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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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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남녘
작품등록일 :
2020.09.20 16:37
최근연재일 :
2021.01.19 20:00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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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4,498

작성
20.10.1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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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9.

DUMMY

눈이 퀭하다. 정신도 몽롱하다.

지금이 몇 시더라.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침 8시가 간당간당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퀭한 눈을 가늘게 떠 적혀진 시간에 초점을 맞춰본다.

정확히 아침 8시 53분.

결국, 하루 종일 대오에게 빌린 『오늘도 두근두근···♥』을 플레이했다. 처음에는 인상을 구기며 혐오감을 표출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묘하게 흥미로워 나중에는 거의 흥분상태였다. 하지만 미적지근한 선택지에서 게임이 멈춰있는 거로 봐서는 결국 중간에 한계를 맞이했던 것 같다.


“결말······. 결말은 봐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내가 곧 쓰러질 거라는 걸 직감했다.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취침.”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나는 그대로 키보드에 머리를 처박았다.



* * * *



“할 말이 있어.”


굳게 닫힌 시야는 아무것도 없이 목소리만을 제공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 이상한 음성이었다. 그게 나한테 하는 말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냥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이후로 그가 말이 없다.

나에게 말한 건가? 나에게 말한 거였나? 그럼 지금, 내 답을··· 기다리는 건가?

나는 조금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입을 떼 묻는다.


“······뭐야?”


나의 물음이 던져지고 나서야 그는 심호흡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약속.”


나는 다시 눈치를 살피다 답한다.


“약속?”

“네 곁에 평생 함께하겠다는 약속.”


별 미친놈이 다 있다.

가뜩이나 오늘 기분도 안 좋은데, 그냥 소리 지르며 도망가 버릴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사람.

눈을 꼭 감고 나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왜? 나를 언제 봤다고.

나는 고개를 슬쩍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얇은 소재로 보이는 붉은 후드가 빗물에 조금 젖어 탁해져 있었다.

조금 호기심이 일어 눈 딱 감고 나는 한 번 더 그에게 물었다.


“내가 널 어떻게 믿고?”

“약속은 새끼에서 엄지로, 서로가 이어지는 거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두 개의 손가락이 품고 있는 접힌 세 개의 손가락이야.”


손가락?

그제야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발견했다. 새끼손가락, 고리 걸고. 저절로 음악이 생각나는 손 모양이다.

나는 순간 웃음을 터트릴 뻔했던 것을 간신히 참는다. 삼켜진 웃음이 호기심 가득했던 마음에 들어가 나의 마음을 요란하게 바꿔 놓는다.

재미있는 사람으로 그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정자 기둥에 기댄 채, 조금 더 말을 들어 본다. 그의 말은 조용히 나의 마음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타고 다가왔다.


“보이는 부분부터,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새끼로 맺고 엄지로 이어 모든 것을 믿겠다는 뜻이야. 나는 내가 모르는 네 어떤 부분도 믿겠어.”


거짓말.


“좋아할 거야.”


만약 그가 그렇게 덧붙이지 않았다면 난 계속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아니, 그에게 기대고 싶지 않았을 거다.

“좋아해.” 가 아닌 “좋아할 거야.”라는 말이.

조금 틀린 그 말이 지금 나에겐 오히려 꼭 맞는다.

멋대로 날 좋아하고, 멋대로 싫어하고, 판단하고 뽑아가는 그 갑갑하게 갇힌 기분을 이 사람이라면 이해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그래서 주절주절 뭐라고 떠드는 그를 향해 나는 몸을 일으키고 용기를 내어 걸어갔다. 그리고 말한다. 빗소리가 나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두드려줘서, 당신이 나에게 오히려 꼭 맞는 말을 해줘서.


“난 좋아.”


좋다고.



* * * *



퍼뜩 눈이 떠진다.

입에서 흐른 침이 하루 종일 켜져 있던 노트북의 뜨거운 열기를 식히고 있다.


“어어어···.”


좀비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나는 키보드 위에 달라붙은 끈끈한 침을 손으로 닦아낸다. 침과 함께 머리를 지끈 거리게 하는 꿈도 함께 닦여가는 기분이다.

그러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의 따끔한 빛이 내 눈을 강타했다. 한껏 인상을 쓰며 핸드폰 화면을 끔뻑 바라본다.


“집.”


오후 5시 30분.

별의 보고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문자 창 스크롤을 쭉 올려보았다.


“기상.”


오전 9시.


“도서관에서 공부.”


오전 10시.


“점심 식사.”


정오.


“중국어 학원.”


오후 1시 30분.


“전공 공부.”


오후 4시.


“장보기.”


오후 5시.


어째서인지 웃음이 난다. 그녀의 문자를 읽고 있느라 뒤숭숭했던 꿈이 완전히 기억에서 사라졌다.


“기상.”


나는 그녀에게 나의 부활 소식을 알리고 몸을 일으켰다.

불편한 자세로 잔 터라 엄청나게 뻐근해진 목 근육을 진정시키기 위해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는 사이, 그녀에게 새로운 문자가 날아왔다.


