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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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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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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0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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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86화

DUMMY

꼭두새벽부터 공간이 심하게 불안정했다.


아마 근처에 이세계로 통하는 구멍이라도 뚫린 모양이었다. 요정의 안식처가 위치한 땅은 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와 부딛치는 일이 가장 많은 지점이라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었다. 많으면 10년에 대여섯번, 적어도 수십년에 한번 정도는 열린다.


"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만... 쯧. "


단잠을 망쳐버린 도서관장은 뚱한 얼굴로 하품을 하면서 도서관 밖을 향해 털래털래 걸어나갔다. 혹시라도 이계의 생명체나 물건이 넘어오지 않았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딱히 그가 해야 할 일은 아니었지만 단조로운 도서관 업무에 질릴대로 질려있던 참에 모처럼 굴러들어온 소일거리를 그냥 지나칠 까닭이 없었다.


' 뭔가 연구할 거리가 있는 물건이 넘어왔으면 좋겠는데. '


정말 위험한게 넘어왔다면 여왕이나 그녀의 자식들이 손을 쓰겠지만 그 외에는 먼저 가서 줍는게 임자였다. 자연히 바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순식간에 지상으로 올라온 도서관장은 통로가 열린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찾기 위해 마력을 퍼트리려다가 호수변에 서 있는 낮익은 사내를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 네가 안식처로 올라오다니 별일이구나. 어쩐 일이냐? "


사내, 아르모어 폰 피르쉬어는 도서관장을 보자 " 오랜만에 뵙습니다. " 하고, 빙그시 웃으면서 말했다.


"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


" 인사? "


" 예, 그 동안 하고 있던 연구가 아까 마무리 됐거든요. "


" 아... 그럼 공간이 불안정해진게... "


도서관장은 새삼스럽게 그의 옆에 있는 이세계 양식의 무덤에 시선을 주었다. 이 무덤이 생긴지도 어느덧 백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인간에게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적일 정도로 긴 세월이다. 무력하고 조그마한 인간 꼬마가 찾아다니던 탈출구에 도착하기까지는, 그토록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만히 안주하고 있었다면 결코 도달하지 못했을 기나긴 시간이.


" 떠날 셈이냐? "


아르모어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냐. " 하고, 도서관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축하해줘야 할 일이지만, 축하하고 싶은 기분이 들질 않았다. 이제와서 헤어지는걸 아쉽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는 드래곤. 수천년에 달하는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자. 반복되는 만남과 이별에는 이골이 나 있다. 단지, 은연중에 자신을 투영하고 있던 이 요정의 결정에 조금 실망했을 뿐이다.


" 넌 그걸로 괜찮은거냐? "


" 예? "


그 탓에, 그냥 잘 가라고 하면 될 것 가지고 기어이 쓸데없는 소리를 꺼내고야 말았다. 아르모어는 말귀를 이해하지 못한 듯, 얼빵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해가 안가면 그냥 자신의 생각을 읽어버리면 될텐데 제 딴에 예의를 지키는 것인지, 아니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질 않는 것인지 멀뚱멀뚱 눈만 껌벅이는 모습이 갑갑했다.

도서관장은 소리없이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가 결국 목구멍까지 기어올라온 속마음을 도로 집어넣었다. 제멋대로 과거의 자신을 그에게 투영했을 뿐, 그는 그고, 자신은 자신이다. 멋대로 기대해놓고 거기에 부응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건 얼간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가 자신의 추태를 후회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려 했을 때, 아르모어가 옛 친구의 무덤을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 달리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


짙은 체념이 깔려있는 목소리가 도서관장의 심기를 거슬렀다. 기껏 이성이 꺼놓은 분노의 횃불이 잿더미 속에서 솟아올라 다시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이 목소리로 표출되기전에 아르모어가 말을 이었다.


" 수십, 수백, 수천번도 더 생각해봤습니다. 지금이라도 세계수를 없애버리고, 내가 이 세계로 오기 전의 정보를 토대로 멸종한 생명체들을 되살린다면 어떨까하고 말입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짐작이 가십니까? "


" 여왕이 개입하겠지. "


관리자는 직접 개입하지 못할테지만 그의 지상 대리자인 여왕은 계약에 따라, 또 앞으로 펼쳐질 예정인 ' 요정의 시대 ' 를 위해 아르모어의 앞을 막아설 것이다.


" 지금의 너라면... 승산이 아주 없는건 아니잖느냐? "


도서관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곳을 주시하고 있을 여왕을 의식하여 조금 주저했지만 이내 각오를 다지고 그렇게 말했다.

