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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쿨러 님의 서재입니다.

우린 몸이 바뀐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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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쿨러
작품등록일 :
2023.05.10 12:44
최근연재일 :
2023.07.11 18:35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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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2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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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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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8화. 그의 이야기.

DUMMY

18화. 그의 이야기.



‘나는 왜 그랬던 걸까?’


알고 싶었는데 묻지 못했다. 고작 한 말은 잘 가라는 인사뿐.

그것도 흑형이 비꼬아줘서 인지했지 그가 아니었다면 그런 말을 했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난 왜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갈피를 못 잡던 마음이 진정되자 새롭게 떠오른 의문이 머릿속 가득 들어찼다.

흑형의 ‘좋아했으니까.’라는 말이 와 닿자 기억을 거세당한 혼란스러움에 두 동공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왔다.

두려워졌다.

없던 일이 아닌 기억이 지워진 거라서.

여태껏 말 도 안 된다며 웃어 넘겼던 일들은 모두 현실이 되어 무서워졌다.

흑형의 기억이 맞았고 명세서의 구매 내역이 맞았으며 꽃순이의 지적 또한 맞았다.

취향 독특한 스토커도 알고 있는 과거를.

머리는 잃고 심장은 기억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나는 스스로 인지해 마주하고 말았다.

어째서 기억나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는 게 아닐까?

영화 속 비련의 주인공이나 겪을 법한 상황에 가정은 진실로 공고해져 갔다.

여느 소설처럼 지우고 싶은 기억만 지우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아직 청춘도 다 피우지 못한 꽃다운 나이.

그녀를 만난 설렘 섞인 혼란은 남은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어 버렸다.

어떤 기억이, 어떤 추억이 지워졌는지 몰라 우악스럽게 구겨지는 커피 캔만큼 심장은 쪼그라들고 애처로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알츠하이머.’


불현듯 떠오른 공포스러운 병명에 육신을 지지하던 다리는 힘이 풀려 맥없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절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병은 기억을 갉아먹으며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 걸 알기에.

육신은 멀쩡한 데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야야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기억이 나질 않아!”

“주둥이는 잘만 기억하더만.”

“진실을 말해줘! 내가, 내가 정말 저 아이를 좋아했었냐?”

“무안해서 그러는 거라면 그만둬. 다 이해하니까.”

“아니, 정말. 진심. 리얼리. 난 기억이 없어!”


그는 억지스러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며 머리와 심장을 번갈아 만지며 정신을 체크했다. 그리고 혀를 차며 마주한 절망을 장난스레 받아 쳤다.


“병에 걸린 것 같긴 하다.”

“알츠하이머.”

“무슨, 염병이지.”

“장난 아니야. 난 기억이 없어. 어떡하지 아직 장가도 못 가고 연애다운 연애도 못 해봤는데.”

“염병에는 몽둥이가 약인데.”

“내 눈을 봐! 이게 어디 장난치는 눈이야. 병원에 가야겠어. 그리고 확인해야겠어! 내가 앓는 병이 정확히 뭔지? 그리고 내 상태가 어디까지 갔는지.”

“거기까지 뭐하러. 가드 내려라. 약 들어간다.”


멍해진 얼굴로 그의 주먹을 얼마나 받아 냈는지 모른다.

귀 뒤로 젖혀 복부를 쳐올리는 주먹질에 배는 들썩거렸지만, 정신은 정지해 무표정해졌다.

그도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회수한 손으로 어깨를 감싸며 정녕 사실인지 물었다.


“진짜야? 장난이면 가만 안 둬!”

“엠···.”

“됐다 됐어. 뭐 그런 거로 엄마까지 걸어. 기억이 어디까지 안 나는데.”

“그걸 알면 기억하고 있는 거겠지.”

“나는 기억나?”

“기운 빠진다. 쉰 소리 하지 마. 우선 샤넬의 얼굴은 알아. 그리고 창고 가다 몇 번 인사 나눈 것까지.”

