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은 낭만을 싣고
건국력 132년(서기 911년) 가을
당, 임유관
질랄부의 추장인 야율아보기는 임유관에 걸린 키탄의 깃발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오랑캐라 불리고 이리저리 치여살던 약소부족 키탄이 드디어 중원의 관문을 본격적으로 점령한 역사적인 순간이다.
‘운이 좋았다.’
분열되어 있다고 한들 임유관은 절대 쉬이 넘을 수 없는 벽이다.
하지만 임유관이 위치한 노룡절도사의 영역은 발해가 가장 극심하게 털어간 지역이었고 그 덕은 키탄이 톡톡히 누렸다.
보통 중원은 이민족을 분열시키고 견제했지만 그게 되지 않는다면 성벽에 의지해 지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전략이 가능한 것은 중원의 막대한 생산력과 경제력과 그에 비교되는 유목민족의 열악한 경제력과 생산력에 기인했다.
유목민의 전투력은 강하지만 유지력은 약해 견고한 성벽에서 버티고 있다면 결국 최후의 승리는 중원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명청 교체기였다. 누르하치는 살아생전에 산해관을 넘지 못했고 청이 산해관을 넘은 건 어디까지나 내부의 혼란 때문이었다.
문제는 지금의 노룡군에는 중원의 막대한 생산력과 경제력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일까.
성벽에서 눌러 지키면 뭐할 건가. 당장 내일 먹을 밥도 없을 텐데.
야율아보기는 상념에서 깨고는 군을 호령해 곧바로 진왕 이존욱의 영토로 진군을 시작했다.
“전군, 서둘러라! 겨울이 오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해야 하느니라!”
겨울이 된다면 전쟁은 어렵다. 안 그래도 어려운 판에 추가적인 방한장비를 준비해야 하고 곧 있을 파종을 대비해야 한다.
또한 작은 하천들은 모두 얼어버리며 땅 역시 얼기에 여러 군사작전에 애로사항이 꽃핀다.
‘무엇보다 우리가 겨울 이후까지 공세적인 작전을 하기엔 식량 사정이...’
이건 야율아보기의 설계였다. 가을부터 전쟁을 시작해 최대한 동원 가능한 인구를 미리 줄이고 보급이 아슬아슬해지는 겨울까지 최대한 많은 땅을 점령한 뒤 겨울동안 방어를 굳히고 간단한 통치체제라도 갖춘다는 계획이었다.
어차피 겨울에는 적들도 공격하기 힘들 테니.
건국력 132년(서기 911년) 겨울
일본, 쿄토 근교
“씨, 씨발... 이게 맞아?”
그 말에 누구도 호응하지는 않았지만 전장에 선 조총병들은 모두 공감한다는 듯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 해도 몇 만은 되어보일 정도로 엄청난 대군, 그런데 그걸 상대하는 건 조금 큰 소리가 나는 나무작대기를 든 우리라니!
뒤에 창을 든 병사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시이다 히토타카의 눈에는 그저 물러나면 등짝을 찔러버릴 독전대로밖에 안 보였다.
거기다 활과는 다르게 장전도 더럽게 느리지 않은가! 발해군 교관조차도 ‘일 분에 한 발 쏘는 걸로 전쟁이라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일 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전장에서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조용, 조용하라!”
스기와라노 가문의 연줄로 새로 신설된 조총부대의 대장인 뎃포다이죠라는 다소 성의 없지만 직관적인 직위에 오른 타이라 요시마사는 연신 병사들을 다독이고 다그쳤다.
관직명이 성의 없다고는 하나 나름 정7위상의 직위로 4위계에 장관급이 깔린 걸 보면 낮은 위치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능력도 있고 덕망도 있어 병사들은 차츰 조용해졌고 발해 군관이 칭하길 부사관들은 계속해서 돌아다니며 병사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 순간에도 좌군 선봉대끼리는 서로 격돌했다. 화궁의 날카로운 살은 서로를 매섭게 노렸고 말들은 투레질하며 몸에 힘을 쥐어짜 달리고 있었다.
