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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쿨러 님의 서재입니다.

우린 몸이 바뀐 게 아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드라마

스프링쿨러
작품등록일 :
2023.05.10 12:44
최근연재일 :
2023.07.11 18:35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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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3
추천수 :
28
글자수 :
421,635

작성
23.06.19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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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50화. 그의 이야기.

DUMMY

50화. 그의 이야기.



몇 점 건드리지도 않은 초밥이 정갈하게 놓여있다.

12피스짜리 점심 특선.

그 중 내가 먹은 건 흰살 생선이 얹혀진 초밥 두 점이 다였다.

불편한 자리에 왕성했던 식욕은 입에 가시가 돋은 듯 껄끄러웠고 어색한 공기에 침샘은 말라 텁텁하기만 하다.

우린 다시 만나서는 안 될 사이인데, 멋 모르고 씌워 버린 친한 오빠 동생이란 프레임은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게 만들었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늦었지만 무시하고 싸늘하게 잘라야 했다. 하지만 어리숙하고 여린 심성은 거절의 뜻조차 마음 가는 데로 표현하지 못했다.

덕분에 무거운 마음에 눌린 식욕은 무저갱 깊숙이 꺼져버렸다.

상큼한 락교를 먹어 보아도, 차로 입안을 씻어 보아도 입맛은 도통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오빠, 초밥 별로야?”

“아니, 어제 먹은 치킨이 엉쳤나. 영 입맛이 없네.”

“그래도 좀 먹어 둬! 오후에 바쁠텐데.”


걱정 섞인 어투로 초밥을 권한 샤넬이 상큼한 미소를 짓는다.

저 미소에 반했었는데, 멀어진 사이만큼 사뭇 다르게 와 닿았다.

미소 한 모금에 뜀박질하던 심장은 차갑게 식어 말뜻 그대로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걱정스러운 권유가 투정 섞인 강요로 감미롭던 목소리는 달팽이관을 지나 꼬아져 비틀렸다.

먹고 힘내라는 말인데, 가식적인 미소에 숨겨졌던 영악한 심성을 알게 된 탓에 별 말 아닌데도 의심부터 하게 됐다.

텅 비어 버린 가슴에 다른 심장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뒤틀린 해석은 분노로 불쑥 튀어나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은하를 떠올려 그녀 따라 웃고는 미소국을 홀짝이며 쓰린 속을 달랬다.


“저기 오빠.”

“응?”

“아니야. 우선 밥 먹고. 이따가 이야기해.”


무슨 말을 하고 파서 말을 아끼는 걸까? 하지만 그녀의 의도를 짐작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끝난 남녀사이에 남은 찌꺼기는 뻔해 앙 다물어진 입은 대답도 건네지 못했다.

안 그래도 잠을 설쳐 컨디션이 말이 아닌데, 물거품이 된 짱박혀 쪽잠이나 자려 했던 계획에 입술이 잘근 씹힌다.

퀭한 눈으로 튀겨진 생선을 보고 있자니 말라 비틀어진 생선의 눈이 내 눈 같아 보였다.

어제의 악몽이 떠오른다.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버려져 갖은 멸시와 비난을 견뎌야 했던 꿈.

가위에 눌린 것 마냥 무섭고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답답한 꿈이었다.

깨면 악몽 속이었고 다시 깨면 또 꿈속이었다. 지금 이순간도 악몽의 일부일지 모른다는 의심이들 정도로.

꿈은 리얼했고 속옷까지 흠뻑 젖을 정도로 불쾌했다.

다신 꾸지 않고 싶은 꿈.

나는 꿈 내용이 떠오르자 고개를 휙휙 저어 털어 냈다.


“오빠, 안색이 안 좋아 보여.”

“괜찮아. 어제 잠을 못 설처서. 내 것도 좀 먹을래?”

“내가 돼지도 아니고. 아깝게 조금만 더 먹지는.”


