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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蘭亭)서재입니다~

비밀 낙서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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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蘭亭)
그림/삽화
nanjung
작품등록일 :
2015.06.21 08:53
최근연재일 :
2017.04.05 15:48
연재수 :
379 회
조회수 :
126,060
추천수 :
1,653
글자수 :
165,582

작성
15.09.26 23:09
조회
444
추천
7
글자
9쪽

시행착오 속에 행복이

DUMMY

시간이 없다고 늘 그렇게 변명함을

행여 당신이 알아차리셨는지 몰라서

착 착 착 오래된 문서 불러와 펼쳤어요.


오해하셔도 할 말 없지만 그래도

속속들이 드러내놓고 말할 수는 없어서

에둘러 집필중인 척 은둔중인 척하는


행복이 뜻밖에도 시행착오에 숨었다며

복수초가 얼음 깨고 피어나듯 그렇게

이제야 탈고한 수필은 햇살 담은 항아리




나는 종종 자연이 주는 행복감에 전율한다.

얼마 전 아이들이 외갓집엘 다녀오게 되어서 데려다주러 갔었는데 사돈이 직접 주워 모은 도토리라면서 도토리 가루 반죽을 네 봉지 내놓았다. 사돈은 묵 쑤는 방식을 가르쳐주면서 도토리는 가루고 묵이고 간에 냉장고에 두게 되면 오히려 딱딱해지니 냉장고에 보관하지 말라면서, 그냥 실온에 두어도 전혀 상하지 않는다고 장담하는 거였다. 나는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가끔 마트에서 도토리묵을 사다 먹는데 포장지엔 유효기간이 적혀있기 마련이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묵을 냉장고에 넣기 바빴던 것이다.


밥도 팥밥이면 잘했다 잘했어, 죽도 팥죽이면 한 그릇 더 줘, 떡도 팥고물 시루떡만 맛있다 하는 남편은 팥 한 번 원 없이 먹어봐야겠다며 작년 오월 초 어느 장날에 떠돌이 장꾼한테서 팥을 한 됫박이나 사서 곧바로 팥 농사를 시작하였었는데, 매화 밭에 풀도 벨 겸 새벽마다 땅을 일구어 쥐도 새도 모르게 팥씨를 묻고는 ‘새도 안 오는 거 보라고’ 하며 벌쭉벌쭉 좋아하였다. 그러고는 그 많은 팥에다 일일이 순 치기 물주기를 하며 날마다 보살피다가 어느 날 문득 깊은 시름에 빠졌다. 옆집 콩밭을 봤더니 콩 꽃이 언제 피었었기에 콩이 주렁주렁 열려있더라고 중얼중얼 하며 ‘도대체 우리 팥들은 팔월이 다가도록 잎만 무성할 뿐 꽃도 안 피워. 그놈에 장꾼한테 속았구나 속았어. 꽃도 안 피는 팥을 팔았던 게야.’ 하도 그래서 팥 파종시기를 검색하였고, ‘옛 사람들은 유월 중순 자귀나무 꽃이 필 때에야 아, 팥 씨 심을 때다.’라고 한 글을 발견하였다. 해서 남편에게 “아니, 팥 씨를 한 달 반이나 빨리 심었네요?”라며 인터넷 검색결과를 말해주자, 남편은 “아이고 장꾼은 무혐의고 팥죽은 물 건너 간 기라. 아무리 팥이 먹고 싶기로 그렇게나 빨리 심어서 웃자란 모양이네. 그래서 아직 꽃도 안 핀 기라.” 하면서, 살다 살다 이런 날이 다 있다고, 꼴란 땔감을 그토록 지극정성으로 키운 셈이라고, 그러면서 가을에 착실히 베어다가 화목보일러에나 털어 넣겠다며 서글픈 표정을 짓는 거였다. 그런 남편이 하도 딱하여 나는 또 ‘팥 개화시기’를 검색하기에 이르렀는데, 아니, 팥꽃은 구월에나 핀다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남편에게 일말의 희망을 주고는 기다렸더니 과연 여름도 다 지난 구월이 되자 매화나무 아래에 노랑나비들이 여기저기에 앉아 하늘거리는 게, 팥꽃이 마치 신기루 같다고, 남편은 아침마다 팥꽃을 보고 또 보고 하였다. 그리고 팥꽃이 지고 그 자리에 팥꼬투리가 주렁주렁 열리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 관찰을 멈추는 거였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올여름 우리 집은 팥죽은 물론 팥빙수도 아예 기계를 사놓고는 날마다 해먹었는데, 내 평생 먹어온 팥빙수를 몽땅 합쳐도 올여름 먹은 팥빙수 수량에는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남편은 그토록 지극정성으로 농사를 지었다.