“역시, 중앙에서 뚫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중앙에는 발해가 훈련시킨 뎃포가 있다. 이걸 무시하기엔 좀 그렇군.”
후지와라노 다다후미는 초조한 표정으로 손을 쥐었다 폈다. 한 눈에 봐도 좌군 선봉대끼리의 대결은 밀리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동북면은 이민족과의 전투가 잦으니 병사들과 장군도 그만큼 단련되어있는 모양이지.
“하지만 우리에겐 기병대가 있습니다!”
기병대.
일본의 말은 품종이 대부분 작았다. 그렇기에 서양, 아니 하다못해 동양의 충격기병에서 나오는 파괴력조차도 기대하기 힘들었고 그 덕에 대기병 전술은 발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지와라 가문은 중국과 가깝다는 점을 이용해 가까스로 중국과 초원에서 말 팔백여 마리를 구입할 수 있었고 이를 잘 불려 현재 천 삼백의 기병대를 편성한 상황이었다.
“저 뎃포가 강력한 무기라고는 하나 철갑을 두른 기병을 감히 이기겠습니까? 저들이 사격하기 전 뚫어버릴 수 있습니다!”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의 말은 다다후미에게 퍽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이미 좌군 선봉대 말고도 몇몇 부대가 더 부딪혔으나 하나같이 열세에 가까웠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경기병도 아닌 중기병을 그냥 들고 있는 것도 좀 뭐했다.
“좋아! 기병대를 맡기지! 그대로 중앙을 뚫어라! 바로 보조하겠다!”
한 번만 균열을 내면 그대로 물량으로 쓸어버릴 자신이 있던 다다후미는 호쾌하게 답했고 히데사토는 그 길로 기병대를 몰아 중앙으로 돌격했다.
“씨, 씨발. 뭔 놈의 땅이...”
진짜 충격기병이 오며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는 이전의 기병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거기에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저 철갑들 좀 보라지.
“대, 대장 나으리... 정말 뚫을 순 있소?”
“걱정 마라, 발해군의 갑옷도 뚫어버리는 물건이라지 않느냐.”
글쎄, 히토타카에겐 딱히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저 갑옷들도 발해철 듬뿍 써서 만든 물건 아닌가? 아마 저만한 기병대에게 주는 것이니 아낌없이 퍼부었을 텐데 과연?
“견착!”
“견착하라!!!”
“견착하랍신다!!!”
이제는 생각할 틈도 없었다. 화승의 불이 꺼지지 않게 조심히 끼우고 개머리판을 뺨에 댄 뒤 목표를 겨눈다.
땅이 울려서 그런지 아니면 두려워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총구가 벌벌 떨렸다.
“두려워 마라!!! 천하제일의 우리 동맹에게서 직접 훈련받고 덴노께서 친히 관직을 신설해 하사하실 만큼 강력한 무기니라!!”
어느새 히토타카의 눈에는 적 기병대의 표정과 얼굴이 어느 정도 읽히자 화약접시를 열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바들대는 손으로 겨우 화약접시를 열고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살짝 걸쳤다. 절대 사격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집어넣지 말라고 미친 듯 갈구던 발해 교관이 오늘만큼은 부처로 보였다. 어이없이 한 발을 쐈다가는 그대로 밀려 죽는 그림은 히토타카의 머릿속에도 환히 그려지는 듯 하였으니.
어느새 기병대의 표정이 읽히고 그가 하는 말이 선명하게 들린다. 이제는 흙먼지가 닿을락 말락 하고 어느새 눈동자의 색이 구분될 무렵
“발포하라!!!!”
타타타탕!!!!!
히히힝!!!
“아악!!”
“미. 밑에 사람. 억. 끄윽.”
