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은 낭만을 싣고7
건국력 135년(서기 914년) 봄
여수, 왕립 항해학교
“국왕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들뜬 마음에 떠들던 학생들은 일제히 입을 다문 채 일어나 정면을 응시했다.
다름 아닌 그 왕립 항해학교다. 발해가 열성적으로 추진하고, 기대하고 있는 학교.
교육받는 것만으로도 특혜였는데 그 장소가 국왕과 국가가 기대하고 있는 학교라니! 이만한 명예도 또 없지 않은가.
“오랜 기간 발해에 헌신한 교수들, 학교를 건설하고 관리한 관료와 고용인들, 그리고 발해의 미래에 새로운 싹을 틔울 항해사들을 무려 이백오십 명이나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그대들은 모두 발해에 헌신하기 위해 여기에 왔겠지? 물론, 그러리라 믿소. 모두가 다른 꿈을 꾸더라도 발해의 번영과 평화라는 꿈은 나를 포함한 모든 발해 신민의 가슴속에 있으니.
우리 발해에게 항해란 매우 중요한 것이오. 바다란 단순한 물길이 아닌 우리의 경제와 안보를 책임지고 국토를 연결하는 축이며 그 속에 장대한 발해의 미래마저 품고 있는 까닭이오.
그렇기에 우리는 발해 본토와 북해도, 일본, 대만도, 옥해도를 이어주는 바다를 반드시 우리들의 바다로 삼아야 하며 이는 곧 발해의 영광과 신민들의 안위를 보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사항이오.”
국왕께서는 숨을 들이쉬며 우리 모두의 얼굴을 기억하는 듯 천천히 좌에서 우로, 우리를 훑었다. 고요한, 그렇기에 자그마한 국왕 전하의 숨소리만이 우리 귀에 꽂혔고 우리는 그저 묵묵히 국왕 전하만을 바라볼 뿐이다.
“나는 이곳에서 우리들의 바다를 쟁취하는 길이 낭만만이 가득 차 있다고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소. 물론 나와 정부, 그리고 이곳의 교수진들은 그대들에게 최고의 교육과 지원을 약속하겠지만, 바다란 그 누구도 종잡을 수 없는 것이오.
여기, 방금 내가 눈을 마주친 발해의 자랑스러운 항해사 중 누구는 풍랑으로 그 유해조차 찾지 못할 것이오. 또, 누군가는 우리들의 바다를 노리는 적들과 싸우다 전사하겠지. 그도 아니라면 선박 위에서 질병으로 숨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죽음이란 언제, 어떠한 형태로 그대들에게 찾아갈지 누구도 알 수 없고 이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래, 당연한 일이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길을 걸어야만 하오. 누군가는 묻겠지, 그토록 고통스러운 길을 도대체 왜 걸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그 질문에 나는 이리 답하겠소. 우리들의 선조가, 고통을 무릅쓰고 발해의 산과 들, 바다를 개척했기에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이리 평화를 누릴 수 있었노라고.”
전하께선 그리 말씀하시며 더운지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셔츠의 단추를 약간 풀었다. 비록 많은 것을 볼 수 없었지만 두 개는 명확히 보였다. 지금껏 발해의 신민들을 지켜온 단단한 옥체와 그 위의 상처가 여실히 빛났다.
“그리고 이제야 그대들의 차례가 온 것이오. 오랜 전란 이후 피폐했던 발해를 지금 여기까지 이끌어 온 선조들이 남긴 선물을 누렸으니 이제 우리가 후손들을 위한 선물을 만들 차례지.
이러한 중요한 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그대들의 출신과 과거는 이제 중요치 않소. 왜냐하면 모든 발해의 농부가 그대들의 식사를 책임지고, 관료들이 그대들이 삶을 영위하는 것을 도울 것이며, 군인은 그대들이 당당한 항해사의 일원이 되기 전까지 굳게 지킬 것이기 때문이오.
기술자들은 모든 손재주를 짜내 그대들에게 최고의 병기만을 선사할 것이며, 기업가들은 그대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최대한 구해줄 것이고, 연구원과 의사들은 모든 지혜를 짜내서 그대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건강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이오.