“난 왜 이리 미덥지 못하냐!”

“믿지 마! 나도 믿고 싶지 않으니까.”

“내 기억과 대조해 보자고, 그러면 기억날지도 모르니까. 네가 샤넬과 가까워진 계기는?”

“계기? 인사 두어번 나눈 게 다인데.”

“뭐야, 연기야? 진짜야? 기억 안 나? 1층 행사장, 바로 옆 가판에서 한 달여 간 같이 일 했었잖아. 기억에 없어?”


없다.

행사장에 파견 나간 적은 있는데, 그녀는 그 곳에 없었다.

떠올리려 해도 번진 물감처럼 가판 오른쪽 공간은 꺼멓게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그 안에 무언가 있을 텐데, 머리를 쥐어뜯고 헤집어도 번진 물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밀려오는 답답함에 나도 모르게 괴성을 지르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미친놈아. 정신까지 잃었냐?”

“제정신이게 생겼어? 내가 치매라니. 고자라면 차라리 낫지 이제 26살 아직 꽃도 다 못 피웠는데, 치매라니!”

“진정하고 단기 기억상실일 수도 있으니까. 기억을 되짚어 보자. 네가 정한 성지는 기억나?”

“성지? 그게 뭐지?”

“왜 있잖아. 네가 샤넬과 추억이 담긴 중요한 장소라며 신성시하는 장소.”

“성지? 기억나지 않아. 그런 유치한 짓을 했다는 사실도.”

“하, 골 때리네 진짜야 아니면 연기야? 너무 늦었으니, 우선 돌아가자.”

“어딜 가! 병원에 먼저가 야지. 이 상태로 나 일 못 해.”

“그럼 옥외 주차장 2층으로 가봐. 그곳이 네가 정한 성지니까. 가면 기억이 나지도 모르잖아.”

“옥외 주차장 2층. 옥외 주차장 2층.”


정신 나간 사람 마냥 그가 말한 장소를 수없이 읊조렸다.

귀신에 홀린 눈으로 그곳을 향해 하염없이 걸었다.

정신이 멍해, 그곳에 도착한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넓디넓은 주차장, 그가 알려 준 성지가 어딘지 찾을 수 없었다.

딛게 되면 떠오를까? 서성였지만 그곳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듯 보였다.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과거를 되돌려 억지로 회상시켰다. 하지만 부하 걸린 플로피 디스켓은 버벅대며 어떤 영상도 재생시키지 못했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고 숨을 깊이 마셔 흩어지는 이성을 다잡았다.

판단하기 섣부르고 치매라 보기엔 잃은 기억이 많지 않았다.

밤마다 이불 킥을 선사하는 부끄러운 과거는 또렷했고 겪었던 충격적인 장면은 선명했다.

그 많고 많은 기억 중 왜 하필 그녀만 몽땅 날아갔는지. 그것만은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른다.

파견 나가 행사장에서 근무했던 날처럼. 이곳에서 지워진 기억의 조각을 찾을 수 있었다.

주차장 끝 외진 자리.

경차도 겨우 댈 수 있는 좁은 자리에 나는 누군가를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회색 빛 기억에 배경은 떠오르지만 검게 칠해진 상대는 누군지 알아볼 수 없다.

그녀일까? 아니면 다른 기억일까?

알 수 없는 사실에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모른다.

세워진 차가 빠져나가고 다른 차가 그 자리를 메꾸고 빠져나가길 반복하는 동안, 나는 서서 그 기억만을 오롯이 쫓았다.

그러다 아래층, 세단에서 내린 토커자식을 보게 되었다.

그는 주차장 입구에서 비서와 내려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지점장님, 이제 말씀해 주시죠! 왜 그러신 겁니까?”

“조 비서님, 그만하시죠.”

