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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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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tiger
작품등록일 :
2024.05.08 10:47
최근연재일 :
2024.09.0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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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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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25,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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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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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파올로 할아버지

DUMMY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명의 노신사.

중절모를 얹은 머리는 희게 새었으나 눈의 총기는 조금의 흐려짐도 없었다.

노인답지 않게 곧게 뻗은 허리에 너무 살찌지도, 너무 메마르지도 않은 육신.

마치 과거 고대 히브리인들을 사막 한 가운데서 용맹히 이끌었던 노익장의 소나무 같은 올곧은 자태를 보는 듯 했다.


“파올로 할아버지?”


손님 한 명 없는 평온한 시간에 홀로 작품 구상에 몰두하고 있던 플레먼.

느긋하게 커피를 홀짝이며 햇빛을 받고 있던 청년은 지인의 방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허, 몇 주만에 보는구나, 플레먼.”


“잘 지내셨어요?”


얼굴에 곧장 밝은 화색이 드러나는 젊은이.

노익장의 얼굴에도 플레먼을 향한 인자함과 신뢰의 감정이 풍부히 나타났다.


“음료와 다과라도 준비할게요.”


“무리할 필요 없단다. 너는 요리 솜씨가 별로잖니.”


“이런, 아프지만 사실이라 할 말이 없네요.”


“혹시라도 어니스트를 불러 부릴 생각이라면 관두는 게 좋겠구나. 네 일을 도와주는 것도 피곤할 텐데 굳이 이 애꿎은 늙은이까지 거들 필요는 없잖니.”


그러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안녕하세요, 파올로 교수님.”


어니스트는 큰 소리로 복창하여 예를 갖춘 뒤 상체를 90도로 굽혔다.


“허허, 잘 지내셨나, 마이런군. 아, 그리고 난 이미 5년 전에 은퇴해서 교수가 아닐세. 지금은 우리 네 낡은 시골 공동체의 섬김이일 뿐이지.”


이분은 호주의 제법 멀리 떨어진 지역에 거하시는 노년의 현자.

플레먼에게는 지인이요 은사이며 정신적인 멘토이기도 한 분이었다.

아울러 어니스트에게는 모종의 이유로 아버지 이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제 특기를 또 발휘해야 할 때인 것 같군요.”


“괜찮대도.”


“이건 제 자유의지이니 부디 기쁨의 기회를 박탈하지 말아주세요.”


“이런.”


어니스트는 직접 주방으로 들어가 간단한 조리를 시작하였다.

직원들이 일하는 장소 말고도 이곳에는 식사 준비용 방이 하나 더 있었다.

보통 플레먼이 창작과 집필에 몰두하느라 집에 돌아가기 귀찮을 때 그의 살림꾼 어니스트가 간략한 도시락이나 만찬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곳이었다.

지금처럼 귀한 손님이 찾아오신 경우에 쓰이기도 하고.


“네 책들은 꼬박꼬박 사서 읽고 있단다. 친구들과 아이들에게도 선물 중이고.”


“부끄럽네요.”


“요즘 세상에 걸맞지 않게 좋은 가치관을 담고 있어서 그런지 읽을 때마다 마음이 평안해지는 기분이란다.”


“그래봤자······.”


플레먼은 칭찬으로 인한 머쓱함에 더해 어울리지 않는 또다른 감정을 얼굴 표정 위로 혼합하였다.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우나 아쉬움 내지는 옅은 회한 같은 정서였다.

그가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의 한계로 인함이었다.

실력에 대한 부족감이나 인기나 인정에 대한 절박함과는 무관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분량만큼의 재주와 노력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깊은 갈증은 조금 다른 부분에 있었다.


“정말 꼭 필요한 이야기는 전하지 못하고 있는 걸요.”


“세상이 그런 곳이거늘 어쩌겠니.”


“그런 핑계로 저 자신을 위로해보았어요. 하지만 소용이 없더라고요.”


오늘날의 세상은 모든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수 없는 시대 가운데 있었다.

물론 적당히 그럭저럭 중도의 노선을 취하면 용서는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양심 있게 진실의 창을 빼들면, 또한 손해를 감수하고 올바름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면, 그자의 목덜미는 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질식된다.


플레먼이 한계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제약된 세계였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의 입술을 봉하는 권세는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도 있었다.

보이지 않는 지독한 봉인의 자물쇠.

파올로도 그것의 정체를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세대에 씌워진 ‘비정상적 두려움’이라는 저주였다.


“결국 저 자신이 비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뿐이었어요.”


영특한 젊은이의 두 눈은 불가항력적인 무력감으로 인해 풀이 죽은 상태였다.

오랜 세월 좌절되어온 꿈으로 인한 고통, 허무, 그리고 번뇌.

