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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묘익천(熊猫溺泉)

백수건달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완결

억우
작품등록일 :
2014.02.22 16:59
최근연재일 :
2015.05.2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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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0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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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八.

DUMMY

* * *


산동성 청도(靑島).

한 무제가 불기산 교문궁(交門宮)에서 제천 의식을 치룬 이래 당송 시대를 거치며 갖은 도문(道門)과 불사(佛舍)로 가득한 청정 수양의 고성(古城). 더불어 산동 제일의 어항(漁港)으로 손꼽히며 산동 인근에 공급되는 해산물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는 이 성시는, 근래에 들어 그 분위기가 대단히 가라앉아 있었다.

청도가 이러한 모습이 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었다.

불과 오년.

숱한 도문과 불사, 그리고 해산물로 유명하던 성시가 강호에 소문난 사파 무리의 근거지로 정체성을 비틀린 시간이다.

그 시작은 한 팔 척 거한이 십여 명의 불한당들을 이끌고 청도 인근의 작은 어촌에서 상경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채 일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만에 청도 뒷골목을 접수하였고 상경 삼년 째에 방파를 개파하였으며 마침내 오년 째가 되는 지금, 당당히 산동의 패권을 주장하며 전통의 명문 산동악가와 그 자웅을 결할 만큼 성장했다.

불과 오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어촌 불한당 무리를 강호에 이름 높은 사파의 거두로 키워낸 남자.

어느 날 갑자기 한적한 어촌 마을에 알몸으로 나타나 처음 그 일성을 부르짖었고, 지금은 강호에 손꼽히는 존재로 거듭난 괴인.

천하에 이름 높은 삼절군자(三絶君子)의 관음삼라수(觀音森羅手)를 힘으로 풀고, 단신으로 산동악가의 무사 오십여 명을 패 죽였으며 일곱 관에 달하는 쇠몽둥이를 젓가락 다루듯 휘두른다.

강호의 중인들은 그런 그의 모습이 전설 속의 초패왕, 항우의 산을 뽑아 올리는 기세와 같다 하여 역발산이라 불렀다.

역발산 왕시운.

스스로 바다를 헤엄쳐 중원으로 건너왔다고 말하는,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괴인 중의 괴인.

아울러 산동의 동쪽 절반을 지배하는 역사방의 방주이며 그 무위가 산동 제일이라 칭해지는 절정의 고수다.

왕시운은 하루의 대부분을 청도 성시 한 가운데 멋들어지게 꾸며 놓은 역사방의 전각에서 보낸다.

그는 특히 전각의 꼭대기에서 청도의 성시 전경을 바라보길 즐겼다. 욕망을 쫓아 중원으로 건너온 지 어언 오년. 눈앞의 전경을 내려다보면 앞으로 있을 찬란한 미래도 환상처럼 그의 눈앞에 가물거렸다.

오늘도 왕시운은 아침부터 전각의 꼭대기에 마련된 금빛 찬란한 의자에 앉아 청도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앉은 의자는 실제로 목재 골조 위로 황금을 덕지덕지 발라 만든 그야말로 돈지랄의 결정체였다. 그리 썩 편한 의자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외공을 극한으로 익힌 그의 몸에는 폭신한 방석 위든 이런 금덩어리 의자 위든 그게 그것이었다.

왕시운의 외향은 강호상에 알려진 팔 척 거한의 괴인이라는 칭호와 다르게 늘씬하기 그지없었다. 키는 팔 척에 달했지만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몸매가 아닌 마치 여인처럼 곱디고운 살결의 소유자였다. 심지어 그 얼굴마저도 차라리 여인이라 하면 믿을 정도로 고와, 도무지 산동의 사파 무리를 통째로 휘어잡은 패악 무도한 불한당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깊은 숙면을 취하는 얼굴로 축 늘어진 채 그의 옆구리 사이에 끼여 있는 여인이 없다면 차라리 키가 비정상적으로 큰 미녀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다.

유난히 황금을 좋아하는 듯 앉아 있는 의자도 황금색이고 걸치고 있는 보통의 것보다 큰 치수의 장포도 누런 황금색이다. 온통 누런 것으로 치장한 왕시운의 고운 눈매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 십여 층에 달하는 전각의 꼭대기 위에서는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도의 관청도, 짠 내 가득한 바다도, 시끌벅적한 난전통도, 홍등 가득한 주색가도, 모두가 왕시운의 시야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의 것이다.

