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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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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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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17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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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1 - 문이 열리는 날 (2)

DUMMY

문이 닫히자 청년은 단상 아래에 미리 준비해둔 책을 모두에게 한권씩 나눠주었다. 진환은 어지간한 교과서 두셋을 겹쳐놓은 것보다 묵직한 책의 무게에 압박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다. 더군다나 한권이 끝이 아니었다. 무려 세권이었다. 권장 얼추 2천 페이지는 거뜬해보인다. 설사 이 안의 내용이 농담과 잡담으로 꽉 차있다고 해도 이 정도면 들인 공이 장난 아닐 것이다.


' 이, 이것이 돈지랄인가. '


세 권은 모두 양장본에 대충 펼쳐본 종이 질도 결코 나쁘지 않았다. 원가가 얼마나 할지는 모르겠지만 시중에서 사려고 한다면 한권에 5만원 정도는 너끈할 듯 싶다.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얼추 쉰명을 상회하고 있었으니 명당 15만 잡고 750만원이 날아간 셈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인가 싶어 호기심에 첫장을 넘기는데 청년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 여러분들에게 나눠드린 책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말, 스리아 어(語) 교본입니다.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말은 아니지만 중세의 라틴어 정도의 위치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말입니다. 정말 이계에 가시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시다면 최소한 일상 회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는 익히셔야 합니다. 공들인 장난으로 생각하시는 분은 이 자리가 파한 뒤에는 재미있는 기념품으로 소장하셔도 무방합니다. 가족만의 암호로 쓰는 것도 좋겠지요. "


꿀꺽


진환은 식은땀을 흘리며 책들을 바라보았다. 한권에 무게만 2kg은 거뜬히 나갈 것 같은 책 세권을 익혀야만 한다니. 솔직히 그냥 수능 만점받는게 더 쉬워보였다. 곁에 앉은 성훈의 생각도 다르지 않은지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책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계고 나발이고 의욕이 눈꼽만치도 없는게 틀림없다.


" 마법 같은걸로 한번에 확 배울 수는 없습니까? "


" 없습니다. "


모두가 갑갑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삼십대 중반의 남자 하나가 물었지만 애초부터 글러먹은 질문이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굳이 비싼 돈을 들여가며 책으로 정리할 리 없잖은가. 당연히 대답은 칼같이 날아와 그의 희망을 깨부쉈다.


" 당신은 이런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


질문을 한 사내가 침통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직후, 이번에는 좀 더 쓸만한 질문이 나왔다. 청년은 좋은 질문이라는 듯 밝은 표정으로 설명했다.


" 믿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가문은 약 100여 년 쯤 이계, 소위 판타지 세계라 불릴만한 곳에서 지구로 건너온 사람들이 이룩한 집안입니다. 본디 마법을 사용한 장거리 공간이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사고로 지구에 도착한 선조분들은 대대로 자신들의 뿌리를 자손들에게 전하며 언젠가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지속적으로 연구해왔습니다. "


청년은 잠시 말을 끊고 사람들을 표정을 한번 둘러본 뒤 말했다.


"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이방인이었던 선조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마법의 이론은 지금까지도 내려왔습니다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약해졌고 저희 대에 와서는 이론만을 알고 있을 뿐, 실제로 마법을 구동할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한둘쯤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구현할 수 있는 마법이라는 것도 사실 라이터나 손전등만도 못한 시시한 것들이죠. "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법이 실존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흥분한 기색이었다. 그들 중에는 당장 마법 이론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청년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 드리는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양도 많고 모두 스리아 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읽지 못하는 자에겐 공개하지 않는 것이 가법이라 한국어 번역본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군요. 기초 이론 정도는 나눠드린 책의 세번째 권 부록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마법에 흥미를 가지는 것도 이해합니다만, 그건 나중에 따로 자료를 요청하시고 지금 중요한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


화재를 바꾼 청년은 사람들의 흥분이 식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다.


" 마법이 이처럼 쇠퇴하기 전에 선조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법진을 가까스로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상시 발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소모되는 마력도 문제였지만 차원과 차원의 거리가 극도로 가까워지는 시기에 맞춰 발동하지 않으면 엉뚱한 세계의 문을 열어버릴 수도 있었죠. 삼대에 가까운 연구 끝에, 선조들은 지난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정확한 시기를 예측했습니다. 선조들의 고향과 지구가 가까워지는 주기는 백이년에 한번이며 우리들이 살아있는 동안 만날 수 있는 그날은 바로 2013년 2월 1일. 다음달 첫날입니다. "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느긋한 태도로 돌변했다. 또렷하고 당당하던 설명에 은근슬쩍 장난기가 끼기 시작한다.


