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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서재입니다.

멀고도 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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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남녘
작품등록일 :
2020.09.20 16:37
최근연재일 :
2021.01.19 20:00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842
추천수 :
0
글자수 :
204,498

작성
21.01.1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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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29.

DUMMY

우습게도 시간은 젠가 블록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잘 간다. 딱히 그렇게 지나간 시간에는 붙잡고 싶은 미련 따윈 없었다. 오히려 더 빨리, 더 빨리, 시간이 달려갔으면 했다. 빨리 미래가 지금의 현재가 됐으면 싶을 뿐이다.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밝은 태양이 내리 쬐는 와중에 내리는 굵은 소나기. 빛을 받은 물방울들이 크리스털처럼 반짝이는 그런 날씨. 별이 환한 웃음을 품은 채, 그 사이로 달려갔다.


“네가 좋아하는 날씨네?”


그랬더니 그녀가 말한다. 환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우리가 좋아하는 날씨지.”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주저앉아 굵은 빗방울을 맞는 민들레 하나를 살핀다. 내가 그녀의 옆에 붙어 우산을 씌어주었다.


“진짜 예쁘다. 빗방울 때문에 반짝여. 곧 새하얀 솜털로 변해 세상으로 날아가겠지?”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본다.


“그러게.”

“너는 무슨 생각이 나?”

“생각?”

“응. 이 민들레를 보면 떠오르는 게 있나 싶어서.”


나는 그녀의 손아래에 조심스럽게 자란 민들레를 바라봤다. 인간은 느끼지 못할 미세한 바람에 몸을 흔드는 그 작고 가여운 것. 곧 꽃잎을 떨어트리고 세상에 날아갈 수많은 씨앗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지금은 어차피 이곳에 박혀있는 것을.


“글세? 조금··· 불쌍해 보여.”

“왜?”


그녀가 조금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지금은 어디도 가지 못할 테니까. 씨앗을 품을 때까지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하잖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녀가 다시 민들레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으로 꽃잎을 적신 물기들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하지만 난 아니라고 봐. 여기에 있어서 나를 만나고, 자신을 걱정해 주는 너를 만나고, 또 시원한 비를 맞으며 곧 다가올 자유를 기다리는 게 이 아이의 행복이지 않을까?”


그녀는 행복을 전염시킨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녀는 나의 행복이다. 나의 행복이 행복을 토해낸다면, 그러면 나도 행복이겠지.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방금까지 물기를 만지던 손이 조금 차가왔지만, 금방 내 온기에 따뜻해졌다.


“이제 어디로 갈까?”


그녀가 물었다.


“네가 가고 싶은 곳. 거기면 난 좋아.”

“그래?”


그녀가 머저 걸어간다. 작은 그녀의 뒷모습이 살짝 멀어졌다. 그게 싫어 나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럼 우리 거기로 갈까? 지하카페.”

“거기는 이제 갈 수 없어.”

“아직도 화해 안 했어?”


그녀가 팔짱을 끼고 돌아보며 타박한다.


“······응.”

“빨리 화해해.”

“오늘은 가고 싶은 곳 없어?”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너무 불편하다.


“오늘은 없었어.”


조금 불만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너 하고 싶은 건 없어?”


그러다 그녀는 순식간에 불만을 씻어낸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

하고 싶은 것.

나는 말한다.


“······젠가······.”

“···별일이네.”


그녀는 앞장 서 걸어간다.

나는 우산을 들고 그녀가 너무 멀어지지 않게, 비에 젖지 않게 따라 붙는다.



* * * *



컴퓨터 커서가 스크롤바를 조심스럽게 붙잡는다. 약간 떨리고 있는 커서는 조심스럽게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6월 공모전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화면의 내용물은 내심 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재빨리 스크롤을 내리고 싶었지만, 또 그러지는 못하고 괜히 쓰잘데기 없이 휘갈긴 본문을 하나하나 뜯어본다.


“1등.”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난다. 그리고 그 소리는 내 한숨과 함께 날아가 버린다.


2등도, 3등도. 우수상도. 그 어떤 상도 타지 못한 내 작품은 쓸쓸하게 내 계정의 첨부파일로만 걸려있을 뿐이었다.


“역시 안 되네.”


