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은 낭만을 싣고8
건국력 135년(서기 914년) 가을
서울, 경복궁 국무회의실
“전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신이 발언해도 괜찮겠습니까?”
회의가 다 끝나고 발언 기회를 얻는 것이 이상했지만 나는 흔쾌히 고연후의 부탁을 승낙했다. 뭐, 할 말이 있으니 발언한다고 해도 괜찮지 않겠어?
“당은 저물었고 발해는 떠오르는 태양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영토도 드넓고 신민들은 모두 배불리 살아가고 있습니다. 헌데 그들을 이끄는 전하께선 어찌 아직도 스스로를 이리도 낮춘단 말씀이십니까? 부디 청컨대 황제의 자리에 올라 온누리를 빛내소서!!”
뭣?
“““황제의 자리에 올라 온누리를 빛내소서!!”””
어... 사실, 이 이야기가 몇 번 나오기는 했다. 우리가 중국을 먹은 것도 아닌데 왠 황제 타령이냐 할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
첫째, 발해의 덩치가 커진 것. 연해도, 북해도, 대만, 유구, 고구려, 필리핀 일부까지 흡수했다.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영토, 인구, 국력 무엇 하나 할 것 없이 통일 반도였던 시절보다 몇 배는 강해졌다고 볼 수 있었다.
둘째, 위신 문제. 이건 위의 근거와 엮이는 문제인데 발해는 다양한 영토를 점령했고 강한 국가였다. 그런데 그런 국가의 왕이 너무 낮춘다? 흠... 쉬이 말해 뽕이 안 찬다. 그리고 항복한 국가의 입장에서도 황제에게 항복한 것이 왕에게 항복한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셋째, 당나라 문제. 당나라에서 흘러들어온 유민들 문제도 있고 당나라가 망해가는 문제도 있었다. 즉, 당나라가 망해가니 당나라에서 온 유민들은 아예 발해가 황제국이 되기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고 이는 당에서 온 일부 관료 출신 이민자들도 동의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당나라의 위상이 좀 어지간하게 추락했나.
더는 단일 세력으로서 당나라 정부는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그만큼 강해진 것도 있지만 당나라가 약해졌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면...
‘고연후 이놈, 신분 상승을 노리고 있군’
간단한 이야기다. 왕국에 항복한 왕조? 기껏 대접받아봐야 실권 없는 공작에 불과했다. 물론, 고연후는 통합의 상징으로 등용을 했고(어케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뭔가 심정의 변화가 있었겠지) 고구려 왕족들에게도 벼슬길을 열어두기는 했지만 특혜란 딱히 없었다.
하지만 황제국에 항복한 왕조라면? 일단 허울이나마 ‘왕조’의 이름을 쓸 자격이 생길 수도 있다. 왕 밑에 왕이 있는 건 좀 이상한 일이지만 황제 밑에 왕이 있는 건 그닥 이상할 일도 없었으니까.
아까도 말했듯 허울이기는 하지만 ‘공작가’와 ‘왕가’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현재 발해의 특성상 고구려 왕가는 간도 안정화에 큰 공을 세웠다. 즉,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라도 승작을 할 수 있게 밑밥을 깔 형편 정도는 된다.
“무슨, 소리를. 이건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난 황제 할 마음이 없다. 아니, 우리 환상 작전하고 있다니까? 그런데 사방팔방에 어그로 튀게 무슨 황제냐고.
하지만 이들은 끈질겼다.
“황제가 되어주십쇼...!”
“싫다.”
거절한다면 그다음 날에
“황제...!”
“아, 좀.”
그러고도 거절당한다면
“이 쇠사슬이야말로 저희의 의지입니다! 받아들여 주시기 전까지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싯팔”
니들 무슨 시위하니? 왜 사슬로 몸을 감고 지랄이야...
하지만 계속 부딪히다 보면 꺾이는 법, 그리고 먼저 꺾이는 쪽은 내 쪽이었다.
“후... 알겠으니 적당히들 하시오.”
“그럼...!”
