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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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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연재수 :
2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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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1,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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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30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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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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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83화

DUMMY

훗날 역사에 '재앙의 시대' 라고 기록된 최악의 가뭄이 끝나고,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나는 정말 바쁘게 살아왔다. 테오도르 왕자님이 남겨주신 공중도시의 식량을 기반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영토를 넓히는데 기여하였으며, 결혼을 하고, 자식들을 훌륭한 기사와 정숙한 부인으로 키워냈다. 이렇게 결과만 나열하고 보면 간단하지만, 하나하나 참으로 힘들고 바쁜 노력의 땀방울로 이루어진 열매들이다.


땀과, 눈물과, 기쁨과, 영광이 뒤섞인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고 있자니 새삼스럽게 그 날의 일이 떠오른다.


만약, 그때 테오도르 왕자님이 나를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청기사와 전력을 다해 맞붙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젊었을 시절에는 이따금씩 아쉽게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이렇게 되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그 날 허무하게 이 몸이 스러져버렸다면, 이 보잘것 없는 몸이 짊어져야 했을 그 많은 일들이 다 어찌 되었겠는가? 생각만 하여도 등골이 오싹한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새삼 아버님의 말씀이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 젊은이는 승리로 얻을 것부터 생각하고, 늙은이는 패배로 잃어버릴 것부터 생각하는 법이다. " 그렇게 말씀하셨던 아버지보다도 20년이나 더 살았으니 과연, 나도 이제 늙은이라 할 것이다.


" 후우... "


괜히 가슴이 답답하여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날, 억센 쇳덩어리 같던 두 팔은 온데간데없고 장장처럼 버썩 마른 얇고 왜소한 늙은이의 팔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보면 검을 잡지 않은지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약해져만 가는 몸이 서러워 홧김에 내팽겨쳤던 검이다. 오늘따라 어쩐지 검이 그리웠다.


아니, 그리움보다는 오기일지도 모른다. 다 늙어 은퇴한 뒷방 늙은이의 삶을 얌전히 받아들이기 싫다는, 어린아이의 투정과 같은 반발심일지도 모를 일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방 한켠에 놓아둔 장검을 집어들어 허리에 찼다. 평생을 함께 해왔던 그 무게가 약간 버겁게 느껴지자 눈물이 핑 돌았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어쩐지 몸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점차 몽환적으로 뭉개져가고, 좌우에서 쏟아지는 빛이 점점 더 강해져갔다.


아아, 이게 내 마지막인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내 인생은 끝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약간의 두려움과 아쉬움이 몰려왔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자 뿌듯한 미소가 그것들을 흔적도 없이 몰아내었다.


" 만족하나? "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검을 뽑아들고, 기사의 예를 갖춘 뒤, 실로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힘차게 대답했다.


" 암, 만족하고말고. "


이 하잘것 없는 자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 실로... 보람찬 삶이었다. "


그로부터 약 20분 뒤.


복도를 청소하러 나온 하녀는 복도 한복판에 멈춰선 기사를 발견하고 움찔, 몸을 떨었다. 창문에서 쏟아지는 빛에 감싸인 그 기사는 교범에 실어도 좋을만큼 훌륭한 예를 표한 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것이 보셰트의 중흥기를 이끈 위대한 기사, 메롬 드 바티용이 역사에 남긴 마지막 모습이었다.


***


" 따뜻하네... "


배고 누운 무릎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은 정겨운 목소리가 이른 봄 날의 햇살처럼 느긋한 어조로 맞장구쳤다.


" 그러게. 이제 정말 봄이 오려나 봐. "


나는 아내의 체온을 두고 한 말인데 아내는 햇살이 따뜻하다는 말로 착각했다보다. 하기사, 다 식어버린 이 늙은 몸에 온기가 있으면 얼마나 있을 것인가. 그녀로선 이 미적지근한 온기보다 햇살의 따스함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당연하리라.


" 난 당신 몸이 따뜻하다고 한건데. "


그럼에도 굳이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리는 것은, 똑같은 세월을 살아왔는데 혼자 늙어버린 자신에 대한 자조이자, 홀로 세월의 흐름을 빗겨나간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성질 고약한 늙은뱅이의 심술보로 베베 꼬인 결과이리라.