“확인.”


그리고 이어서 날아온 사진 하나.


“내 시간표. 참고해.”


그녀가 보낸 다이어리의 사진에는 작은 사각형 속 일정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어제 보았던 붉은 삭선과 새롭게 써진 나와의 만남에 파란 체크 표시였다. 파란 체크 표시는 거기에만 있는 게 아니라 전날에 있는 모든 일정에 다 달려있었다. 오늘 일정 앞부분에도 달린 그 간단한 파란색 브이 표시는 물어보지 않아도 단번에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전공 공부······ 장보기······. 그럼 이젠.”


이제 저녁 먹기라는 일정이 그녀의 파란색 체크 표시를 당할 차례였다.


“곧 저녁 드시겠네요?”


문자를 보낸다.

그녀에게 곧바로 답이 날아온다.


“응.”

“뭐 드시려고요?”

“장본 거. 삼겹살.”


순간 배에서 항의 소리가 들려온다. 아침부터, 점심까지 먹은 게 없으니 당연하다. 아무래도 서둘러 음식을 집어넣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것만 같은 소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내 배보단, 그녀가 먼저다.


“오늘이 토요일이니까, 내일까지 알려줘.”

“계획이요?”

“최대 4시간.”

“알겠어요.”


그녀는 정확하게 6시가 되자, “저녁 식사.”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제야 나도 대충 폭동을 일으키려는 배를 진정시키기 위해 밥을 했다. 새롭게 쌀을 씻고, 햄을 굽고, 계란을 터트리고······.

지글거리는 햄과 계란프라이를 바라보며 나는 대오가 빌려준 『오늘도 두근두근···♥』을 떠올려 봤다.


“공부가 될 거야.”


대오가 호언장담하며 건넨 것과는 달리, 아무리 내용을 곱씹어도 결국 도움이 될 정보는 없었다. 그저 재밌게 플레이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공략한다’는 마음으로 임하면 그저 재미만 느낄 뿐이라는 걸 깨닫기는 했다.

어렵네.

차마 음식 앞에서는 앞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릴 수 없어 어깨를 벅벅 긁는다.


“잘할 수 있으려나.”


잘 구워진 햄과 계란프라이를 미리 받아 놓은 밥 위에 쏟아 부었다.


“편하게라고는 하지만 결국 미연시에조차 나 같은 연애는 없다······ 이건데.”


그렇다면.


“만나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조금 더 분위기를 잡고.”


아.

문득 쓰고 있는 소설에 그대로 적용시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미 고백하는 장면은 여주인공의 시점으로 써버린 지 오래였다.


“안되지, 안 돼!”


딱 그것만. 진짜 딱 그 부분만 쓰려고 했으니까, 더는 쓰지 않겠어.

고추장을 퍼서 밥 위에 올리고, 참기름을 두르며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는다.

이 연애를 상의도 없이 소설로 옮기는 건, 역시나 좀 아니야.

나는 밥에 숟가락을 꽂는다. 슥, 슥. 맛있게 비벼지는 소리가 들린다. 크게 한입 가득 밥을 집어넣으며, 다시 생각의 방향을 그녀와의 관계로 맞췄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내 고백에 맞춰볼까···?”


대상이 별 씨가 아닌 소설 속의 여주인공이었지만, 마음이 완전히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적어도 남주인공은 나를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였으니까 말이다.


“공략이 아니라 진심부터 돼라·········. 대오 녀석 말대로 우선 그것부터 해 봐야겠다. 그러려면 최대한 만나야 하니까.”


그녀에게 방해되지 않을 시간. 그러면서 최대한 오래 볼 수 있는 시간을 찾기 위해 그녀가 보내준 일정을 꼼꼼히 살펴본다.

월, 화는 오전 9시에 기상해서 점심 먹기까지 헬스. 오후에는 학교 강의. 강의가 끝나면 저녁을 먹고, 토익 공부와 책 읽기.

수, 목은 오전 9시에 기상해서 오전 강의. 점심을 먹고 5시까지 헬스.


“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안 쓰러지나?”


짧은 평가를 날리고 다시 훑어 내려간다.

1시간 전공 공부 후에 저녁. 7시부터 방송 편집 공부.

금요일은 똑같이 오전 9시에 기상해서 2시간 동안 작문 연습. 1시간 독서. 점심.


“오후 4시까지 교양 음악 듣기?”


그렇게 놀랐지만, 그녀라면 정말 한숨도 안 자고 교양 음악을 음미할 것 같다.


“그리고 토익. 저녁. 수학 공부. 10시부터 프로그래밍 강의············.”


토요일과 일요일은 전체적으로 금요일과 오전 일과가 똑같다. 오후에는 조금 다른데, 우선 오늘처럼 장보기가 추가돼 있고, 집 청소도 들어있다. 저녁에는 토익이 중국어로 바뀌어 있었다.