“그만둘 수 없습니다. 왜 이미지를 버려 가며 이런 쓸데없는 연기를 하냐 이 말입니다.”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절 골탕 먹이는 걸 좋아했죠. 다시 그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매번 왜 그리 엉성한지. 당해주려 계획보다 시간을 너무 지체하고 말았네요.”

“그게 다입니까?”

“너무 어이없는 답변이었나요?”

“네! 지금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 줄 아시면서. 그리고 항간에 지점장님을 뭐라 부르는 줄 아십니까?”

“투 머치 토커에 스토커. 이젠 완전무결한 토커가 되었겠네요.”

“잘 아시네요. 이 이야기가 회장님 귀에 들어 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거기까진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요.”

“참 할 말을 잃게 만드네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하실 생각인가요?”

“더 오래, 가깝게 지내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선 그만둬야 겠죠!”

“퍽, 대단한 결정하셨네요.”

“덕분에 이 사진들을 훈장으로 얻었지 않습니까!”

“안 지우실 건 아니죠?”

“가지고 있으면 이상할까요?”

“이번엔 제가 신고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조 비서님은 너무 깐깐하셔.”


무슨 대화인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안에 꽃순이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중요하지 않았다.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만으로 머리는 용량을 초과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그녀의 이야기에 관심을 둘 만큼 마음은 여유롭지 못했다.

나는 전화가 1분 간격으로 울리고 액정에 무수한 톡이 쏟아져도 핸드폰을 손에 쥔 체 하염없이 서 있었다.

모든 걸 잊어야 하는 절망감에 모든 것이 덧없어졌다.

그 와중에도 ‘요양병원을 알아봐야 하나?’, ‘엄마가 돌봐 주겠지!’ 하는 한심한 생각만 하게 되고 ‘내일은 이 고민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할까?’ 벌어지지도 않은 사건에도 상실감을 느껴야 했다.

멍한 시선이 주차하는 자동차를 쫓다, 어느 순간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멈췄던 시선은 물체의 움직임에 따라 동선을 쫓았다.


‘꽃순이?’


그녀는 말없이 다가오더니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품에 파고들어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덤덤하게 유지했던 얼굴이 울컥 솟는 슬픔에 애처롭게 구겨졌다.

그녀가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자 나도 그녀 따라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얼마나 부둥켜안고 울었는지 모른다.

참고 참았던 감정은 온기가 닿자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녀의 품이 이토록 따뜻했는지 그리고 깊었는지 오늘에 서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내 병명을 듣고 걱정돼 와봤을 것이다. 그 마음 씀씀이가 정말 고마워,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그녀의 눈만 어루만져 주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우리 둘을 훑고 지나가도 주차 안내 요원이 눈을 흘겨도 우리는 그렇게 서로만 바라보았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내려놓은 미래가 그녀로 하여금 다시 밝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시무룩해졌다.

이 병은 위로만으로 이겨 낼 수 없는 병임을 알기에.

잠시 찾은 광명을 눈을 감아 꺼버렸다.

가족들을 얼마나 괴롭게 만들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만들지, 겪지 않았지만 잘 알아서.

고개를 돌려 입술을 물었다.

엄마의 얼굴은 더 주름져질 것이고 퇴임을 앞두신 아버지는 다른 일터로 내몰릴 것이다.

두 형제의 처신까지는 알 수 없으나 매정하게 모른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집안의 짐이 되어 버렸고 내 존재로 하여금 가족의 웃는 얼굴은 지워질 것이다.

그걸 알기에 섣불리 이겨내자는 그녀의 손을 쉽게 잡을 수 없었다.

사라져야 한다. 아니 없어져야 한다.

어쩌면 오늘의 맹세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온전할 때 없어져 줘야 한다.

이 결정이 불효가 될지언정 고통스러울 미래보다는 나으니 서로를 위해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 전에 확인은 하고 싶었다.

이렇게 지우기엔 너무도 아까워 행여나 맹세가 지워져 퇴색되더라도 확인만은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땐 받아들이고 모든 기억이 지워지기 전 스스로를 지울 것이다.


