰어드는 먹잇감을 환영한다. 그러나, 허공에서 나뭇가지를 한번 휘두르자 공간이 갈라지는 듯한 착각과 함께 거대한 섬광이 날아든다. 만물이 멈춰있는 듯한 시간 속에서도 제 속도를 잃지 않은 섬광을 피하기 위해 사내는 함정을 포기하고 다급히 공간을 도약한다. 간발의 차이로 바닥을 때린 섬광이 느릿느릿 폭발하기 시작한다. 폭발이 자아낸 빛의 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사이, 472번의 공방이 오간다.


얼마나 지났지?


사내의 뇌내시계가 답한다. 3.271121초. 아직 20초까지는 까마득하다. 아직 16.8초 이상을 허께비 같은 상대와 싸워야한다고 생각하니 돌아버릴 것만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몸은 기계처럼 마법을 구현한다. 자기의 말마따나 허께비처럼 흩어진 사내의 몸이 240m 후방에서 재구성된다. 인형의 몸이 허공에서 두어번 꺾였다가 사내의 등장을 감지하고 짓쳐들어온다. 재등장을 감지할때까지 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구성이 끝났을 때엔 이미 다음 공격이 들어오고 있다. 어떻게 되먹은 운동성이냐, 하고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방어를 펼친다. 방벽과 나뭇가지가 충돌하자 반동을 버티지 못한 인형의 팔이 제풀에 터져나간다. 그러나 문제는 없다. 운동에너지가 전달되는 그 한순간만 버티면 충분하다. 그 이후엔 어찌되든 상관없다. 손상이 끝나는 동시에 복구가 완료될테니까.


터무니없이 빠르고, 터무니없이 강하고, 타격을 입히더라도 초재생능력으로 순식간에 복구해버린다. 그 스피드 때문에 대상을 직접 구속하는 마법은 무리, 광장 전체를 뒤덮는 범위 공격이나 디버프를 사용하려고 해도 시전할 틈이 없다. 눈 깜짝할 사이만 있으면 되는데 그 찰나의 시간을 허락해주지 않는 것이다. 장거리 공간이동도 마찬가지로 멀리까지 좌표를 설정할 틈이 없다. 결국, 할 수 있는건 고작 몇백미터 범위의 단거리 이동 뿐. 그래서야 이동과 동시에 또다시 뒤를 잡혀버린다.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승산은 사내에게 있다.


제대로 된 유효타를 먹이진 못했지만 유효타를 먹지 않은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놀라운 힘은 어디까지나 억지로 무리해서 끌어올린 것에 불과하다. 결국, 이대로 버티기만해도 승리는 그의 것이다. 그리고 영원과도 같던 시간은 3천번에 달하는 공방을 주고 받는 사이에 어느덧 19초를 넘어가고 있었다.


최후의 1초.


인형의 몸이 폭발적인 속도로 접근한다. 사내의 몸이 공간을 도약하여 사라진다.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는 공방의 한 장면이었지만 곧바로 뒤를 쫒았을 인형은 그 자리에서 시퍼런 불꽃을 발사했다. 확인도 하지 않고 무작정 날린 공격이었지만 정확히 착탄 지점에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공간이동 패턴을 분석하여 예측 공격을 날린 것이다. 다급히 장벽을 펼쳐 불덩어리의 접근을 막아낸 사내는 왼쪽 아래로 회전하며 공격을 흘려냈다. 자신이 날린 불꽃에 자신이 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아들었던 인형의 나뭇가지가 아깝게 허공을 찌른다. 그 순간, 인형은 나뭇가지의 궤도를 바꾸어 아래를 향해 반월형의 섬광을 다시 한번 날렸다.


!


불과 17cm 앞에서 발사된 섬광.


제 아무리 마법 시전이 빠르다고 해도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공간 이동을 시전하는건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형성했던 방벽을 강화시켜 섬광을 받아냈지만 필연적으로 몸이 멈추고 만다. 그리고 그 순간, 인형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전방위에서 반월형의 섬광이 날아들었다.


그 수는 모두 339개.


하나하나가 바닥 없는 구멍을 만들 만큼 엄청난 위력을 내포한 에너지덩어리를 한몸에 받은 사내는 몸 속의 마력을 사정없이 쥐어짜 자신의 몸을 감싸는 장벽을 겹치고 겹치고 또 겹쳤다. 이미 도망갈 포인트도, 공간이동을 시전할 여유도 없다. 어떻게든 막아내는 것 외엔 도리가 없었다.


