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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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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tiger
작품등록일 :
2024.05.0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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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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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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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독립운동가

DUMMY

얼마나 간만에 직접 쬐는 햇빛이던가.

맑은 야외의 대기가 폐부를 채우자 갑갑했던 기분이 환기되었다.

거기다 여름철의 더위를 몰아낼 시원한 물이 몸에 적셔지는 쾌적함까지.

푸르르게 우거진 녹음(綠陰)의 빛과 상큼한 나무 향기가 눈과 코를 간질였다.

해방감을 만끽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평온한 정오였다.


“오늘 저녁부터는 일을 시작해도 되겠지.”


라이텔바흐는 누운 자세로 푸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몸은 현재 맑은 계곡물에 반쯤 잠긴 상태였다.


“역시 선생님과 당회장님의 솜씨는 전혀 녹슬지 않았군.”


그는 팔과 다리의 관절을 자유로이 움직이며 이리저리 뻗어 굳은 몸을 풀었다.

수영을 하면서 자연과 하나 된 자태로 평온히 휴식을 취하니 금세 정서가 이완되었다.


현재 이곳은 그에게만 할당된 오롯이 사적인 공간이었다.

시더우드의 깊은 중앙부에 위치한 아름다운 산 속 계곡물.

사방에 드리워진 언덕과 우거진 높은 나무들이 사람들의 인파로부터 그를 가려주는 그늘이 되었다.

시더우드를 드나드는 사람은 많지만 그들 중 이 비밀스럽고 아늑한 공간의 존재를 아는 이는 거의 없다.

관리자인 진성과 로라는 아들처럼 애지중지하는 라이텔바흐에게 이 계곡의 열쇠는 물론 물의 점유권까지 선뜻 내주었다.


사실 그들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 시원한 계곡물의 소유권은 라이텔바흐에게 돌아가야 마땅했다.

첫째로는 계곡물 전체가 평범한 물이 아닌 엘릭서이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이 물을 송두리째 엘릭서로 연성한 당사자가 라이텔바흐기 때문이었다.


모든 계열의 엘릭서들이 조화롭게 혼합된 이곳의 물.

종종 로라는 이것을 떠다가 헌터들에게 제공할 치유의 약을 만들 재료로 사용하곤 했다.

또한 라이텔바흐도 고된 전투를 치르고 난 뒤에는 가끔씩 이곳을 방문하여 몸을 담근 채 안락한 휴식을 통해 회복을 얻곤 하였다.


“으음?”


희미한 인기척을 느낀 라이텔바흐는 수풀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잘생긴 이마 위로 약하게 주름이 잡히며 미간이 좁아졌다.

어쩐지 데자뷰가 느껴졌다.

최근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긴 했지.

난데없이 안락한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으니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


이제 막 스무살 정도가 되었을까 싶은 가녀린 여자.

수풀을 거닐다가 우연히 물에 반쯤 잠긴 라이텔바흐를 발견한 그녀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죄 지은 것마냥 안절부절못했다.


‘고의로 사유지에 들어온 건 아닌 모양이군.’


순진무구한 그 얼굴을 보아하니 과연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산책하다가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 정신을 놓고 엄한 곳까지 들어왔겠지.

고의는 아니겠지만 덕분에 제대로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자, 잘못했어요!”


라이텔바흐는 신경쓰지 말라는 투로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계속 이 상태로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는 물 위를 누운 채 부유하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깜짝 놀란 소녀는 뒷걸음질을 쳤다.


‘놀랐겠군. 하기야 내 꼴이 이만저만이 아닐테니.’


격리 해제가 완전하지는 않다지만, 그래도 뭐라도 걸칠 걸 그랬나.

약간은 후회감이 들었지만, 에일린과 만났을 때처럼 수치감이 들진 않았다.

아무래도 마주친 상대가 너무 어리고 연약하다고 느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


“프리실라!”


점잖게 겁 먹은 소녀를 달래서 내보내려던 참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텔바흐의 미간에 생긴 주름이 조금 더 깊어졌다.

이것들이 단체로 정말.


“너 여기로 들어오면 안 되는 거 몰랐니?”


수풀 틈을 헤치고 한 금발 젊은이가 나타났다.

그는 프리실라라 부른 그 가녀린 여인을 여기저기서 찾고 있었는지 숨을 가쁘게 쉬는 중이었다.

두 사람 다 순금처럼 맑은 금발과 채도 높은 사파이어빛 눈동자의 소유자였다.

이목구비부터 느낌까지 워낙에 닮은 외모인터라 누가 보아도 남매 관계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퀼라 오라버니, 죄송해요.”


“어서 나가자꾸나.”


아퀼라라는 사내가 여동생의 손을 잡았다.

그가 프리실라를 데리고 수풀 바깥으로 나가려던 순간.


“잠시만. 당신은 나와 좀 이야기를 나눕시다.”


라이텔바흐의 냉담한 중저음이 아퀼라의 발을 멈춰세웠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아퀼라 맥그리거.”


