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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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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연재수 :
270 회
조회수 :
623,153
추천수 :
8,717
글자수 :
1,341,677

작성
13.11.03 23:18
조회
1,274
추천
36
글자
12쪽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9 - 낙인 (6)

DUMMY

상황은 최악이었다.


가진거라곤 표값을 내고 남은 3만 데카트 정도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원화로 따지면 1만 5천원이 체 되지 않는 돈이었다. 다행히 식료품 물가는 싼 편에 속하기 때문에 아껴쓰면 둘이서 사나흘 정도 배를 체울 수 있었지만 잠자리가 문제였다. 이 추운 겨울에 잠자리를 구하지 못한다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만큼, 잠자리는 매우 중대한 문제였는데 여관비는 아무리 싸게 잡아도 하룻밤에 4만 데카트는 내야했다. 게다가 싸구려 여관은 예로부터 온갖 시정잡배들이 다 모이는 곳이다보니 어린 계집아이를 데리고 가기에는 불안한 구석이 많았다.


' 직장을 구한다고해도 최소한 일주일은 버텨야 주급이 나올텐데 이 돈을 가지고는 그 시간도 버티기 힘들어. '


게다가 하루만에 일자리를 구한다는 보장도 없다. 성세를 구가하던 시절의 무바라크라면 또 모르겠으나 공장이 쇠퇴하고 있는 지금은 특별한 기술이나 경험이 없는데다 나이도 많고 여왕의 눈 때문에 미관상으로도 영 좋지 않은 아르모어를 선뜻 채용해줄만한 공장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겨울은 농한기를 맞이한 시골 농부들이 일거리를 찾아 대거 몰려오는 계절이라 더더욱 여건이 좋지 못했다.


' 아무리 생각해도 무바라크를 떠나는게 낫겠어. '


그는 보다 활력이 넘치는 도시로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2인분의 기차표값을 벌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당장 무슨 수로 돈을 벌어야 한단 말인가? 현실의 난제 앞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 줄곳 기절해있던 계집아이가 몸을 꿈틀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 어...어? "


언제나 그늘진 뒷골목은 한낮에도 저녁처럼 어두웠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지 않은 탓에 아이는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고 어리벙벙한 얼굴로 이따금씩 눈을 껌뻑였다. 그러나 이내 어둠에 눈이 적응하고 한구석에 앉아있는 아르모어를 발견하자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려고 하는 것이었다.


" 읍! 으으읍!!! "


혹시나 경찰관이 달려와서 추궁하면 매우 피곤한 일이 되기 십상이라 아르모어는 재빨리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최대한 자상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며 아이를 진정시켰다.


" 해치지 않을테니 진정해. "


낮선 사람이 자신을 납치한 것과 여왕의 눈 때문에 겁을 먹고 바둥대던 아이는 아르모어의 부드러운 태도에 차츰 진정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괴하게만 보였던 여왕의 눈도 계속해서 보고 있으니 약간의 거리낌은 남았지만 더 이상 두렵지는 않았다. 마침내 아이가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것으로 보이자 아르모어는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아이는 한참 동안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맞추지 못하더니 마침내 용기를 내어 아르모어를 올려다보았다.


" 아저씨는 누구에요? "


아이는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맑은 바탕을 지녔지만 여전히 두려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것은 아르모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단 아이의 마음 속에 깊숙히 자리잡은 타인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아르모어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아이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불안불안해 보였고 미미하게 떨리는 눈가엔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 아직도 내가 무섭나? '


그러나 여왕의 권능을 잃어버린 아르모어가 이런 세세한 속사정까지 짐작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다만 아이가 여전히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여 태도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며 말했다.


" 나는 원래 너를 길러야 했던 사람이야. 하지만 당시에는 부득이한 일로 도저히 너를 기를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에리카에게 맡겼던거란다. "


여기까지 말한 아르모어는 에리카의 악랄한 행동과 자신의 멍청함에 대한 혐오감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주와 욕지거리를 마구 쏟아내고 싶었지만 아이가 두려워할까 염려되어 감정을 찍어누르고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며 아이에게 고개숙여 사과했다.


" 네게는 정말 미안하게 됐다. 그런 여자인 줄 알았으면 절대로 맡기지 않았을텐데... 후우, 이제와서 이런 얘기 해봤자 소용없겠지. 다시 한번 사과할게. 미안하다. "


아이는 한참동안이나 고개를 그대로 숙이고 있는 아르모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 그러면... 혹시 아저씨가 제 아빠에요? "


" 아니. "


거짓말을 해서 아이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도 있었지만 아르모어는 일말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은 체, 신속하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는 자신과 아이의 관계에 대해서 만큼은 조금도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설령 그로인해 아이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일 뿐이다.


' 하지만 그게 지금일 필요는 없겠지. '


아직은 모든 것이 불안불안한 시기다. 언젠가는 미움받게 되겠지만 지금 당장은 곤란했다. 적어도 아이가 자라서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는 피비린내 나는 진실을 장막 뒤에 가려둘 필요가 있었다.


" 난 단순히 의무를 지고 있는 사람일 뿐이야. "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을 모두 밝히지도 않는다. 그 정도의 선에서 자신을 정의한 아르모어는 더 이상 질문을 받지 않기 위해 화재를 돌렸다.