" 그래? 그럼 좀 더 따뜻하게 안아줘야겠네. "


아내는 빙그시 웃으면서 내 옆구리 아래로 손을 넣어 끌어당겼다. 그러자 몸이 훌쩍 들려서 그녀의 품 안에 쏙 안긴다. 젊은 시절과 다를 바 없이 따스한 체온과 향긋한 살내음이 늙은 몸의 감각을 즐겁게 한다. 하지만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질 않았다. 꼭 계집아이가 인형을 끌어안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고약한 늙은이의 심술보가 다시금 베베 꼬이기 시작했다.


" 이런 젠장, 내가 무슨 인형이냐? 꼭 끌어안게? 덥고 숨막히니까 그만둬. "


"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얼굴은 좋아 죽겠다는데? "


" 커험! "


이런 제기랄, 나이를 먹더니 이놈의 얼굴 근육이 당최 통제가 안되네. 잽싸게 헛기침을 하면서 엄격, 근엄, 진지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오려고 노력했지만 아내가 계속 빙글빙글 웃어대는 것이 아무래도 결과가 썩 신통치 않은 모양이었다.


" 하여간 우리 꼬마는 몇 살을 먹어도 귀엽다니까. "


" 아, 진짜 그놈의 꼬마 소린 끝이 없네! 내가 어딜 봐서 꼬마야? 나도 이젠 자식이 다섯에 손주가 열 넷에 증손자, 증손녀도 있는 상 늙은이가 다 되었구만 아직도 허구한 날 꼬마래. "


처음 만났을때야 그야, 정말로 꼬마였으니까 당연한거였지만 설마하니 이 나이 되도록 꼬마 소리 들으면서 살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매번 하던 것처럼 역정을 내어보지만, 애시당초 효과가 있었으면 매번 반복했을 리가 있나. 아내는 매번 그렇듯이 가볍게 웃어넘기면서 하얗고 가느다란 검지손가락으로 쭈글쭈글한 내 볼을 가볍게 콕 찔렀다.


" 그래봐야 반응이 딱 꼬마인걸. "


이 말도 한 번 두 번 들은게 아니다. 그래서 젊잖게 타일러도 보고, 어른스럽게 웃어넘겨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이건 이래서 꼬마다, 저건 저래서 꼬마다, 하여간 뭘 어떻게해도 결국 꼬마 취급을 벗어날 수가 없다.


" 어휴, 이놈의 여편네. 관두자 관둬. 내가 관에 들어가 누워도 꼬마라고 할 사람한테 더 말해서 무얼하나. "


" 아하하하... "


아내는 허물없이 웃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나도 그냥 웃고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쏟아지는 햇살을 만끽했다.

아직 공기는 조금 차지만 유행마냥 너도나도 껴입고 있던 하얀 눈 외투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 얇아진 옷감 사이사이로 새파란 싹들이 힘차게 고개를 내민다. 이제 정말 겨울도 다 끝난 셈이다.


" 그렇군, 다시 봄이 오는게로군... "


봄.


남들은 새로운 만남의 계절이라지만 나에게는 쓰라린 이별의 계절이다. 부모님도, 누님도, 아내도, 못난 자식놈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날씨가 풀리는 봄 날에 따라갈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대부분 신께서 허락하신 수명을 꽉 채운 호상(好喪)이었다만, 그럼에도 가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면 입맛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생각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다음 차례를 떠올리게 된다.


" 당신은 후회스럽지 않나? "


그럴 때마다 나는 아내에게 질리지도 않고 똑같은 물음을 던진다. 이젠 좀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매번 후회하면서도 막상 때가 되면 입이 제멋대로 지껄여버리고 만다.


" 뭐가? "


그러면 아내는 피식 웃으면서 놀리는 투로 되묻는다. 대화가 너무 정형화된 나머지 이제와선 주기적으로 공연하는 연극이나 다를 바 없다. 어떤 결말이 기다릴지 뻔히 알면서도, 배우는 맡은 바 배역에 충실하게 대사를 읊는다.


