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4. 설정에 먹히지 마라 (3)
뭐야, 경비대장 월급으로 이런 집에서 살아도 되는 거야?
“아버지······ 혹시 우리 집 부잡니까?”
아니, 왜 이런 중요한 사실이 설정집에 없었던 거지?
게다가 분명 내가 본 설정집에는 ‘찢어지게 가난함’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솔제니친이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소리냐? 부자일 리가 없지 않으냐?”
그 말과 동시에, 대저택의 정원 쪽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늦었군요, 솔제니친.”
백금발을 어깨까지 곱게 땋은 소녀와, 시중을 드는 하녀 하나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특히 열대여섯 살 쯤 되어 보이는 백금발의 소녀는 한눈에 봐도 고위 귀족 같았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냥 걸어오는 것뿐인데도 몸에서 흘러넘치는 기품이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정중히 대하는 걸 보면―
[일부 별들이 소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를 원합니다!]
젠장, 알았다고.
나는 부러 딴청을 피우며 소녀 쪽을 흘끔거렸다.
······와.
멀리서 볼 때는 그냥 작은 인형 같다 싶은 정도였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장난 아니다.
인형 같은 게 아니라, 이건 진짜 인형이라고 해도 믿겠다······ 이 정도면 됐냐?
[소수의 별들이 만족하며 100 더스트를 지불하였습니다.]
돈 벌기 쉽구만.
자, 그럼 이 미소녀의 정체는 뭔지 한 번 살펴볼까?
[인물 정보]
인물 : 에리스 폰 루테인
나이 : 17세
역할 : 조연 (루테인 영애)
종합 전투력 : ????? (이야기 진행률이 충분하지 않아 열람할 수 없습니다).
잠재력 : 상
설명 : 루테인 후작 가문의 하나 뿐인 영애. 현재 원인을 알 수 없는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당신의 상상력으로는 해당 인물의 과거를 모두 열람할 수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건 뭐 그냥 미소녀도 아니고 무려 병약한 미소녀다. 다분히 누군가의 히로인 취향인 것 같은데······ 설마 내 무의식은 아니겠지.
그런데 뭔가 수상하다.
왜 전투력이 안 보이지? 이야기 진행률이 충분하지 않아서 못 본다고?
“아들이 돌아온 모양이죠?”
“예. 송구스럽습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소녀, 에리스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름이 뭐죠?”
“란스 필그림입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말을 빼앗았다. 에리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난 이 애한테 물었어요.”
뭐야, 이 싸가지는.
“예. 제가 란스 필그림입니다.”
“필그림이라. 이상한 이름이네. 솔제니친 라스트 네임이 원래 그거였나요?”
“그렇습니다, 아가씨.”
“흐응.”
그 짧은 사이 나를 스캐닝한 모양인지, 에리스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머물렀다.
“그런 몸으로 날 지킬 수 있겠어요?”
갑자기 이건 또 무슨 급전개인가 싶었다. 아버지는 에리스를 향해 가볍게 읍을 하고는,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훈련시키겠습니다.”
*
잠시 후, 나는 루테인 대저택 안의 ‘필그림 거주지’에 들어와 있었다.
젠장, 여기서도 셋방살이냐 싶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거주 조건이 훨씬 좋았다.
4LDK급의 넓은 주거 공간에, 정통 판타지가 아니라 세계관 자체가 퓨전이다 보니 수세식 화장실과 샤워실도 구비되어 있다.
차라리 여기에 말뚝 박고 사는 게 더 마음 편할지도 모르겠는데.
월세도 안 들고 말이지.
“아버지.”
“왜 그러느냐?”
“알고 보니 우리 필그림 가문이 대대손손 루테인 가문의 호위기사였다든가, 뭐 그딴 설정은 아니겠죠?”
“······무슨 소릴 하는 게냐?”
“아니면 다행이고요.”
분명 설정집을 읽고 왔는데도 내가 모르는 설정들이 너무 많다.
인물 사이의 관계나 사건들은 [인물 정보]에 모두 표시되지 않는데다, 내 무의식이 언제 어떻게 이야기를 바꿀지 모른다. 이건 뭐 나 자신과의 대결도 아니고······.
“우리는 고용된 입장이 아니다, 란스.”
“그럼요?”
“미안하지만 자세한 건 말해 줄 수 없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아르메니아 최강의 경비병이 되라는 말이, 저 영애를 지키라는 말이셨습니까?”
“그래. 예전에도 말해줬는데 똑같은 걸 또 물어보는구나. 혹시 머릴 다쳤느냐?”
젠장, 이야기가 뭐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모종의 이유 때문에 이곳의 사설 경비원으로 겸업 중이고, 내가 그 일을 도와야 한다는 것 같은데.
“아버지. 뭐 하나 물어 봐도 됩니까?”
“뭐냐.”
“아버지 정도면 대륙 전체에서 어느 정도로 강한 겁니까?”
그 질문에 솔제니친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하긴, 지금까지의 란스였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안 물어볼 사실일 테니 놀랄 법도 하지.
“란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머릴 좀 다쳐서 똑똑해졌다고 해두죠. 아무튼 그래서, 아버지가 평범한 경비대장이 아니란 건 알고 있습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 것뿐이다.
아무리 이게 ‘악몽’ 난이도라고 해도 고작 경비대장이 ‘대륙을 피로 물들인’ 이라는 수사를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결국 한참이나 입술을 우물거리던 아버지가 진실을 토해냈다.
“······대륙 10강은 무리겠지만, 적어도 50강안에는 들어갈 거다. 확신은 못하겠다만.”
대륙 50강.
대륙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일렬로 세우면 그 중에 우리 아버지가 반드시 있다는 이야기다.
