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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쿨러 님의 서재입니다.

우린 몸이 바뀐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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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쿨러
작품등록일 :
2023.05.10 12:44
최근연재일 :
2023.07.11 18:35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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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글자수 :
421,635

작성
23.07.0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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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62화. 그의 이야기.

DUMMY

62화. 그의 이야기.



푸른 빛이 번쩍이더니, 세상이 온통 환해졌다. 그리고 잿빛으로 점철되더니 무수한 화면들이 펼쳐졌다.

시간 순서에 따라 배열된 영상들.

그건 해산의 기억들이었다.

연구소 재건을 위해 찾아온 류홍렬 소장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은하에게 적의를 품은 이유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기억들.

그건 모두 은하와 관련된 기억들이다.

그 모든 기억이 내게 여과 없이 흡수되었다. 하지만 전과 같은 고통도 혼란도 없었다.

숨쉬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기억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은하의 기억은 뒤죽박죽 꼬여 있었는데, 오늘 에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시계에 박힌 구슬조각.

그녀가 기억을 잃은 것도, 전이된 기억이 혼란스러웠던 것도, 다 그것때문이란 사실을.

이제와 그게 무엇이 중요하랴.

지금 중요한 건 앞으로 있을 일들. 하지만 혼자선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입술이 짓이겨진다.

그녀의 짐을 혼자 떠안겠다한 다짐이 얼마나 큰 만용이었는지 알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 날 한심해하며 몸을 일으킨 해산이 옅은 미소를 띄운다. 하지만 그 까닭을 알기에 마냥 적의를 보낼 순 없었다.


“구슬조각 중 하나는 역시 명호씨가 가지고 계셨군요.”

“이미 알고 있었잖습니까!”

“이런, 제가 괜한 말을. 제 기억을 복사해 간 분께 큰 실례를 했네요.”

“왜 피하지 않은 겁니까?”

“명호씨도 참. 봤으니 알 거 아닙니까!”


물론 알고 있다.

날 끌어들인 이유도 알면서 피하지 않은 이유도.

하지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궁금하면서 숨기려 했던 한가지 사실을 알아 내야 해서다.


“이정연씨, 우리 작은 아버지가 있는 곳이 어딥니까?”

“보고 받고 시계로 기억을 지울까 했는데, 혹시 모르잖아. 저 물건은 지운 기억까지 끄집어 낼지.”

“서로 아는 내용은 생략하죠. 오래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리 말씀하시니 섭섭하네요. 별 조건 없이 기억도 보여 드렸는데. 당장 그 기억을 이용하면 떼 돈도 벌 수 있을 텐데, 너무 각을 세우는 거 아닙니까?”


이 또한 알고 있다.

눈에 보이는 수작에 당해준 이유도. 기억을 공유해 과거를 보여준 저의도.

제 치부를 스스로 까발린 이유가 내게 큰 걸 바래 서가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화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바라볼수록 더욱 거세게 들끓는다.

그건 아마도 짐작만 했던 가정이 사실이었음을 알게되서 일테다.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마음에도 없는 연애인과 사귀어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것도 모자라 거짓 소문을 퍼트려 그녀를 악녀로 둔갑시켰다.

그는 철저하게 그녀를 유린하고 마음을 짓 밟았다.

이것뿐이라면 치졸한 복수라 여기고 인상한번 쓰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범죄까지 자행했다.

친구의 아픔을 이용해 그녀를 곤란하게 만든 건 예삿일이고 심란함을 이기지 못해 만취한 그녀의 목숨까지 위협했다.

시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으며, 방해되는 인물은 기억을 지워 장기말로 이용했다.

그는 이 모든 악행의 배후,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목구멍을 넘나드는 욕설이 입밖으로 뱉어지지 않는다.

치욕적이게도 꾸역꾸역 삼켜진다.

그는 기억을 통해 제안했고 나는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서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자살 소동은 겁만 주려 했던거 뿐이니까.”

