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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서재입니다.

멀고도 가까운.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완결

남녘
작품등록일 :
2020.09.20 16:37
최근연재일 :
2021.01.19 20:00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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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4,498

작성
21.01.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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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31.

DUMMY

정말 오랜만에 꿈을 꿨다. 하지만 그건 이제 더 이상 종이나 컴퓨터 한글 파일로 옮겨지지 않을 찰나의 꿈일 뿐이었다. 금방 사라질 내 망각일 뿐이다.

하지만 이 망각이 도저히 떨어지질 않는다. 끈끈이처럼 마음에 달라붙어 있다.


“으으······.”


숙취에 몸을 비틀어도, 꿈은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몇 번이나 일어나 토했지만, 계속해서 새하얀 위액뿐이다. 이미 토해낼 건 다 토해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럼 도대체 난 왜 토하고 있는 거지?

망연하게 화장실 바닥에 앉았다. 어디를 갈 바에는 차라리 여기에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러고 있으니, 또다시 꿈의 내용이 어른거린다. 그리고 곧바로 위액을 쏟아낸다.

목이 화끈하고, 속이 욱신거리고, 눈물이 날 정도로 쓰다. 토해낼 게 없는데 왜 이리도 아픈지. 뭘 그렇게 게워내고 싶은지 도저히 모르겠던 그 이유는 별의 문자를 보고 나서 깨달았다.


“오늘 볼 수 있어?”



* * * *



채윤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다.

눈앞에 아메리카노가 가만히 얼음을 녹여가는 중이다. 그 앞에 젠가가 놓여있다.


“네 차례야.”


별이 말했다.

나는 대답 없이 젠가를 뽑았다. 뽑힌 작은 사각형 속에 예전에는 무엇인가를 봤던 것 같은데, 이젠 관심조차 가질 않는다. 그런 스스로가 거북하다.


“그 소설 어떻게 끝나?”


내가 물었다.


“소설?”

“네가 썼던 소설. 지금의 네가 그리는 웹툰. 그때···.”


그녀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결말 고민했잖아.”

“아아······.”


그녀의 차례.

젠가 블록 하나가 뽑혀 나간다.


“해피엔딩이야.”

“어떤 식으로?”

“글쎄······.”


그녀가 턱을 괬다.

젠가의 빈 부분이 듬성듬성 보인다. 난 그 빈 부분들을 채우기 위해 입을 뗀다.


“미안해.”

“뭘?”


그녀가 블록을 뽑으며 물었다.


“어제도 그렇고. 여태까지.”

“그때 한 말.”


블록을 뽑으려는 내 손이 멈칫한다.


“다 기억하는구나?”

“당연하지.”


꿀꺽.

침이 저절로 삼켜진다.

블록을 쥔 손이 덜덜 떨린다. 젠가는 진동에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난 네가 다 잊은 척할 줄 알았어.”

“그러고 싶었어.”

“근데 왜 안 했어?”


위액이 태워놓은 목구멍이 따끔하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을 내뱉으라는 박차와 같았다.


“그럼 베드엔딩일 테니까.”


그녀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본다.


“우린 소설이 아니야.”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채윤이 긴장한 얼굴로 그녀와 나를 살피고, 내 눈은 그보다 더 긴장을 삼킨 채로 앞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차분한 표정.

무척이나 아름답고, 반짝이는 그녀.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지 못해. 네 선택에 최대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 했어. 네가 무엇을 하던 응원해주고 싶었어.”

“그러면 어제는 왜······”

“그게 포기의 형태만 아니었다면. 계속 그랬을 거야. 네가 그랬던 것처럼.”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채윤씨마냥 너를 한없이 기다릴 수 없어.”


채윤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변해버린다면, 반짝이는 너를 보고 따라온 내가 뭐가 될지············ 나도 잘 모르겠어.”


별의 시선이 나에게서 빗나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사실 내가 보고 있지 않았다.

