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2)
베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거만하게 턱을 치켜 들고 있는 모습이 도무지 열 세살짜리 어린애로는 보이지 않았다.
바르르.
인기척이 느껴져 옆을 보니 하티가 몸을 떨고 있었다.
굳어진 얼굴로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 꽂는다.
그 모습이 마치 과거의 나 같았다.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베인."
내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무슨 일이지?"
"흐흐, 무슨 일이긴? 동네 친구 얼굴좀 보러 오는데 이유가 필요 하겠어?"
놈은 능글맞게 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이봐 아론. 내가 너 때문에 야스 삼촌에게 무슨 벌을 당한지 알아?"
"무슨 일."
"반 년이나 외출 금지를 당했어. 알아? 반 년이야. 그게 얼마나 답답하고 긴 시간인지 넌 모를거다."
반 년?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어?"
"외출 금지라고 해봤자, 너 먹고 싶은거 다 먹고, 집에 쟤네들 데려와서 놀거 다 놀았잖아? 그런데 그게 무슨 벌이야?"
"너 이새끼...."
"그리고 애초에 네가 나랑 하티를 괴롭혀서 그렇게 된거잖아. 그게 왜 나때문이야?"
베인은 말 문이 막혔는지 눈만 부릅 떴다.
나름대로 위협을 가하려는 것일까.
그러나 전장의 살기를 기억하는 나에게는 재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흥, 소작농 출신 거지 새끼들끼리 붙어먹어서 잘 들 노는구나. 둘이서 소꿉놀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그리 말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베인.
뒤에 있던 아이들도 같이 웃었다.
소작농 거지 출신이라....
틀린 말은 아니다.
듣기 거슬린다.
'조금 혼내줄까?'
여름 내내 훈련한 덕분에 나는 모든 능력이 전반적으로 상승해있었다.
베인을 포함한 아이들의 수는 여덟.
하지만...
그래봤자 늑대와 양의 싸움에 불과하다.
입도 뻥끗 못하게 패버릴 수 있다.
몇 달전만 하더라도 나는 그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베인이 이제 외출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야스 아저씨가 지금 대도시에 나간 모양이군.'
지금은 가을, 추수철.
영주의 성으로 세금을 올리러 가는 때이기도 하고, 가장 장사가 바쁠 때이기도 하다.
마을에서 가장 검 실력이 뛰어난 야스는 이 시기만 되면 그 호위를 맡느라 경비에 조금 소홀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후우... 그럼 베인을 말릴 사람이 없다는건가?'
베인은 마을의 난봉꾼이다.
열 세살짜리 어린애한테 그런 단어가 붙었다는 것을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듯이, 놈은 말썽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못 말릴 녀석이다.
그의 아버지 티보의 재력과 권력때문이다.
지금 이 놈을 혼내준다?
괜히 부모님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
피가 머리 끝까지 올랐던 몇 달전이면 모를까,
지금은 최대한 피하는게 나았다.
어디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가?
"...됐다. 너랑 할 얘기 없어, 베인. 나랑 하티를 건들지 마. 서로 무시하고 지내자. 가자, 하티."
"응? 가, 같이가!"
내가 하티를 데리고 베인 들을 지나쳐 가려는 순간이었다.
툭,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베인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야, 너 진짜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이 거지 새끼야? 평생을 가난하게 살 새끼가 지금 내 심기를 거슬려도 된다고 생각해? 나 베인이야! 이 마을 최대 지주 티보의 아들, 베인!"
뿌드득, 이를 갈며 소리친다.
...진짜 못 참겠다.
"...야, 베인."
나는 어깨에 얹힌 베인의 손을 툭 쳐서 밀었다.
그리고 놈을 노려봤다.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
싸늘한 한 마디.
그 말에 베인이 움찔 거렸다.
아마도 나에게 얻어 맞은 기억이 트라우마가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 이새끼. 진짜 주제도 모르는 새끼가."
"주제?"
그래.
좋은 생각이 났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주제를 모르는건, 너야 베인. 넌 나는 커녕 옆에 있는 하티랑 싸워도 못이겨."