" 그런데 말입니다, 백여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박해받던 선조들과 달리 우리 후손들은 보시다시피 확 일어나버렸습니다. 저희에게 있어서 선조들의 세상은 돌아갈 고향은 커녕 배워봤자 쓸모도 없는 외계어를 배우게하는 원흉이며 선조들이 남긴 기록은 허무맹랑한 소설이나 다름없고, 마법은 파티용 마술이나 다름없는 개인기인데다가 선조들이 기껏 구현해놓은 귀환 마법진은 대를 이어 계속한 방대한 장난이라, 이말입니다. 이제는 집안 어른들조차 아이들에게 스리아 어를 배우라 강요하지 않을만큼 우리는 지구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고향에 돌아가려는 선조들의 노력은 이제 쓸모없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


청년은 유쾌한 듯 좌중을 돌아보았다.


" 비록 우리에겐 쓸모없는 것이지만 지금 모여주신 여러분들처럼 이계에 대한 환상을 지닌 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렇게 원하는 분들도 많은데 기껏 고생해서 준비한 것인데 써보지도 못하고 망각속으로 던져버리는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마침 좋은 때가 왔으니 원하는 분들에게 배풀자고. 그 뒤는 아시는대로입니다. 뭐, 제 설명을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열심히 준비해둔 헛소리고 스리아 어는 외국어를 짜집기한 장난이었다고 생각하고 넘기셔도 그만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제 말을 믿고 이 세상과 작별해서 판타지 세상으로 가고 싶으신 분들이 계신다면 기꺼히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한번 저편으로 가버린 여러분들이 돌아오는 길은 보장해드릴 수 없지만요. "


그는 마지막으로 좌중의 질문을 몇 번 받아넘긴 후 마법에 대한 자료를 원하는 사람은 우편으로 사본을 보낼테니 주소를 남기라고 한 후, 호텔의 멋진 식사를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태어나서 지금껏 먹어본 것들 중 가장 비싼 음식들로 배를 체운 성훈과 진환은 가까운 오락실에서 대전게임을 즐겼다. 그들이 선택한 게임 배틀 오브 스페이스, 약창 배스는 요즘 힌창 유행하는 것으로 로봇의 파일럿이 되어 상대방과 PC가 조정하는 로봇들을 제압하고 상대방의 모함을 파괴하는 게임이었다. 실감나는 그래픽도 그래픽이었지만 박스형으로 꾸민 게임기는 제법 그럴듯한데다가 게임상 기체의 움직임에 맞춰 박스가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정말 로봇을 조종하는 것처럼 실감나는 전투를 맛볼 수 있었다.


진환은 게임기의 문을 닫고는 설정을 조정해 상대방과 대화를 열어놓았다. 이 게임은 유저간의 대전도 지원하지만 유저끼리 팀을 이뤄 컴퓨터와 싸우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기에 달려있는 기능이다.


" 야, 너 어떻게 생각해? "


" 뭐가. "


진환의 물음에 무전기처럼 약간 잡음섞인 성훈의 대답이 들려온다. 나름대로 호평을 받고있는 게임상의 연출이다. 동시에 게임기 내부에 불이 들어오며 시야가 모함의 수납고로 바뀐다. 준비가 되었는지 묻는 게임 속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둘의 대화를 잠시 차단했다.


" 뻔하잖아. 아까 이야기 말이야. "


딴청을 부리는 성훈에게 짜증을 내며 진환은 준비 완료 버튼을 눌렀다. 반대편 게임기에서 성훈도 준비를 마쳤는지 곧 게임기가 뒤로 쏠리며 기체가 모함 밖으로 사출되었다. 게임 속 기체가 활공하며 탁 트인 바다가 펼쳐진다. 이번 설정은 해상전투다.


