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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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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연재수 :
2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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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341,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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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31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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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87화

DUMMY

마치 청소기에 빨려들어가는 먼지처럼 몸이 시커먼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제는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감각. 어둠 속에서 어지러이 회전하다가 어느 순간 주변이 확 밝아진다. 아지랭이처럼 일렁거리던 공간이 안정을 되찾고, 숲처럼 늘어선 회색빛 건물들이 시야를 사로잡는다.

보아하니 이번 세계는 내 고향 세계를 기준으로 '현대' 혹은 '근미래' 정도쯤 되는 모양이다. 딱히 드문 것은 아니지만 최근 방문한 세계들은 '고대' 아니면 '중세' 일색이었기에 조금 낮설게 느껴졌다.


툭.


대기를 분해하여 마나를 얻고, 그 마나를 다시 머릿속에 저장해둔 조합식대로 재조합하여 자그마한 보석을 만들어낸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 담겨있는 보석이다. 페어리들은 기억력이 좋고, 나는 그 중에서도 특출난 편이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어서, 너무 오래된 일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잊어버리고 만다.

다행히 뇌에서 사라진 기억이라도 영혼에는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복원은 가능하지만 작업 과정이 너무 번거롭고,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걸려서 자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오래된 기억들을 담은 보석을 만들고, 다시 그 보석의 제조법을 기억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렇게하면 옛 기억이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지 꺼내서 볼 수 있고, 보석을 보관하느라 골머리를 썩일 필요도 없는데다, 설령 제조법을 잊어버린다 한들, 보석을 마지막으로 제작한 시점까지만 영혼의 기록을 뒤지면 되기 때문에 대단히 편리하다.

나는 보석에 담긴 고향의 기억과 이 세계의 정보를 하나하나 대조해나갔다. 새로운 세계에 도착할때마다 반복하는 연례행사다. 별의 이름, 국가, 언어, 인종, 역사, 동식물 등등... 맞춰볼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맞춰보고 혹시 잘못된 점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한다. 그렇게 24번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여기는 지구.


내가 태어난 고향 세계가 틀림없다.


***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고향은 떠나기 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당연하다. 오늘은 2013년 1월 31일. 내가 지구를 떠나기 하루 전이니까.

물론, 우연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운이 좋지않다. 내가 이 시간대로 돌아올 수 있었던건 차원 이동의 특성을 이용한 결과였다.

세계와 세계를 넘나들다보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시간이 꼬인다. 다만 워낙 변수가 많아서 미래로 갈지, 과거로 갈지, 간다면 얼마나 갈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시간대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심지어 방법도 간단하다.

그냥 지구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세계 하나를 찍어놓고 두 세계 사이를 계속 왔다갔다하기만 하면 된다. 한번 왕복할 때마다 시간이 꼬일 것이고, 그걸 반복하다보면 언젠가는 목표한 시대에 도착하게 되어있다. 나는 1722회의 차원이동을 감행한 끝에 원하는 시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시시하군. '


마을을 돌아다니다보면 여기저기 눈에 익은 풍경이 자주 띄었지만 반갑다거나, 그립다거나, 가슴이 아련하다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저 옛날에 본 적이 있는 동내. 그냥 그게 다였다. 세월이란 그렇게나 무심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새삼스럽게 실감한다.

마을을 한바퀴 다 둘러본 나는 기억 속의 고향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지금 가면 이 시간대의 '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직 이세계로 떠나지 않은 '내'가.


" 찾았다! "


막 공원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순간, 맞은편에서 왠 낮선 여자 하나가 손을 흔들면서 나에게 달려왔다.


" 아빠~! "


아직 앳된 기가 다 가시지 않은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하다. 묘하게 낮익은 초록빛 눈동자에서 타고난 쾌활함과 강한 자신감이 엿보인다. 인생에 고민이라곤 하나도 없을 듯한 밝은 인상의, 마치 태양처럼 눈부신 아이였다.


" 보고싶었어~! "


여자는 달리던 기세 그대로 나를 향해 몸을 던져 내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맹렬한 기세로 자기 볼을 내 볼에 부벼댔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그녀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 엘리? "


나는 대부분의 기억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지만 내가 누구인지 잊지않기 위해 여왕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한 여행을 떠날 때까지의 100년 조금 넘는 기억들만은 수시로 읽어보고 있다.