올해는 팥 대신 검은콩, 흰콩, 덤불콩들을 많이 심어 여기저기 허수아비까지 세워가며 키웠고, 만족할 만큼 수확하였다. 그래서 요즘 아침마다 자가생산표 두유 먹기, 콩밥 먹기, 콩나물 놔먹기를 하는데, 다음 주부터는 두부도 내려먹으려고 준비 중이다. 밤고구마도 심었는데 두더지가 많이 파먹는 바람에 수확량이 많지는 않았으나 그 맛은 인스턴트 군것질에 길든 손녀의 입맛을 확 바꿔놓을 정도로 일품이었다. 고추도 심었는데, 올해는 농약 한 번을 안 쳤고, 그래서 전전긍긍하였고, 고추농사는 영 글렀다고 예상했었는데 뜻밖에도 수확량이 평년을 웃돌았다. 날마다 받아놓은 쌀뜨물에 먹다 남은 우유, 마요네즈 등등 갖가지 영양소를 배합하여 비료 삼아 준 덕분인지 고추가 거짓말처럼 무럭무럭 자라주었던 것이다.

청량고추 절반, 보통고추 절반을 심었었는데 보통은 병약한 편이었지만 청량은 워낙 매운 성질 탓인지 엄청 씩씩하게 자라주었다. 뿐만 아니라 수확이 끝나 고추나무를 죄 베어버릴 시기인 지금에 와서도 여기저기서 고추가 불긋불긋 익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올해는 난생 처음 고추장 담기에 도전하게 되었다.

마침 지난여름에 남편이 산에서 따왔던 매실로 100일 이상 숙성시켜 액즙을 내어둔 게 있는데, 그것을 고추장에 넣으면 금상첨화일 것 같았다.

방앗간에서 빻아온 고추장거리 고춧가루는 3,2kg이었다. 방앗간 주인은 찹쌀고추장을 담는다니까 해당하는 메주가루 900g짜리 두 개와 엿기름가루 300g을 주면서 그냥 막 버무리면 된다고 친절히 설명해주는 거였다. 하긴 옛날에는 엿기름을 물에 풀어 일정시간 지나고 나서 걸러내곤 했는데, 요즘은 마치 밀가루처럼 깨끗하게 빻아진 거라 아주 편리해진 셈이다. 그런데 나는 찹쌀고추장 플러스 매실액즙고추장을 담으려는 거여서 방앗간 주인의 설명대로만 해서는 안 될 일이고, 고추장 발효에 대한 상식도 좀 터득할 겸 요리조리 검색을 하는 등 머리를 썼다. 그리고 드디어 찹쌀을 여덟 시간 이상 불렸다가 어젯밤에 죽을 끓여두었었는데, 내가 정한 재료를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고춧가루 3.2kg, 찹쌀 1.8kg, 메주가루 1.8kg, 엿기름가루 300g, 소주3.2L, 매실액즙 3.5L, 양파액즙 800ml, 소금 1.8kg. 생수 엿기름가루 풀어놓을 만큼.


오늘 오전, 오래전부터 간직해오던 옹기항아리 하나를 소주로 소독해두고, 결혼 초창기에 장만했던 커다란 알루미늄 다라도 소주로 소독했다. 소주는 소독에도 사용하고 고추장의 부식을 막기도 한다는 인터넷 정보를 따른 거였다.

어떤 네티즌은 찹쌀 죽을 믹서기에 갈아야 한다는 지론을 펼쳤더라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밥알은 고추장이 익으면서 자연적으로 삭을 테니까 말이다.