"...!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베인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아마도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피식, 소리내어 웃었다.
"귓 구멍 막혔어? 넌 하티랑 싸워도 못이긴다니까?"
그 말에 가장 놀란건 하티였다.
하티는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아론. 그건 좀...."
"넌 조용히 있어, 하티. 우리가 그동안 해온거, 잊었어?"
"그, 그치만...."
앞을 보니 베인의 표정이 수치심에 물들어 있었다.
"하티? 하티랑 내가?"
"겁나냐?"
"이 새끼...."
"해 봐, 한 번 해보고 말 해."
"...하. 진짜 가짢네. 이 개새끼가."
하티가 내 팔을 툭툭 치며 조용히 물었다.
"아, 아론. 어떻게 해?"
나는 담담히 말했다.
"날 믿어. 니가 이기니까."
하티는 벌벌 떨며 베인을 향해 걸어갔다.
우두둑, 우두둑.
"야, 하티. 지금이라도 빌어. 너따위랑 싸우는건 자존심 상하거든?"
베인은 목을 좌우로 풀며 거만하게 말했다.
"나, 나, 난...."
"그냥 예전처럼 알아서 기어. 그럼 봐줄테니까."
"나, 난... 예전처럼 되진 않을거야."
하.
콧방귀를 끼는 베인.
"맞아야 정신 차리겠구나."
놈은 주먹을 말아쥐고 맷돼지처럼 달려갔다.
나는 걱정스런 시선으로 하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티는 아직도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힘을 내, 하티. 넌 할 수 있어.'
구경하던 주변 애들이 그 모습을 보며 킥킥 거렸다.
즐거운 구경거리라고 생각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퍼퍽!
"악!"
비명이 들려온 쪽... 그건 바로 베인이었다.
"어어?"
아이들.
베인.
하티.
그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 내가... 정말로?"
하티는 믿기지 않는 다는듯이 자기 주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이 씨발, 뭔가 잘못된게 틀림 없어."
한 번에 두 방이나 얻어맞고 물러났던 베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베인이야. 이 마을에서 애들 중에서 제일 힘 쎈건 바로 나라고!"
베인은 다시 하티를 향해 달려갔다.
하티를 향해 주먹을 크게 휘두른다.
그러나 손쉽게 피하는 하티.
당연하다.
지난 여름 내내 나랑 대련을 했던 하티다.
저런 큰 주먹에 맞을 리 없다.
그 다음, 하티는 베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퍽!
"악!"
베인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코를 부여잡고,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어...어...코, 코피. 내, 내가... 하티 따위한테 코피가?"
손바닥에 붉은 게 묻어나오는걸 보니, 또 코피가 터진 모양이었다.
"내, 내가...."
하티는 믿기지 않다는 듯한 시선으로 베인과 주먹을 번갈아보았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아론! 내가 해냈어. 내가 베인을 이겼어!"
이런 바보, 코피 하나 터졌다고 싸움 이긴게 어딨....
뒤편에서 베인이 하티를 향해 달려오는게 보였다.
그러나 내가 더 빨랐다.
뻑!
나는 하티를 향해 달려가며 베인의 주먹을 손으로 막았다.
"헉."
그 광경에 놀랐는지 베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 담담한 음색으로 말했다.
"내가 말했지. 건드리지 말라고."
"너, 너, 대체...."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걸 목격했을 때, 두려움을 느낀다.
베인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서려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 인정할 수 없어. 야! 이, 이새끼들, 죽여!"
황급히 물러난 베인이 애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그러다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 아론."
하티는 겁먹은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흥, 내 입술이 비틀렸다.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정말 귀찮았다.
주먹을 쥔다.
수는 일곱.
하지만 상관 없다.
비록 별 반개짜리 스킬이지만,
나에게는 숙련도 레벨 9의 격투술이 있었다.
그리고 녀석들은 평범한 아이들에 불과했다.
"너네 후회 안하겠냐."
나는 목덜미를 긁었다.
"덤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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