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은 낭만을 싣고11
건국력 138년(서기 917년) 봄
발해, 초정약수터
“캬, 이게 탄산이지.”
지난날 재어놓은 포도청에 탄산수를 섞어마시니 탄산음료 부럽지 않았다.
“그게 그리 맛있습니까?”
“한 잔 마시겠나?”
왕건의 잔에도 꼴꼴꼴
보랏빛 액체를 단숨에 마신 왕건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바뀌는 장면은 꽤 재미졌다.
“하... 좋군요. 이거 어디서 안 팝니까?”
“은퇴하면 여기에 별장 짓고 살게.”
진짜 그것밖에 답이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탄산수를 인공적으로 제조 가능한 환경도 아니라서...
사실 제조 가능해도 그걸 마실 수 있는 사람은 부자밖에 없지 싶다. 우선 설탕 가격이 탄산 음료에 넣어 먹을 만큼 싸지는 않았고 탄산수 만든다고 해도 그거 포장할 방법도 없고...
“은퇴시켜주십니까?”
“장관에 총리는 해야 하지 않겠나?”
슬슬 재무장관 했다가 위로 올라가야지? 총리 노릇도 해먹어야지 않겠어? 너 칠순 잔치는 내가 열어주마.
“... 뭔가 굉장히 무서운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만.”
어허, 무슨 소리를. 내가 제일 아끼는 부하직원의 어... 기념일?을 챙겨주겠다는데. 무슨 섭한 소릴?
왕건의 원래 생애를 생각해보면 칠순 잔치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고 계셔도 괜찮습니까? 일이 많던데...”
“큰일은 얼추 마무리 지었지. 왕 열흘 없다고 나라 안 돌아가면 그게 이상한 거고.”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나? 회장이 열흘 비운다 해서 회사가 안 돌아가? 그건 아니거든. 진-짜 중요한 일이야 남겨놓겠지만 상식적으로 지금 이 시점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원래 사람에게는 적절한 휴가가 필요한 법이지.”
세상에 일만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딨어? 그런 사람이 등장하면 진짜 인간 시대의 끝이 도래했다고 봐도 된다.
아니지, 오히려 엄청난 혁명이 아닐까? 흠... 뭐가 되었건 내가 대상이 될 일은 없겠다.
건국력 138년(서기 917년) 봄
서울, 경복궁 국왕 집무실
“하아... 사람들은 정말 이게 좋다고 생각하는 걸까?”
“누구라도 선망하지 않을까요, 오라버니?”
“그건 왕 노릇 안 해봐서 그런다는데 내 손목이라도 걸 수 있어.”
이서민은 질린다는 듯 쌓인 서류의 산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휙휙 저었다.
“굉장히 불경한 말씀을 하시네요, 오라버니.”
“불경은... 아버지께서 늘 하시는 말씀인데.”
“아무튼, 어머니께서 기다리세요.”
이서민은 한숨을 푹푹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등학교는 다닐만하냐?”
“다닐만하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뭐, 성적이라던지? 아니면 애들도 컸으니 슬슬 너의 신분이라던지에 대해...?”
“훗, 저는 오라버니와 다르게 일등을 놓친 적이 없으니 안심하셔도 좋겠네요. 그리고 제 신분이라... 흐음, 그래봐야 저들이 뭘 할 수 있죠?”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당당한 열다섯 소녀의 모습에 이서민은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걸 느꼈다.
‘분명 예전엔 귀여웠던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재수가 없어졌지...?’
객관적으로 볼 때 이서민의 동생, 이다연은 분명 우수했다. 어머니의 모습이 비쳐 보이는 수려한 미인상에 성적도 우수하고 말도 잘 한다. 괜히 발해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제 잘난 거 알고 잘난 체하니까 너무 재수 없어...!’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다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그래서, 어떠셨나요? 짧은 왕 노릇은?”
“지금까지 뭘 들었냐?”
“고작 그것뿐인가요?”
이서민이 입을 다물며 복도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시간이 상당히 흐르고 복도를 벗어나고 나서야 이서민은 작게 중얼거리듯 답했다.
“... 아니.”