괜히 크게 그렇게 말해본다.


그래. 어차피 이제 돌아보지 않을 길이야.


툭, 툭. 넘어진 아이처럼 단번에 일어나려한다. 울지도 않고 씩씩하게 상처 부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일어난다.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도 아픈 건 아팠고 집에 돌아와 서럽게 오열했던 내가, 이 아프고 혼자인 방에서 울지 않을 리 없잖아. 아무리 울어도 들어주는 사람 없고, 신경 쓰는 이 없는 곳에서 그냥 펑펑 전부 흘려보내도 되잖아.


그러다 고개를 가로 저어본다.


“괜찮아. 현실적으로 이게 맞는 거잖아.”


이제는 글을 쓸 수 없어.


“괜찮아···.”


이제는 상상할 수 없어.


“괜찮아···. 취업하고 나서.”


그때 즐거웠던 것.


“여유가 생기면.”


그때 웃었던 것들.


“그때 다시 쓸 수 있어.”


내가 보내온 나날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컴퓨터 화면이 검은 대기화면으로 전환된다. 순식간에 나는 어둠에 잠겨버린다.

그날 내 핸드폰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 * * *



영어지문이 눈앞을 지나간다. 수학 공식이 손바닥을 가득 채워간다.


“우리 어디로 가?”


그렇게 묻는 경우가 많아져간다.


“몇 시에 볼 거야?”


이제는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시간과 장소를 확인하면 다이어리를 꺼낸다. 빼곡하게 적힌 일들을 하나씩 지워간다. 달성하지 못한 일들에 한숨을 쉬며 별에게 온 문자를 확인한다.


“오늘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 봤어. 이름 하여, 멸치 볶음 우동!”


하얀 화면에 글자를 쓰는 손에는 망설임이 없다.


“맛있겠다.”


뒤이어.


“다음에 나한테도 해줘.”


끝으로는 성의가 느껴질 정도의 이모티콘.


별은 내 문자를 읽고 한참 답이 없다. 최근 들어 그녀의 답장이 늦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건 대수롭지 않다.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라 믿으니까 말이다.


“넌 뭐해?”


그녀에게서 새롭게 문자가 왔다.

나의 말에 대한 대답은 없고, 새로운 화두였다.


“공부 중이지.”

“도움 필요하진 않고?”

“응. 괜찮은 거 같아.”


조금 신경 써 본다.


“그래도 내가 완전히 놀지는 않았나봐.”

“잘 됐네.”

“응.”


뚝.


대화가 끊긴다. 마치 가위로 자른 듯 무엇인가 그녀와 나 사이를 끊어놓는다. 그게 싫다면 끊어진 줄을 붙잡아야 할 텐데,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무슨 기분일까. 서로가 들고 있는 끊어진 밧줄이 마치 원래 끊어져 있는 것처럼 절단면이 너무도 매끄럽게 느껴지는 이 기분은 도대체 무엇일까.


“내일은 나 조금 바쁠 것 같아.”


뚝 끊어진 대화를 별이 손을 뻗어 붙잡았다. 나는 붙잡힌 채로 밧줄을 바라보고 손을 움직여 적당히 그녀가 놓치지 않을 정도의 힘을 줘본다.


“내일 약속 있어?”

“응. 친구들 만나기로 했어.”

“친구들?”


그런 적이 있었나?


처음 들어보는 그녀의 약속에 조금의 호기심이 일었지만, 금방 별 생각 없이 손가락을 놀렸다.


“재미있게 놀아!”

“응. 너는 내일 괜찮아?”

“당연하지. 나 할 거 많아.”

“잘 됐다.”


그녀가 안도하자 내 마음도 무거운 짐을 쓸어내린 것처럼 편안해졌다.



* * * *



별과의 만남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음은 내 다이어리를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한숨을 내쉴 일이 적어지고,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정하지 않아도 됐다.

하루는 이틀로, 이틀은 사일로. 그렇게 일주일. 이 주일. 마지노선처럼 삼 주를 최대로 별과의 만남이 가느다랗게 이어져 갔다. 드문 만남은 훌쩍 변한 그녀의 모습에서 특별함을 선사했다.