" 뻥이겠지. "


게임하는데 정신이 팔린 듯 건성인 대답이 돌아오자 진환은 신경질적으로 기수를 돌려 아군기로 표기된 성훈의 기체를 조준하고 빔 라이플로 쏴버렸다. 콰앙, 멋지게 명중. 데미지는 들어가지 않지만 기체(게임기)는 실제로 흔들리기 때문에 불시에 당하면 제법 짜증난다. 예상대로 금새 열광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 아, 씨. 뭐하는 짓거리야! "


" 니가 대답을 그 따위로 하니까 그렇지. 진지하게 하라고 진지하게! "


콰앙!


『적기 발견, 적기 발견.』


그러면서 한눈을 파는 사이 어느새 컴퓨터가 조정하는 적 기체가 진환의 기체에 공격을 가했다. 잽싸게 조정간을 움직여 빔을 피하는데 난데없이 후방에서 빔이 날아와 기체가 앞뒤로 심하게 흔들렸다. 격추당해도 할말없을 정도의 정타다. 하지만 데미지는 없다. 아군기의 공격이었다.


" 야, 쪼잔하게 이러기냐! "


" 시작은 니가 먼저했잖아. 그리고 그 새끼 말이 진짜건 가짜건 난 안가. 그야 고삼 올라가는건 엿같지만 지구를 등질 정도는 아니야. 수능 망치고 난 뒤면 또 모를까. 뭣보다 그 책 못봤어? 궁금해서 한번 훝어봤는데 엄청 어렵더라. 진짜 외계어가 뭔지 보여주더라고. 그거 생활에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공부하느니 그냥 영어 만점받는게 쉬울걸? "


진환의 표정에 갈등이 어렸다. 잠시 멈춰선 기체 위로 적기의 미사일이 두대나 명중한다. 격렬한 진동에 정신을 퍼뜩 차려 바다로 추락하는 기체를 다잡았지만 이미 라이프는 반 이상 깎여나간 뒤였다.


" 그 새끼는 수가 없댔지만 가보면 뭔 수가 있을지 누가 알아? "


미련을 버리지 못한 진환이 중얼거리는 사이 성훈의 기체가 아군 컴퓨터 기체와 보조를 맞추지 않고 홀로 뛰쳐나가 하늘을 뒤덮을 듯 쏟아지는 적의 화망을 요리조리 피해다니며 킬 수를 쌓았다. 그 모습을 보던 진환이 혀를 찼다.


' 이야, 진짜 밥먹고 이것만 했나. 저새끼 저거 사람이야? '


이 게임은 리얼리티가 높은만큼 난이도도 자비가 없다. 컴퓨터 상대라고 아군기를 무시하고 혼자 튀어나갔다간 순식간에 벌집이 되는게 보통인데 저놈은 눈에 계산기라도 달렸는지 용캐도 빔과 미사일의 틈새를 파고들어 정밀한 사격을 날린다. 열발을 쏘면 일곱발은 꼭 명중한다. 격렬한 움직임 중에서도 이 정도니 가만히 서서 쏜다면 백발백중일 것이다. 진환은 몇 번이나 봤던 장면이지만 언제 다시봐도 놀라웠다. 녀석 몰래 삼백원을 더 넣고 리플레이를 찍어 핸드폰으로 전송했다. 이 기능을 이용해 성훈의 플레이를 인터넷에 몇 번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폭발적인 반응이 올라올 만큼 굉장한 실력이었다. 방송에 나오는 프로게이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평으로 언제 프로 데뷔하냐는 댓글이 자주 달렸지만 성훈은 아직 자신의 플레이가 인터넷에 나돌아다닌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 유명한 짤방 몰라? 이상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그냥 쓸데없는 짓 하지말고 인터넷에 관심있는 놈한테 바가지 씌워서 책값이나 챙기고 말자. "


진환이 리플레이를 찍느라 잠시 조정간을 놓은 사이 여유를 되찾은 성훈의 말이 들렸다. 현실은 시궁창. 진환은 자리에 왔던 수십명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는 단 하나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많은 사람들의 한명에 불과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19살. 지구에서나, 판타지 세상에서나 내가 그저 그런 인간일 뿐이라는걸 인정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다.


" 그럴까. "


건성으로 대답하는 그의 말에 진심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현실에 대한 반항인지 진환은 신경질적으로 엑셀을 힘껏 밟았다. 게임기가 진동하며 진환의 기체가 적을 향해 용감하게 날아오른다. 콰앙, 일군의 장수처럼 멋지게 최전방으로 날아가던 기체는 적 모함이 발사한 함포에 얻어맞고 꼴사납게 추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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