흑회색 머리칼의 근육질 사내의 입가에 흥미의 미소가 걸렸다.


“여동생분은 바깥으로 배웅해드리고 저와 단 둘이서 대화하시죠.”


모자를 눌러쓴 금발 사내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긴장의 땀방울이 흘렀다.




*



30분 쯤 지난 뒤 아퀼라는 다시 라이텔바흐를 만났던 그곳으로 돌아왔다.


“그대로 무시하고 가실 줄 알았는데 용케도 오셨군요.”


“예의를 아주 모르는 무례한은 아닙니다. 다만, 프리실라, 그러니까 제 여동생 때문에 사유지에 침입한 점은 진심으로 죄송히 생각합니다.”


“됐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속 좁은 사내는 아닙니다.”


“여동생을 대기 장소로 데려다주느라 늦어졌습니다.”


“어차피 오늘은 할 일이 없어서 이곳에서 신선놀음할 계획이었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제게는 무슨 볼 일이 있으신지?”


아퀼라는 지금 이 상황이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편했다.

특히나 저 존재감 짙은 사내의 위압감이 매우 신경 쓰이고 거슬렸다.


자신도 키나 체격으로는 어디 가서 밀리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자신을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장신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온 몸이 팽팽한 근육으로 짜인 모습이 무신(武神) 같았다.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전무결한 금강석의 육체.

대번 아퀼라는 그의 정체가 헌터임을 눈치챘다.


그리고 얼굴을 자세히 본 후에는 그의 이름도 곧 기억났다.


“라이텔바흐 키르헤른스트 대령님?”


“뭐, 알아봐주셔서 영광이군요.”


느긋하게 영업용 미소를 입에 건 라이텔바흐.

반면, 아퀼라는 여전히 어색함과 난처함을 감당하지 못했다.


‘전설적인 세계 최강의 영웅 헌터를 여기서 만난다고?’


그나저나 다른 이유로도 몹시 당황스러웠다.

저 남자는 부끄러움이란 것도 못 느끼는 건가?

아무리 얼굴과 몸과 체격이 완벽하다고 해도 그렇지,

헐벗은 채로 타인과 마주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다니.

게다가 조금 전에는 프리실라와 마주치고도 태연했었지.

원래 헌터란 족속은 저렇게 강심장에 철면피인 것인가 의문스러웠다.


“사정이 있어서 이런 것이니 이해해주시죠. 엘릭서인 이 물을 제외하면 당분간은 어떤 물체와도 접촉하지 않는 편이 나아서 말이죠. 당신도 제게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지난번 헬게이트 공략으로 인한 오염 때문입니까?”


“그렇다고 해두죠.”


아주 조금 겁이 난 것인지 아퀼라는 움찔하였다.

그 모습에 라이텔바흐는 실소하였다.


‘훨씬 더 담대한 강심장일줄 알았는데 의외군. 하긴 진정한 용기란 것이 꼭 사람의 개인적 기질에서 나오라는 법은 없지.’


라이텔바흐는 상대가 부담감을 덜 느끼도록 수심이 깊은 곳으로 발을 옮겼다.

명치 위쪽의 상체만이 드러난 상태가 되었고 나머지 몸은 물에 잠겼다.

그제야 아퀼라도 용기를 내어 물가 쪽으로 다가가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일반인은 이 물에 접촉하면 안 되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유해한 효과는 전혀 없죠. 혹시 오염의 전이를 염려한 것이라면 그 걱정도 내려놓으시죠. 이건 흑색파동의 전이를 차단하는 매질이지 오염을 삼키는 흡수제가 아니니까요.”


선혈처럼 붉은 눈동자와 물처럼 푸른 눈동자가 정면에서 마주쳤다.


‘아퀼라 맥그리거.’


요새 들어서 재미있는 요주 인물을 많이 만나는구나 싶었다.


‘구 미합중국의 후손, 그리고 비밀리 활동 중인 거물급 독립운동가.’


개인적으로 알아둬서 손해볼 이유는 없지.

호기심이 제법 동하였다.




*


멸망 직전 미합중국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나라의 위치에 올랐다.

그들은 이제 막 전성기를 맞고 있었고, 반면, 유럽은 저물어가는 저녁별이었다.


그랬던 세계 질서가 하루 아침에 뒤집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미합중국의 패인은 평화의 사자로 가장한 악마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였다.

그들은 끝내 자신들이 쌓아온 질서와 문명을 송두리째 빼앗기기까지 상대의 힘을 간과했으며 상대의 사악함은 더더욱 간과했다.


그 끝은 워싱턴 DC의 핵 피격, 그리고 이어진 공중분해였다.

연방으로서의 연합력을 잃은 이상 파죽지세로 점령 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미 핵 무기를 통해 소비에트 연방마저도 멸망시킨 ‘그 집단’은 힘의 정수를 뿌리뽑힌 미국 위에 상륙하여 사실상의 무혈입성으로 대부분의 주를 잠식했다.