별의 얼굴은 나날이 밝아지고, 정말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반짝거렸다.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도 없을 때도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똑바로 보아주지만, 내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니 점점 그녀의 시선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시선을 잊자 조금씩 그 특별함마저 색이 옅어져간다.


“오랜만이다.”


별의 그런 말에 나는 동의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연락은 했으니, 어제도 만난 것 같고, 그제도 만난 기분일 뿐이다.

나에게 그녀는 이제 나의 일상처럼 한결 같아졌다.


평일. 아침 9시에 일어나 10시까지 운동. 11시에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며 12시까지 휴식. 1시까지 나갈 준비를 마치고 도서관으로 직행. 5시까지 공부. 6시까지 저녁. 7시까지 토익 학원에 가서 11시까지 토익 및 중국어 공부. 12시에 집에 들어와 씻는 것 까지 완료. 1시까지 엑셀 공부.


주말. 아침 10시에 일어나 11시까지 음악 듣기. 12시까지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며 휴식. 1시까지 청소 및 밀린 집안일. 2시까지 준비를 마치고 장보고 오기. 5시까지 평일에 공부하며 틀렸던 것 정리. 7시까지 저녁을 먹으며 휴식. 11시까지 기출문제 풀기 및 오답. 12시까지 씻고 자기.


빈틈이 없는 시간에 나조차 들어갈 수 없다. 성취감으로 들어차 후회와 슬픔, 감동은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다.

별을 만나지 않을 때, 주말 휴식 시간에 젠가를 하는 일이 늘었다. 통장에 젠가 블록처럼 쌓인 돈으로 아예 젠가를 구입했다. 하나, 하나. 조심스럽게 쌓고 무너질 때까지 했다. 여느때와 같이 토요일 저녁 6시 30분. 나는 젠가를 무너트리고 있었다.


“야!”


울린 벨소리에 반사적으로 받은 수화기 너머 대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너 복학해?”


그 물음에 순간 말문 턱, 막혔다.


“너 복학 하냐고.”


그렇다고 발뺌할 용기도 없다.


“·········응.”

“좀 만나자.”


언젠가 맞닥트릴 일이었다. 채윤을 일그러진 것처럼 그와도 언젠가 일그러질 게 뻔했기에 속으로 수없이 연습해 왔었다. 그 연습이 이제 실전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두려워할 것 없어. 나는 잘못 한 거 없어.


“그래.”

“지금 나와.”

“······지금?”


이건 좀 당황스러운데.


“어. 당장 할 말도 있으니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으니까.


“알았어.”

“카페로 와. 이 층.”

“응.”


전화가 끊어졌다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뚜욱, 뚜욱, 뚜욱-.


더 이상 끊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귀에서 수화기를 떼버린다. 그리고 별에게 문자 하나를 남겼다.


“친구 만나러 가는 중.”


별은 나의 문자를 받고 언제나와 같이 생각에 잠긴다.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 된 그 생각의 시간을 나는 아무 일 없다, 믿으며 화면을 꺼버렸다. 그렇게 그녀와 나의 대화는 어두컴컴한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



채윤의 가족이 운영하고 있는 카페의 문을 정말 오랜만에 밀고 들어갔다. 채윤의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고 나는 위층으로 향했다.

투박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드센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채윤의 어머니가 버티고 계셨다.


“너 뭐야?”


하지만 그때 당해봤으니, 당황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젠 어려워할 것도 없고.


“손님이요. 친구가 와 있을 거예요. 대오. 아시죠?”


응당 나를 대오가 있는 자리에 안내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취한 태도는 미간을 불편하다는 듯, 조금 꿈틀거리는 게 다였다.


“저기.”


괜히 불안해져서 내가 물었다.


“혹시 아직 대오 안 왔나요?”


그제야 그녀는 입을 뗐다.


“왔어.”


그러나 금방 시선을 떼버린다.


“근데 안 알려줄 거야.”

“네?”


이게 무슨 장난이지?


“나도 껍데기만 있는 애는 안 좋아하거든.”


무례한 말에 얼굴이 구겨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알아서 찾아. 제 친구까지 못 찾는 놈은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아예 계단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기분 잡쳤네.”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어서. 누가 할 소리를 하시는 건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로, 나는 대오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린다. 가게는 나와 대오를 제외한 손님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의외로 찾기 쉬웠다.

