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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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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남녘
작품등록일 :
2020.09.20 16:37
최근연재일 :
2021.01.19 20:00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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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4,498

작성
20.12.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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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20.

DUMMY

“에라이!”


와르르!

이게 무슨 천둥소리냐고 물어본다면, 젠가를 널브러트리고 있는 그녀에게 물어보라고 하고 싶다.


“또 졌어! 또!!”


왜 그녀가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단단히 짜증이 난 그녀를 나는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을 뿐이라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그만 하자니까요”

“아니! 한 판 더 해!!”


그때 때마침 채윤이 와주었다.


“미안하지만, 이만 정리해야 되거든?”

“한 판 만! 한 판 만 더 할게!”


조용히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자 벌써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벌써 1시인데요?”

“뭐? 벌써?”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음에 또 하면 되죠.”

“다음에···. 응. 그래.”


그녀가 흥분을 가라앉히며 서둘러 채윤에게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방금은 잊어주세요.”

“아냐, 아냐. 괜찮아. 말도 텄으면서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아, 맞네.”


채윤의 말을 받은 그녀는 볼을 살짝 붉히고 있었다.

하긴 부끄러운 추태이긴 했지.

속으로 생각하며 젠가를 서둘러 치우고 가방을 들었다.


“잔은 놔 둬.”


채윤이 말했다.


“제가 가져다 놓을게요.”

“아냐. 늦었는데 어서 가.”


그 말을 거절하려는 나의 뒤로 채윤은 성큼성큼 걸어 등을 떠 민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이렇게 되면 젠가도 제 자리에 못 둘 텐데······.


“그럼 젠가라도!”

“됐다니까~ 어서 가 봐. 응?”


안심하라는 의미의 웃음. 어쩔 수 없이 나는 채윤에게 인사를 하고 별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한참 동안을 지하에 짱 박혀 있었더니 폐가 뚫릴 것 같은 찬 공기가 무척이나 달콤했다. 이젠 슬슬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몸을 떨 정도의 날씨가 됐다.


“꽤 춥네요?”

“응. 곧 겨울이니까.”


옆을 바라보니 그녀는 원래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묘한 분위기가 새벽의 공기와 빛깔에 잘 스며든다. 그게 간혹 지나가는 차의 헤드라이트에 비칠 때면,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리게 된다.


“데려다 드릴게요.”


내가 말했다.


“괜찮아.”


그녀가 살짝 뒷짐을 쥐고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덥석, 그 손을 붙잡고 싶은 감정을 가까스로 누르고 내가 다시 말한다.


“오늘 하루 종일······. 같이 있자고 하셨잖아요.”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다.


“·········그랬나?”

“네. 같이 가요.”


그녀가 말한다.

아주 나지막하고, 조용히.


“그래.”


그녀가 먼저 앞으로 나아갔고 나는 뒤를 따랐다.

둘의 발소리가 소리 하나 없는 새벽의 거리에 조용히 울려 퍼진다. 멋모르고 돌아다니던 길고양이가 난데없이 등장한 사람에게 놀라 도망갔다.

차가운 공기가 발목을 스쳐지나간다.


“오늘 좀 이상했던 거 아시죠?”


내가 물었다.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의 모퉁이를 돌아 들어갈 때였다.


“그런가?”

“무슨 일 있으시죠?”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건, 그녀의 집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발걸음이 천천히 세워진다. 그녀를 따라 나의 발도 그녀의 뒤꿈치 와 여덟 개 정도의 블록을 사이에 두고 멈춰 섰다.


“체험···판 같은 거야.”


이상한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려진다.


“고민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그래도 돼?”


뒤돌아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이제껏 봐온 그녀의 표정들과 이 상황을 매치해보면 간단한 일이다.


“그럼요.”

“조금 무서운 걸?”


그녀는 빙그레 웃고 있을 터였다. 진심과 거짓 사이에서 나를 놀리는 감정을 어루만지는 표정. 하지만 그 안에 진실이 섞여 있다는 것에서 나는 그녀를 닦달할 수 없다.