그러니, 보라! 내가 언급한 이들이 발해의 일원이라고 아니 할 수 있는지! 아니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발해의 신민들임이 틀림없다!! 그들이 이토록 그대들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는 까닭은 바로 그대들이 발해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발해를 대표한 항해사들이기에! 그대들이 우리 천만 발해 신민의 꿈과 희망, 번영과 평화를 짊어진 이들이기에!! 지금 이곳에 중요한 것이 단 두 개 있다면, 그대들이 바로 발해이며 발해의 모든 신민은 이제 그대들이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대들이 나와 같은 발해의 혼이 격렬히 타오름을 의심하지 않소! 그야, 우리는 발해를 대표하는 이들이기에! 우린 모두 같은 마음이며 같은 꿈을 꾸고, 같은 목표를 향해 정진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행하지 않는다면 죽음보다 더 두려운 상황에 직면한다는 것은 과거를 돌이켜 볼 때,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명확한 사실이고 나와 그대들에게는 이제 단 하나의 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니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 서로 의지하며 증명하라!!! 바로 우리가, 나와 그대들이 발해임을!!!!”
국왕 전하께선 주먹을 크게 휘두르며 연설을 마쳤고 우리는 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국왕 전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저 국왕 전하의 숨소리만이 강당을 채울 때,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우리는 결연히 일어섰다.
“““행복과 평화가 깃드는 발해여, 우리의 조국이여~♬”””
그래, 우리의 조국이다. 우리가 나고 자란 곳,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자고 나랄 곳, 발해.
“““우리가 형제애로 하나 되면 신민의 적들을 무찌르리라-”””
오른쪽과 왼쪽, 심지어는 뒤에도. 어딜 봐도 믿음직스러운, 굳건한 눈빛을 하는 또 다른 발해의 자랑스러운 아들들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의 눈앞에, 발해 그 자체인 분이 보인다. 이들과 함께라면, 한마음으로 움직인다면 못할 것은 없다.
“““더는 어머니가 아들로 인해 곡하는 일이 없도록, 아들로 인해 곡하는 일이 없도록.”””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의무를 짊어지리라. 우리의 선조가 그러했듯, 우리도 우리의 후손에게 평화를 선물할 것이다. 무슨 일을 해서라도, 절대로.
건국력 135년(서기 914년) 봄
서울, 경복궁 국왕 집무실
“... 되게 오랜만에 등장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우스갯소리도 잘 하는군, 비서실장. 당장 어제도 출근했잖나.”
항해학교에서 하얗게 불태운 나는 축 늘어져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술을 마셨겠지만 지금 술을 마시면 진짜 퍼져버릴 것 같아서.
“뭐, 그렇지요. 아무튼, 소식 들으셨습니까? 당나라 상황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거, 유쾌하기도 하지. 그래서 뭔가?”
“야율아보기의 공세가 막혔답니다.”
“푸흡-!!!”
뭐뭐, 뭣? 뭐가 막혀?
“아니, 왜? 어째서?”
“큼, 전하. 저는 물론 전하를 존경하고 충성을 다하지만, 전하의 입안에서 숙성된 녹차의 기운을 느끼고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가? 빨리, 빨리 말해 보게!”
“상세한 정보는 아직입니다만 야율아보기의 군대가 진왕 이존욱의 군대에게 격파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실제로 목격한 사람도 많고요. 일부 호사가들은 키탄의 군세가 궤멸했다고까지 합니다만... 글쎄, 비경국에서 보고받은 사항에 따르면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다만, 적은 타격은 아닌 건 맞습니다.”
“아, 아아...”
내 초석 광산의 꿈이... 내 초석 광산의 꿈이...!!
이건 말도 안 돼! 시발, 야율아보기라고? 요나라 태조라고? 원역에서 거란의 영웅이던 바로 그 야율아보기잖아!! 지금 당나라는 약해져 있고 나뉘어 있는데 져버리면 어쩌자고! 아직 한창 싸울 때란 말이야!!
“우리가 양념이란 양념은 다 쳤는데, 이런...”
지금의 거란이 원역 수준의 힘을 내기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원역 발해처럼 간도 지방을 쉬이 내줄 상황도 아니고 의도치 않은 기근 탓에 모두가 약해졌다.
그래도 초장부터 막힐 줄은 몰랐는데.
“아니, 아니야... 망한 건 망한 거고 다음을 기약해야지. 차라리 환상 작전에 이용해 먹도록 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림도 참 예쁘잖나. 무너지는 중화, 그런 중화의 적을 무찌른 불패의 충신, 진왕 이존욱이라!”
“좋은 생각이십니다, 마침 이존욱과 주전충의 사이도 영 좋지 않으니 효과는 배가되겠군요.”
