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나뉘다13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소! 이제는 당당한 키탄의 칸이거늘 왜 우리가 하는 일을 발해에 고해야 한단 말이오?”
혼란을 수습하고 키탄의 칸에 오른 야율아보기의 행보는 키탄 내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발해가 좋은 우방인 것은 맞다지만 이건 좀...”
이유야 ‘같이 당을 치자’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기야 했지만 실상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사람은 모두 알았다.
애초에 발해가 중원에 욕심이 있었다면 바로 치고 나왔을 터, 발해에게는 그럴만한 실력이 있었으니.
하지만 발해는 그 이후로 중원을 향한 군사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건축자재를 모아 방어선을 건설하는 데 집중할 뿐.
“형님, 일부 부족장의 동요가 심합니다.”
“...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형님, 저는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우리가 모을 수 있는 전사만도 칠에서 팔만 명입니다. 발해가 강성하다 한들 두려워할 정도는 아닌데 굳이 이렇게 하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키탄의 칸 야율아보기는 자신의 막내동생 야율소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무례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눈에는 호기심 많고 귀여운 막내동생일 뿐이었다. 미처 욕심을 버리지 못한 다른 형제들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우리의 목표가 중원이기 때문이다. 소, 네 말대로 우리는 강성하지만 그렇다고 중원에 들어가면서 발해까지 상대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들어가고 나서도 문제였다.
일회성 약탈이 아니라 들어가 어느 정도 통치를 하고 눌러앉기 위해서는 인력과 자본을 넣어야 했다.
같은 중원계끼리의 싸움이라면 현지의 인력을 사용하는데 큰 무리가 없겠으나 키탄의 사정에서 그 일은 있을 수 없는 노릇.
결국 소수의 이민족 지배층과 다수의 현지인 피지배층으로 나뉘게 되는데 항상 그렇듯 소수의 지배층은 상상 이상으로 귀중한 존재가 된다.
그렇다고 발해군이 노예병이나 징집병 좀 뽑아서 밀어붙인다고 밀릴 정도로 약하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닌지라.
이기든, 지든 키탄의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 결과적으로는 통치나 국가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리고 준비 없이 중원에 들어간 다른 부족들의 최후가 어떠했더냐.”
모두 동화되거나, 혹은 막대한 물량 앞에 결국엔 물러나고 쇠락했다.
“그 강성했던 선우들도 끝내 녹아 사라지지 아니했던가. 저 강성했던 토번도 끝내는 당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런데 자신이 거느린 키탄이라고 다를까? 팔 만의 정예 전사들은 분명 강력한 전력이지만 중원의 넓이에 비하면 그야말로 한줌이나 다름없다.
고작해야 이 정도 세력으로는 중원 내의 모든 적을 무찌르기란 곤란했다.
“그런 와중에 십 만의 병력을 너끈히 동원 가능한 발해와의 적대는 곤란하다. 추후 우리가 중원을 점령하더라도 굳이 발해와는 각을 세우지 않는 편이 좋다.”
저 망할 발해 지역을 쳐들어간 왕조들이 다 어떻게 되었던가. 심지어 그때는 남쪽에 협력자라도 있었지 지금은 온전한 한 개의 국가. 그리고 듣기로는 해외의 영토까지 있다고 하니 쳐들어가봐야 통치는 어렵고 국력만 쇠할 뿐이다.
“그리고 다른 부족장들은... 내가 잘 달래보마.”
“우리가 거절할 것을 알고 보낸 특사입니다. 지금의 관계를 해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넌지시 건넨 것이지요.”
“내 생각 또한 같다. 키탄이라면 국경에서 일어나는 일 정도는 알 터.”
“그 말씀대로입니다. 그냥 연회나 열고 좋은 말로 거절하시면 그만일 듯 합니다. 약간의 선물 정도는 챙겨주면 더 좋겠군요.”