어느 정도는 그 서운함도 아물었고 일정 부분 인정하고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유롭고 지혜로 충만한 한 영혼에게 있어서 타협이란 자신의 존재의의를 잘라내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웠다.


“플레먼, 너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짐이란다.”


파올로는 푹 한숨을 내뱉었다.


“너와 네 세대는 그래도 낫지. 정말로 비겁자는 나와 내 아버지 세대였단다.”


파올로의 깊은 상념은 그의 젊은 시절의 추억들로 겨냥되었다.

추억이라기보다는 되돌아오지 않는 회한의 실패들이라 불러야 하리라.

허나 어찌하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거늘.


‘그래, 이미 우리는 그날 이후로 추락할 수밖에 없던 운명이었다.’


그러한 비겁한 행태를 보이고도 과연 용서받을 자격이 있을까?

책임이라는 형벌이 그와 그의 세대, 그리고 전 세계의 남은 자들을 지금까지도 바위처럼 짓누르고 있었다.


‘우리에게 속죄할 길이 과연 주어질까?’


차마 파릇한 젊은 새싹 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탄식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특별 요리 대령입니다요.”


생활의 달인이자 야무진 손맛의 창조자인 어니스트가 무거웠던 분위기를 활기로 전환시켰다.

교양과 철학적인 주제로 대화를 나누던 노인과 청년은 음식의 향기 앞에 약간의 위로를 얻었다.


“고마워, 어니스트. 정말 수고했어.”


“마이런 군도 같이 와서 잡수게나. 내 언젠가 꼭 보답을 해주고 싶은데, 지금은 축복 밖에는 나눌 것이 없군.”


“교수님의 축도라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세 사람은 한 식탁에 앉아 감사를 나눈 뒤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확실히 활기찬 어니스트가 합류하니 내향적이고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플레먼만 있을 때보다는 긍정적 에너지가 감돌았다.


“마이런 군의 실력은 갈수록 일취월장하는군.”


“제 친구지만 어니스트는 정말로 못하는 게 없죠. 누군가와 무인도에 던져진다면 저는 반드시 저 친구랑 같이 가기를 택하겠어요.”


“무서운 소리 하지 마세요, 도련님.”


“허허!”


그러면서도 어니스트는 속으로 내심 이렇게 생각하였다.

만약 우리 도련님이 홀로 위험한 곳에 떨어진다면 어떡하려나.

자신이라도 곁에 있어드려야 할 텐데.

게다가 도련님이 없으면 차기작들이랑 신곡 시리즈는 어찌된단 말인가.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바였다.

여러모로 한 쪽은 생활적으로, 한 쪽은 정신적으로 상대를 의지하는 친우였다.


‘하긴 최근에는 무인도보다 더 무서운 일도 겪었지.’


두 사람 다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헬게이트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인들 가운데는 크루의 실질적인 행동 대장이자 믿을 만한 상대인 쥬오디아 자와 신티를 제외하면 최근의 헬게이트 건을 아는 이가 없었다.


파올로 할아버지는 플레먼에게 있어서는 가장 존경하는 어르신이었으나 그에게는 불필요한 걱정을 얹혀드리고 싶지 않았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어차피 다 해결된 문제니까.

약간 꺼림칙한 기분과 불길한 예감은 찝찝하게 남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플레먼 개인의 내적 갈등 아닌가.


‘게다가 파올로 옹에게까지 나의 불운을 옮기고 싶지는 않다.’


자꾸만 징크스 중심의 사고를 하는 자신이 부끄러우면서도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단순하게 여기기에는 너무도 귀납적 증거가 많은 것을 어쩌겠는가.

파올로를 상대로는 그저 일방적으로 플레먼 자기 쪽에서만 존경과 존중으로 대하는 선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싶었다.

지나치게 마음의 모든 부분을 터놓고 고민들을 공유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


식사를 마치고 정원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차를 홀짝이는 노인과 청년.

플레먼과 파올로는 지난 추억들과 오랜 상념들, 그리고 근황들을 두런두런 나누며 인생 길을 회고하였다.


“어니스트를 보면서, 그리고 쥬오디아와 신티를 보면서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었어요.”


“무엇을 말이니?”


“제 못다 이룬 꿈들 말이에요.”


작가가 되었던 것도, 시인과 예술가가 되었던 것도,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한 것도, 음악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삶조차도,

그 모든 것은 그가 꿈꾸던 ‘비전’을 위한 발받침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의 인정은 얻었으나 그 비전을 향해서는 입도, 손가락도, 마음의 용기도 움직이지 못했다.

플레먼도 결국은 세대 전체를 봉인하는 불가항력의 힘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이대로 평생을 후회만 하다 갈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기도 했죠. 그런데 아이들을 보니 어쩌면 제가 잘못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고 여겨졌어요.”