늘씬하게 뻗은 왕시운의 손가락이 바다를 가리켰다. 바다를 따라 쭉 가면 처음 그가 알몸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작은 어촌이 나온다. 오년 전의 그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저기서 왔고.”

이어 반대편에 웅장하게 뻗은 산세를 가리켰다. 과거 한 무제가 제천 의식을 펼쳤다는 불기산이다. 오년 후의 그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저기로 뻗는다.”

그러더니 이내 두 팔을 활짝 펴며 외쳤다. 활짝 편 두 팔 사이로 바다가, 불기산이, 그리고 청도 성시의 전경이 모두 들어왔다.

“그리하여 이 산동을 모두 먹어 버릴 테다! 으하하!”

우당탕! 왕시운이 두 팔을 활짝 펴니 옆구리에 끼여 있던 여인이 그대로 굴러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근육질 거한들이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저거 안 멋있다는데 죽어라고 말은 안 들어요.’

‘아휴, 진짜 큰형님만 아니면…….’

‘하루에 한 번이라도 허세를 안 부리면 주둥이서 가시가 돋아나나? 저 꼴 좀 안 봤으면 좋겠다, 진짜.’

‘어휴, 형수님은 오늘도 또 바닥 청소 신세네. 이따 또 큰형님하고 한 바탕 하시겠지.’

거한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뒤로하고, 왕시운은 앉아있는 자세 그대로 허리를 힘차게 틀었다.

드드득! 힘찬 왕시운의 허리 놀림에 앉아 있는 황금 의자가 반 바퀴를 돌며 바닥을 긁었다.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여인의 허리께가 의자 다리와 힘차게 부딪히며 튕겨져 날아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여전히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 그대로 미동도 없었다.

여인을 바라보는 거한들의 안색이 미묘했다.

‘거 참 겉보기에는 되게 불쌍해 보이는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들을 바라보는 왕시운의 시선이 느껴지자 곧 표정을 가다듬고 시선을 십오 도 각도 위로 올린 채 인왕세로 시립한다.

왕시운이 자신의 고운 목선을 손톱 끝으로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자, 오늘도 아침부터 상쾌한 하루다. 어이, 총관. 일일 조례 보고 시작하자고.”

“네, 큰형님!”

총관이라고 불린, 지금 이 자리에 시립한 근육질 거한 가운데 그나마 학구적으로 생긴 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라리 넝마에 가까운 상의를 걸치고 있는 와중에 단 세 명만이 그렇지 않은 복장을 하고 있다. 왕시운, 왕시운의 옆구리에 끼여 있던 여인, 그리고 이 사내. 걸치고 있는 청색의 장삼(長衫)은 흔히 문사들이 입는다고 알려져 있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보통의 것보다 큰 치수임이 분명한 청색 장삼이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있다. 부푼 청삼 위로 보이는 굴곡은 틀림없이 돌덩이처럼 단단한 근육이다. 그리고 머리에 쓴 두건 아래로는 반질반질 윤이 나는 대머리가 번쩍였다.

이곳 역사방에 모인 숱한 사파의 고수들 가운데 유일하게 문사 집안 출신이라 총관으로 발탁된 남자, 철웅(鐵熊) 장향이 소맷자락에서 한 장의 꼬깃꼬깃 접힌 서류를 꺼냈다.

장향의 왕방울만한 눈이 가늘어졌다.

‘아, 망할 놈의 새끼들 서류 보낼 때 글자 크기 좀 키우라니까 말 더럽게 안 들어 처먹네.’

내력을 끌어 올려 시각을 틔워야 겨우 보일 정도로 서류의 글자 크기는 미세했다. 한참을 용을 쓴 장향은 이내 가벼운 헛기침으로 목을 풀고 서류를 읽어 내렸다.

“커험! 지난달 초 홀로 요동 모용세가를 방문했던 악가의 교영창 악지영이 같은 달 말에 모용세가를 떠남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달 초 본방은 악지영을 확보하여 산동악가를 압박하고자 북향주 형님을 북경 인근으로, 동향주 형님을 산해관 인근으로, 서향주 형님을 석가장 인근으로 각기 평방도 이십여 명과 함께 파견했었습니다. 그런데… 어?”

고저 없이 흐르던 장향의 목소리가 별안간 멈췄다. 그리고 한참을 말없이 서류만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듣고 있던 왕시운의 고운 아미가 꿈틀거렸다. 그 모습을 본 다른 거한들의 안색이 검게 죽어갔지만 원인제공자인 장향은 그 사실을 몰랐다.