내가 알기로 이 세계관에서 소드마스터 숫자가 50명 정도인데, 이쯤 되면 소설 제목은 『역대급 소드마스터 경비병』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의문이 든다.
“역시 그렇군요. 그럼 다시 물어 보죠. ‘그만큼 강한 아버지께서’ 왜 한낱 후작의 사설 경비병으로 계신 거죠?”
대륙 50강 쯤 되는 강자라면 귀족의 수하로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 하나의 군세나 다름없으니까.
소드마스터를 영입하기 위해 모든 국가들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아버지 정도 강자라면 어느 약소국의 왕정 기사단장이나 고위 귀족으로 스카우트 되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젊은 시절 루테인 후작에게 빚을 졌다. 그래서 그 빚을 갚기 위해, 작은 약속을 한 것뿐이다.”
“무슨 약속이요?”
“루테인 영애가 열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 그녀를 지켜주기로 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확실한 건 모른다. 너에게 영애를 지키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어차피 이건 나의 빚이니까. 다만 루테인 후작가에 머무는 동안, 영애의 곁에 있어다오.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내게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 할 수 있겠느냐?”
아버지 된 사람이 그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못 하겠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마지 못해 대답했다.
“알겠어요.”
*
언젠가 소설을 쓰다가 그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일주일이 흘러갔다.
막상 소설 속에 들어와 보니, 그게 얼마나 놀라운 문장인지 알겠다.
시발, ‘거짓말처럼’ 흘러가는 일주일 같은 건 없다.
독자들이 ‘거짓말처럼’ 한 문장을 읽는 와중에도 주인공들은 죽어라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나처럼.
“하나! 하나! 하나!”
하루에 일만 번씩 가로베기와 세로베기를 반복하는 동안, 내 육신은 녹진해져 가고 있었다.
막상 주인공이 되고 보니 왜 쉽게 힘을 얻은 먼치킨 주인공이 그렇게 많은지 알 것 같다.
사실 생각보다 많은 작가들이 소설 속에 들어갔었고, 나처럼 수련하는 게 싫어서 주인공에게 기연을 마구 몰아주었던 게 아닐까?
“수고했다. 자세가 조금 나아졌구나.”
“감사합니다.”
아버지(이젠 ‘아버지’라 부르는 게 제법 익숙해졌다)는 매일 일과가 끝난 뒤 내 검술을 봐주었다.
내 성취에는 살짝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뭐······ 그게 당신 자식인 걸 어쩌겠는가.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 내 상태는 좀 심각했다.
[당신의 잠재력으로는 해당 검술 스킬을 습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주일 내내 검을 휘둘러보아도, 도통 스킬을 배울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란스 필그림]
잠재력 : 최하
모두 망할 ‘잠재력’ 때문이었다. 보아하니 잠재력이라는 것은 인물이 생성될 때 고착화 되는 것이라 따로 바꿀 수 있는 방법도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믿을 것은 ‘상상력’ 스킬뿐인데, 아직 이 스킬로 만들 수 있는 스킬에는 한계가 있었다.
[해당 스킬을 생성하기에는 당신의 ‘상상력’이 부족합니다.]
바깥에 나가서 검술 교본이라도 좀 사 읽어 봐야하나?
마침 테라스에서 책을 읽던 루테인 영애, 에리스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약골.’
소리로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에리스의 입모양으로 추측해본 거다. 저 계집애는 어째 마주칠 때마다 나를 노려보는데, 아무래도 내 존재가 영 못마땅한 모양이다.
“뭐, 불만이라도 있으십니까?”
“아주 오만불손한 말투로군요. 솔제니친이 그렇게 가르치던가요?”
요 어린 계집애가 벌써부터 패드립을 시전한다.
“오만불손하기로는 영애님 눈빛이 더 오만불손합니다만.”
“독심술사라도 되는 모양이죠? 눈빛만 보고도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니.”
본래라면 한낱 사설 경비원의 아들 따위가 후작 영애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세계 최강 경비병의 아들이고, 실제로 알아본 결과 딱히 후작이 우리 아버지를 누를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그러니 내가 이 싸가지한테 막 나가는 것은 지극히 개연성에 알맞은 일이라는 얘기다.
[소수의 별들이 당신의 억지스런 논리에 의문을 표합니다.]
[50 더스트가 차감됩니다.]
젠장, 역시 안 속는 건가.
······.
응? 그런데 잠깐.
저 계집애가 지금 뭘 읽고 있는 거지?
“······무슨 짓인가요!”
갑자기 책을 빼앗긴 에리스가 소리를 질렀다.
근처의 하인들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한텐 그런 시선들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이 책, 어디서 난 겁니까?”
내 다급한 목소리에, 에리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 책을 알고 있어요?”
“······알죠.”
에리스의 눈이 의심스럽게 변했다.
“거짓말 하지 말아요. 당신이 그런 품격 있는 책을 알 리가 없잖아요?”
계집애가 안 믿는 눈치라, 나는 간단히 책의 내용을 언급해주었다.
“어, 어떻게······ 대륙 중부에서도 단 한 권 밖에 없는 책인데······.”
에리스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고 있었다.
[소수의 별들이 로맨스의 등장에 눈빛을 반짝입니다!]
웃기지 마라.
열여섯 살 짜리랑 로맨스는 무슨 로맨스냐?
그건 그렇고 정말 맙소사다.
역시 이 세계는 알 수가 없어.
“란스, 말해줘요. 어떻게 그 책에 관해 알고 있는 거죠?”
“책의 작가를 알고 있거든요.”
“······정말인가요?”
알다마다.
세상에서 나보다 이 책의 작가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오크 철학자』
왜냐하면 이 책은,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썼던 판타지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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