자리는 가시방석. 마음은 여유롭지 못했다.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초주검이 된 몸은 식은땀마저 흘리며 안정을 찾으라 재촉했다.

테이블을 사이를 두고 음식 씹는 소리만 들려온다.

만나면 대화가 끊이지 않는 우리였는데, 어색하게 흐르는 침묵이 변해버린 사이를 알려 주었다.

바라만 보아도 웃음이 가시질 않았는데, 어색한 웃음도 메말라 건조한 탄식만 새어 나왔다.

적응 안되는 분위기에 그녀의 젓가락은 부서진 밥풀을 뒤적인다.

다른 손님들의 소음이 없었다면 반도 먹지 못하고 일어났을 정도로 그녀 또한 이 자리가 불편해 보였다.

나는 개선할 의지가 없었고 그녀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느새 우리 사이에는 거대한 설벽이 놓여 있었다.

본론이라도 먼저 꺼내 줬으면 좋으련만, 오물거리는 입은 말을 꺼내기 주저했다.

나도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그녀 따라 초밥을 뒤적이게 되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정적.

과연 우린 같이 밥을 먹고 있긴 한 걸까?

이럴거면 왜 보자 한 건지 답답함이 몰려왔다.

밥풀을 헤집던 젓가락이 멈춰 선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치자 그제야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미워하면서도 그토록 바랬던 한마디. 하지만 상황은 변했고 나는 과거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예전처럼 다시 지낼 순 없을까?”


시험에 나온 예상문제에 입술이 잘끈 씹혔다. 답은 알고 있지만 잘 떨어지지 않았다.

우린 끝났고 다신 돌아갈 수 없는데, 그 사실을 부정하는 회유에 하고 싶은 말은 입안에서 겉돌 며 뱉어지지 못했다.

화를 낼까? 아니면 다독일까?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조물거리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탄식도 함부로 뱉지 못해 꼬아지는 손길 따라 시선은 흐릿하게 고정됐다.

대답이 앞으로 우리의 관계를 결정 짓는 것 같아 무거운 마음에 고민은 길어졌다.

다신 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스치듯이라도 만났으면 했던 바램도 이뤄졌고, 복수 아닌 복수도 하게 됐으니.

내게 남은 여한은 아무것도 없었다.

죽도록 밉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립지도 않은. 남 보다 못한 우리 사이.

그냥 첫사랑으로 남아 줬으면 하는 바램인데.

그녀는 작은 소망마저 들어줄 수 없다며 할퀴고 흠집내 남은 연민도 지워버렸다. 하지만 상처 없이 매듭짓고 싶은 욕심은 정답을 교묘히 비틀어 3점짜리 답안을 내밀었다.


“은하에게 미안한 일 만들고 싶지 않아!”


돌려 말한 대답이 더 비수가 되었는지 그녀의 붉어진 눈가가 촉촉하게 젖는다.

적당히 상황을 모면하려 했던 순진한 대응에 치가 떨리고 숨이 꽉 막혔다.

고작 생각한 대답이 치졸하게 은하를 방패로 쓴 대답이라니.

스스로에게 순간 화가 들 끓는다.

그녀의 슬픔은 관심 밖, 실망스러운 처신에 거칠게 이마를 쓸어 올렸다.

헌데 그런 모습을 그녀는 오해한 모양이다.

그녀는 서글프게 바라보더니 언제 소극적이었냐며 작정하고 메달렸다.


“기회를 줘! 염치없는 거 알아 하지만,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아.”


충분한 대답이 될 줄 알았는데, 돌려 말한 몇 초전이 후회됐다.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인 줄 잘 알 텐데. 잘난 그녀가 이러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제 와서 미련이라도 남는 걸까? 남 주려니 아까웠던 걸까?