그렇지, 그렇지. 분명 당 황실에도 적잖은 타격이 갈 거다. 기왕이면 이존욱이 완전히 떨치고 일어나면 좋겠다만... 글쎄? 나라면 그렇게 안 한다. 양면전선이라니, 너무 싫은데.
“비경국에 전해주게. 아니, 그 친구들이라면 이미 계획 다 세워서 보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군.”
“예, 전하.”
건국력 135년(서기 914년) 가을
당, 장안 황궁
“이게 무슨 말이야! 이존욱 그놈이 뭘 어째?”
주전충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존욱 그놈이 충신이라고? 그럴 리가!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답니다, 장군.”
“이걸 그냥 가만히 두었단 말인가? 초기에 어떻게든 막았어야지!”
주전충의 의견은 분명 타당했다. 소문이 쫙 퍼지면 대응할 수단이 마땅치 않아진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눌러 없애든, 아니면 물을 타서 잘못된 정보가 퍼지게 하는 편이 훨씬 좋은 방법이었다.
물론 이 방법이야 소문이 퍼지고 나서도 가능한 방법이긴 하지만...
‘황실의 상황이 영 좋지 않은데 하필...!’
당나라의 상황은 영 좋지가 못했고 소문이 새로 퍼지려면 최소 몇 달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 몇 달 사이에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그게... 그리 할 수가 없었습니다.”
“뭐?”
“천하에 이름깨나 알린다는 이들이 떠들고 다니는 걸 막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분명 상황이 어려워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 특유의 인맥 네트워크가 깨지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알쏭달쏭한 전족과는 다르게 중화와 그를 지켜낸 충신이라는 주제는 그들로 하여금 신명나게 붓을 놀리게 하긴 충분했다.
“끄응...”
주전충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문제는 단순히 황실과 당의 어려움만 불러오는 게 아니었다. 위의 두 문제가 단순하다고 표현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게 본인의 안위 앞에서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가?
‘폐하께서 나를 버리고 이존욱을 등용하면 상황은 완전히 반전된다.’
장안 일대와 진왕의 영역까지 통합할 수 있고 이존욱은 어쨌건 북방의 군대를 막아내며 최소한 난세에 필요한 능력이 있음을 분명히 증명했다.
또한, 충신이라는 이미지까지 나와버리니 환관 학살 사건으로 영 평판이 애매한 주전충보다는 훨씬 평판적으로 이득이었다. 항상 황제를 욕하기보단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황제의 눈을 가린 간신’을 욕하는 대중들에게는 이번 숙청은 부당하게 공신을 숙청한 것이 아니라 간신을 때려잡고 충신을 등용하며 백성을 위하는 황제로 보일 가능성이 컸다.
‘썩을... 잡히기만 해봐라! 온몸의 살점을 한 점 한 점 저며줄 테니!’
주전충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맹세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맹세가 닿기엔 지영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건국력 135년(서기 914년) 가을
인천, 왕립 인천 조선소
배를 잘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역설적이게도 배를 많이 망가뜨려 보는 것이었다. 만들고 운용하고, 부숴먹는 과정에서 경험은 필연적으로 쌓였고 이런 경험이 곧 항해력의 강화로 이어지는 법이니.
실제로 영국이 대양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북해의 험한 바다에서 부수고 잃어버리고 하다 보니 발달한 것 아니던가.
“호, 이번엔 기대해봐도 좋은 겁니까?”
왕건은 멋들어지게 뽑힌 배를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두 개의 주 돛대와 하나의 보조 돛대가 위풍 당당히 흰색 돛들과 고고하게 있었고 몸체는 견고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띄고 있었다.
“그럼, 물론이지요! 지금까지 경험과 자료를 모두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개조만 거치면 전투함과 수송함을 오갈 수 있게 만들었지요. 처음부터 특화된 배보다는 살짝 못할 수 있지만, 유지보수 면에서는 탁월할 겁니다.”
그 말에 왕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엄청 좋고 비싼 배를 만들어서 몇 척 못 뽑느니 이렇게 준수한 함선을 많이 찍어내는 것이 나았다.
‘어차피 배에 대포를 적재한 시점부터 우리의 해상 우위는 반쯤 확실해진다.’
“이미 대포 발포 시험은 끝났습니다. 이제 제대로 항해할 수 있느냐가 문제겠지요.”
“좋군요.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시지요.”
“항상 넉넉한 지원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많이도 부쉈으니 이제는 결과로 증명하겠습니다.”
- 작가의말
전 범선을 참 좋아합니다. 멋있잖아요.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