지금 이걸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니 그것보다 여기 적혀 있는 말들이 진짜 사실인가.

고민에 잠긴 눈으로 장향은 서류만을 주시했다.

장향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왕시운의 눈썹은 점차 하늘 높이 치솟았지만 여전히 장향은 그 사실을 모른다. 하고 많은 별칭 중에 왜 쇠 곰[鐵熊]으로 불릴까.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는 눈치가 없다. 그것도 좀 많이.

결국 장향은 서류에 적힌 그대로 읽기를 결심했다.

만약 그가 눈치란 게 조금 있다면 서류의 보고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말을 돌리거나 아니면 다른 수를 찾았을 텐데, 장향은 그럴 만큼 머리가 잘 돌아가는 위인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문사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역사방의 총관을 맡고 있다.

“에, 산해관 인근으로 파견 된 동향주 형님께서는 간발의 차이로 교영창 악지영을 놓쳤답니다. 동향주 형님이 말하기는 간발이라는데 같이 파견 된 감찰관 말에 의하면 동향주 형님이 산해관에 도착한 게 악지영이 산해관을 떠나고 열흘이나 지난 후라네요. 우하하, 이 형님도 참.”

장향은 껄껄 웃었다.

장내에 웃는 건 그 하나다. 그를 제외한 장내의 모든 이는 얼굴이 검게 죽었거나, 아니면 분노한 듯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가고 있던가, 둘 중 하나였다.

‘아, 저 미친 곰탱이가 진짜…….’

‘분위기 파악 좀 해라, 인마.’

“에, 마저 읽겠습니다. 석가장으로 파견 된 서향주 형님은 석가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악지영이 제남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보고를 받고 다시 청도로 돌아오시는 중이랍니다. 서향주 형님도 참 다 좋은데 발 느린 게 흠이에요 흠.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경 쪽으로 가신 북향주 형님은… 아, 정말 이거는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는데.”

두건 위로 반질반질한 대머리를 긁으며 미적거리는 장향에게, 왕시운은 딱 한 마디를 던졌다.

“읽을래, 뒈질래.”

“읽겠습니다.”

장향은 각을 딱 잡아 서류를 읽어 내렸다.

“에, 딱 사흘 전에, 저기, 그러니까, 자기가 무슨 백수건달이라고 밝힌 애송이가 북향주 형님을 뒈지게 두들겨 팼다는데요.”

후비적후비적. 왕시운의 길고 가느다란 새끼손가락이 귓구멍을 세차게 찔렀다. 지금 뭔가 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귓구멍에 들어갔다 나온 새끼손가락에는 별다른 것도 없다. 귀에 뭔가 들어가 이야기를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분명 장향 저 곰이 뭔가를 잘못 말한 게 분명했다.

그래서 왕시운은 어지간하면 재차 묻는 일 없이 주먹부터 날린다는 자신의 신조를 잠깐 뒤로 물렸다.

“야, 내가 뭘 좀 잘못 들은 거 같은데 다시 말해 볼래? 누가 누구를 뭐 어떻게 했다고? 백수건달 애송이? 북향주? 뒈지게 두들겨 패?”

“어, 말씀하신 그대로인데요. 잘못 들으신 게 아닌 거 같지 말입니다, 큰형님.”

“허허, 이 새끼가…….”

역사방의 전각 아래를 지나가던 행인들은, 별안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청색 장삼의 거한을 피해 급히 몸을 피해야 했다.


“야, 이거 진짜야?”

대답은 잠시의 차이를 두고 흘러나왔다.

“…예. 거기 감찰관 수인(手印) 있잖아요.”

서류에 있다, 감찰관 고유의 수인이.

수인을 확인한 왕시운은 잠시 눈앞의 곰 한 마리를 찬찬히 훑었다.

부목을 대어 붕대로 묶어 고정한 왼팔과 오른다리, 그나마 멀쩡한 오른손에 짚은 굵직한 지팡이, 피딱지가 앉아 이제는 반질반질하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대머리, 푸르뎅뎅하게 멍이 든 눈두덩이, 그리고 울퉁불퉁 구릿빛 근육을 수줍게 보여주는 찢어진 청색 장삼.

십층 전각에서 떨어져 그대로 바닥에 메다 꽂힌 것 치고는 꽤 멀쩡해 보인다. 과연 쇳덩어리 곰답다.