비전 없고 능력 없는 단점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이제와 집착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새로 만난 능력 좋은 놈 이랑 잘 만나면 될 것을 이제와 날 흔드는 심산을 당최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궁금하지 않았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도 싫고 답답한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너 답지 않다. 이런 이야기라면 그만 가 볼게.”

“내가 그 여자보다 못 한게 뭔데?”

“없어. 그러니 다른 사람 만나.”

“기회 정도는 줄 수 있잖아.”


기회를 달라는 말을 저리도 쉽게 할 수 있다니.

내가 받았던 고통을 단 1%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인다.

내겐 정말 악몽 같은 나날들이었는데, 그녀에겐 되돌릴 수 있는 잠깐의 실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유도 모른체 빛조차 없는 기다림이란 긴 터널을 걷고 또 걸었다.

하루가 일년 같고 한 걸음이 천리 같은.

버거웠던 기약 없는 기다림은 날 암흑 속으로 가둬 버렸다. 그리고 반쯤 왔을 때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터널을 나가는 방법도 모르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왔던 길을 되 돌아 가거나 남은 길을 걷는 것 밖엔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은 고통의 연속.

나는 순례자도 아닌데, 고행을 떠날 것을 강요받았다.

너에겐 참 쉬웠던 배신이 내겐 사무치는 원한이 됐다는 걸 너는 짐작도 하지 못하는구나.

그럼에도 오히려 묻고 덮었는데, 그런 날 기회조차 주지 않는 매정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꺾인 꽃을 다시 붙인다고 살아나진 않아. 계산은 내가 할게.”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그녀가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차가워진 심장은 평온하게 수평을 달린다.

어깨가 들썩여지고 주위 시선이 집중되는데도 티슈 하나 건넬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쓸데없는 배려가 여지가 되지 않기를.

시선을 피해 남보다 못한 사이임을 각인시켜 주었다.


“곧 마주칠 일도 없을거야. 조금만 참아.”


감정을 추스릴 때까지 기다리려다 그냥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사소한 매너가 감정의 찌꺼기가 될까 결제하고 식당을 나섰다.

아직 점심시간은 남았지만, 휴식을 취할 정도로 여유롭진 않았다. 게다가 마음이 싱숭생숭해 눈을 감아도 잠이 들 거 같지 않았다.

바람이라도 쐬야 할 것 같다.

찬 바람을 맞으면 실타래처럼 엮인 감정의 굴곡이 풀어질까? 목적지를 옥상으로 정했다.

에스컬레이터를 지나 직원통로를 향했다. 그런데 낯익은 얼굴이 투명한 창을 넘어 스치듯 보였다.

대충 고무줄로 질끈 묶은 머리에 남자가 입어도 될 법한 중성적인 옷차림.

은하는 우주와 에스컬레이터 맞은편 중식당에서 짬뽕을 흡입하고 있었다.


‘여기엔 무슨 일이지?’


너도 기억을 찾았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기둥 뒤에 숨어 눈만 빼꼼히 봐야 했다.

설마 날 기억 못 하는 건 아닌지. 두려움에 발길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녀의 옆자리에 내 옷이 담긴 종이 가방이 고이 놓여있다. 그리고 손목에는 내가 준 시계가 보란듯이 채워져 있다.

나는 희망적인 모습에 언제 걱정했냐며 움츠린 어깨를 활짝 폈다.

이제야 그녀의 얼굴이 바로 보인다. 그리고 입술을 축여 달달했던 순간을 되새김질한다.

황홀했던 기억. 이제 입술만 보면 키스하고 싶단 생각이 날 거 같다.

비겁하게 덮칠 때까지 숨죽여 놓고는 당당히 내꺼라며 손짓을 쫓고 표정을 읽었다.

대화소리는 하나 들리지 않는데 입이 벌어졌다 닫히면 내게 보내는 암호 마냥 해독하게 되었다.


[사랑해.]


내가 여기 있는지도 모를텐데 그런 말을 했을리가.