눈 앞에 펼쳐진 목재 탁자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의 말도 마음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니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아 자신을 보호하기 급급한 것이다.


“꿈은 언제나 바뀌어. 지금 내 꿈은, 지금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빠르게 직장을 잡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 별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여유롭게 글도 쓸 수 있을 거다.


아버지의 말처럼.

주변의 말처럼.

그건 타협이 아니라 현실을 마주하는 자세다.


“네가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니고?”


그러나 그녀는 냉정하게 물었다.


“뭐라고?”

“지금 네가 힘들어 하는 모든 것에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게 아니냐고.”


그걸 도망이라고······?

함부로 그렇게 정의를 내려버리면.


“그럼 내가 뭐가 돼?”


헛웃음이 나온다.


“도망? 내가? 지금 내가 도망치는 거로 생각하는 거야?”


역겹다.

구역질이 난다.


“내가 지금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 왔는지 알아? 내가 이제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네가 알고나 있어? 너는 너 힘든 것만 생각하지, 늘!”


높아진 언성에 내가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별은 차가운 눈으로 그저 똑같이 나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말했다.


“당연하지. 넌 늘 내게 말해주지 않으니까.”


잠시 대화가 끊겼다.

별이 내뱉는 한숨으로 말이 이어진다.


“언제나 코앞에 닥쳐서 말해주잖아. 지금처럼. 나는 네가 쓰고 있는 소설 속의 ‘한 별’이 아니야. 모른다고.”


난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숨이 턱 막혀온다.

여태까지 차분하고 담담한 얼굴일 거로 생각했던 그녀의 표정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

울먹이는 목소리.

잡아달라는 듯, 애타게 떨리는 손.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듣고, 마주하고 있던 게 현실의 그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나는 몰라. 네 고민도, 아픔도, 슬픔도!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상의를 한 적 있었어?”


없다.


“그러면서 나한테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거야? 난 너로 인해 이렇게 바뀌었는데, 너는 왜 자꾸 반대로 마음을 닫아가는 건데, 왜!”


마음을 닫아간다고?

내가?


당장에라도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보다 더 내 손이 떨리고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나 때문이야? 내가, 내가 잘못한 거야? 소설에서는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왜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알아주지 않는 거야? 내가 네 소설을 보고 알아서 위로를 받아야 하는 거야?”


질문이 쏟아진다.

그녀의 말끝에 걸리는 물음표들이 갈고리가 돼, 나의 몸을 꿰뚫고 어딘가로 끌어올린다. 속 안에 부글부글 끓는 이 감정이 그대로 토해질 것만 같아 두려워졌다.


“확실하게 말할게. 난 그런 거 싫어. 예전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싫어. 너를 떠나보낼 것만 같아서 싫어······.”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싫다고······?”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 선택이, 지금 내 모습이 싫다면. 그건 이제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야.”


도대체 왜, 나는 그렇게 그녀를 대했을까.


“별과 별은 멀리서 보면 무척이나 가까워 보이지만, 결국에는 한없이. 수없이 멀리 떨어져 있대.”

“·········성운아.”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난 이미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녀의 목소리도 얼굴도 마음도.

보고, 듣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너와 나처럼. 가까워 보였지만, 결국에 한없이 멀었던 거야. 난 재능이 없었고, 너는 재능이 있고. 응. 네가 변하고, 또 내가 변한 이유는 거기에 있어. 넌 나 때문에 변한 게 아니야. 네 재능으로 변한 거지. 그 은혜 때문에 나를 좋아하는 거라면, 이제 관둬. 소설을 이제 쓰지 않는다면, 너를 묘사하고 너와 대화하고, 너와 무엇인가를 할 필요가 없겠지.”


의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부서질 듯 강한 분노가 담긴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상황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슬픈 소리였다.