“본디 황제란 것은 봉신이 있어야 하는 법. 하지만 아국에는 우리에게 충성한 신하국이 없소. 우리에게 있는 땅은 모두 발해의 땅인데 신하국이 도대체 어디에 있소?”
고연후의 표정이 애매해졌지만, 왜 맞잖아? 고구려 왕가가 어디 있어? 니들은 공작 가문이잖아.
“하지만 발해의 위신과 신민들을 위해서라도 지나치게 낮추는 것은 좋지 않은 법. 존칭의 격하를 폐지하고 그 위엄과 공을 치하하기 위해 고씨 가문을 대공으로 승작시키겠소.”
사실 대공이라는 작위는 없지만, 특수성을 위한다면 하나 정도는 신설할 생각이 있었다. 대상은 우리에게 항복한 왕가들. 영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쨌건 면을 세워줬으니 괜찮겠지.
그렇게 나는 국왕 폐하가 되었다.
건국력 136년(서기 915년) 겨울
서울, 육군본부 부대훈련장
콰앙!!! 쾅!!!
포대에서 발포된 포탄은 노리기라도 한 듯, 한 지점을 맹렬하게 타격하고 있었다. 포병의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흩어지기 전에 또 포성이 울리고 이번에는 다연장포까지 불을 뿜으며 같은 점을 계속 타격하며 땅을 뒤집어놓았다.
“명중률이 많이 개선되었군.”
“그렇습니다, 장군. 공산오차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다연장포도 한 차례 개선이 되어서 그런지 조금 더 안정적입니다.”
“다만 기마포병대의 명중률은 조금 아쉬운데-”
견훤을 입맛을 다셨다. 기마포병대는 일단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일반 포병에 비해 훨씬 빠르게, 위치를 이동하면서 타격할 수 있고 보병이 급속 행군을 하더라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었다.
문제는 그 기동성이 명중률을 희생해서 얻어낸 결과라는 것이었다. 빠르게 이동해서 불안정한 상태에서 조준하고 발포하고 다시 벗어나야 하는 상황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전보다는 훌륭한 성과입니다. 기마포병의 명중률도 기존 포병 정도까진 끌어올렸으니 기마포병 특성상 문제 될 여지는 없습니다.”
“그거야 그렇지.”
사단의 화력 8할을 포병이 책임진다고는 하지만 견훤은 포병 훈련에만 전념하지는 않았다.
콰앙!!!
“맞으면 골로 간다! 엎드려!!!”
언젠가 적의 포격에 대비한 훈련도 실시했고 다행히 참호 덕에 발해군은 아군 포병에 으깨지는 일 없이 안전하게 훈련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끄아아악!! 다리가!!! 내 다리!!!”
“뜨, 뜨거워!!! 아아아악!!!”
배우들과 소품까지 준비해서 병사들이 실전에 조금이라도 익숙해지게 했다.
“오, 저건 진짜 불타는 건가?”
“사형수라는군요. 불타는 인간들은 사형수라고 보시면 됩니다.”
... 약간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어차피 사형수인데 괜찮다는 의견이 중론이었다.
“의무대, 움직여!!!”
“빨리!!! 여기 부목하고 들것!!”
“지혈해!!!”
그 후 부상자(배우)를 구출하는 의무대의 훈련과-
“끼얏호우!!! 돌격!! 돌격하라!!!!”
기병의 돌격까지. 이 정도면 어딜 내놔도 꿇리지 않는다고 견훤은 자부했다.
‘돈이야 조금 들지만···.’
견훤은 고개를 저었다. 친애하는 국왕 폐하께서 이르사 돈으로 사람 목숨을 살 수 있다면 나쁜 거래가 아니라 하였다.
“저격수의 명중률도 장난이 아닙니다. 적당히 훈련받은 사수들도 500m 밖에 있는 표적을 어렵잖게 맞추더군요.”
유금필 대령은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저격수에 대한 이런저런 물의가 많았던 건 사실이었는데 이렇게 훌륭히 자리를 잡아주니 기쁘기가 그지없었다. 가장 강력하게 저격수 창설을 부르짖은 보람이 있다 싶었다.
“훌륭하군, 중장.”