그 덕분에 그녀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엘리. 내 첫번째 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친딸은 아니고, 요정의 계보상 딸에 해당한다는 것 뿐이지만 피차간에 부모자식 관계를 인정하고 있으니 딱히 친자식과 다를건 없다.


" 네가 왜 여기에 있지? "


문제는 그녀가 왜 지구에 있냐는 점이다. 단순히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난거라면 상관없지만 나를 방해할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면 여기서 죽여두는게 좋다. 위협은 되지 못하지만 상황을 귀찮게 꼬기엔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지구에 온 건 우연. 그치만 아빠랑 만난건 필연이야! 처음에는 관광만 하고 떠날 생각이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아빠는 지구를 찾아서 여행을 하고 있잖아?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 아빠랑 만날거아냐? 그래서 한 300년 죽치고 기다렸지. "


무엇이 그리 자랑스러운지 그녀는 " 엣헴! " 하고, 잘난듯이 가슴을 폈다. 사내처럼 평평한 가슴이 조금 안쓰럽다. 다른 곳은 다 인간인데 왜 하필 그쪽만 페어리의 특성이 발현된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갑자기 왜 그런 눈으로 보는거야? "


"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눈빛으로 새어나왔나보다. 쓸데없는 생각을 머릿속 한켠에다 밀어놓고 본론을 꺼냈다.


" 그보다 왜 날 기다린거지? "


300년이면 엘리에게는 적지 않은 시간이다. 인간으로 치면 대략 1년에서 3년 정도. 아무 목적없이 그만한 시간을 기다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 뻔하잖아. 설마 잊어버린거야? "


엘리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양허리에 손을 올렸다. 모른다고했다간 당장이라도 덤벼들 기세였다.


" 그래. "


뭐, 그래도 모르는건 모르는거지 별 수 있나. 당당하게 심지에 불을 붙이고 배짱을 튕긴다. 금새 뇌관에 불이 붙으면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 다음에 만날 때까지 이야기 많이 모아오라는 약속! 잊어버리면 화낼거라고 그랬잖아 이 얼빠진 아빠야! "


아, 그건가. 설마하니 그런 시덥잖은 이유일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기사 어린애들은 종종 비합리적인 이유로 움직이기도 하지. 나는 안일했던 자신을 반성하면서 매몰차게 말했다.


" 이야기 같은건 없어. 그러니 다른 볼일이 없다면 그만 비켜라. "


" 너무해! 난 장장 300년을 기다렸는데! "


" 네가 멋대로 기다렸을 뿐이다. "


엘리의 눈매가 순간적으로 사나워졌다. 그러나 말 그대로 찰나였을 뿐, 금새 웃는 얼굴로 돌아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알았어, 알았어. 이야기 건은 이제 됐어. 그치만 모처럼 만난 딸래미를 매몰차게 바람맞힐 생각은 아니지? 응? "


" 맞는데. "


"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 정말 오랜만에 만났는데 잠깐 차라도 한 잔하자. 응? "


" 너 혼자 많이 마셔라. "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내 팔을 끌어안는 엘리를 떨쳐내고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자 팔을 붙잡은 엘리의 힘이 갑작스럽게 강해졌다.


" 무슨 일이야? "


그녀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렇게나 흘러넘치던 웃음기가 싹 증발하고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 수백년간 아빠만 기다려온 딸이, 무슨 큰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차 한잔 하자는 것조차 뿌리친다고? 내가 아는 아빠는 그렇게 매정한 요정이 못 돼. 무슨 일이 있는거지? "


풀이 과정은 엉망진창인데 나오는건 정답이다. 참으로 희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


" 일은 무슨, 그냥 빨리가서 내 삶을 지우려고 그런다. "


좀 더 스무스하게 넘어갈 방법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바른대로 대답한다. 이처럼 유, 불리를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내 오랜 버릇이다.


" 왜? "


좀 더 시끄럽게 굴 줄 알았는데 엘리는 예상외로 차분하게 이유를 물었고, 나는 짤막하게 즉답했다.