“압니다. 되려 당해 분통 터져했다는 것도.”

“민망하네요. 서로 다 아니까. 탐색은 그만 두죠! 그래서 제안을 받아 주겠다는 겁니까?”


말도 꺼내지 않았으면서 대뜸 수락 여부를 묻는 그가 어이없었다.

생략한 이유는 알테고 빨리 답하라며 생각이 많은 날 보챘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어두워진 낮빛을 더 보고파 대답을 미루고 미뤘다.


“거절로 받아 들이면 되겠습니까?”


기다림에 지친 최후의 통첩, 이젠 미룰 수 없다.

나도 여유가 없는건 매한가지 안타깝지만,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은하의 잃은 기억을 찾아 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 못마땅하지만 듣고 싶은 말을 들려줘야 했다.


“그러게 쓸데없는 모략은 왜 꾸민겁니까!”

“제 입으로 들어야 속이 후련하시다면, 들려 드리죠. 하지만 그전에 대답 먼저 듣고요.”

“좋습니다. 수락하죠. 그녀에게 온전한 기억을 찾아 주려면 이게 최선일 테니까요.”


그의 제안은 시계를 제자리에 돌려 놓는 것.

자신이 뒤에서 분탕질했다는 사실을 덮으려. 나를 이용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것이다.

최근 배임 횡령 혐의를 간신히 벗은 그에겐 시계는 독사과와 같았다.

탐스럽지만 먹으면 죽을 수 있는 이런 와중에 정치에 개입하다 뒷덜미를 잡혔으니 아무리 제벌 2세라도 후달렸을 것이다.

시계는 아깝지만, 살고 봐야 했기에.

노발대발할 제 아버지를 생각해 나중을 기약한 것이다.


“제가 고맙다고 해야하나요?”

“고마워할 건 없죠. 각자 이득을 취했으니.”

“저 역시, 사라질 뻔한 시계를 구한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덤으로 시계가 박장화 씨의 물건임을 알고 황망해한 사장님 얼굴까지 봤으니 손해는 아니죠.”

“제법 사람 긁는 제주가 있으시네요. 아무튼 약속은 지키실 거라 믿습니다.”

“빠져나갈 시나리오는 다 짜 놓으셨으면서 걱정은.”

“하하하. 기억을 남이 엿본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군요.”


대수롭지 않다며 웃어 넘긴 해산. 하지만 이 부분은 기억을 보았음에도 이해되지 않아 인상이 써졌다.

많은 선택지 중 왜 가장 위험한 수를 고른 것 인지.

당최 그를 종잡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시계의 존재를 지웠어도 될 일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제 동생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제 기억을 전이하는 방법을 택했다.

면죄부라도 바랬던 것일까? 이런다고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쯤은 잘 알 텐데.

그 때문에 섣불리 말하기가 꺼려졌다.

수많은 감정 중 어느게 본심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 구슬조각을 버리기 아까워 택한 차선택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돈이 썩어 나는 놈이니 방법이야 많을 거라고, 은하를 향한 미안한 감정은 구겨 버리고 가장 타당한 이유라 결론 지었다.

놈은 내 생각을 공고히 해주려 또 다른 제안을 건냈다. 하지만 예상했기에 별로 놀랍진 않았다.


“10억. 너무 적나요?”

“30억까진 생각하고 계셨잖습니까.”

“이러면 흥정할 맛이 안 나는데, 좋습니다. 30억 덤으로 이정연씨의 행방까지 알려 드리죠.”


작은아버지가 남긴 구슬조각.

그걸 넘기는 대가로 그가 제시한 보상이다. 하지만 수락하지 않았다.

주인이 아니라 그런 것도, 정의감 때문도 아니었다.

일종의 보험.

유품은 적어도 모든 사건이 일단락될 때까지는 쥐고 있어야 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으니 얼키고 설킨 실타래의 끝이 보일때까지는 간직하고 있어야했다.