“감사합니다, 총사령관 각하.”
“이대로 보고를 올려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지켜본 김철은 견훤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고는 자리를 떴다.
추후 보고를 받은 지영은 짧게 평했다.
“신식 발해군의 뿌리를 아주 야무지게 박았군, 훌륭해.”
건국력 136년(서기 915년) 봄
남월, 꼬로아 성(현 하노이 인근)
발해가 이래저래 뿌리를 신명나게 박는 동안 남월도 애써 독립한 이래로 뿌리를 박으려 애썼다.
“끼에에에에엑-! 한나라가 쳐들어온다!!”
“끼에에에에엑-! 참파가 쳐들어온다!!”
참파나 한나라나 이제 갓 독립한 남월의 체급으로 견딜 국가는 아니었다. 한나라가 아무리 당나라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조각이라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거암도 지구의 작은 조각일 뿐, 거대한 국가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은 파편일지라도 거대하다는 걸 남월은 몸소 느끼고 있었다.
참파도 마찬가지. 애초에 체급 자체가 참파가 더 컸고 참파는 북방에 중국 같은 무서운 패권국을 두고 있지는 않아서 훨씬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 남월인이 포기를 했던가? 남월인의 투쟁은 초창기 어우락 왕국부터 시작해서 이들은 아직 모르겠지만 천조국과도 싸워 국가를 지켜낸 몇 안 되는 나라다.
“필요하다면 친정을 할 것이오!”
남월국왕 쿡하오 역시 언제나 갑옷과 무기를 가까이하고 언제든 전쟁에 끼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아아악-! 살려줘-!!!”
“뭐야, 이것들. 뭐 이리 약해?”
“좋아 중국놈들을 쓸어버리자!!”
다만 중국은 전체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던지라 제아무리 여러 우세를 점한 한나라라도 정글 너머로 영향력을 투사하는 건 어려웠다.
또한, 한나라 역시 남월과 같이 양면전선, 혹은 그 이상을 감당해야 하는 나라였던지라 이래저래 막아내고 오히려 부분적인 역습까지 가하며 몰아낼 정도였다.
“이 당나라 떨거지 놈들을 몰아내자, 만세-! 만세-!!”
“그래봐야 연합왕국 아니냐! 막아! 막으면 그만이야!!”
참파 역시 마찬가지. 강국인 것은 맞으나 연합왕국이라는 한계가 명확한 나라였다. 이들을 이끌어줄 카리스마 넘치는 군주가 있다면 무서워지지만(실제로 참파의 전성기 때는 베트남의 수도를 몇 번이고 털어먹었다.) 그렇지 않다면 충분히 막아낼 만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남월인들은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거... 할 만한데?”
“우리... 꽤 강했나?”
정작 본인들은 몰랐지만 남월은 꽤 강한 국가였다.
남월이 위치한 곳은 농업 생산성이 좋은 곳이었고 하나로 뭉친 국민은 곧 하나로 뭉친 군대가 되어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다.
또한, 남월의 역사는 중국, 참파와 맞선 투쟁의 역사였기에 약한 놈들은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기도 했고 발해와 교역을 하며 부족한 물자를 보충받을 수 있는 것도 컸다.
적어도 한나라가 멀쩡했다면, 혹은 참파가 하나로 묶여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랐겠지만, 다행스럽게도 한나라는 반쯤 깎아내리자면 거지 떼였고 참파는 내부 다툼의 폭탄을 안고 있는 상태였다.
“힘을 모으자! 저 당나라를 막고 참파에 역습을 가하자!”
“참파는 남월의 성장을 두려워합니까?”
남월인들은 축제 분위기에 빠졌다. 아, 독립하고 망할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잘 나가는 거지!
견훤이 만든 발해의 사단 편제입니다.
전투 대대의 편제까지 만들려면 만들 수 있지만... 그리 복잡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걍 대강 이런 식으로 굴러간다 보시면 됩니다.
이거 지도에도 사단 마크들이 배치되던데 나중에 써먹을 일이 있을지...
- 작가의말
와 정말 불타는 것 같아!(진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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