" 나랑 결혼한 것 말이야. "


" 글쌔... "


그녀는 웃는 얼굴 그대로 턱에 검지손가락을 댄 채, 잠시 고민하는 척 하다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뭐, 이래저래 불만스럽긴 하지. 재미 좀 보려니까 어느새 폭삭 늙어버려서 싸우지도 못하고, 늙으니 거동이 불편해져서 이것저것 챙겨줘야하고, 성격까지 고약해져서 툭하면 성내고, 고집피우고, 억지부리고, 정말 성가셔 죽겠다니까. 게다가 나만 남겨두고 먼저 떠나버릴 거면서 결혼이라는 자기네 문화를 내세워서 다른 남자도 못 만나게 하지. 늘어놓고보니 불만스러운 점 투성이네. "


" 크흠... "


매번 듣는 불평이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이 괴로운 것은, 그것이 모두 사실인 까닭이리라.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진실은 누군가에게 더할나위 없는 폭력이 된다고.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옳은 소리다.


" 그치만 역시 후회하지는 않아. "


한바탕 가슴 속을 쑤셔놓은 아내는 다시 한번 나를 끌어안으며 속삭인다.


" 귀찮고, 힘들고, 불편한 일들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즐겁고, 가슴뛰는 일들이 많았으니까. "


실로, 병 주고 약 주는 짓이다. 그래도 이 약이 없었다면 내 심장은 옛날 옛적에 멎어버렸겠지. 마음 속에 퍼져나가는 따스한 약기운을 느끼며 슬그머니 눈을 감는다. 여기서 그만두면 참 좋을텐데 노친네라는 것은 언제나 한마디가 더 많다.


" 혼자 남겨진 채, 그 즐거운 시간보다 수십배는 긴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데도? "


" 어머나, 우리 꼬마는 자기가 죽은 뒤에도 내가 이 '결혼'이라는 문화에 묶여있을거라 생각하는거야? "


" 그런가... "


그녀는 호들갑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리는 투로 되묻는다. 이 또한 언제나와 같은 대사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정말로 그래주면 좋을텐데.

고작 70년도 못 채우고 삭아버리는 인간과 달리 엘프족인 그녀는 앞으로도 수백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가야한다.

그 생각만해도 까마득한 기나간 시간을, 먼 옛날에 잠깐 스쳐지나갔던 이종족 꼬마 하나 때문에 고독하게 살아가야한다면 그건 너무 잔인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그런 것은 바라지 않는다.


" 그렇다면... 다행이군... "


그녀의 따스한 온기 때문일까. 잠기운이 소리없이 몰려와 눈꺼풀을 짓누른다. 내 목소리에 깃든 졸음기를 읽어낸 아내가 빙그시 웃으며 묻는다.


" 졸려? "


" 으음... 조금 그렇군. "


" 그럼 이제 슬슬 돌아가자. 이런데서 자면 감기걸려. "


" 그러는게 좋겠군. "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괜히 나 때문에 아내가 감기에 걸리는건 곤란하다. 아내의 부축을 받아 늙고 나약해진 몸을 일으킨다.

아, 정말이지 늙음이란 어찌 이리도 불편한 것이란 말이냐! 고작 일어나서 내 집으로 가는 것조차 아내를 귀찮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니.

나약해진 자신에게 불평을 내뱉으며, 그녀의 몸에 의지해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어쩐지 어제보다 발걸음이 조금 더 무거워진 기분이다. 내일도 이렇게 나올 수 있을까?


" 만족하나? "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묘하게 낮익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족하냐고? 글쌔... 솔직히 말해서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이렇게 아내의 짐짝 노릇이나 하고 있는데 뭘 그리 만족스러울까. 하지만 그렇군...


" 나쁘지는 않았다. "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과 한평생 웃으면서 살았으니, 비록 말년이 조금 불편하다하나 나쁠 것이야 있겠는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에 힘을 더한다. 그런 우리들의 등 뒤로 봄날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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