그래, 그건 분명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서민을 지배했던 건 바로 전능감이었다. 고작해야 왕태자 자리로는 느껴볼 수 없던 권력과 전능감. 발해 전체를 몇 장의 서류로 꿰뚫어 보고 수백, 수만의 생명을 손짓 하나에 지배할 수 있는 권능.
어릴 때 마셨던 아버지의 과실주를 흠뻑 들이킨 것 같았다. 지독히도 달콤했지만 한 번 취하면 빠져나오지 못하겠지. 살짝 혀만 담궜는데도 지금까지도 취기와 숙취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런가요.”
“왜, 욕심나?”
“그렇다고 하면, 양보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서민은 발걸음을 멈추고 다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칠흑같이 검은 눈, 자신의 그릇으로는 저 작은 아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평생 읽어내지 못할 그런 눈이었다.
들은 이야기로는 아버지께서는 영원불멸하시니 왕 노릇을 한다는 것 따위는 남매에게는 평생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성인 되면, 가져가라. 난 못 해 먹겠어.”
혹시 모르지, 미래에는 왕 비슷한 자리가 날지도. 그렇다면 왕위 계승 1순위라는 자리는 큰 도움이 되리라.
“그런 건 네가 어울려.”
욕심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한 번 더 발을 디뎠다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재수 없는 동생년이라면 그럴 일은 없겠지.
“양보해 줘서 고마워요.”
다연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또래의 남자애들을 모두 설레게 할, 그런 밝은 웃음이었지만 서민은 질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역시... 재수 없어.’
건국력 138년(서기 917년) 여름
서울, 경복궁 국왕 집무실
“왕태자 자리를 넘기고 싶다?”
“예, 폐하.”
“그것도 다연이한테? 다연이가 고작 열다섯이라는 건 알고 말하는 거지?”
“이 년만 있으면 성인이지요. 성인식 때 넘기고 싶습니다.”
서민이 녀석의 말에 내가 제일 먼저 의심한 건 둘이 싸운 게 아닐까...? 싶었는데 아무리 봐도 다퉜다기엔 사이가 묘하게 좋아 보였다.
그리고 바보 멍청이도 아니고 왕태자 자리는 그렇게 가볍게 다뤄질 자리도 아니기도 하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조금 경험한 것만으로도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물론 제가 왕위를 물려받을 일은 없다지만 발해가 커지면 커질수록 제가 감당해야 할 짐도 늘어나겠지요. 저로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남들은 죄다 하고 싶어하는 걸 우리 아들내미는 싫다고 때려치네. 하, 이걸 참.”
“... 죄송합니다.”
“그래, 하고 싶은 건 있고?”
“증기기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자세히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흥미로 가득 찬 서민이의 눈을 보자 나는 내가 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아들놈이 하고 싶다는 거 하게 해 줘야지. 집에서 배만 벅벅 긁는 것도 아니고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데 어떡해.
아마 지금까지 끌고 온 것도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 오히려 대견하다고 해야겠지. 고작 열여덟 살이니.
“그래, 고생 많았다. 아, 그래도 다연이 이야기는 들어보고 결정하마.”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근데 내가 아는 다연이라면...
“하고 싶어요.”
“아...”
“할래요.”
어... 그래. 정말 단호하구나. 얼굴은 유키코를 닮은 것 같은데 성격은 딴판이야. 근데 그럼 내 성격을 닮은 거야? 흠... 모르겠네.
“딸, 이거 쉬운 일 아니야.”
“알고 있답니다.”
“그런데도 한다고? 그걸 지금 그 나이에 결정해도 괜찮겠어?”
“오래도록 욕심내왔답니다. 그리고 저희 남매 중에서는 저 말고 누가 이 자리를 감당하겠나요?”
하이고... 그래, 자기들 하고 싶은 거 해야지.
“오늘부터 학교 끝나면 집무실로 오렴. 오늘부터 경험하면서 체험해 봐.”
“허락해주시는 건가요?”
“성인이 되었을 때 다연이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래.”
그래도 결정을 철회할 수 있는 시간은 줘야지. 물론, 다연이는 바뀌지 않겠다만 그런 시간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니까.