음음, 그렇지. 애초에 답을 받는 게 목적이 아니니만큼 우리도 그냥 우호적이라는 액션만 취해주면 그만이다.
“그럼 그렇게 하시오. 아, 그리고 대만도 이제 자체적인 곡물을 생산하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예, 이제 적게나마 잉여 식량이 남는다 합니다. 필리핀 개척에 큰 도움이 되겠군요.”
“확실히, 수송비를 절약할 수 있겠군.”
역시 이기작이 짱이긴 하다. 그리고 대만에서는 자포니카 품종의 벼를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아마 남쪽의 영토를 유지하는데도 도움이 되겠지.
원래 사람이라는 건 미세한 환경의 변화에도 크게 영향을 받으니까. 물갈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대만의 인구도 많이 늘었습니다. 호적에 등록된 것이 이제 십만여 명에 달합니다.”
“보고된 문제는? 이제 인구가 십만이면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을 텐데?”
북해도의 경우에는 그 문제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문명화된 지역이랑 거리가 좀 멀기도 했고 환경 특성상 식량이 부족했고 생활이 힘들었으며 무엇보다 몇십 년이라는 시간동안 꾸준하게 동화시켰으니까.
“음, 아무래도 기존 원주민들과 마찰이 좀 있답니다. 일부는 우호적이고 복속되었지만 일부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더운 지역에서 논농사를 짓다보니 문제가...”
문제? 문제될 게 있나?
“그... 벌레가 좀 많답니다.”
아, 벌레. 그렇네. 논농사라고 하지만 결국엔 고인 물을 계속 유지하는 거니까. 거기에 날씨까지 오죽 더우니...
어? 잠깐만, 그럼 필리핀은 어떡함?
이거 모기 한 번 잘못 돌면 그냥 몇천 명씩 몰살 당하는 거 아냐?
“그런데 그 뭐냐, 논에 미꾸라지나 오리 같은 동물을 기르면 되는 거 아닌가? 이미 반도에서는 하고 있잖나. 내가 농사지을 때도 미꾸라지를 키웠는데?”
“그것도 잘 관리하고 키워야 말이죠. 반도의 논농사는 사실 우리가 처음 한 것이 아니니만큼 이미 기틀이 있고 거기에 살을 더하고 약간씩 고쳐갈 수 있었다지만 대만이나 혹은 필리핀은 처음 아닙니까? 이미 대만에서만 수십 곳에서 실패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음...”
“실패하면 다시 한 번 하면 되지 않느냐, 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셔도... 한 번 실패하면 정말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솟구쳐 나옵니다. 해충이 원래보다 배는 번식하는 건 그나마 예상 가능할 정도로 말이지요. 농업과학연구소에서 이래저래 연구를 하며 정보를 하고는 있습니다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 이런, 젠장.
“방법은 없나? 대책을 마련하라고 항상 예산과 인력을 빵빵하게 주는 것 아닌가.”
“결국 시간만이 답입니다, 전하. 해당 지역의 기후와 식생에 맞는, 체계적인 관리방법을 만들어내고 이를 배포해 모두가 따르게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으음... 어쩔 수 없군. 정 안 되면 논의 일부를 밭으로 바꿔도 괜찮아. 쌀 좀 더 얻겠답시고 위험 요소를 계속 키울 순 없지.”
이렇게 하면 수확량은 줄겠지만 들어가는 노동력과 해충의 숫자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려나? 단순 계산상으로 보면 맞기는 한데 현장을 가보지는 않았으니 이거 원.
“아무튼, 대만도 총독에게는 말을 잘 해놓게. 생산량이 줄어도 좋으니 해충이나 그로 인한 질병에 각별히 유의하라고. 현재로서는 대만도에 모든 지원을 할 수가 없어. 큰 일을 애초에 안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고, 알겠나?”
“알겠습니다.”
“이 사안은 특별히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직통으로 보고하도록. 계속 유의해야 할 사안이니. 그리고 이에 발맞춰야 할 북방 요새선 건설은 어찌 되어가고 있나?”