플레먼은 메시지를 전하는 존재.

그러나 그는 최근 깨닫고 있었다.

말이나 글이나 음악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울림을 내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그 매질이란 바로 삶이었다.

특별하거나 찬란하거나 화려한 인생이 아닌, 지극히 작고 평범하고 소박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내딛어지는 인생 길.

작은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의지.

인간됨의 본연을 바라볼 줄 아는 여유로움.


어니스트에게도, 신티에게도, 쥬오디아에게도, 그런 가치들이 선명히 존재했다.

그들의 삶은 빛나거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충만했다.

매 순간 열심을 다하며 주어진 작은 것들에 감사하며 충실히 행해지는 순간들.

어쩌면 그런 작은 파편들이 모여 세상의 진정한 본연을 자아내는 것이 아닐까.


“훌륭한 깨달음이로구나.”


“민망하기 그지없네요.”


“그래, 동생들이 매일을 살아내는 모습을 보니 어떻던.”


“제가 찾아내려던 뮤즈가 저런 모습이겠죠.”


삶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그리고 특별해보이는 삶이 아닌 지극히 작은 일들 가운데서 가치가 나타난다.

플레먼에게 있어서는 이것이야말로 잃어버린 꿈을 회복할 해결책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소망을 준 세 아이들이 존재하듯,

그에게도 이제는 하나의 바람이 생겨났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망가져버린 소망을 되찾아줄 매개체가 될 수 있을까?


“최근에 한 사람을 만났어요.”


플레먼의 회상에 알 수 없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낀 파올로는 귀를 기울였다.

무언가 자신의 안에서부터 세미한 목소리가 들려오기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왜일까?


“말해보렴. 어떤 사람이었니?”


“무뎌진 사람이요. 고통에 대해서, 모든 고난에 대해서 무뎌진 사람이었죠. 지하의 돌이 오랜 압력과 열을 받아 금강석이 되듯, 너무 단련된 나머지 마음의 강함이 지나치게 커져버린 사람이랄까요.”


고작 한 번 만나 대화한 것만으로 알면 대체 얼마나 알았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람과의 만남은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초면 같지가 않았다.

마치 오랜 영혼의 친구를 되찾아 재회한 듯한 울림이랄까.

설명하기 힘든 깊은 이해의 감정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면 너는 그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주고 싶니?”


“다시 만날 기회가 허락될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기회를 선물받는다면.”


플레먼은 시원섭섭한 감정의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거짓이 섞이지 않은 한 장의 편지가 되어주었으면 하네요. 친구까지는 무리더라도 적어도 말동무로서는 가능하겠죠.”


그날따라 철새들이 무리지어 하늘을 수놓는 모습이 몹시도 아름다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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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기대와 불안 NEW 15시간 전 1 0 14쪽
56 제안 24.09.03 4 0 15쪽
55 교활한 광전사 (2) 24.08.30 5 0 13쪽
54 교활한 광전사 (1) 24.08.29 6 0 13쪽
53 조우 24.08.25 7 0 17쪽
52 레기온 24.08.22 8 0 16쪽
51 다중심연융합체 24.08.17 8 0 11쪽
50 극강 장벽 24.08.15 8 0 11쪽
49 이변 (2) 24.08.12 7 0 13쪽
48 이변 (1) 24.08.10 7 0 12쪽
47 마무리 단계 24.08.07 9 0 12쪽
46 독립운동가 24.08.04 8 1 12쪽
45 예측력의 한계 24.07.31 10 0 12쪽
44 에일린 (2) 24.07.28 9 0 13쪽
43 에일린 (1) 24.07.25 11 0 11쪽
42 재난 예보 작전 (3) 24.07.22 11 0 13쪽
41 재난 예보 작전 (2) 24.07.17 10 0 13쪽
40 재난 예보 작전 (1) 24.07.17 12 0 12쪽
39 퇴각 24.07.05 15 0 14쪽
38 정부군 대 헌터군 (3) 24.07.02 12 0 15쪽
37 정부군 대 헌터군 (2) 24.06.29 10 0 12쪽
36 정부군 대 헌터군 (1) 24.06.27 12 0 13쪽
35 뒷통수 24.06.24 10 0 12쪽
34 최후 일격 24.06.22 10 0 11쪽
33 지하 던전 6층 24.06.19 11 0 13쪽
32 지하 던전 5층 (3) 24.06.17 11 0 12쪽
31 지하 던전 5층 (2) 24.06.16 11 0 14쪽
30 지하 던전 5층 (1) 24.06.14 12 0 13쪽
29 음모와 술수 24.06.13 10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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