“대답이 늦다.”

“…시정하겠습니다.”

“쯧.”

또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왕시운은 그냥 넘어갔다.

이런 약간의 반항쯤은 그냥 넘어가주는 아량이 있어야 그의 관대함이 더욱 돋보이는 법이니까. 그리고 사실 그도 사람인지라 무작정 전각에서 내던진 장향에 대해 미안함이 있었다.

솜털 하나 보이지 않는 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왕시운은 서류를 다시 한 번 훑어봤다.

서류에 적힌 내용은 장향이 말한 그대로였다.

북향주 철골잔심 조규가 말 그대로 ‘뒈지게’ 맞아서 자랑하던 철포삼의 공력을 모조리 잃어 버렸단다. 거기에다 도대체 뭘 어떻게 맞았는지 극심한 공포에 잠겨서 거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니 이제 무인 철골잔심 조규는 죽음보다 못한 절망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단전은 살아 있다고 하나 수십 년을 고련한 무공 자체가 사라졌는데 대체 단전이 살아 있어 봐야 무슨 소용인가.

한 치의 가감 없는 감찰관의 보고서에 왕시운의 곱디고운 눈썹이 일그러졌다.

왕시운은 가만히 과거 철골잔심 조규와의 조우를 떠올렸다. 동서남북의 사향주는 모두 왕시운 그가 직접 만나 역사방으로 끌어들인 인재들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조규의 경우 왕시운이 사향주 가운데 가장 기꺼워하는 수하였다.

그 무위 자체는 다른 향주들과 비슷하지만 조규에게는 왕시운이 원하는 독심(毒心)이 있었다. 상대의 절망을 즐기고 기뻐할 수 있는 악랄함이 있었다. 사실 불한당의 무리를 이끄는 수장 치고 나름 유약한 편이라고 자신을 평하는 왕시운의 입장에서, 모자란 그의 독기를 채워주는 조규는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사마(邪魔)는 사마다워야 사마다.

평소 왕시운이 주창하는 말이다.

조규는 간사하고, 악랄하고, 폭력적이고, 인정이 없었다.

왕시운이 인정하는 사파의 무인 그 자체였다.

그래서 그런 기꺼운 수하, 조규의 소식은 왕시운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악가 놈들에게서 산동의 패권을 빼앗는 것은 당연히 본방의 최대 영광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왕시운은 걸치고 있는 장포를 펄럭이며 앉아있던 황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나, 본방의 형제에게 닥친 죽음만도 못한 치욕을 갚지 못한다면 한 성의 패자로 올라서는 게 과연 무슨 영광이란 말이냐!”

순간 팔 척 장신에 어울리지 않는 그의 마르고 호리호리한 몸이 폭발적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장포가 한계까지 늘어나다 이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넝마 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윽고 드러난 조각 같은 몸.

한 점 불필요한 지방 없는, 극한에 달하는 근육의 물결이 마치 신의 손길에 따라 빚어진 듯 유려하게 미끄러진다.

천고의 장인이 수십 년 간 다듬어 빚은 듯한 매끈한 살결 아래로 한 가닥 한 가닥 꼬아 묶은 굵은 힘줄들이 시리도록 아찔하게 휘감아 올랐다.

어떻게 보면 유려한 미인의 곡선이 보였고, 어떻게 보면 천년 거암의 투박함이 보였다.

실로 인간의 육체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 극한까지 치달은 왕시운의 몸 위에 아홉 마리 새카만 흑룡(黑龍)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엮어져 있었다.

구룡철탑(九龍鐵塔)의 흔적, 왕시운의 본질 그 자체. 이국(異國)의 스러진 왕손(王孫)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끔 만들어준 그의 모든 것.

천하 모든 외문(外門)의 궁극이 여기 있다.

드러난 왕시운의 몸에 역사방의 거한들은 감격했다. 심지어 장향마저 쥐고 있던 지팡이를 떨어뜨릴 정도로 감동에 휩싸여 전신을 떨었다.

그들 모두 외문 일도(一道)에 평생을 바친 외골수들, 그들이 바라는 궁극이 눈앞에 있는데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왕시운의 두 눈에 하나의 편액(扁額)이 들어왔다.

이년 전 역사방을 개파하며 일필휘지로 써 내린 네 글자.

역사방의 가장 근본이 되는 네 글자.

“망은(忘恩)!”

어떤 은혜든 모두 잊는다.