하여간 나는 애초 1.8kg이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 푸짐해진 찹쌀 죽을 다라에다 퍼 넣었다. 거기에다 메주가루를 붓고 생수(정수기물)에 한 10분 담가놓았던 엿기름물을 들이부었는데, 다 같이 어울려서 삭을 것이므로 따로 삭힐 필요가 없다는 잣대로 재단해보니 10분마저도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매실액즙과 양파액즙을 부었다. 그리고 소주에다 풀어놓았던 소금물로 간을 맞춰가며 홍두깨로 젓기 시작했는데, 잘 풀어지질 않아 꽤나 힘들었다. 문득 고추장 담기는 재료를 모두 섞기 위해 젓는 과정이 가장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그것 뿐, ‘이게 끝이야?’하고 반문할 정도로 너무나 간단하게 고추장 담기를 마쳤다. 내가 처음 담은 고추장은 아마도 성공한 듯하였다. 금방이라도 솟아오를 것만 같이 밝게 빛나는 태양색깔에다 매콤새콤달콤향긋한 것이, 익기도 전에 이만저만 맛있는 게 아니었다. 더구나 매실액즙과 양파액즙 덕분에 물엿 한 방울을 쓰지 않고도 달달하였다.

잘 저은 고추장을 항아리에 담아보니 예상보다 고추장이 많아서 또 다른 항아리를 챙겼고, 소독용 소주는 이미 써버린 터라 펄펄 끓인 물로 항아리를 소독하여 나머지의 고추장을 다 담았다. 그리고는 바람과 햇살이 통할만한 천을 잘라 입구를 봉하고는 양지바른 곳에 둔 다음 고추장의 숙성기간을 검색하였다. 매실액즙고추장은 일주일에서 한 달이면 숙성되며, 곧바로 먹어도 되지만 오래 묵을수록 맛이 좋단다.

하지만 나는 아차 하였다. 매실액즙을 재료에 버무리고 항아리에 담은 후 맨 위에다 또다시 소복하게 부어놓으면 되고 소금은 전혀 필요 없다는 게 아닌가. 그런 줄도 모르고 소금을 소주에 녹여 섞은 것도 모자라 맨 위에다 소금을 한 켜 더 뿌려놓았다니, 참 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다. 훗날에 또 고추장을 담게 된다면 그땐 그야말로 소금 없이 담가보리라 다짐해본다. 그런데 내가 사용한 소금은 한 일 년 전부터 두부에 사용하려고 간수를 빼버린 '약'소금이어서 오히려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냉장고에 넣어놓을 필요가 없다는 도토리묵을 그냥 다용도실에다 놓아두고 먹으면서 정말 쉬지 않음에 참 신기해했는데, 매실액즙 또한 고추장이 상하지 않게 하는 효능이 있다니, 자연이 주는 선물이란 이토록 깊은 배려를 동반한 과학성을 지닌 모양이다. 묵을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상하지 않으며, 매실액즙 고추장엔 소금을 전혀 안 써도 된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하늘의 달이 거대한 컴퓨터 덩어리로 결론지어지는 일 만큼이나 신비로운 일이다.



2014. 10. 29. 난정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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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사랑하고 사랑해도 15.10.02 178 5 1쪽
» 시행착오 속에 행복이 +1 15.09.26 445 7 9쪽
131 오래된 즉흥시 15.09.26 196 5 1쪽
130 시인의 말 +2 15.09.23 390 7 4쪽
129 그 사람 15.09.08 185 4 1쪽
128 내일은 죽을 수 없습니다. +2 15.09.03 294 6 1쪽
127 찔레꽃 붉게 피는...... +2 15.09.02 414 6 1쪽
126 청설모 +1 15.08.31 189 7 1쪽
125 비밀편지 5 +5 15.08.15 158 7 1쪽
124 비밀편지 4 15.08.15 190 8 1쪽
123 청개구리 15.08.15 143 6 1쪽
122 어느 봄 +2 15.08.15 235 7 1쪽
121 내 이름은 마고 +1 15.08.13 318 5 3쪽
120 가을비 우산 속 +2 15.07.31 334 9 1쪽
119 이웃 8 15.07.29 250 7 1쪽
118 이웃 7 15.07.28 169 5 2쪽
117 이웃 6 +3 15.07.27 249 7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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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이웃 5 15.07.25 240 7 1쪽
114 이웃 4 +2 15.07.25 250 7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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