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기사의 이야기 Ep.9 - 낙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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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이다. "
낮익은 요정의 목소리에 아르모어는 고개를 돌렸다. 골목의 그림자 속에 한 쌍의 황금빛 눈동자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담이 약한 사람이라면 비명을 지를만큼 기괴한 현상이었지만 조금만 더 주의깊게 살펴보면 밤처럼 새까만 털을 지닌 고양이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 네 입에서 오랜만이란 소리가 나오니까 되게 어색한데. "
인간에게야 6년이 긴 세월이지만 수천년을 살아가는 요정에게 6년이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검은 고양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종족들은 흔히 긴 세월을 살아가는 종족들이 시간을 가볍게 여긴다고 착각하지. 그러나 수명의 길고 짧음과 상관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다. 6년이란 시간이 네게 긴 시간이었다면 만년을 사는 드래곤에게도 긴 시간인 것이지. 차이가 있다면 수명이 긴 쪽은 좀 더 오랜 시간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 뿐이다. "
" 그런건가? "
그렇게 말하는 아르모어의 표정은 그다지 납득한 얼굴이 아니었지만 더 이상 그에 대해서 논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수명과 시간의 상관관계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보단 당장 내일의 우유 시세에 더욱 관심이 많았던 자들이다. 구태의연한 인사치례의 말꼬리를 붙잡아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이 정도로 족했다.
" 어쨌거나 무사한 모습을 보게되어 반갑군. 오는 길이 험하진 않던가? "
" 어차피 무슨 소리 나올지 뻔히 알고 있잖아. 쓸데없이 시간낭비하지 말고 그냥 본론이나 말해. "
" 사교성 없는 녀석이군. "
" 네가 할 말이냐. "
검은 고양이의 투덜거림에 사내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남의 편지를 대필하면서 핵심만 추려낸 요약본을 만들어 보낸 놈이 남의 사교성을 탓하다니 적반하장도 정도가 있다. 그러나 고양이는 아르모어의 태클을 못 들은 척, 무시해버리고는 말을 이었다.
" 그럼 네가 원하는대로 본론을 꺼내지. 네가 알고 싶은 이야기는 아마 두 가지일거다. 하나는 네가 떠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하나는 내가 왜 널 불러들였는지. 맞나? "
마지막의 물음은 그냥 확인하는 형식을 갖춘 것에 불과했다. 검은 고양이는 자신의 예측이 빗나가지 않을거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모어는 뜻밖의 말을 했다.
" 아니, 틀렸어. 둘 다 궁금하지 않아. "
" 의외로군. "
예상이 빗나가자 검은 고양이는 드물게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르모어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 내가 떠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내가 사람을 잘못 평가했고 그로인해 불쌍한 이 아이에게 두번이나 몹쓸 짓을 한 개자식이 되었다는 결과가 변하진 않아. 그러니 이제와서 사연을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괜히 들어서 마음만 어지럽힐 바에야 차라리 안 듣는게 낫지. 그리고 너희들이 개입한 이유도 궁금하지 않아. 사실 그건 너무 뻔한 이야기거든. 이번 일에 얽힌 것은 나를 제외하면 모두 인간들이야. 그런데 너희들이 상관도 없는 인간을 위해 일할 리가 없잖아? 그럼 날 위해서 끼어들었다는 이야기밖에 안되지. 고마워. "
아르모어가 감사를 표하자 검은 고양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무슨 헛소리를 햐나는 투로 말했다.
" 그냥 생선포가 먹고 싶어서 불렀는데? "
" 잉? "
" 모처럼 여기 내륙까지 대구포가 들어왔는데 돈이 없지 뭐냐. 그래서 공금 미리 땡겨서 사먹었어. 이거 매꿔놓아야하니까 월말까지 50만 데카트 입금해. "
" 잠깐잠깐잠깐만! 지금 너 무슨 소리 하는거야!? 내가 왜 네 생선값을 내줘야 하는데!? "
뜬금없이 돈내놓으란 소리에 아르모어가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항의하자 검은 고양이는 뻔뻔스럽게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 당연히 정보료지. 그 편지 내가 쓴거다. "
" 대필이 아니라 사칭이었냐!? "
" 그런거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
" 상관 있거든!? "
아르모어가 기가막혀 얼굴을 잔뜩 붉힌 체, 항의하려고 하자 검은 고양이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한숨을 푸욱 쉬더니 차분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 이봐, 내가 이 편지를 안보냈으면 저 아이는 겨울을 넘기기 전에 어디론가 팔려나갔을거다. 설령 운이 좋아서 팔려가지 않았다해도 여전히 학대당하고 있었겠지. 내가 편지를 쓰지 않았으면 네가 어떻게 이런 상황을 알 수 있었겠나? "
" 그야... 그렇지만... 내가 시킨 것도 아니잖아! "
" 물론 그렇지. 하지만 우리쪽에서 먼저 알려주지 않았으면 네가 이 정보를 요구할 일이 있었을까? "
" 윽. "
" 네겐 꼭 필요한 정보였을 것이다. 우리가 그 정보를 자연스럽게 제공했기 때문에 너는 신속히 움직일 수 있었고 그로인해 저 아이는 고통스러운 학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단돈 50만 데카트가 아깝나? 네게 있어서 저 아이의 가치가 50만 밖에 안되는거였나? 만약 그렇다면 철회하지. 우리들의 판단 미스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네가 요구하지 않은 정보는 아무리 네게 필요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구태여 알려주지 않겠다. "
" .....젠장. 알았어, 알았다고. 주면 될 것 아냐, 주면! "
" 현명한 선택이다. "
" 단! 네 억지를 들어주는 대신 조건을 하나 걸어야겠어. "
아르모어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말도 안되는 강매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 정보의 혜택을 입은 것도 사실이고 적어도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는 살아가야하는 만큼 고작 50만 데카트 때문에 고양이 요정들과 사이가 틀어져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손해만 보고 나가떨어질 순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조건을 달았다.
" 5년간 무이자로 천만 데카트만 빌려줘. "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자리를 잡을 때까지 버틸 돈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르모어는 대출을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검은 고양이는 난색을 표했다.
" 안됐지만 우린 돈놀이는 하지 않는다. "
" 그럼 이번 의뢰비를 천만으로 늘리고 대신 네가 공금을 빼왔던 것처럼 돈을 빼서 빌려주면... "
" 안돼. "
" .....젠장. "
검은 고양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아르모어는 나직히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자력으로 어떻게 해볼 수 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렇잖아도 힘든 상황이라는걸 뻔히 알면서 짐만 얹어준 고양이는 더 이상 볼일이 없다면 그만 헤어지자며 작별인사를 건내고 슬그머니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 작가의말
열심히 썼는데 결과물이 3천자 밖에 되지 않는 매직한 이틀 지난 것 같은데 보름이 훌쩍 지나가는 매직10편을 작정한 에피소드가 도입부에서 5화를 까먹는 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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