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의 제안.
1.
교관의 말도 있고, 어차피 트리플 검술의 수련은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그늘 속에서 나무에 기댄 체 마나 호흡법을 수련했다.
남들이 보기엔 늘어지게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한가한 시간이 많이 생긴 것은 나에게 호재라고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숙소에서는 동기들이 너무 많기에 호흡법을 제대로 수련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니까.
스읍, 하아.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그러면서 공기중의 마나를 빨아들이고, 그걸 몸속, 아랫배의 마나 홀(Mana Hole)에 담는다.
다른 마나 호흡법은 자연의 마나를 몸속에 담아 자신의 힘으로 바꾸는 작업을 한 번 더 해야한다.
마나 호흡법을 창시했다고 알려진 트리플 검황의 트리플 호흡법에서 파생된 작업이다.
하지만 스승님께 배운 마나 호흡법은 그런 일련의 작업이 필요 없었다.
내가 스승님께 익힌 마나 호흡법의 이름은 네츄럴 마나 연공법.
말 그대로 자연의 마력을 그대로 몸속에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등급은 ★★★★★.
즉 별 다섯개, 지옥의 마법이라 할 수 있는 헬 파이어와 동급인 최상위 호흡법이었다.
어느정도 마나를 받아들인 나는 마나 홀속에 소용돌이치는 마력을 전신의 마나 로드(Mana Road)를 경유해 회전시켰다.
온 몸을 한 바퀴 휘감은 마나 로드가 이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연결된 두 개의 거대한 마나 로드, 즉 트윈 마나 로드(Twin Mana Road : 任督兩脈)에 부딪혔다.
정신을 집중했다.
꽝!
체내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마나가 트윈 마나로드를 뚫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다.
'역시 생각처럼 쉽게는 안되는건가? 그래도 이전보다는 좀 나아진거 같기도 하고....'
현재 내 경지는 오러 나이트(Aura Kight) 하급.
소드 익스퍼트보다는 높지만 소드 마스터보다는 낮은 등급이다.
트윈 마나 로드는 원래 인간이라면 뚫려 있지 않는 길이다.
스승님의 말에 의하면 이 두 개의 마나 로드를 개통하면 지금까지보다 10배는 많은 마나를 보유할 수 있고, 보다 마나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고 했다.
즉, 이 트윈 마나 로드를 개통하면 소드 마스터(Swrod Master)의 길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뭐 생각처럼 쉽게 될 거라곤 생각 안했지. 일단 천천히 풀어나가보자.'
아직 내 나이 15살.
역사상 최연소 소드 마스터도 20대 중반이었으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지금 경지만 하더라도 말도 안되는 경지였으니까 말이다.
"훈련 종료! 힘든 훈련을 잘 마쳤다! 저녁 식사 맛있게들 하고, 푹 쉬도록!"
크게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눈을 떴다.
그러고보니 슬슬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훈련병들이 기진맥진해 바닥에서 헉헉 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벌써 끝났나? 생각보다 오래 집중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간단히 풀고는, 식당으로 향하는 훈련병들 무리에 끼어들었다.
왠지 모르게 원망어린 시선을 보내는 훈련병들.
뭐, 이해는 갔다.
자기들 뼈빠지게 훈련하고 있는데, 나는 그늘에 늘어져서 쉬고 있었으니까.
사실 나도 할 말이 많았다.
교관이 쉬라고 하는데 훈련병 따위인 내가 뭐라 말 할 것인가.
동기들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무시하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판을 받고 배급을 받는다.
오늘 저녁은... 찐 감자 두 덩이, 빵 두 조각, 스프인가.
푸짐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어디에 앉을까... 음, 저 자리가 좋겠군.'
왁자지껄한 식당 내부에 마침 아는 사람들이 보였다.
바로 숙소 동기들이었다.
아무래도 훈련소 내에서는 같은 생활관을 쓰는 사람들, 혹은 고향에서 온 사람들끼리 앉는 법이다.
빈 자리에 가서 앉으려는 순간이다.
"어이."
정면에 앉은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다.
바로 베어였다.
"뭐지?"
"꺼져."
"...?"
나는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다짜고짜 뭔 개소리야?"
저쪽에서 말을 험하게 하니, 나도 곱게 받아줄 마음은 없었다.
베어가 입술을 비죽 움직였다.
"남들 다 고생하는데 혼자 쉬다온 놈이 밥은 잘 넘어가나보군. 네놈 낯짝 보고 싶지 않으니까, 저리 꺼져."
뭐야, 이 소리인가.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쉬고 싶어서 쉰게 아니고, 총교관이 쉬라고 한건데 뭐 어쩌란거야?"
"흥, 어디 뇌물이라도 찔러준거 아니야? 신병 훈련소에서 신병 열외라니, 내 기억에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심각한 부상을 입은 놈을 제외하고 말이야."