“지금 말씀하시기 싫으면, 나중에 하셔도 돼요.”

“예전에.”


그녀의 말은 거의 나와 동시에 튀어나왔다. 라디오가 겹치는 바람에 그녀도 나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바람이 차다. 그나마 가로등 불빛만이 강렬하게 그녀와 나를 비춰준다.


“위로만 받다가 정작 위로 해주는 법을 잊은 적이 있거든. 응원만 받다가 응원하는 법을 잊은 적도 있어. 그리고 의지만 하다가 이젠 내가 가야할 길을 잊었어.”


그녀가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가로등에 비춰 밝게 보이는 얼굴은 내가 예상했던 표정이 아니었다.


그 부릅뜬 눈 때문에.

붉어진 눈시울에.


나도 모르게 용기가 나버리고 만다.

나의 발이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인다. 그녀의 표정. 점 하나. 그 변화를 발견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앞으로 나아간다.


처음으로 그녀가 떨군 눈물은, 처음으로 내가 붙잡은 그녀의 손 위로 떨어졌다.

처음으로 껴안은 그녀의 몸은 무척이나 작았다. 처음으로 가까이서 맡은 그녀의 향기는 무척이나 특별했다.


“있어 주기만 해도.”


조심스럽게.

상처받지 않게.


“그냥 매일 카페에서 각자 일만 하더라도 저에겐 언제나 특별했어요. 함께하고, 얘기하고, 바라보는 것이. 제겐 위로였고 응원이었고, 의지였어요.”


고백할 때와 같이 나의 머리가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려 애쓴다. 하지만 그때와 다르게 나는 똑바로 그녀를 향해 말하고 있다.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조금 더. 조금 더. 그녀에게 제대로 닿을 만한 단어들을 찾아 애쓰고 있었다.


“약속······.”


숨이 턱 막힌다.

그녀가 내 품에서 웅얼거리며 뱉은 말이 그대로 심장에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네가 나한테 고백했을 때 말했던 약속. 계속 지켜줄 거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작은 어깨에 턱을 괴었다. 그녀가 조금 더 가까이 나에게 붙는다. 휘감고도 남을 작은 체구. 그런 그녀를 한가득 담아내는 내 적당한 체구가 처음으로 자랑스러웠다.


“그럼요.”


나는 미소 지었다.


“그럼 더 자세한 얘기는 스키장에서 들려줄게.”

“다음 화 예고하시는 거예요?”

“몰라.”


나는 그녀도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표정을 바꾸기 위해 움직이는 작은 근육의 떨림까지도 그녀의 눈물이 스며드는 심장에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 * * *



올해의 첫눈은 생각보다 늦었다. 10월 말. 11월을 앞에 두고서도 눈은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쌀쌀해진 날씨에 멍하니 걸어가다가는 몸을 부르르 떨기 일쑤였다.


“추워?”

“조금요.”


별이 손을 내민다. 그 손에는 투박한 손난로가 쥐어있었다.


“받아.”

“아니······”


휙, 불어온 찬바람이 내 말을 훔쳐가 버린다.


“고마워요.”


몸을 떨며 손난로를 받아들자, 별은 조용히 웃었다.


“생각보다 늦으시네···.”


별의 말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본다. 채운의 차가 오기로 한 방향이었다.


“대오를 태우고 오신다 했으니까, 곧 오실 거예요.”

“대오가 네 친구라 그랬지?”

“맞아요.”


별이 나를 따라 고개를 빼고 내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본다. 살짝 까치발을 들고 넘어지려 하면 살포시 내 어깨에 턱을 기댔다. 그건 마치 버튼이라도 되는 듯, 그럴 때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지금은 조금 서먹하다는.”

“맞아요.

“그래도 절친이라는.”

“네, 네.”

“부럽다.”


그 말에 내가 뒤를 돌았다.

내 눈에 대항해 그녀는 방긋 웃으며 답한다.