일곱 개의 칸에 빽빽하게 일정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새롭게 이어진 기다란 일곱 개의 칸에는 일정별로 세부 사항들이 적혀 있다. 그것까지 읽기에는 나의 핸드폰 화질이 버티질 못해 관뒀지만, 입이 떡 벌어진다.

이 사람 틈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 따위는 전혀 없다.

다이어리의 작은 사각 틀 안에. 그리고 빽빽한 일정들 사이에 그보다 더 작은 내가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려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그 환상은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일정들 사이에 껴 죽고 만다.


“윽!”


끔찍한 상상에 절로 그런 소리가 났다.

공부를 빼자니 방해하는 것 같고, 음악 듣기나 독서에 들어가자니 그녀만의 유일한 휴식을 빼앗는 느낌이다.


“청소시간이나 장보기 시간은 괜찮지 않을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 다시 벽에 부딪힌다.

그러다 별씨가 청소를 못 하면? 장을 못 봐서 쫄쫄 굶으면?

멋대로 내 머리가 가본 적 없는 그녀의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그녀를 굶겨 앙상한 모습으로 바꿔놓았다.


“으악, 안 돼!”


끔찍한 생각을 서둘러 털어낸다. 밥그릇은 깨끗하게 비웠지만, 나는 아직도 식탁에 앉아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고 다듬기를 반복한다. 번뜩이는 묘수를 생각해 내려는 책사의 기분이다.

그때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다.


“지금부터 2시간 동안 수학공부.”

“확인.”


혹시······ 하는 마음에 다시 핸드폰을 붙잡아 문자를 보낸다.


“어제 저녁 식사는 하셨어요?”


곧바로 답이 왔다.


“아니. 수학 공부도 못했어.”


그리고 그녀는 새롭게 사진을 한 장 보냈다. 토익 밑에 있는 저녁 식사와 수학 공부가 장렬히 전사해 있는 슬픈 사진이었다.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덕분에 오늘 저녁 시간을 줄이고 수학 공부를 두 배로 했어.”


그녀가 이어서 보낸 문자다.


“일부러 이러는 거죠? 그렇죠?!”


그렇게 쓰고 차마 보내지 못해 서둘러 지운다.

한 손으로 지우면서 이마를 어루만졌다.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설령 비집고 들어가도 그녀나 나, 둘 중에 한 명은······.


“계획에 깔려 죽는다, 죽어!”


그렇게 외치니 탁하고 힘이 풀렸다.


“어찌해야 하오이까···.”


그때, 내 두뇌에 대오의 말이 번뜩인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 길게 내려온 그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자니, 뜻밖에 묘수를 떠오른다.


“이거다!”


스스로도 그 생각에 놀라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대오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충분한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나서, 나는 곧바로 묘수를 이행한다.

역시 묘수는 묘수다. 막힘이 없이 준비가 착, 착 완료돼 간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는 조심스러운 손으로 그녀에게 사진 하나를 전송한다.


“시간표 짜봤어요.”


사진을 확인하는 듯, 그녀는 조금의 시간을 두고 답했다.


“뭔가 이상한데?”


그녀에게 메시지가 도착한 건 정확히 5분이 흐르고 나서였다.


“왜요?”

“시간표가 나랑 똑같아.”

“아뇨, 잘 보세요.”

“잘?”


그녀는 다시 5분의 시간을 사용했다.


“아아, 교양 음악 감상 3시간에 토익 1시간? 이때 보자고?”

“네네.”

“하루만?”

“음······네! 시간표대로면요?”


후후, 당황스러울 거야.

그녀는 내 예상대로 곧바로 답장하지 못했다. 5분여 정도의 시간 후에야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래, 그럼.”


나는 여유롭게 다 먹은 식기들을 들어 싱크대에 넣었다.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물을 틀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답했다.


“근데 내일 어디서 수업 들어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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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1. 21.01.18 27 0 19쪽
30 30. 21.01.13 17 0 18쪽
29 29. 21.01.12 17 0 20쪽
28 28. 21.01.11 22 0 15쪽
27 27. 21.01.06 15 0 19쪽
26 26. 21.01.05 16 0 20쪽
25 25. 21.01.04 18 0 15쪽
24 24. 20.12.30 18 0 14쪽
23 23. 20.12.29 19 0 14쪽
22 22. 20.12.28 17 0 20쪽
21 21. 20.12.23 17 0 14쪽
20 20. 20.12.22 18 0 19쪽
19 19. 20.12.11 17 0 18쪽
18 18. 20.12.09 17 0 18쪽
17 17. 20.12.07 23 0 16쪽
16 16. 20.10.28 15 0 8쪽
15 15. 20.10.27 19 0 9쪽
14 14. 20.10.27 17 0 14쪽
13 13. 20.10.21 33 0 8쪽
12 12. 20.10.20 20 0 11쪽
11 11. 20.10.19 20 0 8쪽
10 10. 20.10.14 20 0 8쪽
» 9. 20.10.13 32 0 13쪽
8 8. 20.10.12 25 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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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 20.10.06 19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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