단순히 힘의 절대량만 따진다면 아르모어는 죽었다 깨어나도 여왕의 상대가 될 수 없을테지만, 큰 힘에는 큰 제약이 따른다는 법칙에 따라 여왕에게는 막대한 제약이 걸려 있었다. 반면, 아르모어는 아슬아슬하게 제약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장기전이라면 몰라도 단기전으로는 승산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도서관장의 생각이었다.


" 절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 "


아르모어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 실제로는 어림도 없겠지만, 기적이 일어나서 제가 이겼다고 치죠. 그 다음은요? "


" 요정들이 들고 일어나겠지. "


" 그렇겠죠. "


요정들에게 있어서 여왕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만약, 누군가가 여왕을 해친다면 그게 설령 이 세계의 관리자라 할지라도 요정들은 주저없이 덤벼들 것이다. 그렇게되면 범인이 죽거나 요정이 멸종하기 전까진 결코 끝나지 않는다.


" 그래서야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만뒀어요. "


아르모어는 사람들보다 요정들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더 깊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비록 가치관의 차이를 절감하고 안식처를 뛰쳐나왔지만 요정들은 그의 구원자이자 조력자였고,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아무리 과거에 저지른 과오가 무겁다고 하나, 자신의 손으로 요정들을 멸종시키는 것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 ..... "


아르모어의 대답에 도서관장은 역시 과거의 자신과 이 꼬마는 닮았지만 다르다는걸 새삼스럽게 실감하고 조용히 미소지었다.


" 네가 그걸로 괜찮다면 됐다. "


그걸 깨달은 이상, 더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해봐야 망상에 사로잡힌 늙은이의 추태에 지나지 않는다. 도서관장은 연구 성과에 대해 짤막한 대화를 나눈 뒤, 마지막으로 모든 일이 그가 바라는대로 잘 풀리기를 기원해주고 짧은 인연 하나를 끝맺었다.


***


도서관장과 헤어진 뒤, 아르모어는 안식처를 돌면서 여왕을 비롯해 그 동안 신세졌던 요정들과 정령들을 만나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가치관의 차이를 절감하고 안식처를 뛰쳐나온 이래로 100년이 넘도록 교류가 없다시피 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막상 이 세계를 영영 떠난다고 생각하니 눈에 밟혀서 그냥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다들 똑같구나... '


10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요정들은 변함이 없었다. 그가 어렸던 시절과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미소를 짓고, 똑같은 호의를 가지고 작별인사를 나눈다. 분명 생각하는 것도 그때와 똑같을 것이다. 애초부터 한없이 기나긴 세월을 살도록 설계된 생명체니까 100년 정도로는 변하지 않는게 당연하다.


하지만 인간은 어떨까?


평범한 인간은 대부분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다. 인간은 짧은 세월을 살도록 설계되었고, 그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도록 되어있다. 요정이 되어버린 자신과는 다르다. 억지로 수명을 늘린다고 한들, 어느샌가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만큼 변해있으리라. 그리고 설계 의도에서 벗어난 짓을 한 끝에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내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기분이 가라앉고 회의감이 몰려왔다.

차원이동 마법은 분명히 완성했지만 그가 만들어낸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원하는 세계를 마음대로 골라서 이동할 수 있는 편리한 물건이 아니었다.

마법이 시전된 세계와 가장 가까운 세계에 접속하여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지역이 있는지 없는지 검색한 뒤, 그런 지역이 있으면 통로를 열고, 없으면 다음 세계에 접속하여 탐색을 반복하는, 최소한의 안전성을 갖춘 랜덤 텔레포트에 가까운 물건이다.

그나마 마법의 사정거리 내에 다른 세계가 없다면 접근하는 세계가 있을때까지 무한정 기다려야하고, 지구처럼 큰 우주가 있는 세계라면 환경 검색에만 수십년씩 걸릴 수도 있다. 그러다가 세계간의 거리가 벌어져서 사정거리 바깥으로 가버리면 말짱 도루묵.

그런 방식으로 은하수가 실개천으로 보일만큼 터무니없이 많은 세계들 중에서, 지구가 있는 세계를, 또 그 안의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라는 작은 티끌 하나를 찾아내기까지 대체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한걸까? 그렇게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면서 꼭 지구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걸까?


어차피 찰나의 위안 밖에 되지 않을텐데.


안식처 밖으로 향하던 아르모어의 발걸음이 완전히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지러이 흔들린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세계도 나쁘지는 않았다. 요정들은 즐거운 시간을 같이 즐기기엔 좋은 친구들이었고, 인간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함께 할 수 있었다.