결국, 찬란했던 세계 최고의 선진 문명은 포악한 승냥이 같은 파시스트의 아가리 속으로 집어삼켜졌다.


한편, 멸망 전, 그 나라 안에는 미합중국의 잠재력에 힘입어 자국의 독립을 꾀하려던 지혜자가 하나 있었다.

그의 모국은 동양의 어느 작은 나라로 당시에 이미 군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 모국의 주권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미합중국이 세계를 구해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제창했다.

그러나 무사 안일주의와 정신적 잠에 빠져 있던 미국은 기민히 움직이기를 포기한 채 방관하며 늑장부리며 상황만을 주시했다.


결국, 지혜자는 자신이 믿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상황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끝내 모국은 독립하지 못했다.

모국을 삼켰던 그 악한 나라 또한 또다른 사악한 동맹국에게 배신당하여 나란히 유린당하고 집어삼켜졌다.

믿었던 가능성인 미합중국마저도 패망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모든 희망을 포기한 그는 초야에 묻히기를 택했다.


참고로 그는 이미 미 본토의 주민과 혼인하여 자녀를 가진 바 되었다.

그 이후로 이어진 후손들의 대다수는 평범했으나 일부 빼어난 재능과 정신을 지닌 자들이 있었다.

그의 5대 손인 아퀼라 맥그리거도 대표적이었다.


아퀼라는 그의 조상의 유지를 이어받았다.

그는 미합중국의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소명으로 일어섰다.

박식하고 인맥이 탁월했던 그는 삼십대 중반의 나이로 유력 인사가 되었다.

그는 그 힘들을 이용해 막후에서 몰래 자유로운 문명의 회복을 꾀하였다.


세계 정부쪽 입장에서 표현하자면 말 그대로 반정부 세력.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을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그저 역사의 뒤안길로 파묻힌 그 위대한 정신적 유산과 가치를 되살리기를 바랬을 뿐이었다.

개인의 자유,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 고귀한 가치 위에 세워진 문명.

그리고 인간의 권력을 제한하는 안전 장치와 영적인 유산들까지.

지금은 파괴되어 버린 그것들을 되살릴 기반을 닦는 것이 그의 소명이었다.


미합중국의 유지를 잇겠다던 독립운동가는 그 한 명만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다른 자들도 들고 일어서긴 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폭력적인 방법과 과격한 전술에 의존했다.

아퀼라는 그들의 방법에 찬동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력으로는 절대 세계 정부를 이길 수 없다.

외교를 통한 타개책만이 살 길이다.

그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하지만 독재자의 시대 이후로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세계 정부라는 괴물의 손아귀에 들어왔거늘, 무슨 수로 외교의 술수를 부린단 말인가.


아퀼라가 바라본 ‘외교의 대상’은 국가가 아니었다.

현재 유일하게 세계 정부를 골탕먹일 수 있는 힘을 지닌 신흥 권세.

바로 헌터들.

그는 헌터들의 힘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세상의 질서를 다시 자율적 주권 국가 체계로 재편하기를 소원했다.


그렇기에 혁명가요 독립운동가인 아퀼라와 야심 많은 차기 헌터 지도자 라이텔바흐의 조우는 여러모로 운명적인 모멘텀이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제 쪽에서 협상의 가능성을 제시하죠.”


라이텔바흐는 잘 정제된 업무용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생각해보시겠습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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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교활한 광전사 (1) 24.08.29 8 0 13쪽
53 조우 24.08.25 8 0 17쪽
52 레기온 24.08.22 9 0 16쪽
51 다중심연융합체 24.08.17 9 0 11쪽
50 극강 장벽 24.08.15 10 0 11쪽
49 이변 (2) 24.08.12 8 0 13쪽
48 이변 (1) 24.08.10 9 0 12쪽
47 마무리 단계 24.08.07 9 0 12쪽
» 독립운동가 24.08.04 10 1 12쪽
45 예측력의 한계 24.07.31 10 0 12쪽
44 에일린 (2) 24.07.28 10 0 13쪽
43 에일린 (1) 24.07.25 12 0 11쪽
42 재난 예보 작전 (3) 24.07.22 14 0 13쪽
41 재난 예보 작전 (2) 24.07.17 11 0 13쪽
40 재난 예보 작전 (1) 24.07.17 13 0 12쪽
39 퇴각 24.07.05 15 0 14쪽
38 정부군 대 헌터군 (3) 24.07.02 14 0 15쪽
37 정부군 대 헌터군 (2) 24.06.29 13 0 12쪽
36 정부군 대 헌터군 (1) 24.06.27 13 0 13쪽
35 뒷통수 24.06.24 12 0 12쪽
34 최후 일격 24.06.22 12 0 11쪽
33 지하 던전 6층 24.06.19 12 0 13쪽
32 지하 던전 5층 (3) 24.06.17 1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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