의자가 채, 그 소리를 끝맺기도 전에 별의 발걸음이 가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 * * *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이 만남으로 모든 것이 끝나리라. 하지만 정말 내가 끝낼 수 있을까. 내 손으로, 그 아이를 도울 수 있을까.


두려웠다.


“너를 묘사하고 너와 대화하고, 너와 무엇인가를 할 필요가 없겠지.”


이런 말을 듣게 될까 봐.


결국에 참지 못하고 가게 밖으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더 거기에 있다가는 정말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을 것만 같았다.

한참을 달렸다. 방향성을 상실한 채로. 차에 몇 번이고 치일 뻔했고, 지나가는 자전거와도 부딪힐 뻔했지만, 개의치 않고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헛기침이 토해질 때가 돼서야 내 발걸음은 멈췄다.


익숙한 곳.

나의 발걸음이 이끈 곳은 성운과 처음 만났던 바로 그곳이었다. 꿈에 좌절하고 주저앉아 있을 때, 실없는 말을 듣고 덜컥 고백을 받아버린 그곳이었다.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정자가 있고, 봄비가 내리고, 간간이 산새들이 지저귀고············.



* * * *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때 내 두 뺨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정신을 차리자, 눈앞에는 채윤이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쫓아가!”


그녀가 문밖을 가리키며 외쳤다.

자동으로 두 다리가 움직였으나, 일어나지는 않았다. 내가 방금까지 상상하던 전개라면 분명 당장에 달려가 그녀와 화해할 수 있을 터였다.


“못해요.”


하지만 현실이다. 소설은 이미 벗어났다.

그녀를 붙잡는 것도, 놓는 것도, 그 무엇도 나는 할 수 없다.


“인생은 소설이 아니잖아요. 끔찍한 현실일 뿐이에요. 거기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주어진 상황에서 발버둥 치는 것. 그것뿐이에요.”


채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더러운 벌레라도 발견한 표정. 만약 지금 거울이 있었다면, 분명 내 표정도 저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한 발자국 다가와 나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못한다고? 못해도 해! 인생도 소설도 네가 움직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

“저, 저는······!”

“현실이 끔찍한 건, 네 현실이 아닌 삶을 살기 때문이잖아!”


채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매일, 매일, 매일·········. 네가 아닌 삶을 살아서잖아. 왜 도대체 너는 네가 주인공이라 생각하지 않는 거야? 네 소설 재미있어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잖아. 응원해주는 사람도 있었잖아. 그런데 도대체 왜!”


멱살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게 내 몸을 떨리게 만들고 있었다.


“번듯한 직장이 없으면,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게 전부고, 그게 지금의 꿈이니까요.”

“왜 자꾸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도망치려는 거야?”


핑계.

그 단어가 심장을 움켜쥐는 듯했다.


“돈을 벌어야 직업이고, 성공이고, 꿈인 거예요. 그렇지 못한 건 직업도 성공도 꿈도 아니에요. 전부 실패지.”


꿈을 이루지 못한 게 패배자가 아니다.

꿈을 접고 번듯한 나이에 번듯한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이 패배자다.

그런 사회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르죠? 저도 그런 걸 꿈꿨어요. 그렇지만 제게는 그 꿈이 너무 멀더라고요. 별처럼. 닿을 수 없어요. 누구랑 다르게.”


별은 그런 사람이었다.

정말로 빛나는 사람. 내 기준으로 성공한 사람. 패배하지 않은 승리자.


“그리고 뼈저리게 느낀 거예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요. 게임으로 치면, 마법사면서 힘이나 찍고 있는 꼴이었죠.”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래도 이건 아니야. 네가 잘못 보고 있다고. 그 모든 말들은 다 핑계일 뿐이야. 지금이 안정적이니까 지금에 안주하려는 핑계야.”


채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든 게 떨렸다. 그녀가 나를 흔들고 있다.