" 자세한 이유는 언젠가 네가 어른이 되면 가르쳐주는 걸로 하고, 이제부터 같이 다니게 되었으니 통성명이나 하자. 내 이름은 아르모어 폰 피르쉬어. 이름이든 성이든 편한대로 부르면 돼. 뭣하면 그냥 아저씨라 불러도 상관없고. 네 이름은 뭐니? "


" 에... 예? 이, 이름... "


아이는 머뭇머뭇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별 대단한걸 물은 것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주저한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였지만 아르모어는 미소를 잃지 않고 인내심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거의 3분이 지나서야 아이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모기같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어요... "


" 미안, 잘못들었어. 다시 한번만 말해줄래? "


" 없...어요... 이름. 평소엔 그냥 찌, 찢어죽일 년이라던...가, 빌어먹을 년이라고... "


" ..... "


아르모어의 표정이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마음 속에서 분노가 폭발 직전의 마그마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당장이라도 가게로 달려가 에리카의 목을 분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이 샘솟았지만 그의 머리는 터질 듯한 감정을 힘으로 찍어눌렀다. 여기서 감정대로 행동했다간 감옥행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되면 결국 아이만 낙동강 오리알처럼 붕 떠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 그래서는 곤란하지. '


그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정말로 아이를 위하고 싶다면 여기서는 자기 감정에 휘둘려 화를 낼게 아니라 아이의 마음 속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이 옳았다. '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야. 중요한건 지금이지. ' 마음속으로 자신을 타이르며 굳어있던 미소를 자연스럽게 풀고 불행을 행복처럼 포장한다.


" 그래? 그것 참 대단한 행운인데! "


" 예? "


" 잘 생각해봐, 이름을 가진 사람은 많지만 자기 이름을 스스로 정한 사람은 좀처럼 없단 말이야. 자기 이름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행운이야? "


" 그런...걸까요...? "


" 그럼, 물론이지. 부러울 정도인걸. "


아이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아르모어의 표정도 덩달아 누그러진다. 그는 아이가 생각의 방향을 바꾸기 전에 신속히 다음 과제를 안겨주었다.


" 좋은 기회니까 여기서 이름을 지어보자. 혹시 평소에 생각해둔 이름이 있니? "


" 에... 음... 그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이 잘... 힉! "


그렇게 말한 아이는 별안간 몸을 움찔하더니 머리를 감싸쥐며 쪼그려 앉았다. 아르모어는 혹시 누가 나타났나 싶어서 번개같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경계했지만 골목길은 개미새끼 하나 없이 조용했다.


" 왜 그래? "


" 죄, 죄송합니다. 때, 때리지 말아요... "


" ? + ?? + ??? + ???? + ?????? "


정말로 영문을 모를 일이다. 아르모어가 얼굴 가득히 물음표를 띄운 체,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한숨을 푸욱 쉬고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 힉! "


아이는 겁먹은 얼굴로 거북이처럼 목을 잔뜩 움츠렸다. 그러나 아르모어의 손바닥은 뺨을 후려갈기는 대신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 괜찮아, 괜찮아. 당장 생각안나면 뭐 어때. 앞으로 살아갈 날은 새털같이 많이 있다고. 그러니까 느긋하게 생각하면 돼. "


" 아... "


아이는 멍한 눈으로 아르모어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르모어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자, 그럼 이름은 천천히 생각하도록 하고. 이제 슬슬 가보자. "


" 예? 어디로요? "


아이가 놀란 듯한 목소리로 묻자 아르모어는 멋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거든. 조만간 자리를 잡을 예정이지만 당장은 지낼 곳이 없단다. 그러니 해가 있는 동안에 부지런히 움직여서 잠자리를 마련해두지 않으면 안돼. 한겨울에 노숙하다간 얼어죽기 딱 좋거든. 아무리그래도 애를 맡은 첫날에 얼려죽일 수는 없잖아? "


자기가 말하고도 심하게 민망한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그는 다시 한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 당분간 고생을 많이 해야 할거야. 미안하지만 조금만 참아줘. 최선을 다해서 지금 상황을 벗어날테니까. "


한동안 멍하니 아르모어의 눈을 바라보던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여전히 불안감이 묻어나는, 하지만 처음보다 조금 더 또렷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 으응. 괜찮아요... 나, 참는건 익숙하니까. "


" 그래, 고맙다. "


아르모어는 조금 더 유쾌한 기분으로 돌아섰다. 가혹한 현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지만 골목 바깥으로 나서는 그의 발걸음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계집아이는 그런 남자의 옷자락을 잡은 체,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늘이 가득한 골목을 지나, 코너를 돌자 밝은 빛이 넘쳐흐르는 거리가 두 사람을 환영하듯 펼쳐진다. 남자가 당당하게 빛 속으로 첫 발을 내딛는 순간, 계집아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나. "


" 응? "


" 제 이름... 한나로 할래요. "


" 한나라. "


아르모어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 한나. 여자 이름으로서는 아주 흔해빠진 이름이다. 여자가 백명 있으면 스무명쯤은 한나라는 이름을 갖고 있을 정도다. 흔하고 평범한... 아무것도 아닌 일상 같은 이름. 불행 속에서 허우적대던 아이가 꿈꿀만한 '평범한 생활'이 담긴 이름이다.


" 좋은걸. "


그리고, 마흔이 가까워오도록 그가 붙잡지 못한 가치가 담긴 이름에 아르모어는 도전적인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아이, 한나는 " 응. "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저도 마음에 들어요. "


오늘따라 더 없이 밝아보이는 태양을 올려다보면서.


작가의말

기획 : 10화면 충분합니다.

전개 : 1, 15화 정도...

절정 : 다음화가 30화라고!?

결말 : 55화 (end)

 

이번엔 이러지 말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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