' 이미 시간은 거의 다 되었어. 이것만, 이것만 막아내면 끝난다! '


20.00


사내의 뇌내 시계가 타임 오버를 알림과 동시에 느려졌던 시간이 원래의 속도를 되찾으며 거대한 빛기둥이 하늘 끝까지 솟아올랐다. 허공에서 폭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에 있던 4개 블록을 통째로 집어삼킨 기둥이 사그라들자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것이 날아가버린 그 압도적인 파괴현장의 한복판에 누르스름한 구슬 같은 것이 떠 있었다.


빠직빠직... 챙그랑!


잔뜩 금이 가 있던 그 구슬은 어느 순간 산산히 부서지며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 후우... 이거 정말... 수지에... 안맞는 일이군... "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애먹을 줄이야. 가벼운 마음으로 끼어들었다가 정말 큰코다쳤다. 이내 호흡을 진정시킨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털어내고 바닥에 내려서기 위해 고도를 낮췄다. 바로 그 순간,


" 윽!? "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 속에서 튀어나온 인형이 사내를 향해 나뭇가지를 찔러넣었다. 사내는 반사적으로 옆구리를 들어올려 공격을 흘려냈지만 인형이 그를 뒤에서 끌어안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마치 아빠에게 업힌 딸처럼 사내에게 들러붙은 인형은 나뭇가지를 변형시켜 자신과 사내를 감싸며 말했다.


" 적의 말을 신용하시면 안되죠. "


20초라는 시간제한은,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단건가. 사내는 재빨리 마법을 사용해 위기를 탈출하려고 했지만 이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을 가둔 구체 내부의 마나 밀도가 너무나도 높아서 마나를 원하는 형태로 배열할 공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면 게임은 끝난거나 마찬가지다.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는데 성공한 인형은 손가락으로 자신과 사내 사이에 놓인 최후의 방패, 두께 2mm 이하의 얇은 마력 장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 하지만 정말 놀랐답니다. 설마하니 마지막 공격을 버텨낼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혼신의 힘을 다해 날린 공격으로도 끝을 보지 못하다니. 그래서 조금 고민했답니다. 어떻게해야 확실히 당신의 철벽 방어를 뚫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그 결과가 바로 이거에요. "


뿌득, 뿌드드득...


불길한 소리와 함께 인형의 몸이 여기저기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피부 사이로 하얀 불빛이 새어나온다. 마침내 인형의 의도를 파악한 사내의 얼굴에 처음으로 위기감이 떠올랐다. 인형의 육체에 담긴 에너지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이대로 계속 에너지가 늘어난다면... 더 이상 신체가 버티지 못하게 된다.


" 어쩌다 이렇게까지 하게 된 걸까요... 그러게 쓸데없는 객기 부리지 말고 처음부터 암살로 나왔으면 좋았을텐데. "


얼굴까지 쩍쩍 갈라진 인형은 마지막으로 한탄을 털어놓더니 찬란한 빛 속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남겼다.


" 아쉽지만 슬슬 헤어질 시간이네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나의 주인님이 될 수도 있었던 분. "


그리고, 온 세상이 하얀 색으로 물들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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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9 - 낙인 (10) +10 14.01.26 1,223 38 10쪽
171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9 - 낙인 (9) +7 13.12.07 1,470 35 15쪽
170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9 - 낙인 (8) +5 13.11.17 1,313 30 13쪽
169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9 - 낙인 (7) +9 13.11.12 1,323 43 8쪽
168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9 - 낙인 (6) +6 13.11.03 1,275 36 12쪽
167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9 - 낙인 (5) +5 13.11.02 1,531 46 7쪽
166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9 - 낙인 (4) +7 13.10.23 1,344 34 13쪽
165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9 - 낙인 (3) +5 13.10.18 1,161 29 9쪽
164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9 - 낙인 (2) +7 13.10.02 1,209 33 3쪽
163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9 - 낙인 (1) +8 13.09.24 1,672 30 11쪽
162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8 - 떨어진 별 (9) +3 13.09.01 1,304 44 3쪽
161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8 - 떨어진 별 (8) +6 13.08.28 1,591 39 11쪽
160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8 - 떨어진 별 (7) +3 13.08.26 2,325 44 13쪽
159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8 - 떨어진 별 (6) +6 13.08.21 1,477 33 10쪽
158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8 - 떨어진 별 (5) +5 13.08.18 1,639 32 9쪽
157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8 - 떨어진 별 (4) +1 13.08.11 1,505 36 9쪽
156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8 - 떨어진 별 (3) +6 13.07.30 3,599 66 14쪽
155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8 - 떨어진 별 (2) +7 13.07.22 1,595 3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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