똑 같은 제안을 도산에도 할 테지만, 녀석을 위해 그리고 은하를 위해 서라도 숨기고 지키리라 마음먹었다.


“팔 생각 없습니다.”

“설마 거절하실 지는 몰랐네요.”

“팔게 된다면 사장님께 팔도록 하죠. 누구도 이만한 가격은 쳐주지 않을 테니.”

“전 지금 당장 필요합니다. 그러니, 그냥 파시죠. 마음만 먹으면 빼앗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럴 생각이었다면, 제안하지도 않으셨겠죠. 아니, 애초에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 빼았았을지도.”

“생각은 상황에 따라 바뀌기 마련입니다. 제 마음이 바뀌지 않았으리라 어떻게 확신하시죠?”

“한번 꺾은 신념, 두 번은 어렵지 않겠죠. 하지만 당신이 화난 이유. 그 때문이라도 내게 그러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말은 당당하게 했지만 쫄려서 여차하면 삼키려 구슬조각을 꽉 쥐었다.

다행히 그는 제 치부를 건드렸음에도 별로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절 이해하한다 여긴 건지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기브앤 테이크. 제 신념이죠. 거창한 건 아니지만, 금수저라면 반드시 가져야할 덕목이라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갖은것도 많으면서 조건 없이 빼앗는 건 너무 치졸하잖아요.”

“갖은 자의 선택적 기브앤 테이크를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애먼 곳에 분풀이하는 것 또한 너무 치졸했다 생각하지 않나요? 아무리 서의원님께 화가 났다지만, 은하는 죄가 없습니다.”

“이거 원, 패를 보여주고 포커 치는 기분이군요. 아무튼 그래서 입니다. 명호씨께 기억을 공유해 드린 이유는. 제 뜻을 곡해하진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마음데로 생각하시고 아무튼,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내게 준 기억이 제 진심이라니. 진정한 개소리에 콧바람이 절로 새어 나온다.

차라리 당사자에게 주던지, 내게 뭘 어쩌라는 건지.

더운 바람이 인중을 쓸며 흩어졌다.

그가 왜 독하게 굴었는지 안다.

이해 된다는게 아니라 그냥 안다는 것이다. 이 차이를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내게 이러는 연유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공감을 바랬던 걸까? 나도 제 입장이라면 그랬을거라 여겼던 것일까?

생각이 어찌되었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현재를 이해하려 눈을 감고 그날의 분노에 몸을 맡겨 보았다.


‘파라다이스 그룹 가야자동차 인수전에 고배를 마시다.’


재 작년 여름, 경제 뉴스 일면을 장식한 기사 제목이다.

해산은 파라다이스그룹의 총역량을 동원해 인수전에 뛰어들었고 무난히 인수하리란 예상을 뒤엎고 실패를 맛봤다.

생각치도 못한 돌발 변수.

순항 중이던 인수전은 서의원이란 태풍을 만나 좌초되고 말았다.

당시 2선 의원이었던 서의원은 재벌의 도덕적 해이를 문제삼아 파라다이스그룹의 인수전을 방해했다.

처음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었는데, 작은 소요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더니 국민의 공분을 사며 정계에까지 영향을 뻗혔다. 그리고 카운터 펀치.

인수 전에 털어 내려 했던 가야자동차의 치부가 도리어 파라다이스 그룹의 오명이 되어 버렸다.

가야자동차 급 발진 결함.

서의원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였다.

그는 급 발진 결함이 파라다이스전자에서 제공한 전자제어시스템에 있음을 공표해 합법적 인수를 불법적 탈취로 변질시켰다. 그리고 결과는 앞서 말했듯 경쟁 업체였던 태산자동차그룹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서의원을 향한 분노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의 분노를 공감하려는게 아니다.

내가 주목한 건 서의원의 마지막 수.