비록 ' 어쩔 수 없는 ' 고난 앞에서는 비정하리만치 쉽게 돌아서는 단점이 있지만, 어차피 여왕이나 관리자에게 반기를 들지 않는 이상, 이 세계에서 그가 ' 어찌할 수 없는 ' 일 따윈 거의 없다. 사실상 있으나마나한 단점이 아닌가? 생각만 조금 바꾸면 여기서도 얼마든지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안식처 밖으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완전히 멈췄다. 한동안 그 자리에서 못박힌 것처럼 가만히 서 있던 아르모어는 어느 순간, 능력을 발동시켜 '영역'을 펼쳤다. 시야가 폭발적으로 넓어지고, '영역' 안으로 들어온 공간들의 정보가 쓰나미처럼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온다. 마침내 '영역'이 확장을 멈추었을 때, 그의 시야에 이 별 전체의 모습이 펼쳐졌다.

안식처를 제외하면 있는 것이라곤 시커멓게 죽어버린 대지와 사막, 세균 한마리 살지 않는 물, 그리고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쓸쓸한 흔적들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일찍이 옛 시대가 그러했듯이, 사람의 시대가 그러했듯이, 앞으로 열릴 요정의 시대도 결국은 이렇게 막을 내릴 것이다.


' 그때도 나는 손 놓고 구경하는 것 밖에 할 수 없겠지. '


이미 그의 존재는 관리자의 계산 속에 들어가있다. 이번에 요정들을 인질로 삼아 제어했듯이, 다음번에는 또 다른 수단으로 그의 목에 족쇄를 채워둘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 따위 있을 리가 없다. 그 자신이 공간 지배의 경지를 체험해봤기에 몸서리치도록 잘 알고 있었다. 관리자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여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조차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틀어막아버릴 것이다.


" 젠장. "


퍼억!


아르모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되자 양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힘껏 쥐어서 터트려버렸다. 머리가 과자처럼 부서지고 내용물이 사방팔방 튀면서 주변을 더럽힌다. 머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지 않았다. 단지 유령같은 형태가 되어 자신의 몸 밖으로 튕겨져나왔을 뿐이다.*

머리가 날아가는 것과 동시에 냉정을 되찾은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영역'을 자신의 주변으로 축소시켰다. 그리고 흉하게 망가진 목 위쪽을 마나 입자로 분해해버리고 온전한 모습으로 재조합하여 깔끔하게 수리했다.


' 하마터면 대형사고를 칠 뻔 했군. '


육체로 되돌아온 그는 능력을 완전히 거두고 다시 한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역'을 한껏 펼쳐둔 상태에서 감정에 휘둘려 ' 다 없어져버려라! ' 같은 생각이라도 했다간 아예 별이 통째로 분해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어차피 그런 상황이 벌어져도 다시 재구성하면 그만이긴 하지만...


' 괜히 관리자가 개입할 빌미를 주면 안되지. '


여왕에게 그랬던 것처럼 괴상쩍은 노예 계약 같은걸 강요당하는건 곤란하다. 그런걸 생각하고 있자니 그렇잖아도 바닥을 기던 정나미가 뚝 떨어져나간다. 마음을 완전히 정리한 아르모어는 마지막으로 안식처를 한번 돌아본 뒤, 공간을 넘었다.


***


공간을 열고 도착한 연구실은 텅 비어 있었다. 삼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책장의 자료들과 어지럽게 널려 있었던 수많은 연구 기록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빈 테이블과 의자 3개만이 덩그렁히 남겨져 있었다.

아르모어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장소를 한동안 서성거리면서 감회에 잠겼다.

고작 1년짜리 수험생 생활도 벌벌 떨던 꼬마가 이 좁아터진 공간에서 무려 8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연구만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 너도 그 동안 수고 많았다. "


마음을 정리한 그는 80여년간 함께한 연구실에게 작별 인사를 건낸 뒤,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는 그 작은 건물을 마나로 되돌려보냈다. 마나 입자들이 흩어지고, 푸른 빛에 감싸인 대사막의 풍경이 펼쳐졌다.


" 정리는 끝났어? "


바깥에는 엘리와 애냐가 푸른 빛을 내뿜는 거대 마법진의 중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냐는 평소와 다름없는 복장에 빈손이었지만 엘리는 자기 몸뚱어리보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그것도 모자라 양손에 제 몸통만한 자루를 두 개씩 들고 있었다.


" 그래, 언제든지 출발해도 좋아. 그런데 너 그게 다 뭐냐? "


완숙한 공간 지배의 경지에 다다른 아르모어와 달리 그의 딸은 할머니 - 여왕 - 의 힘을 어설프게 이어받은 탓인지 공간 조작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다. 때문에 물건을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아르모어와 달리,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직접 챙겨가야 하긴 했다. 챙겨가긴 해야하는데...