그러고보니 이 녀석은 원래 용병출신이라고 했던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기분이 불쾌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건 이해하마.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훈련은 지금 내게 딱히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필요 없다고?"
베어가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감이 대단한 놈이군. 몸도 꽤 좋아보이고, 어디 시골에서 방귀깨나 뀌고 온 모양인데, 전장을 우습게 보지 않는게 좋아."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베어란 놈이 전장에서 몇 년을 굴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전생의 나보다는 적어도 덜 굴렀을 것이다.
나는 실력은 없었지만 백번도 넘는 전투에서 살아남았다.
기사도 아니고 잡졸인 내가 그정도 생존율을 보유한건 가히 기적이나 다름 없었다.
때문에 나는 백전노장들을 제외하곤 누구보다 전장 경험이 많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됐다. 너, 그리고 동기들이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앉을 자리를 같은 훈련병에게 지적받을 만큼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밥이나 먹자."
나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그렇네, 이보게 베어, 같은 동기끼리 싸우지 말고 잘 지내보게. 어찌보면 다 불쌍한 처지들 아닌가."
베어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노인이 점잖게 중재하려들었다.
"흥."
베어가 아니꼽다는 듯이 콧방귀를 꼈다.
2.
별 다른 일 없이 하루가 지났다.
다음 날에는 트리플 창술의 훈련이었다.
훈련이 시작되고 나서, 총교관인 잭이 단상 옆으로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에게 한 가지 물어볼게 있네."
"물어 볼 것이라면?"
"일단... 어제도 말했다시피 자네 훈련을 열외시키려고 하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보고싶은게 있네."
잭이 나에게 목봉을 하나 내밀었다.
"트리플 창술도 알고 있겠지? 한 번 보여줄 수 있나?"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귀찮게 하는군.
하지만 총교관의 명령이다.
군인이라면 어지간한 일이라면 무조건 상관의 말에 복종해야하는법.
나는 목봉을 들고 트리플 창술의 간단한 세 가지 동작을 모두 보여주었다.
슉, 슈슉, 쉭!
"오...."
주변의 조교들이 탄성을 토했다.
잭은 눈을 번쩍 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근처의 조교들에게 말했다.
"어떤가? 이정도면 열외 시켜도 되지 않겠나?"
"맞습니다, 총 교관님."
"아론 훈련병이라고 했나요? 저 자의 창술은 정말 깔끔하군요. 왜 어제 검술 훈련때, 저희들은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잭이 어깨를 으쓱이는게 보였다.
아마도 내 실력을 유일하게 알아봤다는 자부심같은 것이었으리라.
"흠흠, 하여간 이 친구의 훈련 열외에 대해 자네들도 불만 없는 것으로 알겠네. 그러면 난 이 친구와 잠깐 할 이야기가 있으니 신병들의 훈련을 계속 도와주러 가보게."
"옛."
조교들을 물린 잭이 내게 손짓을 했다.
나는 그를 따라 단상의 뒤로 향했다.
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
잭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주게. 자네의 트리플 검술과 창술의 숙련도는 몇인가?"
음. 이건 솔직하게 말하면 귀찮아질지도 모른다.
약간 낮춰서 말해볼까.
"8입니다."
"파, 팔이라고?"
잭의 눈이 커졌다.
뭐, 당연한 일이다.
숙련도 레벨 8.
정말 십수년을 트리플 검술과 창술에 바쳐야만 얻을 수 있는 레벨이니까.
"어쩐지... 대단하다 싶더니!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숙련도를 얻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군! 그게 재능인가? 하여간 대단해. 사실 말하자면 어제 자네의 검술을 보고 나는 순간 '깨달음'의 경지를 경험했다네."
"깨달음말입니까?"
아, 어제 그 묘한 상태가 바로 그것이었나보군.
깨달음이란 높은 숙련도를 가진 스킬이, 다음 레벨로 향할때 겪는 황홀경 비슷한 감각이다.
라고, 나는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통 깨달음은 7,8,9레벨 에서 다음 레벨로 향할쯤에 겪게 되는데,
나는 어떤 스킬을 익혀도 레벨이 9다.
그리고 레벨 10은 거의 그 스킬에 평생을 매달린 명인들이나 지닐 수 있는 레벨.
아직 나는 10레벨에 달성한 기술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런 경험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음, 어제 말을 건넨것은 내가 좀 실수한 부분이었군.'
"죄송합니다."
그리 생각하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무인에게 있어서 스킬 숙련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닐세, 괘념치 말게. 그래도 숙련도가 0.1이나 상승했으니, 몇 달, 혹은 몇 년의 시간을 단축시킨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사실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는 한 가지 제안을 할 게 있어서 그렇네."
"제안이라면...?"
큼, 큼.
잭은 턱을 매만지며 헛기침을 했다.
"자네, 기사가 될 생각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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