“괜찮아. 다 괜찮아. 넌 잘 못 한 게 없어.”


그녀의 위로가 되레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누구도 잘못을 저질러 병을 얻지 않기에 의미는 알지만 작은 생채기에도 쓰라려 힘겨웠다. 하지만 표현을 잘 못 하는 그녀임을 알기에 애써 미소 지어 대답을 대신했다.


“잘 이겨 낼 거야. 너라면 분명히 잘 이겨 낼 거야. 그러니 너무 신경쓰지마!”

“나는 다 잊게 될 거야. 그래도 괜찮을까?”

“그래 다 잊어. 잊어도 돼! 까짓 것, 뭐 대수라고 잊고 그냥 털어 버려.”

“말이라도 고맙다. 엄마에게는 말 하지 마! 걱정하시니까.”

“뭐 하러 그런 걸 엄마한테 말해. 우리 둘만 기억하고 잊어버리자.”

“너도 잊어버리면 어쩌지? 엄마, 아빠 그리고 우리 가족들···. 다 잊으면 나 어떡해!”

“나는 잊어도 되는데, 가족까지 잊을 필요는 없잖아.”

“원하지 않아도 이 병은 날 그렇게 만들 거야.”

“병?”

“응, 흑형에게 들었지 나 치매야!”

“너?”

“응!”

‘퍽!’


너를 잊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서운했을까? 따뜻한 위로를 건 내주던 그녀는 정강이를 차고 눈을 흘기고 매정하게 돌아섰다.

서운하지 않았다. 충분히 위로 받았고 이 또한 잊혀 질 걸 알기에 그저 고마운 그녀의 뒷모습만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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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42화. 그의 이야기. 23.06.11 21 0 12쪽
42 41화. 그녀의 이야기. 23.06.10 19 0 13쪽
41 40화. 그의 이야기. +2 23.06.09 18 0 12쪽
40 39화. 그녀의 이야기. 23.06.08 16 0 11쪽
39 38화. 그의 이야기. 23.06.07 15 0 14쪽
38 37화. 그녀의 이야기. +2 23.06.06 25 1 15쪽
37 36화. 그의 이야기. 23.06.05 16 0 14쪽
36 35화. 그녀의 이야기. 23.06.04 17 0 14쪽
35 34화. 그의 이야기. 23.06.03 17 0 13쪽
34 33화. 그녀의 이야기. 23.06.02 16 0 14쪽
33 32화. 그의 이야기. 23.06.01 17 0 12쪽
32 31화. 그녀의 이야기. 23.05.31 16 0 13쪽
31 30화. 그의 이야기. 23.05.30 19 0 14쪽
30 29화. 그녀의 이야기. 23.05.29 20 0 14쪽
29 28화. 그의 이야기. 23.05.28 16 0 13쪽
28 27화. 그녀의 이야기. 23.05.27 16 0 12쪽
27 26화. 그의 이야기. 23.05.26 18 0 13쪽
26 25화. 그녀의 이야기. 23.05.25 17 0 12쪽
25 24화. 그의 이야기. 23.05.24 20 0 12쪽
24 23화. 그녀의 이야기. 23.05.23 20 0 14쪽
23 22화. 그의 이야기. 23.05.22 23 0 12쪽
22 21화. 그녀의 이야기. +2 23.05.21 24 0 13쪽
21 20화. 그의 이야기. 23.05.20 23 0 13쪽
20 19화. 그녀의 이야기. 23.05.19 25 0 12쪽
» 18화. 그의 이야기. 23.05.18 22 0 12쪽
18 17화. 그녀의 이야기. 23.05.17 25 0 14쪽
17 16화. 그의 이야기. 23.05.16 24 0 15쪽
16 15화. 그녀의 이야기. 23.05.15 27 0 12쪽
15 14화. 그의 이야기. 23.05.15 28 0 12쪽
14 13화. 그녀의 이야기. 23.05.14 30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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