" 아무리 그래도 짐이 너무 많잖아!? 좀 줄여! "


" 이것도 최대한 줄인거야! "


" 이게 줄인거라고!? "


그럼 처음엔 대체 얼마나 준비했단 말인가? 아르모어가 어처구니 없어하자 뒤에 서 있던 애냐가 조용히 마법진 바깥쪽을 가르켰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과장하나 없이 하늘 끝까지 치솟아 있는 배낭의 탑이 서 있었다.

도대체 이 망해버린 세계 어디에 저만한 물자가 있었는지 납득이 안 갈 정도의 물량이다.


" 하... 됐다, 됐어. 관두자. "


그 방대한 스케일에 질려버린 아르모어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아버지와 딸이라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여왕의 힘으로부터 태어난 요정이란 의미지 실제 혈연 관계가 있는 것도, 가족간의 정 같은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 세계를 떠나고 싶다는 목적이 일치했고, 그에 따라 협력해왔을 뿐. 이제 목적을 달성하고 각자 갈라서서 자기 갈 길로 떠나는 마당에 진짜 애비마냥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 우울해하고 있는데 애냐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 그럼 주인님, 이제 약속을 지켜주세요. "


" ..... "


우울한 일은 왜 연달아서 오는걸까? 아르모어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뻔히 알면서도 마지막으로 물었다.


"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꿀 생각은? "


" 전혀요. "


그녀는 예상대로의 대답과 함께 반문했다.


" 주인님이라면 제 마음을 이해하시지 않나요? "


인류를 구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인형의 반문에 아르모어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길로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인형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가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지었던 것과 똑같은,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감이 어린 미소가.


" 그럼 안녕히, 원망스러운 주인님. "


파앙!


마지막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애냐의 몸이 하얀 입자로 분해되어 사라졌다. 그녀의 재생을 담당해야할 마법은 이미 80여년 전, 『소원의 열쇠』를 해체하면서 함께 해체해둔 뒤다. 아르모어는 그녀의 잔해가 흩어지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한 복잡한 표정으로 가만히 지켜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 가자. "


" 응. "


그가 의지를 움직이자, 바닥의 마법진이 그에 호응하여 눈부시도록 강렬한 푸른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 앞의 공간이 크게 일그러지더니 허공에 성문만한 거대한 구멍이 뻥하고 뚫렸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마치 괴물의 목구멍 같은 구멍을 흥분한 얼굴로 지켜보던 엘리는 통로가 안정되자 방긋 웃는 얼굴로 돌아보면서 말했다.


" 이제 헤어질 시간이네? "


" 그러게. 이젠 정말 안녕이야. "


같은 통로로 들어간다고 해서 같은 출구로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출구 설정을 행성 단위로 해놓은 탓이다.

물론, 떨어진다고 해봐야 같은 행성 안일테니 만나려고 한다면 금새 다시 만날 수 있겠지만 지구를 찾아 차원이동을 반복할 예정인 아르모어와 이동한 세계에서 한동안 지낼 계획인 엘리가 구태여 다시 만날 이유가 없었다.


" 그럼 여기서 약속! "


" 어, 엉? "


적당적당히 대꾸해주던 아르모어는 엘리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당황해서 바보같은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녀는 " 뭐야, 그 얼굴. 바보같아. " 하고, 손가락질하며 얄밉게 웃어대다가 무안해진 아르모어가 막 화를 내려던 타이밍에 귀신같이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 나중에 다시 만날 때까지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모아와! "


" 나중이라니... 언제? "


" 언젠가! "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대충대충인 약속 시간이었다.


" 나도 여러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재미난 이야기 많이 모아올테니까, 아빠도 꼭 그러기야? 알았지? 잊어버리지 마? 만약 잊어버렸으면 다시 만났을때 나 되게 화낼거야! "


" 아니, 그... "


" 꼭이야! "


아르모어가 가타부타 대답하기도 전에, 엘리는 통로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는 그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보다가 난처한 표정으로 뒷통수를 긁적거리면서 중얼거렸다.


" 잊어버리지 말라니... 나, 참. "


엘리라는 이름에 뭐라도 있는걸까?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하면서 사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조금은 밝아진 얼굴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 너머로.


***


작가의말

설마했던 급마무리.


몇년이나 끌어왔던 하얀 기사의 이야기가 드디어 끝났습니다.


원래는 한 나라에 기사 하나씩 던져주고 전쟁하는 이야기로 기획했는데 쓰다보니 제겐 전쟁물의 재능이 없더군요. 제기랄

그 바람에 급선회를 하면서 뭔가 이상한 이야기가 되버리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이리저리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막상 적으려고 하니까 떠오르는 말이 없군요.


그 동안 아마추어의 부족한 취미에 함께해주신 독자 여러분들에게 감사인사를 드리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에필로그 남아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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