“근데 넌 아직 아니잖아. 아직도 글, 쓰고 싶잖아? 계속 걔랑 같이 있고 싶잖아? 그 아이랑······ 꿈꾸고 싶은 거잖아? 너는 포기하지 마. 제발. 너는 놓지 마.”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발·········. 제발·········. 체념하지 마. 무너지지 마.”


몸의 흔들림이 멎었다. 그녀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그녀를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일그러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뒤에 있던 유리문에 내 표정이 비치고 있었다.


분노······? 아니야. 후회. 허탈함. 거기에서 오는 분노였다. 그걸 확인한 순간,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사라졌다. 그리고 짧은 종소리가 들리고, 나는 어느덧 밖으로 나와 있었다. 밖에는 부슬부슬 여우비가 내리고 있었다.



* * * *



허파에 찬바람이 밀려들어 온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아무런 정황도 없이 달린 발은 나를 별과 처음 만났던 곳으로 이끌었다.


그녀가 있을까?


확신은 서지 않았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헐떡거리는 숨을 참으며 간신히 정자의 앞에 도착했다. 비와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눈앞에 내려왔다. 그것을 걷어내자, 정자의 기둥 뒤로, 무척이나 작은 그녀의 어깨선이 조심스럽게 보였다.

단번에 그녀가 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용기를 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봤다.


“어떻게 알았어?”


별이 먼저 물었다.

용기를 냈던 나의 발걸음이 다시 뒤로 후퇴했다.


“·········있을 것 같았어.”

“그래?”


빗소리가 침묵을 조심스럽게 채워주었다.


“내가 말했던 조건 기억해? 이미 우린 그 조건을 많이 어겼어. 알고 있지? 전화도 많이 했고, 서로에게 너무 많은 간섭을 했어. 지금도 그렇고.”


그녀가 정자 뒤에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얼굴은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웠다.


“이렇게 될까 봐 내걸었던 조건인데············. 결국 또 이렇게 되고 말았어. 그것도 저번보다 더 최악으로. 이렇게 바꿔놓고, 맞춰놓고, 멋대로 사람을 고쳐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왜 도망가는 거야?”


도망······.


“미안해.”


주먹을 꽉 쥐었다. 놓치지 않으려고, 도망치지 않으려고 나를 붙잡듯 힘을 주었다.


“너무 무서웠어.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무런 성공도 못 했으니까. 아무런 성과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 나에게 맞지도 않고, 그저 꿈만 꾸면서 발버둥 치는 기분이었어.”

“그래서 도망간 거야?”

“·········맞아. 그게 현실로 돌아가는 거니까.”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별의 발소리가 조금씩 들렸다. 정자의 나무 바닥을 밟는 소리였다. 한두 걸음이 이어지고 그녀가 다시 나를 불렀다.


“성운아.”


그 부름에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그녀는 처음 만났던 그때와 같이 정자 계단에 몸을 쭈그리고 앉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지금 있는 게 현실이야.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 여태까지, 그리고 지금도 너는 현실에 있었어. 그걸 잊어서는 안 돼.”

“······별아.”


그녀가 몸을 일으켜 나에게 걸어왔다. 사뿐한 발걸음이, 웅덩이를 밟고 튀어 오르는 물방울과 같은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두 손이 빗물에 헝클어진 나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정리해주었다.


“나는 너를 무척 좋아해. 네가 내 조건을 모조리 깨줘서. 나를 바꿔줘서. 내가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절대 깨주지 말아줬으면 했던, 마지막 조건은 끝까지 지켜줘서 고마워.”

“일정이 틀어졌을 땐, 꼭 같이 있어달라는 거?”

“응.”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그래도 우리는 조금 시간이 필요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잠시 하고 싶은 걸, 하고 오려고. 지금의 너랑 같이 있으면, 나는 예전으로 돌아갈 것만 같거든.”


몸이 떨렸다. 그녀도, 채윤 때문도 아니었다. 별이 떠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떨고 있는 거였다.


