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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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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연재수 :
2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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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161
추천수 :
8,717
글자수 :
1,341,677

작성
14.04.24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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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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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글자
11쪽

하얀 기사 이야기 Ep.0 - 이야기의 시작 (1)

DUMMY

" 으음~ 날씨 좋다. "


아르모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마따나 오늘 날씨는 각별했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따사롭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애인의 손길만큼이나 상냥해서 맞으면 맞을수록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진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쾌적한 날씨를 만끽하던 사내는 슬그머니 돌아서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 여행을 떠나기엔 최고의 날씨라고 생각하지 않아?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시체가 무슨 대답을 하겠는가? 공주처럼 차려입은 채, 상석에 앉은 소녀는 영원한 잠에 빠져 현세의 일 따위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 마치 한 폭의 그림 같군. '


손가락으로 만든 액자 속의 소녀는 정말로 한 폭의 그림처럼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멈춰버린 호흡만 아니라면 누구도 그녀가 죽었다는 걸 깨닫지 못할 정도다. 그러나 액자를 치우고 시야를 뒤로 물리자 처참한 홀 전체의 모습이 드러났다.


시체, 시체, 시체, 또 시체!


스무명이 넘는 사람들이 갈가리 찢긴 채, 바닥을 온통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어찌나 요란하게 흩뿌려놨는지 망자의 파편을 밟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었다. 이 처참한 지옥도를 연출한 장본인은 정작 지옥의 풍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천상을 향해 여행을 떠나는 소녀에게 상쾌한 미소와 함께 작별인사를 건냈다.


" 짧은 인생동안 수고 많았어. 부디 저쪽에선 행복하길... "


아르모어는 홀 한복판에 돌맹이 하나를 던져놓고 미련없이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가 남긴 돌맹이에서 불길이 치솟더니 삽시간에 홀 전체를 집어삼켰다. 곧이어 아래에서 대기하던 거대한 고양이가 마치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떨어지는 사내를 안전하게 받아냈다.


" 어떠냐? 복수를 끝마친 감상은. 옛 시인의 말처럼 달콤하더냐? "


" 아뇨, 그저 살인일 뿐이더군요. "


근육질 거한의 질문에 아르모어는 울며불며 목숨만 살려달라고 매달리던 사내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한나를 죽였을 그 손을 끊어낼 때도, 산 채로 더러운 장기를 뜯어냈을 때도, 왼쪽 눈을 파내고 귀를 잘라냈을 때도, 마침내 더러운 아가리에 단검을 쑤셔넣어 숨통을 끊은 순간까지도 특별히 통쾌함 따윈 느끼지 못했다.


" 저런, 안됐구나. 복수를 하고도 맛을 못느끼다니. 기껏 공들여서 나처럼 귀하신 몸을 모셔왔는데 이래서야 통 보람이 없겠어. "


도서관장의 농담 섞인 반응에 아르모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무슨 말씀을, 오늘의 메인 이벤트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잖습니까. "


" 글쌔,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나. 아무래도 나이를 먹으면 기억력이 약해져서 말이다. "


드래곤의 기억력은 나이를 먹을수록 감퇴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발달한다. 이미 수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도서관장이라면 천년 전에 들었던 농담까지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그런 존재가 고작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잊어버릴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노친네 흉내를 내면서 시치미를 때는 것은 아르모어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기 위해서다. 내키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없었던 일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 못 뵙던 사이에 배려심이 많아지셨네요. "


" 음, 나는 본래부터 배려심이 넘치는 드래곤이지. 찬양해도 좋아. "


" 마음만은 감사히 받아두겠습니다. "


찬양하다 못해 우상으로 숭배하고 싶을만큼 가슴 따뜻한 배려심이었지만 아르모어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도서관장은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 후회하지 않겠나? "


" 물론이죠. "


어차피 지워버릴 세상이니까요.


뒷말을 마음속으로 삼키며 아르모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쾌활한 목소리로 확답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확고한 의지를 읽어낸 것인지 나이 많은 드래곤은 그래, 하고 조금 씁쓰레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평소의 자신감 넘치고 오만한 드래곤으로 되돌아온 도서관장은 드래곤의 눈을 한껏 개방하며 호기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렇다면 더 이상 기다릴 필요 없겠지. 후다닥 해치워버리고 간만에 찾아온 합법적 휴가를 만끽해야 하니까! "


캬아아아악!!!


주인의 우렁찬 목소리에 화답하여 도시 곳곳에서 괴성이 울려퍼진다. 일상의 모습을 가장하던 마법의 장막이 찢어지고 엘로얀의 사람들이 평생동안 만나본 적 없는 기괴한 괴물들이 탐욕스러운 송곳니를 드러낸다. 족히 수천은 되는 괴물들의 대군세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르모어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끝내주게 쾌청한 하늘이 그를 마주내려보았다.


" 정말 좋은 날씨야. "


거리에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괴물들을 발견하고 비명을 내지른다. 자비를 모르는 괴물의 발톱이 시민의 뱃가죽을 찢고 게걸스럽게 내장을 물어뜯는다.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지옥의 음악을 무덤덤한 얼굴로 감상하던 아르모어는 오늘의 메인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을 신전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학살하기엔 아주 그만이라니까. "


본래 학살이란 오늘처럼 맑은 날에 벌어지는 법이다.



***



하늘이 새빨갛다.


대지가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사물이 술취한 사람마냥 흐물렁흐물렁거린다. 어제만해도 멀쩡했던 세상이 하룻밤 사이에 왜 이렇게 맛이 가버린걸까. 정말이지 영문을 모를 일이야, 하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이상한건 세상이 아니라 내 쪽이라는 것을.