“답원(答寃)!”

하지만 원수는 그것이 사소할 지라도 반드시 갚는다!

“총관!”

총관, 장향이 더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왕시운은 북쪽을 향해 팔을 뻗었다. 거센 기운의 흐름이 왕시운의 손짓을 따라 공기를 뒤흔들었다.

“북향주 철골잔심 조규의 목숨을 거둔다.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될 방의 형제에게 베푸는 마지막 의리다.”

“복명!”

한 무리의 거한들이 조용히 장내를 빠져나갔다.

그들의 두 눈에 싸늘한 살기와 안타까움이 공존한 미묘한 감정이 진하게 흘렀다.

“더하여 그와 관련된 모든 일을 철저히 파헤쳐라. 누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무슨 의도로! 본방의 형제를 건드렸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히 파헤쳐 드러내라!”

“복명!”

나머지 거한들의 신형이 순식간에 장내를 빠져나갔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원한 가득한 불꽃이 이글댔다.

빠져나가는 거한들을 뒤로 하고, 활짝 열린 전각의 창을 아침나절의 눈부신 햇살이 타넘었다.

햇살은 왕시운의 전신을 휘감고 이내 전각의 내부를 환하게 비추었다.

산동의 동부를 지배하는 사파의 대 방파 역사방.

어둠과 더러움을 벗 삼아 살아가는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환한 햇살이었다.


“아우, 눈부셔요, 서방님! 또 창문 다 열어놓고 아침부터 무슨 허세신가요? 소녀 잠 좀 자게 해주세요, 제발! 응? 그런데 오늘은 또 왜 뱀 대가리는 불러놓으셨습니까, 서방님? 소녀는 서방님의 그런 모습 싫어한다고 말씀 드렸는데 벌써 잊으신 건 아니실 테고, 무슨 일 있으셨나요?”

“어엇! 당신, 언제 일어났어? 내가 너무 시끄러웠지?”

“잘 아시네요, 서방님! 그건 그렇고 눈이 부시니 창문이나 닫아 주세요. 아니, 그런데 전 또 왜 바닥에 자빠져있는 거지요? 어디 한 번 설명해 보시겠어요, 서방님?”

“어, 그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 여보 마누라, 때리지 마! 아파!”

“소녀가 죽어라 때려도 안 아픈 거 다 알아요, 서방님! 엄살떨지 마세요!”

“이것 보세요, 마누라! 진짜 아프거든!”


작가의말

오늘은 금요일, 이슬람 지역 휴일이지요.

그런데 전 왜 또 출근을... ㅠ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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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三. +17 14.03.15 33,641 982 14쪽
28 二. +25 14.03.14 33,818 1,041 16쪽
27 二. +22 14.03.13 34,944 1,062 13쪽
26 二. +23 14.03.12 34,974 1,012 12쪽
25 一. +16 14.03.11 35,638 1,091 16쪽
24 一. 제2권 +16 14.03.10 35,661 994 13쪽
23 九. 제1권 끝 +21 14.03.09 36,562 1,011 18쪽
22 九. +16 14.03.08 36,240 1,003 15쪽
» 八. +15 14.03.07 36,721 970 18쪽
20 八. +16 14.03.06 35,890 1,021 14쪽
19 八. +17 14.03.05 35,283 1,035 16쪽
18 七. +17 14.03.04 35,295 1,032 16쪽
17 七. +12 14.03.03 34,711 953 14쪽
16 七. +12 14.03.02 36,198 999 12쪽
15 六. +13 14.03.01 36,175 1,005 16쪽
14 六. +9 14.02.28 37,016 1,066 12쪽
13 五. +8 14.02.27 37,082 977 11쪽
12 五. +14 14.02.26 38,098 1,005 12쪽
11 五. +17 14.02.25 39,568 1,018 12쪽
10 四. +7 14.02.25 39,804 1,078 12쪽
9 四. +11 14.02.24 41,669 1,134 13쪽
8 三. +10 14.02.23 40,886 1,117 11쪽
7 三. +8 14.02.23 41,399 1,096 14쪽
6 三. +11 14.02.23 43,171 1,126 10쪽
5 二. +13 14.02.22 45,377 1,153 16쪽
4 二. +11 14.02.22 47,106 1,288 10쪽
3 一. +19 14.02.22 52,190 1,270 15쪽
2 一. +18 14.02.22 59,616 1,374 13쪽
1 序. +24 14.02.22 64,489 1,569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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