“난 친구 없잖아.”

“어어, 저 있잖아요.”

“친구야?”

“친구죠. 남자친구도 엄연한········· 친구죠, 친구.”


조금 더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사장님이랑 대오랑도 친구 해요.”

“그래도 되려나·········.”


그녀의 눈이 쓸쓸하게 반 정도 감겼다.

나는 다급해진다.


“스키장! 스키장에서도 만날 수 있죠. 친구. 만드는 거 생각보다 쉬워요!”

“수학여행이냐?”


반쯤 감긴 눈이 아예 감겨 웃는 눈이 된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안일하게 하는 순간, 뒤에서 경적 소리가 들려온다.


“야, 타!”


채윤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멋지게 외쳤다.

부러워라.

나중에 차를 타게 된다면 꼭 내가 외치리라는 생각을 하며 별과 함께 채윤의 차에 탔다. 대오는 채윤의 옆자리에서 게임기만 붙잡은 채 내 인사를 받았다.



* * * *



생각한 것보다 더······ 별은 스키를 잘 타지 못했다. 차에 내릴 때 그녀는 당당하게 내게 말했었다.


“스키, 잘 타?”

“못 타진 않아요.”


그 말에 자극이라도 받았는지, 그녀는 곧장 내게 말했다.


“난 잘 타.”

“정말요?”


그걸 덥석 물어버린 내가 잘못이다. 대오가 움직이지 않아서 그렇지 운동신경은 좋은 놈이었고, 채윤도 겨울마다 스키를 타러 갈 정도로 마니아였다. 그러니 상급자 코스로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됐고, 아마 그녀. 별도 빠질 수 없는 분위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큰 문제로 작용한 것은 막 상급자 코스의 눈에 스키 발을 푹 집어넣었을 때였다.


“나 사실 잘 못 타.”


그 말소리는 너무도 작아서 나만 들렸다 보다. 저 멀리 이미 대오와 채윤은 쏜살같이 내려가고 있었으니까.


“네?”


혹시나 해서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못 탄다고. 스키.”

“아까는 분명······.”

“민폐처럼 보이기 싫었어. 그뿐이야.”


조금 고개를 사선으로 떨군 그녀가 한쪽 팔꿈치를 잡아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되돌아갈까요? 다시 타고 갈 수 있어요.”

“그건 싫어.”


묘한 고집이었지만, 그 마음은 이해가 간다.


“하긴······ 저걸 올라오는 사람이랑 눈 마주치면서 가긴 좀 그렇죠.”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천천히 같이 내려가 봐요. 어차피 스키는 넘어지면서 배우는 거니까.”

“아, 알았어.”


긴장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간지러웠다.


“일단 저 완만한 곳까지 걸어가요.”


상급자 코스의 초반부는 경사가 너무 가팔랐기 때문에 내가 제안했다. 그녀도 그건 괜찮은지 고개를 끄덕이며 폴대를 이용해 스키에서 발을 빼냈다.

그녀와 앞뒤로 걸으며 급경사의 한쪽으로 붙어 내려갔다. 움직이는 것도 스키를 들고 있는 것도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그래도 서로 자잘한 얘기로 떠드느라 금방 완만한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탈 수 있겠네요. 제가 앞에서 계속 봐 드릴 테니까 한 번 타보실래요?”

“알았어. 해볼게.”


그녀가 다시 스키를 신고 폴대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슬슬, 앞으로 스키를 밀기 시작한다. 나는 그녀를 바라본 채 뒤를 경계하며 천천히 그녀의 속도에 맞춰 내려갔다.


“A자 유지하는 건 알죠?”

“그건 알아.”

“그러면 다 할 수 있어요. 스키는 그것만 알면 되거든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불안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10초 간격으로 넘어졌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엉덩방아를 찧거나 스키가 분리되거나 했다. 초보자가 이런 식으로 넘어지는 건 좋은 일이다. 다만, 그걸 모르기 때문에 퍼질 수가 있다.