" 질렸거든. "


" 뭐에? "


" 사는데. "


" .....애인이라도 죽었어? "


나는 실로 오래간만에 실소했다. 그런 생각은 젊은이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지, 나처럼 닳아빠진 노괴물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 아니, 단순히 너무 오래 살아서 사는게 지겨워진 것 뿐이야. "


엘리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물었다.


" 아빠의 삶은 어땠어? "


나는 그녀가 무엇을 묻고 싶어하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빙 둘러가는 대신, 그녀가 정말 알고 싶어하는 것들을 곧바로 말해주었다.


"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질리도록 즐겼다. 이제와선 무엇을 해도, 무슨 일을 겪어도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아. 더 이상 이 세상에 바라는 것도 없고, 남겨둔 미련도 없다. "


" 그건 오만이야! "


갑자기 엘리가 언성을 높였다. 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성난, 그러나 어딘가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열변을 토했다.


" 아빠는 분명히 오래 살았어. 본래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아빠에게 3천년이란 시간은 그야말로 영원처럼 느껴졌겠지. 하지만 아니야! 이 세상이 품고 있는 즐거움은 무궁무진해! 결코 그 정도 시간으로 다 맛볼 수 있는게 아니라고! "


아, 과연 그렇군. 처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나는 그녀의 말에 위화감을 느낀 척,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 응? 잠깐만, 잠깐 기다려봐. 대체 3천년이란 시간은 어디서 나온거지? "


" 어디서 나왔나니, 나랑 아빠랑 헤어진 뒤로 흐른 시간이잖아? "


엘리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투로 대꾸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차원이동을 할때마다 시간이 꼬인다는 것조차 모르는 듯하다. 한번 떠났던 세계에 돌아와본 적이 없다는 반증이다. 하기사 그러니까 불과 2700여년만에 지구에 도착할 수 있었던거겠지.

나는 마음속으로 엘리의 강운에 경의를 표하며 내 기억이 담긴 보석 하나를 만들어 건냈다.


" 이게 뭐야? "


" 내 오래된 기억이 담긴 보석이지. "


" 기억? "


" 그래, 요정의 뇌는 실로 우수해서 한번 겪었던 일들을 도무지 잊어버리는 일이 없지. 수만년 전의 일이라도 의식만 하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야. 하지만 그것도 딱 1억년까지다. 누적된 기억이 1억년 분량을 초과하면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슬그머니 머릿속에서 지워지기 시작하는거야. 뭐, 다른 요정들은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래서 영혼의 기록을 들춰내서 잊어버린 기억들을 담은 저장소를 만들었지. 바로 네가 들고 있는 그런 것 말이다. 그리고나서 머릿속의 용량이 꽉 차는 1억년마다 뇌에 담긴 기억을 들어내 새로운 보석을 만드는 식으로 기억을 모아왔다. "


" 지금... 대체 무슨 소릴 하는거야? "


엘리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목소리도 불안하게 떨렸다. 그러나 나는 오만하기 짝이없는 평소 버릇대로 조금의 배려도 없이 사실 그대로 말했다.


" 뭐, 간단히 말하자면 그 보석 하나당 1억년의 기억이 담겨있다는거지. "


툭, 투둑...


그리고 기억이 담긴 보석들을 하나하나 만들어나갔다. 허공에서 만들어진 보석이 비처럼 쏟아진다. 그 중에 똑같은 보석은 단 하나도 없다. 엘리는 서로 다른 1억년의 기억을 품은 보석들의 비를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나에게 물었다.


" .....도대체 몇 개나 있는거야? "


" 45만 1728개. "


" 거짓말이지? "


갯수쪽을 묻는건지, 아니면 내용쪽을 묻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쪽이든 사실이었으므로 나는 시원스럽게 대꾸했다.


" 의심가면 마음대로 확인해봐라. "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보석의 비는 기세좋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제 고작 3천개쯤 뿌렸을 뿐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엘리는 질린 듯한 얼굴로 손사레를 치면서 발작하듯이 소리쳤다.


" 됐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


바람대로 나는 보석의 생산을 멈추고 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보석들도 마나로 되돌렸다. 그 동안 엘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있다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 아빠는 아까 자기 삶을 '지운다'고 그랬지? "


" 그래. "


" 그럼 나는 어떻게 돼? "


" 사라지지. "


내 삶이 지워지면 나로 인해서 일어난 일들은 모두 없던 일이 된다. 당연히 내 딸인 엘리 또한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 되므로 세계에 의해 소거될 것이다.