대오는 별에 대한 상담을 했을 때와 똑같은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앞에 앉았다.


“안 더워?”


무척이나 텁텁한 날씨에도 껴입는 두터운 패딩이 걱정스러워 물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은 지 음료만 홀짝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은 왜 게임을 안 하고 있지.


“오늘 무슨 일 있냐?”

“너를 만나는 일이 있지.”


대오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게임기를 들지 않은 손이 무척이나 어색한지 자꾸만 손을 쥐었다 피길 반복했다. 그리고 무언가 불안한 듯, 눈동자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흔들렸다.


“네가 게임을 안 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해는 이미 서쪽에서 떴어.”


이상한 소리.


오늘은 얼굴이 펴질 일이 없을 것 같다.


“말장난 그만해. 하고 싶은 얘기만 하려는 거라면, 빨리 얘기해. 나도 바쁘니까.”

“왜?”


허, 참!


그 말에 절로 웃음이 난다.


“왜? 그게 무슨 말이냐?”

“뭐가 바쁜지 묻는 거야.”

“난 이제 그냥 노는 애가 아니야. 취업 준비 하느라 바쁜 사람이지.”


그 말에 불안하던 그의 행동들이 차분해졌다.

창가에는 빛이 들어오질 않았다. 별에 대한 상담을 했을 때와 달리 컴컴한 어둠이 가게의 빛과 대비되고 있었다.


“복학한 이유도 그 때문이야?”

“당연하지.”

“왜 휴학했는지 기억은 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돌려 말하지 말고 확실히 해. 시간 아까우니까.”

“시간이 아깝다고?”


대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한숨을 토해낸다. 그건 실소를 동반하고 있었다.


“뭐가 웃겨?”


그러자 대오의 표정이 싹 굳었다.

그리고 그는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너······ 진짜구나?”


무슨 소리야.


“난 언제나 진짜야.”

“거짓말.”

“도대체 뭐가!”

“거짓말이야!”


대오가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쳤다. 그 반응에 놀란 건 나였다.


이 녀석이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애였나···? 아냐. 언제 한 번 이런 일이. 이런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머리를 휘어잡고 흐느끼고 있는 대오에게서 잠시 시선을 떨어트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캄캄한 하늘에 건물들이 별보다 더 반짝이고 있다. 별보다 더 가깝고, 당장이라도 손에 쥘 수 있는 현실적인 별들에 눈앞이 뿌옇게 옅어지기 시작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거짓말을 들으며, 나는 내 기억에 가까스로 남아있는 부스러기를 움켜쥐어 본다. 지금 생각하면 거짓말에 가려진 우스운 행복 속에 갇혀 있는 기억. 이렇게 눈앞에도 별이 가득하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그날 의 기억을 나는 잠시 회상해 본다.



* * * *



“저희 학과는 이제부터 심리학과와 통합될 것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이 주 후에는 공대와 합쳐져 저희는 새로운 단과대학으로 새단장을 할 것입니다.”


학과장을 맡고 계신 고고한 늙다리 교수의 말이었다.


“해당 결정에 대해서 혹시 질문이 있으신 분이 있다면, 손을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

교수는 나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앞에 있던 학생회 인원에게 명령했다.


“네. 저 학생에게 마이크 주세요.”


2, 3학년 정도 돼 보이는 선배가 쪼르르 달려와 나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아.”


잘 나오나?


“아, 아. 교수님.”

“네, 잘 들립니다. 말하세요.”

“이 결정을 도대체 누가 내린 거죠?”


애초에 필터링 따위는 없을 예정이었다. 싸우러 나온 거니까.


“정부와 교육부. 또 어, 음. 그래요. 학생이 알고 있는 높으신 분들 대부분과 저, 학과장. 학생회 대표가 승인했습니다.”

“학생은요?”

“학생이요?”

“네. 학과에 몸을 담고 있는 건, 실질적으로 학생들인데 왜 학생들에게 의견은 안 물어 보신 거죠?”

“물어 봤을 텐데요?”


학과장이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노려본다.

나는 준비해온 종이를 꺼낸다.


“설문조사 했죠. 예술대학 소속의 스토리창작학과는 융합인재 정책에 따라 과 통합을 진행할 수도 있다. 동의하는가. 예, 아니오. 투표 참여율 일 퍼센트.”