하아.


바닥이 꺼질 듯이 묵직한 숨을 내뱉었는데도 가슴이 무겁다. 발바닥이 땅과 일체화 된 것처럼 아무리 용을 써도 떨어지질 않는다. 그도 그럴게 인생을 통틀어 한번밖에 없는 결혼식을, 그것도 내 목숨보다도 소중한 사람의 고귀한 결합을 훼방놓으러 가는 길이니까.


***


클로디아 폰 아데발트


요즈음 백기사란 별명으로 더욱 유명한 그녀는 내게 있어서 단순한 상관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빛. 인생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는 이정표. 무엇을 해야할지도 모른 채, 그저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며 무가치하게 썩어들어가던 나를 방황의 늪에서 건져준 구원자가 바로 그녀였다.


그녀와 만났기에 나아갈 길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끌어 주었기에 살아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세상에 해악만을 끼치던 악취나는 폐기물을 한 명의 사람으로 바꾸어 주었다. 이처럼 거대한 은혜를 배풀어준 사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길까지 열어주었다. 그런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심지어 그녀는 귀족이었다. 그것도 나라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명문가의 여식이었다. 똑바로 바라볼 수 조차 없는 고귀한 존재가 시궁창에나 어울릴 법한 미천한 나를 필요로 해준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삼생의 영광이요, 분수에 넘친 호사이자 형언할 수 조차 없는 무한한 은혜였다.


하지만, 어리석은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분수를 벗어난 발칙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감정은 마음 속 한구석에서 소리없이 피어나 서서히 덩치를 불려가더니 자각했을 때에는 머릿속을 완전히 장악당해 있었다. 맙소사, 그 얼마나 발칙하고 어처구니 없는 생각인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죽여야 마땅할 극악무도한 죄악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 같은 추악한 오물 따위가 감히 그녀에게 연모의 정을 품다니.


하지만 타고난 멍청함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인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불경한 감정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그 마음을 무덤까지 안고가기로 마음먹었다. 제거할 수 없다면, 숨길 수 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약해빠진 내 의지는 그것마저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 그녀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부터 꿈틀대기 시작하던 충동은 결혼식 준비가 갖춰지는걸 지켜보면서 점점 덩치를 키워나가더니 기어이 이성을 굴복시키고야 말았던 것이다.


바보짓이라는건 알고 있었다.


수려한 용모와 폭넓은 교양, 마스터급에 육박한 무력과 번뜩이는 카리스마까지 겸비한 발디스 공작가의 후계자는 경이로울 정도로 완벽한 인물이었다. 거기에 혈통과 지위에 걸맞는 고결한 성품까지 겸비하고 있었으니 온 세상을 뒤져보아도 이보다 뛰어난 청년은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상식적으로 그토록 완벽한 신랑감을 버리고 신분도, 실력도, 재력도, 인품도 형편없는 나를 선택해줄 여자 따윈 존재하지 않을테니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거절당할 것이 명백한 고백이었다. 억에 하나, 짖궂은 신의 변덕으로 그녀가 오판을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무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공을 조금 세웠다고는 하나, 천민 출신의 호위 나부랭이와 결혼하기 위해 이틀 앞으로 다가온 혼약을 파기하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으니까.


이러나저러나 자신의 목숨과 그녀의 마음만 심란하게 만드는 백해무익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알면서도 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괘씸죄로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심지어 그녀를 상처입히는 한이 있더라도 별 수 없었다. 억누를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내 마음을 전할 수 밖에 없었다. 처참한 결말을 향해 돌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어이 내 마음을 전했고


당연한 수순으로 거절당했다.


그러나 끝나야 했을 내 마음 속의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진정되지 못했다. 차라리 독설을 퍼부어주었다면 좋았을텐데, 차라리 실컷 두들겨 패줬으면 좋았을텐데, 차라리 길길이 날뛰면서 내 목을 쳐버렸다면 시원하게 스러졌을텐데, 내 고백을 들은 그녀의 반응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 고마워. 하지만, 난 벌써 팔린 여자니까 받아줄 수는 없어. 대신... "


달빛을 등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은 얼굴로 다가와 한순간 내 추악한 입술에 구름처럼 보드라운 입술을 겹쳤다.


" 그 마음만은 받아둘게. "


그리고는 빙글 돌아서서 뒷짐을 진 채, 산책로를 따라 가버렸다. 느긋한 걸음걸이였지만 충격에 빠져있던 나는 따라갈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한 채, 석상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입맞춤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세계가 뒤집어질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내 망막에 새겨진 그 장면만큼이나 충격적이진 않았다.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그녀가 그처럼 슬픈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어째서 그녀가 그토록 괴로운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끝없이 이어지던 의문끝에 마침내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어쩌면, 혹시 어쩌면


그녀는 결혼하고 싶지 않은게 아닐까?


그 가설을 떠올린 순간, 나는 또다시 감정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이성을 되찾았을 때는, 그 미친놈의 생각에 동조하는 정신나간 자식들과 함께 갈데까지 가버린 뒤였다.


작가의말

기껏해야 50~70화 정도로 기획했던 내용이 어쩌다 이렇게 늘어나버린건지 원.

 

게다가 어찌된 셈인지 갈수록 필력이 퇴화해서 퀼도 구린게 시간만 한정없이 처먹고...

 

갈길이 구만리 같은데 참 깝깝합니다.

 

애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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