" 역시 그렇구나... "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엘리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는 커녕, 도리어 차분하게 식어갔다. 아무래도 방해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나는 그녀를 죽이려고 들어올리던 손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 아빠가 그렇다면야 할 수 없지. "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체념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어께를 맥없이 늘어트린 채 돌아섰다. 뜻밖에도 순순히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 그걸로 괜찮은거냐? "


의외의 결과였기에 나는 그만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엘리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돌아서서 소리를 빽 질렀다.


" 괜찮을 리가 있겠어? "


그리고는 한동안 씩씩대면서 흥분을 가라앉힌 뒤 말을 이었다.


" 사는건 즐거워. 미련도 철철 넘치고. 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더 살고 싶어. "


" 그러면... "


" 그래도 그게 아빠의 선택이니까. "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난 아빠를 사랑해. 나에게 생명을 준 아빠를 사랑해. 내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 아빠를 사랑하고 감옥 같던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준 아빠를 사랑해.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삶을 허락해준 아빠를 사랑해. 그러니까 아빠가 너무 지쳐서, 이제 그만 모든걸 끝내고 싶다고 한다면, 여기서 내 삶을 끝내야 하더라도 난 아빠가 편히 쉬기를 바래. "


그녀는 말하는 동안에 마음을 정리한 듯, 나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작별 인사를 건냈다.


" 그럼 안녕, 아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으면 좋겠네. "


내가 바라는대로 둘 다 깔끔하게 소멸했으면 좋겠다는 뜻이리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


실로 오래간만에 돌아온 집은 굳건히 잠겨있었다. 뭐, 아파트 문은 잠겨있는게 보통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나는 대문을 잠시 마나로 분해시켰다가 안으로 들어온 다음에 원래대로 되돌렸다.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자 한가롭게 tv를 보고 있는 인간 여자가 보였다. 오래된 기억 속에서 보았던 내 '어머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향이나 마찬가지로 별다른 감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본 적이 있는 인간. 그냥 그뿐이었다.

나는 그것에게 흥미를 잃고 '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대놓고 거실을 가로질렀지만 인식을 방해하는 결계를 펼치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가 화들짝 놀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아니라 저절로 열린 문을 보고 놀란 것이지만, 뭐, 그런거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나는 '내'가 쓸데없이 소란을 피우기 전에 마법으로 재우고 문을 닫았다.


자고 있는 어린 '나'는 실로 하찮았다.


툭 건드리면 뭉그러지는 약해빠진 신체에, 마나 입자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나약한 정신, 돌아서면 스러지고 없는 짧은 수명... 그야말로 하잘것없는 생명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는 낫다.


끝을 모르고, 가치를 잃어버리고, 닳고, 닳고, 닳아서 형상조차 잃어버린 채, 그저 살아있기만 할 뿐인 나보다는 낫다.


그러니까 자라.


푹 자라.


내일 해가 떨어질 때까지 잠에 취해 있어라.


그리고 다시 일어나 보잘것없는,


찬란하게 빛나는 시시한 인생을 살다가 죽어라.


***


저 멀리 어둠속에서 새벽해가 붉을 밝힌다. 어슴푸레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전화 저편에서 상대가 첫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그 입을 틀어막았다.


" 아무말도 하지마라. "


말은 필요없다. 아주 먼 옛날부터 그렇게 정해두었다. 그렇잖아도 쓸데없이 길기만 한 연극이었다. 마지막만큼은 짧고 간결한 것이 좋으리라. 멀리 휴대폰을 붙잡은 채, 당황하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손을 한껏 흔들며 그를 부른다. 그리고 나를 향해 돌아보는 그에게, 내 모든 이야기의 발단이 된 그에게 달려가


있는 힘껏, 시원스럽게 주먹을 날렸다.


***


작가의말

그냥 열린 엔딩으로 끝내는게 더 낫지 않나 싶어서 올릴까 말까 계속 고민했습니다만 결국 올리기로 했습니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묵은 이야기는 다 털어내고 싶었거든요.


그 동안 이 길고 괴이한 이야기에 같이 어울려주신 독자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들 올해 마무리 잘하시고 새해 복 많이받으세요.


해피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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