“학생,”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학생. 투표를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과반수인 의견인 찬성으로 저희는 진행했을 뿐입니다. 이 결과를 원치 않았습니다, 저도. 그러니 다들 반대표로 투표를 했어야죠.”


종이가 구겨진다. 그것과 동시에 나의 얼굴도 지금 똑같은 표정이리라.


“투표할 가치가 있어야 투표를 하죠!”


내 고함에 좌중이 조용해진다.


“융합인재? 과통합? 과에서 나눠준 공문에 따르면 이름만 과통합이지 실질적으로 저희가 배워오던 수업은 죄다 없애고 있지 않습니까? 확과장이라는 분이 과에 애정이 있기나 하십니까?”

“말을 가려서 하세요!”


늙다리가 단상을 쾅, 쾅 내리치며 외친다.


“가려서 하고 있는 겁니다. 욕하려던 걸 간신히 참아가며 신사적으로 얘기 중인 겁니다.”

“뭐라고···?”

학생회도 학생들도 그리고 교수들도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다.


“저희 학생들. 여기 과수업 보고 들어온 겁니다.”


이가 바득바득 갈리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 과에서 글 쓰려고 들어온 거예요. 성적 맞춰서 대충 어중이떠중이로 온 게 아니라.


이걸 참아내고 있는 것도 토악질 날 정돈데, 얼마나 더 내가 참아야 하는 거지.


“학생회! 뭐 합니까. 당장 마이크 뺐으세요!”

“뺐으세요! 다 뺏어가십쇼! 애정도 없는 학과에서 학과장이 되신 이유가 이겁니까?”


왜.


“과통합 시키고 융합인재 개발한다는 정부에게 잘 보이고 싶으셨던 겁니까?”


도대체 왜.


“수업 때마다 저희에게 어떤 글을 써야 하는 지 알려주시던 분이 고작 이러고 있는 겁니까!”


말을 해, 제발!

나와 교수의 눈이 날카롭게 마주한다.


“그게 현실이니까!”


늙다리가 그렇게 외치자, 나를 부여잡고 끌어 내리던 학생회들이 순간 멈췄다. 나의 몸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결박에서 풀어졌다.

늙다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뱉었다.


“학생.”


나직하게 나를 부른다.


“학생은 지금 모르겠지만, 그게 현실이야. 꿈을 좇아? 하고 싶은 걸 해?”


그가 손을 뻗는다. 죄다 부질없다는 듯.


“그런 건 없어. 이게 현실이야. 돈에 얽매이고, 하고 싶은 건 죽어도 할 수 없는 거! 그게 현실이란 말이야.”


거짓말.


“그러면 왜 그렇게 알려주시지 않으신 거죠?”


주먹을 꽉 쥐었다. 다가오는 누구든 당장이라도 얼굴을 갈겨버릴 수 있을 만큼 단단히 쥔 주먹이었다.

울분을 참고, 견디고···.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하나. 하나 찍어내듯 내가 말했다.


“학생이라는 틀에 가둬 놓았으면서. 꿈만 꾸게 만들었으면! 그 꿈이 현실인 것처럼 교육시켜 놨으면! 이제 와서 그딴 소리를 왜 지껄이는 건데!”

“그럼 넌 꿈만 꾸던가. 그럼 그러면 되잖아. 현실에 직시하는 사람. 꿈에 갇힌 사람. 선택은 네 자유야. 학생. 이만 나가게. 여긴 더 이상 알려주는 곳이 아니야. 스스로 깨닫는 곳이지. 깨달았으면 나가고, 아직도 무지하다면 남아.”

“거짓말······.”


힘이 쫙 빠진다.

그제야 나에게 쏟아지는 눈초리들을 느낄 수 있었다. 화살보다 더 날카롭고 빠른 그 눈길에 나는 순식간에 피투성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대로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발악하는 소리쳤다.


“거짓말이야!”


무슨 의미도 뜻도 담기지 않은 고함. 어린 아이의 심술과 같이 그냥 쏟아낸 울분. 그때 남은 건 그게 전부였다.

그 이후에 대오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마음에 들어. 휴학 친구로 손색이 없어.”


우리는 그렇게 같이 휴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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