“힘들어.”

“그래도 일어나셔야 내려가죠.”

“그만 넘어지고 싶어.”


그녀가 녹아내리는 눈처럼 촉촉하게 말했다.


“넘어져야 배워요.”

“그냥 아까처럼 걸어가는 게 좋겠어.”

“그럼 엄청나게 오래 걸릴 걸요?”

“그래도 도착은 할 거 아냐.”

“의미가 없잖아요. 스키 타러 온 건데.”


그녀가 크게 한숨을 토했다.


“그럼 너 먼저 타고 내려가. 나 때문에 여기 묶여있지 말고. 난 걸어서 내려갈 테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알아. 그런 말 아닌 거.”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근데 지금은 그렇게 듣고 싶어. 그렇게 들어야 지금 적어도 내가 꼴사납지는 않을 것 같아.”


이 정직함이. 이 솔직함이 나를 미소 짓게 하는 걸 그녀가 알았으면 한다. 그러니 조금 더 의지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그녀의 폴대를 잡아 건넸다.


“같이 가요. 별 씨라면 분명 잘 탈 수 있을 거예요. 젠가처럼요.”


그녀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말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의미가 그녀에게도 통했는지, 그녀가 싱긋 웃어주었다.


조금은 용기를 내본다. 눈 위라는 이질적인 공간을 가로지르며, 때로는 넘어지고 다치고 고통스러워도 곧잘 일어나는 용기를 말이다. 그러다 보면 분명 넘어지는 횟수는 줄고, 타고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 지금 나를 지나쳐 내려가고 있는 그녀처럼.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던, 리프트를 기다리던 장소에 나와 그녀의 스키가 시원하게 눈을 가르며 도착했다. 그녀도 나도 후련한 마음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시원하네.”


그녀가 말했다.


“그러게요. 뭐라도 먹고 있을까요? 두 사람은 한 번 더 타려고 올라간 것 같은데.”


내가 말했다.

그녀는 그런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스키를 분리한 채 조금씩 내게 걸어왔다. 나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가만히 서 있었다.

뽀드득, 뽀드득.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짓이기듯 그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나는 분명 그렇게 들었던 것 같다. 너무도 바람 같아서 환청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입에서 분명 그렇게 새어 나왔던 것 같다. 조금은 그 말에 감격을 느껴 스키를 벗는 것조차 잊고 망부석이 돼 서 있는 내게 그녀는 말했다.


“뭐해? 뭐 먹자며.”


아무래도 고맙다는 말을 들은 건, 내 착각인 듯싶다.



* * * *



눈이 아닌 나무로 만든 바닥에 앉아 기다란 츄러스를 씹었다. 음식보다는 그녀와 함께하고 있는 순간과 이 공간에서 주는 특유한 분위기가 달콤했다.


“재미있었어.”

“저도요.”


그게 너무 달콤해서 서로 말을 꺼내는 것 자체도 입안에서 단내를 풍기게 한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행여나 내가 느끼는 단내가 그녀에게 전달될까 쉽사리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손을 쓸데없이 움켜쥐거나 풀대를 들었다가 놓거나, 발을 까닥이는 듯의 정신 사나운 행동도 그것에 대한 여파다.


“뭐 할 말 있어?”


그런 내 행동이 심히 거슬렸는지, 그녀가 한참 동안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다가 물었다.


“아뇨! 그냥”


그러고 있었을 뿐이데·········.

아무런 말이 없으면 이상하긴 하니까, 뭐라 말을 붙여보고는 싶었지만, 또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몸만큼이나 속도 정신 사납기는 매한가지다.


“그럼 내가 말해도 돼?”


그 한 마디에 모든 게 차분해지는 기분이다.

그녀는 츄러스를 한 입 베어 문다. 그리고 그 달콤함을 한껏 입안에 퍼트리고 나서 말했다.


“조금 노력해볼까 해.”

“노력이요?”

“응.”