“별과 별은 가까워 보여도 사실은 엄청나게 멀어. 우리는 여태까지 서로를 제삼자로 가까이 보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이제는 각자가 별이 돼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거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내 소설처럼 멀리서 서로를 알아갔으면 해. 우리가 뽑아낸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웠던 것들인지를.”

“너무 많이 변하면?”


당장에라도 울고 싶었다. 그 감정을 그대로 실은 목소리는 불안정했다.


“그러다 영영 멀어지게 되면?”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녀를 이대로 놓쳐버릴까 무서웠다.

반면에 별은 침착한 얼굴이었다. 나를 달래주는 어떻게 보면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마. 내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니까.”

“그런 터무니없는 걸 믿으라는 거야?”

“당연하지. 왜냐면 원래 별과 별이 만나는 건 터무니없는 거니까.”


비가 내렸다.

차가울 정도로 침착한 그녀의 머리 위에도 비가 쏟아졌다. 빗줄기가 얼굴을 타고 내려와 단번에 그녀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게 설령 빗방울 때문이라도 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닦아주었다.


“꼭. 갈게.”

“간다고?”

“네 소설처럼. 전부 부서져서, 별똥별이 돼서, 단 하나의 파편으로라도 너에게 닿을 게. 너에게로 반드시 내가 갈게.”


그 말에 차가웠던 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여우비가 선사하는 아름다운 풍경에 딱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 * * *


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거기에 섞여 작은 팻말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별★’


수줍게 그려진 별 모양을 바라보자 괜히 낯이 달아오른다. 그러던 와중에 눈앞에 자동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단번에 알아봤다. 여우비가 쏟아져 내리던 날, 지었던 표정과 얼굴 그대로. 별이 캐리어를 끌고 나온다. 나도 모르게 손을 흔들고 말았다.


“별! 별아!”


그 외침에 주변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별이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황급히 나에게 달려와 품 안에 안겼다.


“닿았어?”


내가 물었다.


“응.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네 파편은 다 나한테 날아왔었어.”


그녀가 답했다.


“그래도 여전히 인기는 시원치 않나 봐? 그렇게 로맨스 소설만 썼는데 말이야.”

“예전보다는 좋아. 돈은 벌고 있거든.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다 네 망상 연애니까 그렇지.”

“망상 아니거든? 네가 이렇게 왔으니까 이제 하나, 하나 하면 현실이지.”


그 말에 별은 방긋 웃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럼 뭐부터 할까?”

“당연히 젠가부터 하러 가야지.”


그 말에 그녀와 나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린다.


작가의말

다음 화는 후기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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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후기. 21.01.19 27 0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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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0. 21.01.13 20 0 18쪽
29 29. 21.01.12 17 0 20쪽
28 28. 21.01.11 23 0 15쪽
27 27. 21.01.06 15 0 19쪽
26 26. 21.01.05 16 0 20쪽
25 25. 21.01.04 18 0 15쪽
24 24. 20.12.30 18 0 14쪽
23 23. 20.12.29 21 0 14쪽
22 22. 20.12.28 17 0 20쪽
21 21. 20.12.23 18 0 14쪽
20 20. 20.12.22 18 0 19쪽
19 19. 20.12.11 19 0 18쪽
18 18. 20.12.09 18 0 18쪽
17 17. 20.12.07 23 0 16쪽
16 16. 20.10.28 17 0 8쪽
15 15. 20.10.27 23 0 9쪽
14 14. 20.10.27 18 0 14쪽
13 13. 20.10.21 34 0 8쪽
12 12. 20.10.20 20 0 11쪽
11 11. 20.10.19 24 0 8쪽
10 10. 20.10.14 21 0 8쪽
9 9. 20.10.13 33 0 13쪽
8 8. 20.10.12 25 0 21쪽
7 7. 20.10.07 21 0 14쪽
6 6. 20.10.06 19 0 7쪽
5 5. 20.10.05 28 0 11쪽
4 4. 20.10.01 30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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