건국력 138년(서기 917년) 가을
옥해도(루손 섬), 총독부 관저
“총독 각하, 2함대 사령관께서 왔습니다.”
김경진 보좌관의 말에 총독의 얼굴이 확 펴졌다.
옥해도에 정착한지도 벌써 몇 년, 개척촌은 많이 확장되었고 식량 수급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나 그렇다고 눈에 띄는 업적은 없어 불안하던 차였다.
“반갑소, 총독 2함대 사령관 초원택이오.”
“오느라 고생 많으셨소. 우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소?”
본래 일개 함대의 사령관이 총독에게 할 말투는 아니었으나 옥해도는 잘 쳐줘도 한 개의 시만도 못한 규모다. 물론, 그 중요성은 고작 한 개의 시와 비교될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건 현재 옥해도 총독의 위치는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환대에 감사하오. 오면서 둘러봤는데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로군.”
“실로 그렇소. 옥해도는 아름다운 곳이지. 왜 옥해도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항상 느끼고는 한다오.”
차를 한 잔 비우고 나자 옥해도 총독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헌데... 사령관이 왔다는 건...”
“아, 안타깝게도 아직 본격적인 군사 행동을 명받지는 못하였소. 물론... 다소의 충돌이야 본관의 재량으로 대처할 수야 있겠지만...”
“그건... 좀 아쉬운 일이구려.”
초원택도 동감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으나 사실 2함대가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하기에는 여러 제약이 있었다.
첫째, 옥해도에서는 아직 풍족한 보급을 받을 수 없었다. 이제 육년이나 된 개척촌이 무슨 재주로 한 개 함대의 보급을 감당하겠는가.
둘째, 옥해도에서는 충분한 함대의 정비를 할 수 없었다. 간단히 접안 시설만 있을 뿐, 창정비를 비롯한 고급 정비를 할 수 있는 시설이 없었다.
셋째, 신형 함선을 인수하지 못했고 그 덕에 옥해도 근처의 해적, 및 해상세력과 모두 싸워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우선 본 함대는 옥해도와 대만도 사이의 수송로를 확실히 지키고 옥해도 개척지 인근의 해상 제해권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요. 그 이상은... 어렵겠구려.”
“으음...”
“그래도 본국에서 신형 함선이 나왔소. 새누리급이라는 함선인데... 기대해도 좋소. 아마 2함대에도 높은 우선권이 부여될 거요.”
“음... 그렇다면 구형 함선은”
“연안경비함으로 개조된다고 들었소. 기존 전투함에 포를 적재한다고 들었는데... 흠, 과연 몇 문이나 적재할지는 모르겠구려.”
“그렇다면 옥해도 연안 방위를 위해 연안경비함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시겠소? 우리 총독부에서는 옥해도의 정보를 다량 수집했소만 생각보다 만만치 않소. 각 세력의 규모는 커 봐야 한 개 도시 정도에 불과하지만 해군력은 강한 편이지. 우리에겐 자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해군력이 필요하오.”
총독의 호소에 초원택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과연 이게 2함대 제독의 재량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니면 본국과 상의해야 하는지 그 경계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현재 함대의 일부를 떼어주는 것은 어디까지 함대 사령관의 재량이다. 또한, 받은 연안경비함을 배치해 주는 것 역시 함대 사령관의 재량... 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총독이 말하는 투가... 별개의 연안경비함을 원하는 것으로 들린다.’
거기서부터는 함대사령관의 권한과 벗어나는 일, 상부에서는 현직 관료와 얽히는 장군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 작가의말
다연이가 이리 말할 수 있던 이유는 발해에서의 왕태자 자리는 별 의미가 없는 자리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에서도 언급이 되었듯 지영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는 걸 꿈꿀 수 없기에 오히려 관직이 막히는 자리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죠.
작중에서 왕태자가 국무총리를 하는 모습을 보신 적이 없을 겁니다. 사실 국무총리는 비상설직이고 최고의 관직이기 때문에 왕태자나 왕위 계승1순위에게 주어도 상관 없는 직책인데 말이죠.
독자 여러분, 모두 즐거운 추석 연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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