그녀가 고개를 들어 곧 눈을 쏟아내기 위해 꽉 막힌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 그리고 저번에 네가 해줬던 말······ 기억하려나?”


물론이다. 하나도 잊지 않고 있다. 기록과도 같이 써오니까.


“물론이죠.”

“그래? 그것도 기쁘네. 아무튼, 그 말들이 조금 용기가 되고 있거든. 나는 말이야.”


그렇게 그녀가 자신의 얘기를 처음으로 들려주었다.


“원래 하고 싶은 게 엄청 많았어.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만화를 그리고 싶었고, 바이올린도 켜고 싶었고, 노래도 잘하고 싶었고, 피아노도 치고 싶었고, 친구도 많았으면 했고, 학생회장도 되고 싶었고, 클럽도 가고 싶었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게임도 하고 싶었고, 게임으로 대회도 나가보고 싶었고, 게임을 만들고도 싶었어. 영화도 찍어보고 싶었고, 뮤직비디오를 찍고 싶기도 했어. 밴드에 참여하고도 싶었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맥주 한 캔에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세보고도 싶었어.”


스키화를 벗은 맨발이 꼼지락댄다. 그녀는 그 말을 들어 올려 품 안에 잔뜩 끌어안았다.


“근데 아무것도 못 했어. 왜일까?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많았으면 적어도 하나 정도는 했어야 하는데,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무서웠거든.”


무섭다는 말이 처음으로 정말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 집은 부유한 걸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롭지 못해. 그런데 부모님은 언제나 나에게 돈을 투자했어. 학교를 보내고, 학원을 보내고, 대학 등록금을 내주고, 생활비를 대고·········.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많다는 걸, 말할 수 없었어.”

“·········눈치가 보이신 거죠?”

“응. 무척.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 내 돈이 없기 때문이야. 내 돈이 아닌 이상, 난 스스로 움직일 수도, 스스로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도 없어. 빡빡한 스케줄을 짜는 것도, 취업을 위해 닥치는 대로 스펙을 올리는 것도 마찬가지야. 내가 선택한 게 아니야.”


그들이 바라고 있으니까.

그녀가 고민하는 게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나는 내 목에 걸린 쇠사슬을 다시 한 번 느끼고 말았다.


“그들 말대로, 그들의 돈대로 일단 취업을 해서 이제까지 받은 것에 대한 빚을 청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거로 생각했어.”


그리고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너를 보고 조금 생각이 바뀌었어.”

“저요?”

“응. 너는 달라보였어. 네가 하고 싶은 거로 벗어나려고 하는 게 보였거든.”


쇠사슬이 만져진다. 그리고 그건 그녀도 보고 있었다. 손만 뻗으면 붙잡을 수도 있었다. 난 나에게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대단해. 부럽기도 했어. 그 용기가. 그래서 네 고백을 받았던 거야. 나도 너만큼 널 봐왔으니까.”


이건, 알지 못 했던 사실이다.

그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꽤 오래. 어쩌면 너보다 더 오래.”

“언제부터요?”


꼭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가 나를 지켜본 시점을 똑똑히 듣고 싶었다. 그게 어떤 감정에서일지 몰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음과 함께 답했다.


“네가 교수님께 손을 들었을 때부터.”


전혀 몰랐다.

그녀가········· 저렇게 웃으며 말하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나는 알고 있지 못했다.


“같은 과라고 생각도 못 했지? 그때 이후로 네가 학과 행사에서 교수님한테 난리 쳤던 이후로 못 봤으니까. 겹치는 수업도 적었고.”

“전혀 몰랐어요.”

“그래? 어쨌든 그런 너를 보고, 또 이렇게 만나서 네 말을 들으며 용기를 얻고 싶었어. 그들이 아닌 너라면 나를 조금 더 내가 하고 싶은 것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어떠셨어요?”


조금 용기를 내 그렇게 물었다. 너무 꽉 쥐었는지, 손에 있던 츄러스는 허리가 끊겨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말했다.


“정답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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