“이미 첫 삽을 떴습니다. 그간 실험한 자료들을 가지고 건설에 착수하고 있으며 기존의 요새선을 최대한 활용한 종심방어 체계를 갖추고자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영역을 요동 일대까지 확장했기 때문에 방어선 건설에는 문제는 없을 듯 합니다만...”
아니, 문제 없다면서 말은 왜 늘이는데.
“이런 식으로 방어선을 짜게 된다면 간도 개발 계획과 상충하게 됩니다. 특히나 서간도의 곡창지대로 삼으려는 계획과 정면 충돌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혹시 키탄의 중원 진출을 약간 돕고 그 댓가로 기존의 키탄이 점유하던 지역을 일부 받아와 방어선 건설에 사용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성사된다면 곡창지대로 예상된 지역의 피해를 확실히 줄일 수 있겠습니다.”
“총리님, 잠깐. 이미 우리의 국시는 남진으로 정해진 것 아닙니까?”
“대전략이야 그렇지만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전술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결국 그 남진이라는 것도 북수가 받쳐줘야 가능하고 서간도의 곡창이 개간된다면 분명 큰 효과를 볼 것 아닙니까?”
“그러니 결국 총리의 의견은 요서 지방까지 확보하자는 것이군.”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입니다. 키탄을 계속 우호적으로 두는 이상 요동의 생산력에 이상이 생길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종심방어를 한다고 해서 개별 요새의 방어력이 뒤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기존 요새보다 강한 방어력을 보여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요서지방을 얻으면 확실히 방어에 이점이 생기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여차하면 즉시 장성을 압박할 수 있는 효과도 있지. 이건 일단은 선택지 중 하나로 남겨야겠네.
“일단 그 부분은 외교부에서 한 번 논의해 보게. 그 외 특이사항은?”
“포가 많이 필요합니다. 충분한 화력이 없다면 이번에 새로 건설하는 성형요새는 그저 낮은 성벽을 가진 좀 까다로운 요새에 불과해집니다. 사단에 포를 배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요새선에도 포가 충분히 배치되지 않는다면 곤란합니다.”
오... 대포... 재무부 장관의 얼굴이 아주 볼만하구만.
“부산조병창에 잘 말해 놓지. 그리고 재무부와 방위성 내에서도 잘 조율하도록. 그리고 주일 군사고문단은?”
“교육은 잘 진행되고 있답니다. 다행히 일본에서도 나름 검증된 인력을 내줬는지 훈련이 수월하다는군요. 다만 좀 이상한 점이 있다면 훈련병이 육천여 명인데 조총을 육천 정만 사갔다는 겁니다.”
“...?”
“그런 표정으로 보셔도...”
“아니, 적어도 육천 명의 소총수를 무장시키려면 최소 만 정은 필요할 텐데?”
육천 정은 보급하고 천 정은 훈련용, 삼천 정은 예비 물자로 두는 것이 최소한이다. 우리 발해는 아예 육천 정은 보급, 육천 정은 훈련, 육천 정은 수리 및 교체소요를 위한 물자로 두는 이른바 삼각 체제를 도입했다.
그런데 조총은 우리의 소총보다 신뢰성이 낮다. 특히나 화약을 계량해두지 않고 소총수의 감에 맡기기 때문에 고장이 더욱 잦지. 예비군 훈련을 안 한다고는 해도 아까 말했듯 만 정 정도는 도입해야 여유롭게 굴러갈 텐데?
“이 일로 괜히 조총을 물고 늘어지지는 않겠지.”
“그건 아닐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초기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딱히 좋지는 않겠군요.”
“우선 현지 고문단에게 맡기지.”
현지에 있는 건 이들이니 아마 이들이 현장 상황에 맞게 움직여 주겠지. 제발 추가 매출을 올려다오...!
- 작가의말
아열대, 열대 지방의 벌레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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