“사, 살려줘!”
흑색화약의 연기가 걷히고 히토타카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아니, 모두의 눈에 충격적이었다.
그 강대한 기병대가 걸레짝이 되어 피와 비명을 토해내는 모습을 보라,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창병들의 굳건함과 조총병의 강력함을.
사실 조총 사격을 통해 직접적으로 적을 사살한 수는 생각 외로 적었다. 문제는 소음과 연기, 그리고 말에 맞는 총탄, 이 삼박자를 통해 말들은 놀라 날뛰고 기수를 떨어뜨리거나 창에다가 들이 박았다.
그리고 그렇게 돌격 중에 대열이 얽히니 뒷 열도 와르르 엉키고 넘어지고, 낙마한 기수들은 그 엉키고 넘어지는 말의 거대한 체구를 온 몸으로 느끼거나 발굽의 견고함을 느끼면서 허무하게 죽었다.
히토타카는 신명나게 화약을 총구에 붓고 가죽 조각에 싼 총탄을 망치로 쑤셔박으며 생각했다.
‘어라? 우리 좀 강할지도?’
건국력 132년(서기 911년) 겨울
서울, 육군본부
“솔직히 말씀드려 일본의 군사기술은 좋게 봐도 백 년은 더 뒤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동의합니다.”
육군 장성들의 생각은 전부 일치했다. 일본의 군사기술은 단순히 무기가 아니라 그냥 전술 자체가 너무 뒤떨어져 있다고.
“남월보다도 전술적 발전이 뒤떨어지는 게, 이게 맞습니까?”
적어도 남월은 계속 중원 왕조와 부딪히며 숲과 정글, 산악에서의 유격전의 명수들이었다. 전면전에서는 한 수 접어줄지는 몰라도 유격전에서는 발해군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로 훈련과 경험이 고루 갖춰진 군대였다.
하지만 일본은? 기초적인 제병협동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적 기병대가 중앙으로 치고 들어왔다가 돈좌되면 추가적인 조치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예를 든다면 조총 방진을 전방으로 진격시켜 기동력을 상실한 적 주력기병을 타격하고 적을 전체적으로 압박한다던지.
아니면 기병대를 보내서 도망가는 기병대를 추격해 적 기병대를 이끌어 내고 조총 방진과 연계해 잡아낸다던지.
“하다못해 주변 보병들은 뭘 했는지조차 의문입니다. 아니면 궁병이나요. 고문관이 보내온 지도에는 분명 근처에 보병대와 궁병대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굳이 산개해서 전투할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이오. 물론, 무작정 모인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겠지만...”
발해군 장성들이 바라본 일본군은 마치 대대나 중대 단위로 각자 싸우는 느낌?
“십만 대군이 있어도 대대 단위로 따로 놀면 그게 무슨 소용이랍니까?”
“이해야 갑니다. 저들이 언제 연대나 여단 단위의 편제로 전술적인 움직임을 해봤겠습니까? 일본에는 그렇게 군을 움직일만한 상대가 없는데요.”
섬나라의 강점이자 약점이었다. 맞상대할 육군이 없다는 것.
저 멀리 섬나라의 신사들이야 이리 끼고, 저리 끼고, 거리도 가깝고 하니 그나마 괜찮다지만 일본과 영국은 사정이 완전히 달랐으니.
“뭐, 우리의 친애하는 동맹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그게 아니었잖습니까. 중요한 건...”
“돈이 될 것이라는 것이죠.”
그의 말은 적중해 지영은 낄낄대며 웃었다.
어쨌건 조총은 대활약을 했고 이는 곧 새로운 수요로 이어질 것이니 말이다.
“좋군! 일본의 내전이 조금 장기화되도 얻을 것이 있지 않겠는가.”
“크흠, 그래도 우리의 맹방 아닙니까.”
“우리끼리 하는 소리지, 우리끼리.”
- 작가의말
빵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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