그 계략이 사별한 아내와 관련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였다.

은하가 정치하는 제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한 때는.

어머니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실망이 둘 사이의 깊은 골로 자리잡은 것이다.

관련자들을 법원에 세우고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용만 하고 어영부영 덥어버렸으니 화가 날 수 밖에.

입을 맞춘듯, 사건은 가야란 이름과 함께 사람들 기억속에 지워져버렸다.

사실 법을 잘 모르는 나로선 어떤게 최선이었는지 모른다.

긴 법적 공방 끝, 관련자를 다 처벌할 수 있을지 의문이고 법을 잘 아는 의원님의 판단이니 최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은하가 바랬던 결과가 아닌거란 것쯤은 알 수 있다.

정치적 도구로 전락해 버린 어머니의 죽음.

은하의 실망은 이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빌딩 앞 벤치에 누어 하늘을 올려 보았다.

높게 솟은 마천루, 하늘에 닿을 듯 웅장한 건물이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나를 덥쳐 왔다.

나는 피할 길 없어 대리석 벤치에 몸을 웅크려 온기를 보존했다.

햇볕을 쐬지 못한 대리석 바닥을 타고 한기가 침범해 온다. 하지만 심장이 더 차가워진 탓에 별다른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지금쯤 은하도 이 사실을 알게 됐을까?

입김을 타고 안쓰러운 마음이 퍼져갔다.

은하가 보고싶다. 고생했다고 대견하다고 어루만져 주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지막 한가지 사실을 더 찾아야 했다.

그녀의 기억을 봉인한 사람이 짐작한 사람이 맞는지 확인부터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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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몸이 바뀐 게 아니었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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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72화. 그의 이야기. 23.07.11 13 0 11쪽
72 71화. 그녀의 이야기. 23.07.10 11 0 12쪽
71 70화. 그의 이야기. 23.07.09 10 0 14쪽
70 69화. 그녀의 이야기. 23.07.08 11 0 13쪽
69 68화. 그의 이야기. 23.07.07 18 0 12쪽
68 67화. 그녀의 이야기. 23.07.06 10 0 12쪽
67 66화. 그의 이야기. 23.07.05 14 0 11쪽
66 65화. 그녀의 이야기. 23.07.04 13 0 12쪽
65 64화. 그의 이야기. 23.07.03 14 0 12쪽
64 63화. 그녀의 이야기. 23.07.02 18 0 13쪽
» 62화. 그의 이야기. 23.07.01 15 0 12쪽
62 61화. 그녀의 이야기. 23.06.30 16 0 14쪽
61 60화. 그의 이야기. 23.06.29 12 0 12쪽
60 59화. 그녀의 이야기. 23.06.28 18 0 14쪽
59 58화. 그의 이야기. 23.06.27 17 0 13쪽
58 57화. 그녀의 이야기. 23.06.26 16 0 14쪽
57 56화. 그의 이야기. 23.06.25 16 0 14쪽
56 55화. 그녀의 이야기. 23.06.24 17 0 13쪽
55 54화. 그의 이야기. 23.06.23 16 0 13쪽
54 53화. 그녀의 이야기. 23.06.22 17 0 14쪽
53 52화. 그의 이야기. 23.06.21 14 0 14쪽
52 51화. 그녀의 이야기. 23.06.20 14 0 15쪽
51 50화. 그의 이야기. 23.06.19 18 0 11쪽
50 49화. 그녀의 이야기. 23.06.18 22 0 13쪽
49 48화. 그의 이야기. 23.06.17 16 0 12쪽
48 47화. 그녀의 이야기. 23.06.16 20 0 14쪽
47 46화. 그의 이야기. 23.06.15 19 0 15쪽
46 45화. 그녀의 이야기. 23.06.14 18 0 13쪽
45 44화. 그의 이야기. 23.06.13 19 0 13쪽
44 43화. 그녀의 이야기. 23.06.12 20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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