하지만 대뇌는 입모양을 조작해 내가 듣고 싶은 단어로 치환해 주었다.

겁은 많아 다가가진 못한체,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한심하게 엿보게 되었다.

해맑다. 즐거워 보인다.

어제와 사뭇 다르게 밝아 보였다.

내가 문제를 대신 떠 안아서일까? 생각 없는 모습 그대로 변함이 없이 헤픈 웃음을 보였다.

어제 꾸었던 악몽은 모두 그녀의 사건들이었다.

철저히 1인칭으로 묘사된 장면들.

그녀가 지우고파 지웠던 암담한 현실이 내게 꿈으로 전달된 것이다.

추측데로 구슬의 색이 바뀌었고 바램과 달리 기억은 내게 씌워졌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신 아프고 싶다.’


간절한 부탁.

구슬 조각은 그녀가 아닌 날 선택한 것이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입가는 호선을 그리며 반달을 만들었다.

지우고 싶었던 기억 굳이 알 필요 없다며, 나는 강탈한 기억에 명분을 부여했다.

늘 혼자 세상을 사납게 이겨내던 그녀가.

강한 척 포장해 자신을 숨겼던 그녀가.

온화한 성품을 숨기지 않기를, 약한 모습 보이는 걸 두려워하지 않기를.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던 나는 비로소 구원자가 되어 그녀를 늪에서 건질 준비를 한다.

앞으로 할 일은 그녀의 과거를 바로잡을 것.

그 시작은 다래를 설득하는 것 부터다.

나는 그녀를 눈에 더 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옥상으로 향하려 했던 발길을 1층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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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몸이 바뀐 게 아니었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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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72화. 그의 이야기. 23.07.11 14 0 11쪽
72 71화. 그녀의 이야기. 23.07.10 12 0 12쪽
71 70화. 그의 이야기. 23.07.09 10 0 14쪽
70 69화. 그녀의 이야기. 23.07.08 12 0 13쪽
69 68화. 그의 이야기. 23.07.07 20 0 12쪽
68 67화. 그녀의 이야기. 23.07.06 13 0 12쪽
67 66화. 그의 이야기. 23.07.05 15 0 11쪽
66 65화. 그녀의 이야기. 23.07.04 15 0 12쪽
65 64화. 그의 이야기. 23.07.03 15 0 12쪽
64 63화. 그녀의 이야기. 23.07.02 18 0 13쪽
63 62화. 그의 이야기. 23.07.01 16 0 12쪽
62 61화. 그녀의 이야기. 23.06.30 18 0 14쪽
61 60화. 그의 이야기. 23.06.29 13 0 12쪽
60 59화. 그녀의 이야기. 23.06.28 18 0 14쪽
59 58화. 그의 이야기. 23.06.27 17 0 13쪽
58 57화. 그녀의 이야기. 23.06.26 16 0 14쪽
57 56화. 그의 이야기. 23.06.25 16 0 14쪽
56 55화. 그녀의 이야기. 23.06.24 17 0 13쪽
55 54화. 그의 이야기. 23.06.23 17 0 13쪽
54 53화. 그녀의 이야기. 23.06.22 19 0 14쪽
53 52화. 그의 이야기. 23.06.21 15 0 14쪽
52 51화. 그녀의 이야기. 23.06.20 15 0 15쪽
» 50화. 그의 이야기. 23.06.19 19 0 11쪽
50 49화. 그녀의 이야기. 23.06.18 25 0 13쪽
49 48화. 그의 이야기. 23.06.17 17 0 12쪽
48 47화. 그녀의 이야기. 23.06.16 21 0 14쪽
47 46화. 그의 이야기. 23.06.15 21 0 15쪽
46 45화. 그녀의 이야기. 23.06.14 18 0 13쪽
45 44화. 그의 이야기. 23.06.13 19 0 13쪽
44 43화. 그녀의 이야기. 23.06.12 22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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